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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주인
성경본문 : 잠언 4: 20-27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25.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26.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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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대표 시에 ‘인빅투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인빅투스’는 라틴어로 정복불능이란 뜻입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 같은 암흑, 억누를 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이 시의 내용입니다. 이 말이 진실입니까? 정말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 되고 내 영혼의 선장이 될 때에 행복합니까? 전혀 아닙니다.
이 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파멸되었는지 아십니까?
스티븐 맥베이라는 미국 오클라호마 주 청사 폭파 사건의 주범은 마지막 사형직전에 그가 인용하여 쓴 글이 바로 이 마지막 구절입니다.
내 운명의 주인이 나라구요?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습니까?
서양인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까?
내 영혼의 선장이 나입니까?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마음대로 했습니까?
내 운명의 주인이 나라고 하는 사람, 내 영혼의 선장이 나라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파멸과 죽음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면 나를 죽입니다. 내 생명도 나의 것인 줄 알고 자살도 예사로 합니다. 남의 생명도 자신의 것인 줄 알고 대량 학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삶의 주인이신 성령이여”라고 주제는 말합니다. 성령께서 삶의 주인이시기 위하여 내 마음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실 때 내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이 누구입니까?
무엇입니까?
세상의 온갖 것들이 우리 마음의 주인 되겠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은 격전장으로 변합니다. 세상에서의 성장, 지식, 과학, 기술, 물질, 정보 이 모든 갖가지들이 마음의 주인들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원래 남편은 주인 양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남편은 쥔 양반이랍니다. 남편들이 부인들에게 쥐어 살아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말고 우리가 그것들을 쥐고 삽시다.
예수님만이 주인이 되시면 다른 것들은 쥐고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잃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새끼를 깝니다.
미국의 어느 백만장자가 늦게 아들을 보았습니다. 이 아들이 일곱 살일 때 부인이 죽었습니다. 이 백만장자는 한 가정부를 데리고 와서 살림도 하고 아들도 키우게 했습니다. 얼마 후 아들마저도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백만장자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너무 슬픔이 깊어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대개 백만장자가 죽을 때가 되면 유서가 있을 텐데 아무 유언도 유서도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전 재산을 경매 처분하여 국고에 들어가게 합니다.
우선 그의 모든 유품들을 경매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 가정부는 가난하여 큰 물건을 살 수가 없었지만 자신의 아들 같은 소년의 사진이 든 액자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액자는 사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정부는 싸게 이 액자를 사서 아들을 그리며 집에 걸었습니다. 얼마 후 가정부는 다시 액자를 걸기 하여 뒷 유리를 빼었을 때에 그 유리 안에서 종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내 아들 소중히 여겨 이 액자를 집에 거는 자에게 전 재산을 준다”고 하는 아버지의 유언장이었습니다.
가정부는 변호사에게 부탁하여 그 많은 재산을 다 유산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품으면 아버지의 상이 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자를 아버지는 제일 귀하게 보십니다. 아들의 마음을 품으면 아버지의 상이 큽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의 마음을 품는 자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첫째, 자기를 비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었습니다. 우리말에 “쓸개 빠진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완전히 속을 비우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쓸개가 빠져도 마음을 비우지 못합디다. 예수님께서 비우지 않고 이 땅에 오실 수 있겠습니까? 비우지 않고 매를 맞고 비우지 않고 고생하고, 비우지 않고 침 뱉음을 당하고, 비우지 않고 십자가 죽고, 비우지 않고 음부에까지 내려갈 수 있습니까? 비움으로 비로소 가능한 삶이 메시야의 삶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말합니다. 높아져라, 이름을 높이라, 천하만국을 얻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높아져서 세상을 얻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정 반대였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비우셨고 우리가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면 우리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으로서 그 많은 것을 비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쥐꼬리만한 것을 못 비워서 이탈 저탈, 탈이 너무 많습니다. 비우면 찹니다. 비우지 못하면 차지 못합니다. 비우는 것은 채우는 비결입니다.
동양의 묵상은 마음 비우기 위한 노력인 반면 기독교의 묵상은 마음 채우기 위한 시도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하여, 소명수행하기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는 모세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목자로서의 능력과 기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목자로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던지라고 하십니다. 다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목자로서 비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목자가 되지 않으십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신을 따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비우면 차고, 포기해야 얻습니다.
기독교의 삼대 신비주의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엠마누엘 스위든보르그와 선다씽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주님을 절반만 따르고 절반은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소유와 친구와 명예는 포기하더라도 자신을 버리는 일만은 지나친 부담으로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두레박은 비워져 있는 만큼 물을 채울 것입니다. 두레박 안에 돌이 있으면 그만큼 물은 못 채울 것입니다. 빈 두레박을 내리면 물을 가득 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다거나 지나치게 고요하면 공포감을 느낍니다. 이것을 철학자 스피노자는 ‘공간공포’라고 하였습니다. 빈곳이 있으면 채우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비우고 채우는 이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비우고 거기에 그리스도로 채우는 일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비우니 종이 됩니다. 마음이 차 있으면 종이 되지 못합니다. 종은 차면 안됩니다. 비어 있어 종이 되고 종이 된 사람은 종이 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바울도 종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였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만인의 주인으로 철저히 자유롭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에게 예속된 만인의 종으로 철저히 충성한다”. 정말 자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종입니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빌 수 있는 사람만이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합니다. 자신 속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것은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 모든 종들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선 비어야 찰 데가 있는 법입니다. 채우기 위하여 비워야 합니다.
둘째,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낮추는 것은 그리스도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같이 되었고”라고 합니다. 낮추면 사람 같이 됩니다.
낮추어야 구원자가 됩니다. 세상에 높아서 될 일이 없습니다. 낮으면 안 될 일도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를 매는 사람은 높은 사람입니까? 낮은 사람이지요.
잠언 29:23은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3:12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1:10은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낮아질 것을 권합니다.
높아질 것을 권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낮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도 낮아져야 예수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억지로 낮추십니다.
신명기 8:2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왜 만나를 주셨습니까?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축복하실 때에 왜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십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고 하십니다.
야고보서 4:10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낮아지라고 하시고 낮추리라고 하십니다.
어느 날 아바 마카리우스가 늪지에서 나와 종려 잎사귀를 가지고 자신의 숙소로 가고 있을 때 노상에서 큰 낫을 든 악마를 만났습니다. 악마는 마음 내키는 대로 그 낫을 그에게 휘둘렀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결국 악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카리우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네가 하는 것은 나도 다 할 수 있다. 네가 단식하면 나도 단식할 수 있다. 네가 자지 않으면 나 또한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바 마카리우스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악마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너를 해할 수가 없다.”
사탄은 겸손한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은 낮아지는 사람을 해할 수 없습니다.
“물과 은혜는 낮은 곳에 고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닷물이 대조(한사리) 직전에 가장 많이 빠지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낮추십니다. 이런 낮은 마음이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가지고, 비우고, 낮아지고, 밑바닥까지 내려갈 때 우리의 영이 맑아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셋째,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순종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말씀은 죽기를 각오하는 복종의 말씀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은 끝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순종입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는 은총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높아졌습니다. 제사장의 할 일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역할도 대신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그들을 살리지 말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의 목숨 살려주고, 가장 좋은 가축과 좋은 물건들을 자기의 것으로 취하였습니다. 이것을 안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을 책망하였습니다.
사울은 변명과 핑계로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좋은 양과 소를 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목숨을 내어놓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극에 보면 신하가 임금에게 “전하,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장면이 더러 나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죽여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에게 충성을 이해해달라는 아부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말로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복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복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시편 15:1과 4절에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복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끝까지 충성하는 자가 하나님의 충성된 일군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는 우리의 삶의 시작부터 마침까지입니다. 끝까지 마음을 변치 않고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죽기까지”란 죽어야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우리가 죽어야 끝납니다. 하다가 말면 복종이 아닙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찬송처럼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순종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 이 가사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존 템플턴은 “습관이란 학습과 연습 과정을 거쳐 굳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습관의 주인 되면 습관은 당신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충직한 하인이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비어지고, 낮아지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경건의 연습은 영성의 습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그리스도에게 마음으로 충직한 종이 될 것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에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참 빛을 찾습니다. 옛 행실을 끊습니다. 죄가 희어집니다.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시어 날마다 충만한 이 기쁨으로 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