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된 사람들
1971.02.11 (목), 한국 마포교회
[기 도]
오늘 저녁에는 마포교회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버님을 모셔 놓고, 서로의 마음이 아버지 앞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이 나아가 아버지의 품안에 품기려는 소망을 가지고 나왔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모인 개개인의 사정과 심정은 다를지라도 생명을 지닌 가치의 내용을 스스로 알고 있는 같은 형제들이옵기에, 이 귀한 설명을 아버지 앞에 귀의 시키고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서의 가치를 찾기 위하여 여기에 모인 자녀들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험악한 이 땅 위에서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저희들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하늘 앞에 부족한 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사옵니다. 오늘도 저희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가야 할 길을 가고자 하는 진정한 참의 모습으로서 아버지를 모시고 싶은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가 아버지 뜻 앞에 보장받지 못할 자신들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찾아오는 당신의 섭리의 뜻 앞에 저희들이 어찌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 아버지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저희 일신에 머물러야만 되겠습니다. 당신의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어서 저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쓴 뿌리를 몽땅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버님의 긍휼의 사랑을 바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부복하였사오니 악은 악대로 처단하시고 선은 선대로 키우시옵소서.
당신이 계실 수 있는 하나의 개인과 당신이 계실 수 있는 하나의 가정과 당신이 계실 수 있는 하나의 씨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당신이 소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기 때문에 진정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는 개인을 흠모하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긍휼히 보시옵소서. 자비의 손길을 펴시어 부족한 저희들을 어루만져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고아와 같은 생애노정에서 지친 무리들이기 때문에 하늘의 참다운 사랑의 손길을 고대하고 바라고 있사오니, 아버지 앞에 나올 적마다 포근함을 느끼고 감사함을 느끼고 안식할 수 있는 하나의 터전으로써 이자리를 흠모하고 나온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 개체 개체의 마음을 살피시옵소서. 뭇사람들이 하나의 참된 형상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선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오랫동안 만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만나지 못하였던 저희들에게 사정을 털어 놓고 서로서로 만날 수 있게 이 자리를 허락하여 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아버지의 각별한 은사를 베푸시사 이 만남이 인간만으로 인연되는 만남이 아니라 아버님이 중개가 되시고 저희 중심에 좌정하시어서, 저희가 하나의 인연을 갖출 수 있게 하시옵고, 의인을 따라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내일의 무한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거룩한 행각이 여기에서 벌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이 어린 사람의 마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의 마음이나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앞에 순종하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솔직이 다 내보여야 되겠습니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나쁘면 나쁘다고 해야 되겠습니다. 전후 좌우에 거리낄 것 없이 아버지 앞에 몽땅 직고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긍휼의 마음과 생명의 인연이 여기에 연결되어 개개인을 재부활시킬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엄중하신 생명의 판결을 내리시는 아버지시여, 생사화복의 주권을 좌우하시는 아버지의 권한으로 죄악을 물리치시옵고 선의 기세를 넓히시어서, 스스로 해방된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어린 자녀들과 더불어 허락하신 시간을 갖고자 하오니, 아버지, 친히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악이 틈타지 말게 하시고 선만이 저희들과 인연맺게 하시어서, 아버지가 그리워하고 사모하던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어 서로서로 의지하고, 서로서로 하나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첫 시간부터 전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앞에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내가 여기 왔다 간 지가 일년이 넘었나요? 안 넘었지요? 「반년 됐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자주 못 온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녁에 이렇게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여기 처음 오신 분도 계시리라고 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릴 것은 칠판에 써 놓은 것과 같이 '참된 사람들'이란 제목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크다면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개인을 중심삼고 보나 전체를 중심삼고 보나 자기를 존중시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고 나쁘고 슬프고 기쁜 이런 모든 사연들을 말하게 될 때에 제 3자를 중심삼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좋다고 할때 그 중심이 누구냐하면 자기인 것입니다. 혹은 슬프다고 할 때도 그 중심이 누구냐 하면 어디까지나 자기라는 것입니다. 그 자기라는 것이 언제나 주체가 되어 가지고 자기 일생에 있어서 행불행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그 '자기'라는 위치가 올바른 자리에 섰다면 좋겠지만, 올바르지 못하고 그릇된 자리에 서서 좋고 나쁘다고 한다면 그 일생은 비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참된 자리라면, 하늘이 있고 혹은 땅이 있고 역사적인 어떤 선(善)이 있어 가지고 악을 비판할 수 있고 참되지 않은 것을 제거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할진대, 그 힘은 참되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참되지 못한 것은 제거시키는 작용을 할 것이요, 자기를 중심삼은 주체적인 입장에서 좋고 나쁘다 하는 판가리를 하는 입장에 있게 될 때는, 참을 옹호할 수 있는 우주적인 어떤 힘은 자기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적이요 상충적인 힘으로써 작용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좋다고 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좋다고 하는 그 자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자리냐, 그렇지 않으면 나쁜 자리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하루를 사는 데 있어서 모든 사람이 일상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이러한 일은 그러할 때는 좋은 것이고, 저러할 때는 나쁜 것이다' 하고 막연하게 판단하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막연한 주체성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위치에 있다 이겁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사회단체면 사회단체도 반드시 어떠한 중심을 중심삼고 관계된 환경이 연결되어서 하나의 사회단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놓고 볼 때 국가의 한 중심을 중심삼아 가지고 삼천리 반도 전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은 너나할것없이 어떤 지역이면 지역, 어떤 환경이면 환경에서 그 위치와 처해 있는 입장을 반드시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을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이 남쪽이냐 서쪽이냐 혹은 동쪽이냐 북쪽이냐 하는 방향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이 중앙이면 중앙을 중심삼고 어떠한 거리에 위치해 있느냐 하는 문제가 반드시 설정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자기가 주체와 관계를 맺게 될 때에, 그 관계가 올바른 관계가 될 수 있고 사방이 공인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를 두고 볼 때도 나 자체가 중심적인 입장에서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있어서 좋고 나쁜 것, 혹은 선하고 악한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오늘 어떤 참된 중심이 있다고 한다면 그 중심에 대하여 내가 어떤 방향과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좋고 나쁜 것을 판가리해야 하느냐?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참사람의 표준
자기가 국가를 대신한 중심적인 입장에서 참된 모습으로서 주체성을 가졌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한민국에 있어서 과연 참된 중심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세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은 지나온 역사가 다르고 형성된 문화와 환경이 다르지만, 각각 그 나라들의 환경을 중심삼고 그 나라의 어떤 주권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권자가 그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그 나라의 참된 중심이 되느냐 할 때 그것도 그렇게 우리가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렇듯 개개 국가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 한 주권자를 참된 중심 존재라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전세계를 두고 볼 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중심삼고 참된 중심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현재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 혹은 어떤 학문적인 일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진정한 의미의 참된 사람이냐 할 때 이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어서 참된 인생으로서 이것이 옳은 것이다, 그른 것이다 하는 하나의 표준적이고 중심적이고 가치적인 존재는 어떤 존재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어떠한 학교의 학생들이 있다면 그 학생들 가운데서 제일 참된 학생이 누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학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학교를 두고 볼 때 거기에는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학교에서 현재 가장 참되다고 하는 학생이 과거도 대표할 수 있느냐? 현재의 수많은 학교의 학생들 가운데 으뜸가는 중심이 될 수 있겠느냐?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수많은 학생들 앞에 있어서 중심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자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은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참된 사람이라고 공인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과연 그 사람이 과거를 대표할 수 있느냐, 현재를 대표할 수 있느냐,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느냐 하는 등등의 문제가 연결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참된 주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 하루를 중심삼고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주체라는 것은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에도 변함이 없고, 미래와 연결되는 데 있어서도 상충이나 가로막히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참된 존재는 오늘 현실을 대표해서도 참이 되어야 하고, 미래를 대표해서도 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미래라는 것은 시간적인 한계를 넘어 무한한 세계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인간이 참되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표준을 두고 하는 말이겠느냐? 그 자체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에는 수십억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그 수십억 인류 가운데서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한 주권자가 있고, 일본이면 일본, 미국이면 미국, 독일이면 독일을 중심삼고 주권자들이 있습니다. 그 주권자들 가운데 수십억 인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참된 주권자는 누구일 것이냐? 주권자라는 것은 그 나라의 민족성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그 나라가 지나온 역사과정, 그 나라의 문화적 배경과 풍습과 환경에 따라서 주권자의 입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주권자가 제창하는 정책이라든가 사상적인 방향이 역사발전과 더불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진적인 발전현상을 우리는 역사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박대통령을 중심삼고 볼 때도 박대통령이 역사과정에 있어서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 있는 것이지, 전체를 대표한 어떤 고착된 입장에 있어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미국의 대통령 닉슨을 중심삼고 볼 때 닉슨 대통령도 역시 발전하는 사회형편에 따라서 그 풍습과 환경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 정책은 어디까지나 변천하는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입장에 있음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서 그가 참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과연 그가 역사를 대표하고 이 세계의 30억 인류를 대표하고 미래의 수천억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느냐 할 때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해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참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양심의 가책이 없으면 누구에게나 떳떳한 자세를 갖게 됩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 ' 하며 당당코 그 환경 있어서 자기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입장을 부정하면 부정하는 그 여건과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입장에서 주장하는 그 자리가 과연 역사가 보장하고 시대가 보장하고 미래가 입증할 수 있는 참된 자리냐? 이런 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루를 두고 보면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 기분하고 낮 기분하고 저녁 기분하고 밤 기분하고 사람 자체는 마찬가지인데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태양이 아침에 동녘에서 솟아오르게 될 때 그 광명한 빛을 바라보는 기분은 저녁에 석양을 바라보던 기분과는 다릅니다. 그때의 내 마음과 내 모든 감정은 그 태양과 더불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지만, 내 모습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내 감정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낮이면 낮을 중심삼고 다르고, 저녁이면 저녁을 중심삼고 다르고, 밤이면 밤을 중심삼고 다릅니다. 또 보통 환경에서 느끼는 감정하고 명승지에 가서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혹은 산꼭대기에서 느끼는 감정, 산골짜기에서 느끼는 감정, 평지에서 느끼는 감정, 광야에서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자기를 중심삼고 절대시하고 좋고 나쁜 것을 판가리할 수 있는 주체성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와 그 뿌리는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늘의 이 시대에 산다고 해서 갑자기 비약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역사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거예요. 과거로부터 역사성을 지니고 오늘 현재의 자기라는 존재가 형성된 것입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생각할 때 여기에는 반드시 자기와 관계되어 있는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인연의 세계를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반드시 부모의 인연을 따라가게 됩니다. 또, 나를 중심삼고 볼 때 여기에는 친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의 인연을 중심삼고 친척이라는 인연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인연을 넓혀 가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씨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고, 또 더 넓혀 가면 세계가 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주장한다는 것은 그러한 인연을 부정하고 그러한 관계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연과 관계된 석상에서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그 주장하는 표준이 달라지고, 국가적인 입장에 따라 주장하는 표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악에 대한 관도 그 입장과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왜정 때에 일본에서 공산당은 용허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정당을 갖고 백주에 공산당을 선전할 수 있는 자유환경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느냐? 공산당 자체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일본 민족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때의 정치적인 방향이라든가 환경이 달라지면 그 결과에 미쳐지는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공산주의자하고 친구였습니다. 일본 천황 유일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에 있어서 공동 목표 아래 공동전선을 펴나갔습니다. 그때는 그들이 친구 중의 친구요, 없어서는 안 될 동지 중의 동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갈라졌느냐? 그들과 우리가 대하는 방향과 목적이 상반되기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게 될 때 여러분들이 일생 동안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는 대한민국 백성으로 태어났다. 아무 문중의 아들딸로 태어나서 남부럽지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양심적으로 볼 때 가책받을 아무런 내용이 없다. 이렇게 살면 옳지 않으냐'라고 판단한다고 합시다.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때의 환경적인 인연과 내용을 중심삼고 말할 뿐이지 전체의 환경 적인 내용과는 관계없는 자리에서 말한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루하루의 생활을 중심삼고 좋다 나쁘다 하는 말을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나는 이것으로 만족이다. 이 이상 더 좋은 것은 원치 않는다' 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다다. 이것만으로 나는 그만이다'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보다 좀더 가치있는 것, 좀더 행복스러운 것, 좀더 귀한 것, 좀더 무한한 가치의 내용을 지닌 것을 찾고자 할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데는 자기의 생활권내에서, 집안에서, 사소한 살림살이에서, 아내와 자식과 사는 그런 관계에서 찾지를 않아요. 안목을 크게 가지고 대한민국적으로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래도 그것을 찾지 않은 사람보다 그 시대에 있어서 뭇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중심이 될 수 있고, 뭇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중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찾지는 못했지만 찾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나은 자리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느낀 바와 자기 나름대로의 아는 바를 중심삼아 가지고 어떤 환경 앞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 생활을 살펴보면 현재의 입장에서 행복해하고, 현재의 입장에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확대시켜 가지고 세계적으로 행복해하려고 합니다. 더우기나 요즈음 세계적인 정세가 우리의 생활권내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20분 남짓한 시간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직접 우리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후에 우리가 살아 나가야 할 인생행로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을 위주한 내용을 가지고 '좋다'고 확정한다면 이건 세계적인 축에도 못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 때가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적이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부흥을 중심삼고 중진국을 표준해서 나가고 있으니까 1975년도를 넘어설 때는 중진국이 될 것이다'라고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선진국이 결정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중진국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거예요.
진정한 행복
역사는 지금까지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개인 개인의 소신이 일치되어 가지고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가정 가정의 주장이 서로 일치될 때는 씨족을 중싱삼은 하나의 공동사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씨족 씨족 끼리 서로 주장한 내용이 같게 될 때는 서로 규합해 가지고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 민족이 주장하는 것이 전부다 다르게 될 때는 세계를 표준해 가지고 인류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것이 제일이다. 딴 나라가 주장하는 것은 모두 나쁘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와 하나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대한민국이 보다 가치 있는 상대 나라와 합하게 되면 더 큰 가치가 나올 것이거늘, 이 둘이 합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만 위주한 주장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주장하는 것이 공동목적으로서 보다 나을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게 될 때, 그 둘이 합하면 합하기 전보다도 손해가 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때 합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하루의 생활을 통해서 친구를 대한다든가, 혹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많은 사건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만나서 그와 관계를 맺는다고 할 때는 서로서로의 목적이 일치되는 기점에서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는 기쁘고 자기는 슬픈 자리에서 맺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리의 개인생활은 서로가 공동목적의 표준이 현실의 자기 입장보다도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내용만 발견되면 갈라질래도 갈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어떤 개인이 행복하다고 했을 때, 그 행복이 그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행복이라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갑이라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중심삼고 '행복하다'고 한다면, 즉 전부를 부정하고 나만이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들한테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내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높은 위치에 있지만 모두에게 가망이 있는 내용을 지녀야 합니다. '너만 그럴 것이 아니라 만민이 전부다 그럴 수 있다. 네가 가는 길을 따라가게 될 때는 너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동쪽에 있는 사람이나, 서쪽에 있는 사람이나, 남쪽에 있는 사람이나, 북쪽에 있는 사람이나 전부다 행복할 수 있다' 하게 될 때는 그 사람이 주장하지 않아도 그를 중심삼고 자동적으로 전부다 하나되려고 하는 거예요.
천태만상인 사람의 생각
선한 것이 무엇이고 악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알 게 뭐야? 그런 말은 종교인들이나 하는 말이지'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 저녁에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도 마찬가지지 뭐 여느 목사가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예수장이들, 뭐 믿는다는 패들 다 공식적으로 하는 말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인간에게 과연 선이 필요하냐? 왜 선만 필요하고 악은 필요하지 않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생활습성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그것을 물어 볼 필요가 뭐 있느냐? 물어 보는 사람이 좀 이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저 상을 찡그리고 '아이구, 나 죽는다'고 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할 때, 그런 것을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웃고 노래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손들지 말라고 해도 들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째서 우는 것은 나쁘고 웃는 것은 좋으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천태만상입니다. 갑이라는 사람은 괜히 가을날 찬바람이 불어와 스산할 때, 앞뜰의 감나무에 감이 누렇게 익어 있고 잎사귀가 누렇게 단풍이 들어 있어서 울었는데, 찬바람이 불어 감나무 잎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가면 그 감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눈물 흘린다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 슬퍼하는 사람하고 속이 상해 가지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매를 맞았다든가 무슨 걱정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는 그 눈물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 같지 않다 이겁니다.
하나님은 시적(詩的)인 감정이 풍부해 가지고 인간에게 감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생의 처량함을 생각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인생이 저렇게 한 끝에 가면 낙엽처럼 떨어지겠구나' 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눈물짓는 사람하고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 남편에게 매를 맞아 아프다고 울고 있는 사람하고는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매를 맞고 우는 데에도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거 부인들 대해서 이런 이야기 해서 안됐소만 눈물은 부인들이 잘 흘리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남자들, 좋아하지 마세요. 부인들 중에는 남편한테 매를 맞고 울면서 '이거 억울해서 죽겠다. 내가 이러기 위해서 시집을 왔느냐? 이놈의 남편, 며칠 못 가서 다리가 부러지고 망해 자빠지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면에 매를 맞으면서도 '당신이 이럴 수 있겠느냐? 오히려 당신 손이 아프지 않겠는가? 나는 그래도 괜찮지만, 당신이 날 이렇게 해 가지고 기쁠 게 뭐 있느냐? '고 하면서 남편을 위해 동정의 눈물을 홀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눈물 흘리는 데에도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일을 굶을 수밖에 없는 아주 처량하고 형편없고 불쌍한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먹지 못하고 사흘간이나 굶고 사는 처지가 얼마나 불쌍해요? 여기에는 자기들이 불쌍한 것을 느끼고 사는 아들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도 있을 것이고, 어머니도 있을 것이고, 손자도 있을 것입니다. 열 식구라면 열 식구가 전부다 사흘씩 굶었으니 오죽하겠어요. 불행 중의 불행이라고 느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그 가족들이 사흘만 굶으면 어떻게 된다는 어떤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끝장이 난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이런 자리에서는 기가 막힐 거라구요.
기가 막힐 것이지만 여기에도 눈물의 가락이 식구마다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수양을 많이 쌓은 할아버지는 '내가 80여년의 생애를 사는 동안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몰랐는데 이렇게 3일 동안 밥을 못 먹는 자리에 처해 보니 인생에 이러한 골짜기도 있구나. 이야! 참 좋은 교훈을 내가 체험했다'고 하면서 그런 자리에서도 멋진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저놈의 영감, 정신이 나갔어. 먹을 것이 없어 죽겠는데 가만히 들어앉아서 무슨 공상하노? '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식구들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할 겁니다.
이것을 열 사람을 딱 벌려 놓으면 거기에는 세계적인 정상이 다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은 한가지인데 그 내적인 깊이와 모양과 사정은 열 사람 모두 다르다 이겁니다. 천태만상이라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는 전부다 눈물을 흘리고 탄식과 절망 가운데서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통곡해야 할 사정이지만, 어떤 사람은 도리어 거기에서 인생의 깊은 골짜기의 맛, 인정의 깊은 인연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찬스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회에서 발견할 수 없는 깊은 정서적인 흐름이 여기에서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단 한 번밖에 없는 귀한 찬스로 소화시킬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런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 못살겠다고 몸부림치고 그것을 저주와 원망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천태만상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이 웃고 사는 데만 있느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일반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이냐? '나는 모르겠다' 하면서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아니면 '인생은 덧없지만 이런 생활 가운데서 보람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것을 찾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냐 할 때, 여러분은 두말할 것 없이 전부다 후자처럼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이게 이상하지요. 그걸 보면 기분 나쁩니다.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딱한 사정으로 볼 때는 기분 나쁜 거라구요. 당장에 죽을 지경이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될 텐데 거기엔 관심 없는 사람처럼 딴청을 부리니, 그 옆에 있는 사람은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그 어떤 것이 그래도 나쁜 것들 가운데서 한 발자국이라도 참에 가까우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기에는 천태 만상의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국가로부터 표창받은 사람들 종류를 한번 통계 내 보세요. 국가에서 표창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대개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삼천만 민중이 전부다 '나도 가겠다. 나도 가겠다. 그것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표창받을 대상이 못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부다 표창받게요? 표창이라는 것은 단 한 사람, 일등한 자에게 주는 겁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리에서 표창받을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국가를 배반하고, 누구나 다 민족을 배반하고 나라고 뭣이고 안중에 둘 수 없는 절망상태의 환경에 떨어졌을 때, 다 도망가고 다 배반하고 다 싫다고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중심적인 지조를 갖고 충신의 도리를 심으려 하고, 애국정신을 심으려고 하는 사람, 거기에서 자기의 몸이 찢기고 어떠한 환난과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는 사람에게 표창을 주는 것입니다.
다 도망을 가고 없어졌지만 거기에서 남아 가지고 '나만 남았구만. 내가 일등 상 타겠구만' 하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남아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국가에서 표창을 받겠지' 하는 욕심을 가진 사람은 끝까지 붙어 있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상을 타서 뭘해요. 상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붙어 있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가려 내 가지고 여기에 없어지지 않을 하나의 민족정신을 남겨 놓아야 되겠다'고 하면서 자기 생명보다도 나라를 더 사랑하고, 자기 생명보다도 더 질긴 인내력을 갖고 사지를 고수한 결과 그 실천한 내용이 대중 앞에서 공인받을 수 있는 실적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자기가 싫다고 도망을 가더라도 수상자로 추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상자로 추대받게 되는 그 동기와 내용들은 비참한 거라구요. 너와 내가 좋아서 희희낙낙하면서 웃고 춤을 추고 노래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슬픔과 고통과 고독이 자기를 침범하고 자기 생명을 노리는 위험한 자리에서 그 환경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시킨 사람이라면 그는 그 국가를 대표한 충신이면 충신의 이름이 남을 것이고, 국가에서 표창 대상자로 선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충신은 평시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충신은 초비상상태에, 국가 운명이 경각에 봉착해 가지고 너나할것없이 전부다 책임을 질 수 없는 환경에서, 역사적인 절박한 내용을 내포한 것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책임지고 나서려는 사람이 충신입니다. 아무리 미래 과거 현실이 악한 세상이라도 그런 사람은 역사적인 대표적 충신으로 남아지는 것이요, 미래세계의 충신들을 통솔할 수 있는 중심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국가에서는 충신들을 중심삼고 제 1의 충신, 제 2의 충신, 제 3의 충신, 제 4의 충신…. 이렇게 순번을 매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표준을 세워서 그보다 나으냐 못하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등급을 설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행복이 웃고 사는 데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현생활에 있어서 인간 자체로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곤궁에 사로잡혀 있다 하더라도 그 곤궁을 보람 있게 개척하고 생명을 투입하여 거기에서 남이 지니지 못하는 보람 있는 가치를 갖고 나선다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일로써 보다 차원 높게 수습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사상이라든가 모든 주의(主義)는 그러한 기반 위에서 형성되어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보다 나을 수 있는 그 사상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보다 나은 사회환경, 중심 자리에 서 가지고 보다 잘먹고 잘사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나은 사회환경의 복판에 있지만 보다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서 비참한 내용을 소화시킬 수 있고, 비참한 내용을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태한 사회를 혁신하고 미래에 있어서 차원 높은 세계로 혁명을 제시할 수 있었던 동기는 보다 나쁜 자리에서 출발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에 태어난 성현치고 그 나라와 민족 앞에 환영받은 성현이 없습니다. 그런 성현은 가짜 성현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과 좋은 것
여러분이 출세를 하는 데 있어서 '그 동네에서 유명해질 것이냐, 나라에서 유명해질 것이냐' 하고 물어 보면 그것은 물어 볼 필요도 없이 '나라에서 유명해져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또 '나라에서 유명해질 것이냐,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냐'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온 사람들 가운데는 잘난 양반들도 계시겠지만 못난 양반들도 계실 것입니다. 잘나고 못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헤쳐 보게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전부다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안 갖고 있으면 사람이 아니라구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기분 나쁜 사람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사람이 기분 나쁘겠으면 나쁘고 말겠으면 말고…. (웃음) 그것을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지요?
아마 코를 흘리는 아이한테도 '너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래, 세계 대통령이 될래? ' 하고 물어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집어치우고 세계 대통령이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보고, '이 녀석아, 대한민국 대통령한테는 인사도 하지 않고 세계 대통령한테 가려고 그래? 그러면 매국노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참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참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물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물이 아무리 세차게 흐른다 하더라도 반석의 모서리를 한순간에 닳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천년을 계속해서 물이 흐르고 흘러서 닳고 닳아 가지고 동그래질지는 모르지만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흘러가는 물과 반석 중에 어느 것이 되겠느냐고 묻게 될때, 반석이 되겠다고 하지 흘러가는 물이 되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반석이 왜 좋으냐? 요동이 없고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귀하고 좋은 것은 어떤 것이냐? 한번 좋았으면 그것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영속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참된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좋다가 내일 안 좋으면 뭘 해요?
강도들이 남의 생명을 노리면서 금은 보화를 탈취해 가지고 며칠 동안은 좋았지만 그 다음에는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아요? 안 좋은 것입니다. 한번 좋은 것은 영원히 좋은 것으로 보장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보다도 내일에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가중돼야 합니다. 금년보다도 내년이 60년대보다도 70년대가, 70년대보다도 80년대가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느끼고 산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 여러분은 행복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이것을 하면 좋겠다' 했을 때 그것을 했다면, '아, 좋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목적을 이루었을 때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지극히 주의해야 됩니다. 목적을 이루었을 때 그것이 목적으로 끝나게 되면 그 사람은 벌써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루었지만 그 목적보다도 더 고차적인 목적을 세워 놓고 그것을 향해 '야, 또 간다' 할 수 있는 터전에 서야 합니다. 제 1차 목적은 훈련적인 목적으로 소화시켜 가지고 그것을 하나의 재료로 삼아 내일의 제 2차적인 목적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피곤함을 모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1차적인 목적만 딱 계획해 가지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그 다음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부패하는 이유도 그거라구요. 권력을 잡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끝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가진 민족은 세계에 남아질 수 있는 민족이 못 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은 무서운 민족입니다. 2천년 동안 그 민족은 세계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자기 나라라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지만, 나라를 잃어버린 개인이요 민족을 잃어버린 개인이지만, 그 개인이 민족을 대신할 수 있고 나라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냐?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게 무서운 사상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이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신이 있는데 이 절대적인 신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있다. 이러한 시련 고통을 주는 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시련시켜 가지고 역사적인 최후의 주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사상인 것입니다.
참의 본질
우리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이 '탕감'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제일 위대한 말입니다. 죽을 자리에 가서도 '탕감이다' 기쁜 자리에 갈 때도 '탕감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기쁜 자리에서도 혼자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쁠 때는 제사를 드려야 되는 거라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그 민족은 '우주의 중심 되시는 절대자는 계신다. 아무리 히틀러가 유대인의 생명을 노린다 할지라도 하늘은 반드시 승리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남더라도 그 축복은 옮겨갈 수 없다' 하는 신념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다 죽고 한 사람만 남아도 그 민족은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다 죽고 한 사람만 남게 되더라도 그 나라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방에 흩어졌던 죽고 남은 무리들이 손에 손을 잡고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가 소원하던 그곳으로 가자' 할 때 그 나라는 다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겠어요? 하나님이 바라던 소원의 나라입니다. 만민을 지도할 수 있는 주체국으로서, 태평왕국을 창설하는 그 민족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이 있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3백여만 명의 이스라엘 민족이 1억에 가까운 아랍권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재기시킬 수 있고 민족을 재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가 지닌 사상보다도 우위에 선 주체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세 사람이 단결하고 또 그 수가 가중되게 될 때는 그들의 움직임이 세계에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면 과거에 겪은 그 시련과 고통이 불행이었더냐? 아닙니다. 그 불행이 미래의 행복을 소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예요.
이러한 점에서 참사람을 찾아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참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참사람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출발했느냐, 중간쯤에서 출발했느냐, 맨 나중에 출발했느냐? 그것을 찾아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참사람이 되겠다고 하기 전에 먼저 참사람을 찾아 보자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 참사람이 누구냐를 찾는 데에는 오늘에서만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역사의 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람을 찾을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의 참사람은 누구였더냐, 오늘날의 참사람은 누구냐, 그리고 미래의 참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느냐? 그것을 모르고 미래의 참사람이 될 수 있겠어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참사람이라고 주장해도 그 사람은 참사람이 못되는 것입니다. '미래의 참사람은 이래야 된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될 것 아니예요?
참이라는 것은 지역적인 여건에 따라 달라지거나 환경적인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동대문에서 참이던 것이 서대문에 가면 참이 아니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대문 시장과 서대문 시장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변하는 물건은 참 물건이 아닙니다. 동대문에 가도 그것이요, 서대문에 가도 그것이요, 서울에 가도 그것이요, 산골에 가도 그것이 변함이 없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금도 순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금 좋아하지요? 황금덩이 좋아하지요? 금 중에도 순금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왜 순금을 좋아하느냐? 그것은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초월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초월적인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슬픈 사람이 보아도 그 빛이요, 기쁜 사람이 보아도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그 속성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우선 변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물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조 다이아몬드하고 진짜 다이아몬드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인조 다이아몬드가 티도 없고 금도 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장에는 인조 다이아몬드가 더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때에 따라 변색이 될 수 있고 형태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다이아몬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의 여건에 지배를 받지 않는 초윌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의 본질을 타진하게 될 때, 우선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참이라는 것은, 아무리 참이라고 해도 그것이 한 일년쯤 가다가 없어지면 뭘 합니까? 참의 본질 가운데는 반드시 불변성과 더불어 영원성이 있어야 됩니다. 불변성도 있어야 되지만 영원성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유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만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주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모든 비교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요? 순금을 표준으로 가짜 금에 순금이 몇 퍼센트 있다고 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만이 지니고 있는 자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원기(原器)라는 것은 불란서의 만국미터법동맹도량형국에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계 수많은 국가가 길이나 거리를 측정하는 어떤 도구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네 것이 좋다고 아무리 큰소리쳐도 그것을 미터 원기로 감정했을때 몇천 분의 일, 몇만 분의 일 틀려도 그게 가짜예요, 진짜예요? 몇억만 분의 일 틀려도 그것은 가짜라는 거예요. 그쯤이야 괜찮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엄격히 따지면 몇억만 분의 일 아니라 몇 수십억만 분의 일 틀려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참된 인간이 있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대한민국에도 위인이 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의 위인으로 누구를 쳐요? 우리 민족의 정기를 지금까지 전통으로 남기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충신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누구를 위인으로 쳐요? 「이순신요」 그건 다 알고 있구만. 혹시 이씨가 많아서 이순신이라고 한 것 아니예요? 거 대답한 사람이 이씨라면 기분 나쁩니다. (웃음) 그래 이순신이면 다예요?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어쩌려고 저래? '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참사람은 못 된다구요. 위인은 되지만 참사람은 못 됩니다. 왜 참 사람이 못 되느냐? 참이라는 것은 지역적인 한계를 초월해야 됩니다.
위인, 성인, 참사람
이순신은 대한민국을 중심삼고는 충신이지만, 일본을 중심삼고는 뭐예요? 역적, 원수라는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일본의 맨 졸장부라도 이순신만 잡는 날에는 일본 민족 앞에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지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은 위인은 되지만 성인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전부다 알고 살아야 됩니다. 그저 아무래도 좋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길을 건너가려면 건너갈 길을 가려 가지고 한 발자국씩 건너가야 하고, 사다리를 올라가려면 하나 둘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다 가겠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추대할 만한 애국자이지만 성인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성인과 위인은 다릅니다. 참사람이라면 지역적인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참사람이라면 일본에서도 참사람이라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대한민국에서 명장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건 한 가닥이라는 거예요. 대한민국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명장의 권위를 가진 위인의 입장에 설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본연의 인간, 참된 인간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불합격자라는 거예요. 그러니 그 사람은 우리가 표준으로 할 수 있는 참된 사람은 못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성인이 크냐, 위인이 크냐 하면 성인이 크지요? 그건 알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성인 될래요, 위인 될래요? '하고 물어 보게 될 때 위인 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인이 되지' 한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려면 몇십 년 전부터 위인 명패를 따두고 있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위인 사촌 축에도 못 들어 가지고는 '성인이 되지. 그걸 물어 볼 필요가 뭐 있어? '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관절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여러분, 그것 알아야 돼요. 성인은 민족을 초월합니다. 세계적이지 않고는 성인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 성인의 마음 가운데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 제패의 꿈이 있다면 그는 독재자는 될는지 모르지만 성인은 못 됩니다. 그런 유의 사람은 독재자입니다. 여러분, 파시즘 잘 알지요? 그것은 자기 일개 민족을 중심삼고 그 민족의 욕망을 세계화시키려고 칼을 휘두르고 별의별 짓을 다 하다가 나가자빠진 그런 역사적인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히틀러 같은 사람은 게르만 민족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조상을 따져 보면 그 조상이 백정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독재자는 될는지 모르지만 성인은 못 됩니다.
성인이 어떠한 사람이냐? 성인은 세계적입니다. 국가를 초월한 초국가적인 입장에서 인간의 가치와 세계의 가치를 그리면서 자기의 생명을 심고 간 사람이 아니고는 성인이 못 됩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성인은 세계적입니다. 그런데 위인은 일국에서 환영받는 무리입니다. 위인의 죽음길에는 민족의 눈물이 연결되어 민족 전체가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길은 민족도 배반했더라 이겁니다. 저 녀석은 미친 녀석이라고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전체가 욕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나라를 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민족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민족을 사랑할 수 없는 입장에 몰렸고, 만민의 행복을 소개할 수 있는 중심존재이지만 행복의 터전을 소개할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갖지 못하여 이슬같이 살다 갔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고귀한 성인의 자리에 접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인은 그 국가의 국민들이 반이라도 동정할 수 있는 눈물의 길을 남기면서 죽어갈 수 있으되, 성인은 그런 길을 못 간 사람들이에요. 그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더벅머리 총각은 30세가 되어도 장가도 못 가고 돌아다니다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역사적인 원수인 로마 병정들, 그때 당시 식민지 국가로서 흡혈귀마냥 자기 민족의 피를 빨아먹던 원수 중의 원수 로마의 졸장들, 자기의 가슴을 창으로 찌르고 생명을 노린 그런 원수들을 대해 죽으면서까지 '아버지여, 저들이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게 미친 수작 한 것 같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로마 나라를 초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로마 나라든 무슨 나라든 그 표준을 넘어선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이 찾아가야 할 길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고 있는 인격 형성과 국가 형성을 초월한 자리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내가 태어난 것은 그 나라를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나라의 절개를 지닌 충신이요, 그러한 한 사람의 책임자로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현재는 망하더라도, 아무리 주위에서 똥감태기 씌운다 하더라도 순수한 금빛, 순금 빛은 변할소냐? 지금 이 악한 환경에서 빛은 안 나지만 그것이 그런 환경에 싸여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언젠가는 만천하에 빛날 수 있는 순색을 보여 줄 때가 올 것이다' 하고 늠름히 생각하면서 자기의 생명을 밟고 넘어가던 멋진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세계를 제패하고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 것을 여러분은 잘 알지요? 그의 사상은 민족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인간이 찾아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냐? 일개 민족의 성공을 중심삼고 나오던 위인들의 주의 사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초민족적이요 초국가적인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성인의 도리를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의 도리요, 우리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여기에 처음 온 사람들도 있을 텐데 실례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나는 내 신념으로 살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에 서 있는 이 사람도 그런 신념을 가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똑똑하다면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있었던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왜 하필 종교 책임자가 되었느냐? 통일교회 문아무개 하면 말은 많이 들었을 거예요. 보기는 처음 보지만. 내가 바로 문 아무개입니다. (웃음) 나에 대해 기분 좋지 않은 말도 많이 들었지요? 사람들이 '문 아무개는 기분 좋지 않은 사람이야' 하며 색안경을 쓰고 보는데 과거를 생각해 보더라도 나는 부끄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아니면 내가 그렇게 되었느냐?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만든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사람은 흥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악한 것은 망하는 것이요, 선한 것은 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똥감태기 안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순수하고 천하의 역사가 공증할 수 있는 참된 자리에 섰을 때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쇠고랑을 차고 갈 때, 지나가는 행인 여자들까지도 곁눈질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오냐, 너희들이 걷는 그 걸음걸이는 거룩해 보이고 여기 이 사나이는 불쌍해 보이지만, 아직까지 비교 기준이 안 나왔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됐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자리가 드러나게 될 때는 옳고 그른 것이 판결난다' 하면서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과히 좋지 않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지요? 그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도 기분 나쁘다구요. 여러분만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나도 기분이 나쁘다 이겁니다. 혹자는 '모두 잘사는 세상에서 뭐 욕먹고 살 필요가 있어'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아가씨 아주머니들, 내가 통일교회 여자들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어요. 내가 무슨 편지 한 통을 했나, 전화 한 통을 했나? 어디 비밀리에 만나자고 말이라도 한번 해보고 욕먹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웃음)
왜 선생님이 욕을 먹었느냐 하면 말예요, 여자들이 밤중이나 새벽에 남편과 가장 재미 있을 시간에 예배 보러 간다고 보따리 싸니까 이것이 싫다는 겁니다. 여러분, 꿀맛은 밤에도 좋고 낮에도 좋지요? 꿀맛을 본 사람에게 '야, 낮에만 가지 밤에도 가느냐' 한다면 그 사람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꿀맛을 못 봤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구요. (웃음) 요것을 싹 맛만 들여 놓으면 혓바닥이 감쳐 들어갈 것 같은데 맛만 보다가 돌아가서 자려니 잠이 안 오거든요? 그러니까 할수없이 자다 말고 눈을 번쩍 뜨고 그대로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남편도 눈에 안 보이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남편들이 문선생한테 홀딱 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선생한테 홀딱 반할 게 뭐예요? (웃음)
모든 것은 사필귀정
봄이 되면 형편없이 말랐던 풀에서도 회생의 기운이 돕니다. 그렇지 않아요? 봄볕이 내려 쬐게 되면 땅에서는 거기에 화동하여 발아합니다. 땅은 솟아오르고 하늘은 낮아져 천지의 조화 이치로 인해 가지고 잠들었던 생명이 발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싹이 나고 생태변화가 벌어지는 겁니다. 내적으로 운동을 하고 외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주니까 크는 겁니다. 커지면 껍데기를 터치고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아주머니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껍데기가 되어 있으면 남편을 터치고 나가려 하고, 집안이 껍데기가 되어 있으면 집안을 터치고 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인생의 봄을 못 봐서 그렇지 인생의 봄만 보게 된다면 가을을 찾아갈 사람 어디 있겠느냐 말입니다. 봄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지 말래도 와 가지고 지금까지 욕을 먹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욕을 먹었습니다. 팔자가 사나와서 별의별 꼴을 다 봤구만요.
여자들이 머리를 박박 깎여서 오질 않나, 밤송이처럼 깎여져 가지고 오질 않나. 이렇게 와 가지고는 훌쩍훌쩍 우는 걸 보면 꼴사나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다리가 부러져 가지고 오질 않나, 머리가 깨져 가지고 오질 않나, 벌거벗긴채 쫓겨나서 오질 않나. 세상에 별의별 꼴을 다 봤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안 만들었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니, '좋다. 일이 그렇게 됐으니 내가 책임지겠다' 이래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은 사필귀정이라고 했습니다. 참과 거짓은 반드시 부딪치게 됩니다. 한 번 부딪치고, 두 번 부딪치고, 세 번 부딪치고, 네 번 부딪치고….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거짓은 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저 때려부수려고 하는데 부수려고 하면 할수록 참은 철옹성같이 단결하는 것입니다. 쇠도 그렇습니다.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들기면 가짜는 다 떨어져 나가지만 진짜는 남아서 다져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그 놀음을 했습니다. 3정권 시대를 거치면서 별의별 수난을 다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아직까지 지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녁에 통일교회 문선생의 말을 듣고 기분 나빠서 반기를 들겠으면 죽을 각오를 하고 반기를 드십시오. 그러지 않으려면 아예 그만두라는 겁니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벌써 죽을 각오를 몇백 번 몇천 번 한 사람이기 때문에 뭐 시시하게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건 이미 진 거라구요. 이렇게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구요. 기분 나쁘겠지만. (웃음) 사람은 만나면 사정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정입니다.
여기 기성교회 다니는 양반이 있다면 내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이 실례긴 실례입니다만, 그들이 나보고 하는 말이 '통일교회 문선생, 당신은 대관절 뭐야? 당신 그래도 되는 거야? ' 또, 인상을 보고는 '야, 저 사람은 천사장 같아 가지고 전부 싫어하겠군' 하는데 그거 그러지 말라 이겁니다. 기분 나쁘다구요. 쓱 앉아서 불만스런 얼굴을 해 가지고 왜들 그럽니까? 그렇게 앉아 있는 사람은 내가 척 보면 다 압니다. 안 그러는 척하고 있지만 속 마음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청중을 대해 보았고 지도해 보았기 때문에, 감추고 앉아 있어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 심통을 다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찔리게 만들면 나한테는 못 당합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지요? 그렇지요? 굳고 무른 것은 부딪쳐 봐야 되는 거라구요. 악하고 선한 것은 부딪쳐서 결판을 가려 보아야 아는 겁니다. 오늘 기성교회가 통일교회 죽으라고 별의별 놀음을 하지만 통일교회는 만만히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나를 대해서도 죽으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영계에서 '아무개 목사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니 좀 들어 봐라'고 라디오 소리처럼 들려 줍니다. 들어 보면 참 거룩한 기도를 많이 한다는 목사님이…. (웃음)
그런 경우를 당할 때는 내가 그렇게 지독히도 나쁜 사람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늘나라 옥좌 앞에 가더라도 나는 당당하게 하나님을 공격할 자신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인간을 이렇게 고생시키시오. 절대자라면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인간을 도탄 중에 넣고 신음하게 하고 이러한 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를 왜 두셨소' 하고 큰소리칠 수 있는 그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지금은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막대기인지 쇠꼬챙이인지, 모르니까 쥐고 휘둘러치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자기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패로 알고 있는데 그것마저 위협당해 빼앗길것 같으니까 안 빼앗기겠다고 눈을 감고 들이치는 겁니다. 그러니 그 눈에 장인 장모를 어떻게 알아볼 것이며, 사돈의 팔촌 그 누구를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핍박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자라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니예요.
보다 가치 있는 것
그러면 통일교회 자체도 참된 사람, 참된 종교인들로서 결합되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제아무리 잘났다고 하는 사람도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기술자는 그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일는지 모르지만 인간 전체를 대표한 중심적 가치를 두고 비교해 볼 때, 그는 중심이 될 수 없다 이겁니다. 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분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여 그래도 참에 가까운 사람을 헤아려 보면, 위인은 참된 사람이 못 됩니다. 성인은 그래도 차원이 높아서 참된 사람 축에 참여시킬 만합니다. 왜? 그 사람들의 주장은 세계적이기 때문입니다. 잘살되 자기만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부가 같이 잘살자, 행복하되 전체가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전체가 행복하자는 데 있어서도 자기는 가만히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면 그때 살짝 들어가서 행복하겠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피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체가 행복하게 되는 데 자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그 목적에 투입시켜 가지고 생사결단 하고 간 사람들이 성인의 반열에 동참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보세요. 성인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성인 축에 들어가요? 어때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소크라테스는 철인은 되지만 성인은 못 됩니다. 그는 지식과 지혜의 왕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의 왕자는 못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생명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지식에는 유물론을 가지고 생명의 가치 유무를 주장하는데 그 주장은 지나가는 거예요. 심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지식을 중심삼고 사람을 전부다 재지요? 대학교 총장이면 제일이지 하는 식입니다. 대학교 총장이 생명의 제일이에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지식의 비중을 중심삼고 인간을 재는 세계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귀한 것이냐? 인간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제일 귀합니다. 생명이 위협받게 될 때가 가장 불행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 불행한 자리에서 해방될 때가 가장 즐거운 것입니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 좌우하느냐? 여러분, 지식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있어요? 그건 팔부 사람입니다. 행복의 주축은 무엇 가지고? 생명 갖고 좌우하는 거예요. 생명이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가치가 나라와 민족을 넘고 세계 인류를 넘게 되면, 그 사람은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인치고 박사 아닌 사람 없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성인은 박사라는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양반들은 사람 때문에 죽었지, 지식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 틀림없지요? 나라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구요. 아무 나라를 걸고 죽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을 걸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참된 인간을 걸고 죽는데, 참된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죽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생명을 걸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그게 다릅니다.
여러분들, 제일 위협적인 말은 죽여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놈의 자식, 죽여 버린다'고 그러지요? 그거 알기는 아는 거라구요. '요 녀석, 옷을 빼앗아 버린다'고는 아무리 얘기해도 괜찮지만 죽인다고 하면 심각하지요? 80세의 할머니도 죽는다고 하면 '나야 이제 곧 죽을 나이니까 괜찮아' 하지만 심각하다는 거예요. 제일 심각한 것이 무엇이냐? 지식 보따리예요? 천 개 만 개가 빵꾸가 나건, 흘러가든, 그건 문제시하지 않지만 생명 하나만은 절대시합니다.
성인의 도리는 신을 중심삼은 도리
성인은 무엇을 가지고 터치(touch)했느냐? 성인이 터치한 그 내용은 지식이 아닙니다. 보다 가치 있는 생명, 보다 보람 있는 생명을 중심삼고, 그 생명이 국가적이 아니라 세계적인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초환경적인 생명의 가치를 그리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그 주위 환경 속에서 그 생명이 뒤넘이치면서 세계적인 국가를 바라며 죽어 갔다면 그는 성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성인 축에 못 들어가요. 오늘날의 사조는 무엇이 움직이느냐? 철학이 움직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생명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철학이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근원적인 입장은 못 되는 겁니다. 생명의 대상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지식의 기원은 되지만, 생명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자체는 못됩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철학자가 아닙니다. 성인들은 분석해 볼 때, 이들은 무엇을 가지고 살았느냐? 무슨 전법을 가지고 살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식을 가르쳐 주기야 했지요. 인생의 도리의 일면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그것을 무엇을 중심삼고 가르쳐 주었느냐? 세상을 점령하기 위한 전략적인 것을 가르쳐 준 것이냐? 이들이 가르친 내용은 달라요. 전부 다르다는 겁니다.
지식은 알면 알수록 점령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서구철학이라는 것은 점령적인 철학입니다. 알면 알수록 점령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자기를 넘어 가지고 그 판도를 세계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세계를 중심삼고? 자기를 중심삼고?
세계를 위하는 길을 따라 나간다고는 하지만 누구를 중심삼느냐 하면 어디까지나 자기 자체를 중심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는 반드시 유물사상에 결집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기가 중심이다 이겁니다. 철학은 인생의 생명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상적인 가치에는 속할는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결정 요인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무엇을 추구했느냐?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탐구하되 평면적인 것만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만이 아니라 양면적인 면에서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도리는 반드시 무엇이 중심이 되어 있느냐? 자기가 중심이 안 되어 있어요. 알겠어요. 그런데 철학은 무엇이 중심이 되어 있느냐? 학(學)이돼 그 학을 주장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인은 주장하되 주장하는 그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라요.
철학이라는 것은 주장한 사람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거라구요. 마르크스주의면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한 사람이 주동적인 역할을 하는 거라구요. 그 사상권내에 전부다 융합시키기 위해서 세계로 발전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누구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삼은 환경적인 내용을 결속시키는 데 있어서 내재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 오늘날의 철학사조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성인의 도리는 그렇지 않아요. 성인의 도리의 중심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아니라 신(神)입니다. 이것이 다른 겁니다. 따라서 신을 소개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의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는 겁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보면 막연하지만 무엇을 중심삼고 가르쳤느냐? 천(天)을 중심삼고 가르쳤습니다. '위선자(爲善者)는 천(天)이 보지이복(報之以福)하고 위불 선자(爲不善者)는 천(天)이 보지이화(報之以禍)니라' 즉 선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이에 보답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이에 보답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공자 중심이에요, 하늘 중심이에요? 「하늘 중심입니다」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걸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철인은 어떤 사람이냐? 구별해야 되겠지요? 철인은 자기를 중심삼고 뭘 알라, 인간의 오관을 중심삼아 가지고 본체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면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인간을 중심삼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점을 못 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그런 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일시에 넘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치고 신을 소개하지 않는 성인이 없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보면 거기에는 철학적인 근거도 있지만 막연하나마 천(天)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이 아니예요. 구체적인 시대에 구체적인 신의 섭리를 추구할 수 있는 때가 되면 구체적이지 않은 것은 지나가게 됩니다.
석가도 막연하나마 천학(天學)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소개했지요. 마호메트교는 종합 종교예요. 그것도 역시 하늘을 중심삼고, 신을 중심삼고 나온 거예요. 예수님도 역시 신을 중심삼고 나온다는 거예요. 그의 가르침은 신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게 달라요. 중심이 인륜이 아니예요. 천륜을 위주로 해 가지고 도를 펴려고 나왔다는 거예요. 그 가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천을 중심삼고 가르쳐 나오면 성인이 되는데, 그 성인의 도리는 무엇을 따르려고 하느냐? 인의의 도리를 따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의의 도리를 따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절대적인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바라는 뜻이 무엇일 것이냐? 대한민국만 구하는 것이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대한민국만이 아니다 이거예요. 자그마치 그 뜻은 세계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은 세계적이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종교인은 하늘을, 천륜을 중심삼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인륜과 천륜이 있습니다. 인륜 도덕이란 문제는 중요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이니 뭐니 이래 가지고 거기에만 치중하고 있는데, 물질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겁니다. 여기에는 인륜이 있으면 인정이 있고 천륜이 있으면 천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행복은 정서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행복이 정서적인 분야를 떠나서 있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행복이란 상대적 여건을 존중하는 자리에서만 벌어지는 것이므로 홀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 나는 백만장자이므로 홀로 있어도 행복하다'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반드시 정서적 입장을 논의할 수 있는 상대 요건이 필요합니다. 내가 천하를 얻더라도, 아무리 문화적인 생활을 누리더라도 반드시 상대적인 요건을 중심삼고 정서적인 감정이 통해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지닌 게 있더라도 거기에 정서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륜 도덕에도 정서적인 문제가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인륜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가 인정의 내용을 샅샅이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지만 인륜의 근본이라는 것은 인정이 아닙니다. 인정이 근본이 아닙니다. 인정이라는 정(情)의 뿌리는 사람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어떤 동기에서 벌어진 거예요. 그 동기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결과입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냐 하면 하늘입니다. 천륜이 인륜의 동기가 되고 천정(天情)이 인정(人情)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정에 대해 가르쳐 준 성인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중심삼고 정서적인 문제를 가르쳐 준 내용 여하에 따라 성인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남자가 있으면 반드시 누가 있어야 돼요? 행복한 집안에 주인 양반이 있으면 누가 있어야 돼요? 주인 마나님이 있어야 됩니다.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됩니다」 그건 절대적입니다. 주인 양반 부부가 있으면 또 누가 있어야 돼요? 아들딸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인륜을 중심삼은 도덕 관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도덕 관념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후 좌우 상하의 인연을 맺어가는 데 있어서 도덕 관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어떤 영감 부부가 있으면 '우리 둘이 정답게 만났으니 우리 둘이 정답게 살다가 죽으면 돼' 그래요?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는다면 자기 재산을 생각하며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딸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됩니다」 몇 명쯤 있어야 되겠어요? '뭐 아들딸 많이 낳아서 뭘 해. 아들도 하나 딸도 하나면 되지'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많기를 바래요? 나무에 가지가 많은 것이 좋아요, 적은 것이 좋아요? 「많은 것이 좋습니다」 좋은 재목을 구하려고 하는데 가지가 적은 나무에서 좋은 재목이 나와요? 가지가 많을수록 그 확률이 커지는 거라구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못사니까 할수없이 아들딸 적게 낳자고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천지간에 꽉 찼다면 아들딸을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지금 산아제한하는 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러지 먹을 것이 남아 가지고 개한테 나누어 줄 수 있게 되는 입장만 되어 보라는 거예요. 여기 안경 낀 영감님은 아들 하나 갖고 싶어요, 백 명을 갖고 싶어요? 백명의 아들이 다 대학교 총장 되어도 싫어요? 백 명의 자식을 다 공부 못 시키니까 할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구요. 자, 그러면 국민이 많은 게 좋아요, 적은 게 좋아요?
요즈음 중공을 왜 세계가 무서워해요? 인구가 많기 때문입니다. 밥을 굶고 있지만 식구가 많으면 그 동네 부자집 영감도 무시하지 못하는 거라구요. 내기를 하는 데도 한 번 하는 것보다도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열번 하는 것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지 않느냐 이거에요. 그런 관점에서 많은 것이 적은 것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돈도 적은 것이 좋아요? 많은 것이 좋지. 학문도 많은 것이 좋아요, 적은 것이 좋아요? 많은 것이 좋지요. 자기편도 많은 게 좋아요, 적은 게 좋아요? 많은 것이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딸도 많은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통일교회 처녀 총각들은 축복받고 자녀를 낳게 되면 한다스 이상 낳으십시오. (웃음) 전도 안 하고도 자꾸 낳아 가지고 대한민국 국민보다 많아지게 되면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먹혀 들지 별수 있어요? 간단하다구요.
우리 교회 식구와 결혼하게 되면 전부다 우리편이 되는 겁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3천만이고 우리가 3천 백만이라면 일대일로 결혼해도 우리 패가 많다는 것입니다. 투표를 해도 우리편에서 대통령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 낳아야 되는 거예요. (웃음) 그것은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많은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륜을 중심삼고 볼 때 인정이라는 것은 혼자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정이라는 것은 전후, 좌우, 상하 동료도 많아야 되고, 풍부한 정서적인 터전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한 것입니다.
천정(天情)을 가르쳐 준 예수
그러면 인륜만 가지고 되느냐? 인정만 가지고 되느냐? 안 됩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천륜에 대해서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천정에 대해서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왔다 갔던 성인들 가운데서 천정을 가르쳐 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은 인정은 다 집어치우고 천정만 논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0대 총각 때까지 목수의 조수였습니다. 그러니까 뭐 옷이라도 여러분들같이 양복을 입었겠어요? 양복이 다 뭐예요? 그저 베로 만든 유대나라 옷을 뒤집어쓰고 다녔다구요. 그것을 잘 감고 다녀야지 그렇지 않으면 바람이라도 불면 속이 다 보이게 됩니다. 그런 총각 신세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몰라서 그렇지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가 귀엽게 기른 줄 알아요? 의붓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랐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붓 아버지 밑에서 목수의 조수 노릇을 하면서 형편없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30세까지 장가를 못 갔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주 배포가 컸습니다. 생각을 많이 한 양반이라구요. '내가 출세를 하면 어떻게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답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사람의 사위가 되지 않으면 아들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근사하지요? 여러분도 할수없어서 그렇지, 현재 박대통령 중심삼아 가지고 그의 조카 사위만 되어도 야단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주권자를 중심삼고 정서적으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서고자 하는 것이 그 나라 백성들의 욕망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도 천주의 대주재 되시는, 천지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 있으면 그분을 딴 사람에게 양보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참의 기원
아까 하던 이야기 되돌아가서 한번 더 해 보자구요. 여기에 늙은 양반 하고 젊은 양반 둘이 앉아서 서로 자기가 참사람이라며 입씨름을 한다고 합시다. 우리 인간들의 입장으로 봐서는 같은 값이라면 나이 많은 사람을 참사람으로 추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된 사람의 얼굴을 하루라도 더 보기를 원하는데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하루라도 더 빨리 죽으니까 곤란하다고 조건을 걸게 될 때는 젊은 사람이 얼마든지 추대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해도 젊은 사람이 더 오래 많은 일을 할 테니까 젊은 사람을 추대할 수 있는 요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둘 가운데서 한 사람을 빼내야 합니다. 만일 젊은 사람을 추대하게 된다면 나이 많은 사람은 '저 녀석은 나보다 나이가 20년이나 아래인데 이거 뭐 이래' 한다는 것입니다. 또, 나이 많은 사람이 추대되면 젊은 사람들은 '저 늙은이, 걸러 먹을 대로 다 걸러 먹고 껍데기만 남아 가지고 이제 갈 데도 없으면서 저거 뭐 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자기가 낫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 선거일이 가까와 오는데 여당 야당이 서로 잘났다고 하지요? 그러면 누가 더 잘났어요? 서로 잘났다는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잘났다고 판정을 하면 그것이 진짜 판정이에요, 가짜 판정이에요?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만일 인간들 끼리끼리 잘났다는 사람을 결정하게 되면 최고라고 결정된 사람 다음 사람이 불평을 한다는 겁니다. '뭐 키로 보나 수완으로 보나 나보다 못하다'고 불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파당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인간끼리는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끝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국이 벌어질 거라구요.
그러면 이것을 누가 결정하느냐? 잘났다고 하는 두 사람끼리도 결정하지 못하는데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끼리는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끼리끼리의 결정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보다도 월등하고 초월적인 입장에 있어 가지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 앞에 순응할 수 있고, 그 환경을 공인할 수 있고 공증할 수 있는 어떤 주체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주체자의 판정을 바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주체자가 누구일 것이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외에는 등장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면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신이 감정하여서 판정하여 세워 놓으면 그것은 절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거기서부터 인간세상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질서를 못 잡는다는 것이 우리의 이론 추구에 대한 결론입니다.
만일 절대자가 있고 절대자가 옳다고 판정한 사람이 있다면, 인간은 절대자를 따라갈 것이냐, 절대자가 옳다고 판정한 사람을 따라갈 것이냐?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갈래요? 대답해 보세요. 이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절대자를 따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결론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는 사람을 넘어서 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바라고 있는 최고의 행복을 그려 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언제나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 신(神)입니다. 신(神)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고 신(神)만이 우리의 행복의 요건을 가져올 수 있으니, 신을 중심으로 삼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의 출발과 더불어 종교사상이 떠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위주해 가지고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참이라는 것은 사람을 위주해 가지고 출발할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참이 출발해야 되느냐? 절대적인 신으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절대적인 신을 위주하고 천륜을 위주하여 인륜의 내용을 제시한 천정과 인정이 상봉할 수 있는 결합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고 우리 인간이 기뻐할 수 있는―우리 인간이 기뻐하는 것은 천의에 일치되기 때문입니다―그것을 찾아서 상봉하게 될 때, 인간의 행복이자 하나님의 행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의와 인의가 합하고, 천륜과 인륜이 합하고, 천정과 인정이 합할 때만이 모든 것이 결정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종교를 중심삼고 절대적인 신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인은 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알겠어요? 자기를 소개하지 않았어요. 신을 뒤로 하고 인간이 앞에 나와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신을 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절대자는 이렇다' 하고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들 가운데 누가 신(神)을 제일 정확하게 파헤쳤느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예수님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라고 했습니다. 참 잘 결론지었습니다. 인간이 최고의 절대자 앞에 최고로 가 머무를 수 있는 종착점이 어디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절대적 신 앞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당신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다'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결론이 나왔어요. 예수님의 그 한마디는 인류를 대표한 선각지권을 가지고 설파한 내용입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요' 할 때, 저쪽에서 '오냐 !' 할 수 있게 된다면 천하는 다 해결됩니다. 절대자가 자기의 장인만 되어도 천하가 왔다갔다할 텐데 아들이라는 겁니다.
아들의 특권은 뭐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끊을 수 있어요? 끊을 수 없다 이거예요. 칼날이든 권세든 그 무엇을 가지고도 아들의 인연은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녀석은 내 아들이 아니야' 하는 그날부터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아픔이 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권세가 있고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자식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끊을 수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힘도, 하나님도 못 끊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설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했습니다. 독생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정서적인 인연에 있어서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천륜과 천정의 내용이 이 한마디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천륜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부자의 관계요, 천정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부자의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맺고 살려고 생명을 버리고 갔기 때문에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면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민주세계는 기독교 문화권내에 부식(扶植)되어 가지고 그 터전에서 앞으로 새로운 세계는 연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으로 연결되어 나가지요?
여러분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사위가 되겠느냐, 아들이 되겠느냐? ' 하고 묻게 된다면 아들이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또, '세계 대통령의 사위가 되겠느냐. 양자가 되겠느냐?'하고 물어 보떤 양(養)자가 붙어도 사위보다도 양자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아들이 되겠느냐고 물어 보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올라가는 거라구요. 사람의 마음은 최고점을 바라고 있습니다. 전부다 세계에서 일등이 되려고 하고 하늘땅을 자기 것 만들려는 욕심을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소질을 다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이 열 분, 백 분이라도 다 집어넣고도 남을 만큼 큽니다. 이렇게 멋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자들은 하나님의 딸이 되겠어요, 하나님의 며느리가 되겠어요? 「딸이 되겠습니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하나님의 딸이라면 틀림없지요? 눈이 애꾸눈이라도 딸이라면 할 수 없는 거라구요. 잘생기고 못생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딸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독생자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밖에 없으면 외톨이가 되므로 거기서는 나라가 나올 수 없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남자만 택해 가지고는 세계가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남자 혼자만 있으면 백년 이내에 죽어 버리면 그만이거든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딸을 필요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 라고 했습니다.
악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로 와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질 수 있는 독생자가 되어, 무한한 가치의 내용을 중심삼고 악한 세상을 분별시켜 여기에 일치될 수 있는 딸을 한 사람 구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계적입니다. 째째하지 않다는 겁니다. 세계적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무대를 이끌어 가지고 하나의 신부를 택해 역사이래 전무후무한 세계적인 대잔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들과 며느리를 중심삼고 잔치를 할 수 있는 그날이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날이요. 타락한 인간들이 찾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재림사상이라구요. 어린양 잔치 입니다. 어린양 잔치가 뭔지 알아요? 신랑 신부 잔치라는 거예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신랑 신부도 되지만 나는 형이고 너희는 동생이라는 거예요. 형제다 이겁니다. 결국은 신과 인간이 합작을 하여야 이상적인 가정의 기반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주류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한 사람이 참사람
그러면 참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참사람은 단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점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점령하게 되면 절대자는 못 되지만 상대적 절대자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남자 하나님은 못 되어도 여자 하나님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웃음)
하나님이 절대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자신도 별수 있어요? 아무리 높다 해도 혼자서 재미있겠어요? 혼자서는 재미없는 거라구요. 천하를 다 가졌다 한들 혼자 '허허' 웃는 다면 그걸 정상적이라고 하겠어요? 하나님이 어떻다고 그러겠어요? 돌았다고 하겠어요, 미쳤다고 하겠어요? 돌았거나 미쳤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돌긴 돌고 미치긴 미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일등 가는 대통령이 방에 혼자 앉아 가지고 아무도 없는데 웃는다면 뭐라고 해요? 돌았다고 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치만 요만한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보고 히히한다면 안 돈 것입니다. 상대가 있으면 무한한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상대가 없으면 아무런 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상대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상대가 누구냐 하면 인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그저 보기만 하겠다는 것이냐? 보고 뭘 하자는 것이냐?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살면 어떻게 사느냐? 싸우며 살자는 것이냐?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나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참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역사 이래 하나님을 완전히 점령한 사람입니다. 공자, 석가, 예수님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을 점령하려고 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점령은 못했습니다. 내용을 발표하려고는 했지만 실천은 못했습니다. 실천을 해서 '이렇다' 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게 되면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만 완전히 점령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을 점령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속에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 완전히 점령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인정과 천정을 자기 일신에서 결속시켜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끼리 참된 사람이라고 판정한 그 사람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을 점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그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참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통일교인들은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위인이 될 것이냐, 성인이 될 것이냐 하게 될 때, 여러분, 성인이 될래요, 위인이 될래요? 「성인이요」 그럼 예수님이 뜻을 이루었어요, 못 이루었어요? 공자가 뜻을 이루었어요, 못 이루었어요? 석가가 뜻을 이루었어요, 못 이루었어요? 모두다 이렇게 된다고 소망을 걸었지만 다 못 이루었다 이겁니다. 이들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 그 종착점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결해야 되는데 그런 자리를 찾았느냐 하면 못 찾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찾기 위해 2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보다도 못해야 되는 거예요, 나아야 되는 거예요? 만일 예수님이 밀알을 심고 그 거두어지는 밀알을 바라보며 너는 나보다 못생겨서 됐다고 했다면 그 예수님도 망해야 된다 이겁니다. 찌꺼기 밀알 하나를 뿌렸어도 거두게 될 때는 완전한 결실로서 거두기를 바라는 것이 밀알을 뿌린 사람의 소원이 아니겠느냐?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세계적으로 번창시켜 놨으면, 기독교를 통해서 되어지는 그 결과인 사람들이 예수보다 못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대한민국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또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를 내 나라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될 때, 이는 예수님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간단하다는 겁니다.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통해서 로마를 향해 뜻을 이루기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죽어갔습니다. 지금 세계는 하나의 무대가 되어 민주세계의 생활권내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좋다는 내용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세계는 한품에 안길 수 있는 시대상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세계를 품고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색 인종을 초월하고 모든 국경과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초윌하여 새로운 문화세계 창건, 다시 말하면 현재 발전하고 있는 과정적인 문화뿐만 아니라 최고의 문화, 결과적인 문화를 바라보면서 하늘땅이 화합할 수 있는 하나의 최고의 기준을 중심삼고 현재의 생활무대에서 그러한 이론적인 환경을 감미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먼 거리에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생활권내에서 직접 나와 동반하시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인정이자 천정이요 천정이자 인정으로, 종적 관계가 아니라 횡적인 관계에서 대등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갖고 살게 될 때, 비로소 여기에서 참된 인간이 결정되는 것이요, 참된 인간을 중심 삼고 가정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종적 관계는 격위로 볼 때 상하 관계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잘나기를 바랍니까, 못나기를 바랍니까? 대답해 보세요. 진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들이 자기보다 잘난 것을 기분 나빠합니까, 자기 아들이 자기보다도 잘나기를 바랍니까? 「잘나기를 바랍니다」 잘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나이 많고 못생긴 아저씨가 아들을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 아들이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고 아버지와 비슷비슷한데 '그녀석 잘생겼구만, 아버지보다 백만 배 이상 잘생겼구만' 하고 말한다면 그 아버지는 괜히 좋아한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아들보다 백만 분의 일만큼 못생겼다는 말이 아니예요? 그래도 그 아버지는 좋아 하거든요. 그 아들이 누구를 닮았겠어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의 아버지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인간 대해서 '하나님보다 잘생겼구만' 하면 하나님이 기분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웃음) 나쁘다면 하나님은 인간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만 못해요. (웃음) 틀림없이 하나님도 좋아하실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잘나고 싶어요, 못나고 싶어요? 대답해 보세요. 「잘나고 싶어요」(웃음) 너무 그러면 실례가 되지요. 미안하지만 잘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옛날 동양에서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아버지한테 문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내가 아버지 한번 되어 보고, 아버지가 나와 같이 한번 되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위에 있고 나는 언제나 아래에 있으란 말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상하관계가 좋긴 좋지만 언제나 그러면 싫다는 겁니다. 자기도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때가 있으면 괜찮지만 말이에요. 언제나 아버지는 윗 자리, 아들은 아랫 자리이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안 들어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부자의 관계는 격위에 있어서 상하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자리 나 한번 주소. 아버지 자리에 한번 가 보고 싶소' 할 때, '야 이놈아, 안 된다' 하면 거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그것까지 염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을 것이냐 하는 것이 하나님편에서 볼 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으려고 했느냐 하면 격위에 있어서는 상하관계이지만 사는 데 있어서는 전후 관계요, 내외관계에 세워 놓으려 하셨습니다. 이런 문제를 추구해 들어가야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곳에 모셔야 할 하나님
그러면 내외관계가 되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셔야 되느냐? 하나님은 무형의 신(神)인데 인간과 어떤 자리에 있어야 되느냐? 언제나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위에만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부자의 관계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제일 귀한 분이십니다. 한 분밖에 없는 귀한 분인데 이 귀한 분을 어디에다 감춰 둬야 되느냐? 보물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을 빼앗기면 세계가 왕창 무너질 만큼의 가치를 가졌다면, 그것을 어디에다 감춰 두면 좋겠어요? 금고에 넣어 놨다고 안심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 스파이 영화 같은 것을 가끔 보게 되면 금고를 파괴하고 그러지요? 그것도 훔쳐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만 빼앗아 가는 날에는 이 세계가 몽땅 왔다갔다하게 된다면 그건 문제없이 훔쳐간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된다면 그걸 자기 지갑에다 넣어 두겠나, 방에 두겠나…. 둘 데가 없어요. 땅에다 파묻어 둬도 또 누가 훔쳐가겠고, 그렇다고 자기 몸뚱이 뼛골 안에 집어넣거나 다리 안에 갖다 넣을 수도 없는 거라구요. 이렇게 되면 잠잘 때 잘라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일 귀한 분이고 제일 좋은 분을 어디에다 건사할 것이냐?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고 내 눈에만 보이면 좋겠다' 요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발견했다면 그건 최고의 발견이예요.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있겠어요?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고 자기 눈에만 보이면 좋겠다는 것은 자기만이 알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어디에다 건사할 것이냐 할 때에, 그 좋고 귀하신 분을 언제나 안고 다니고 싶고 갖고 다니고 싶지 떼어 두고 다니고 싶어요? 우리 아주머니들도 할수없어서 아기를 떼어 놓고 다니지, 마음은 늘 안고 다니고 싶지요? 사람들이 없으면 항상 볼에다 입을 대고 다니고 싶은 거라구요. 떼어 놓기 싫은 거라구요.
하물며 그렇게 귀한 하나님을 저 하늘 꼭대기에 모셔 놓고 보면 그거 좋겠어요? 싫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 몸뚱이에 지니고 다니고 싶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어디에 모시고 싶으냐 할 때,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나만이 알 수 있는 장소에 모시고 싶다 이겁니다. 그런 장소가 내 마음과 몸뚱이 가운데 있느냐 할 때,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한복판에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빼앗아 가겠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보이기를 잘했어요, 안 보이기를 잘했어요? (웃음) 안 보이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인다면 '저기에도 들어가 있구만, 아이구 저기도…' 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거라구요. 안 보이니까 가치가 있는 거라구요. 나만이 아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그걸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래부터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안 보이기를 잘했어요, 못했어요? (웃음) 안 보이길 잘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하나님이 보이는 분으로 계신다면 어떻겠어요? 매일 도둑이 침범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미국과 소련이 땅덩어리 가지고 죽기 살기로 겨루고 있는데, 천지를 창조한 분이 떡 버티고 있다면 그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원자포 싸움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나님이 보였다가는 큰일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못했어요, 잘했어요? 하나님은 그런 것을 다 알았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하고는 상하관계에 있지만 내외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어요? 나를 죽여도 못 빼앗아 갑니다. 죽여도 마음은 남는 거라구요.
나이가 많은 80세 영감님도 그 마음은 16세의 젊은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장로도 그렇지요? 「예」 머리가 허옇게 된 노인들도 장가가게 된다면 열 다섯 살 처녀한테 장가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웃음) 그런 겁니다. 싫을 게 뭐예요? 마음은 다 그런 거지. 마음은 늙지 않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영영 청년이요, 영영 사춘기요, 영영 봄동산이요, 영영 희망에 벅찰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 있다 이겁니다.
마음은 큽니다. 마음은 대한민국을 잘살게 해주더라도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 인류를 잘살게 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세계 인류를 잘살게 해주더라도 영계에 가면 옛날에 못살았던 사람까지도 잘살게 해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터가 되려면 박자가 맞아야지요. 종도 종 노릇을 해먹으려면 눈치 코치가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런 박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하나님을 보려고 생각도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참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나만이 하나님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됐지요? 속삭일 수 있는 길은 있다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렇지.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 맛은 꿀맛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사람과 천국 건설
여러분, 벌은 꿀맛만 보게 되면 말예요. 겨울에는 벌들이 잘해야 설탕물만 먹거든요. 그런데 해동기가 지나고 봄날에 꿀맛을 보게 되면 아무리 꽁무니를 잡아당겨도 안 떨어집니다. 곤충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죽자 사자 하는 판국에 누가 목을 잘라 간들 그거 알겠어요? 그런 멋진 길이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데는 셋이 아니고 단 둘이지요?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마음에 계시고, 나와는 내외관계라는 겁니다. 우리 몸뚱이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조상 아담 해와는 어떤 사람이냐? 몸뚱이를 쓴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몸뚱이를 쓴 하나님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인 주인과 외적 주인 둘이 서로서로가 만사 일치되어 우주의 평화의 기준이 되고, 행복의 절대 안정기준이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부터 천하의 행복을 전부다 저울질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 조상이 타락해서 그렇지 타락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우리 인간 조상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이요, 하나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 천지를 창조하신 대주재로서, 실체를 쓴 하나님과 내적 하나님이 하나되어 서로서로 사랑하고 뜻이 일치한 자리에서 생활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마음의 세계로 돌아가는 겁니다.
죽는 것이 뭐냐 하면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우리가 제한받는 세계가 아니라 무한한 활동무대를 상속받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체(體)를 벗는 때가 죽는 때입니다. 요것만 죽지 않는다면 죽음의 공포는 문제없이 초월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이 되어야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자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지금까지 도주 가운데 여자가 있었어요? 없었지요? 그거 안 되는 거라구요. 앞으로는 도주 중에 여자 도주도 나와야 됩니다. 남자 도주와 여자 도주가 나와서 서로 자기가 높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되어 가지고 도주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이상세계요, 천하가 행복의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출발의 기원이 된다는 것만 알라구요. 알겠어요?
통일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 않습니다. 외짝이기 때문에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하면 거짓 부모를 가진 것이지요? 그렇지요? 여러분은 실수한 거짓 부모의 핏줄을 받고 태어났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올바로 되려면 참된 부모가 와서 다시 낳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참부모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혼자예요, 둘이에요? 「둘입니다」
이런 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기독교인들도 할 수 없어요.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보다 가치 있는 길, 보다 이익이 되는 길이 있다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누가 가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스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몰라서 그렇지 알게 되면 가라 말라 하지 않아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도 지금까지 50이 넘도록 이 놀음을 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누가 가라고 해서 가나요? 안가면 안 되기 때문에 가지요.
여러분도 알겠지만 참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가지고 하나님과 내외관계를 세워 안팎이 하나된 그런 자리에 선 사람입니다. '당신이자 나요, 나자 당신이다' 둘이 하나되게 될 때는 부부일심이라고 하지요? 내외일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위기대가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결정적 입장인 것입니다.
인륜과 천륜, 인정과 천정으로 결속된 참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땅위에 가정이 조성되게 될 때 참된 가정이 나오고, 그 참된 가정으로 말미암아 참된 종족, 참된 민족, 참된 국가, 참된 세계가 나오지요? 참된 개인만 나와 가지고는 절대 안 됩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부다 자기 혼자만 믿고 천당 가겠다고 생각하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으로 오는 거라구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거라구요. 예수님도 참된 가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낙원에 가있어요. 천국 못 들어갔다는 거예요.
본래 인간이 이와 같은 자리에 있어서 선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그냥 그대로 가정 전체가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지, 아버지는 지옥 가고, 어머니는 천국 가고, 아들은 지옥 가고, 딸은 천국 가면 그것이 무슨 천국이에요? 천국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냐 하면, 이렇게 솔가(率家)해 가지고 가정뿐만 아니라 법도에 일치될 수 있는 민족과 국가 전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 그런 나라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 나라도 아직 천국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천국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된 참된 사람들로 이룬 가정으로 말미암아 종족 편성, 민족 편성, 세계 편성을 해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천국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천국을 만들어야만 저나라의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비로소 역사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우월한 입장에 서서 승리의 권한을 세워 가지고 하늘 앞에, 온 인류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들이 찾아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게 될 때, 그 귀착점은 오로지 아버지와 저희가 상면하는 자리가 되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이 말할 수 있고 저희가 말할 수 있는 최후의 결정적인 말이 무엇이냐 하게 될 때 그것은 '너는 내 아들이다, 나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는 말일 것이옵니다. 그것만이 인류가 바라는 소원의 말이요, 당신이 찾아오신 인류를 만나기 위한 결정적인 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과 딸로서 상봉하는 것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아들과 딸은 당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서 바꿔칠 수 있어 가지고, 그 내연적인 소원이 저희에게 나타나고, 저희에게 나타난 한 개인의 욕구가 한 가정에 나타나고, 가정의 욕구가 사회와 국가를 넘고 세계 만민을 넘어서서, 그것이 아버지의 진정한 내정적인 체휼의 감정이 되어 보편타당한 세계적인 기준까지 넘쳐 흐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세계가 당신이 찾아오는 소망의 세계요, 인간들이 찾아가는 단 하나의 세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과연 이런 길을 찾는 무리가 있는 지 저희들은 찾아 보아야 되겠습니다. 알아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모든 성인들이 가르치신 그 도리의 기원을 파헤쳐 가지고 저희 자체에 있어서는 얼마만한 가치로 하늘의 가치를 찾아야 되며, 하늘과 저희들이 어떠한 대등한 위치에 서야 되느냐 하는 것을 분석하고 비판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결정적인 자리에 서 가지고 만민과 만세계와 새로운 사조 앞에 나타나서 이들을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참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참의 모습이란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현실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수 있는, 그 누구도 이것을 점령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타락한 인간도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이요, 부부의 인연을 따라 사는 것이요, 자녀로 말미암아 미래의 소원을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가정 제도는 타락한 세계의 심정을 결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되고, 인륜과 인정의 기반이 되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륜과 인륜, 천정과 인정이 결속되려면 성인들이 찾아 나가던 표준을 오늘의 인륜과 결속시킬 수 있는 승리적인 하나의 가정제도를 이 땅 위에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보게 될 때에 남자된 자와 여자된 자는 과거와 같은 그런 남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저희 자신을 입증할 수 있고, 저희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신념 뿐만 아니라 체휼적인 자리에서 아버지와 나는 전후관계, 좌우관계에 있음을 입증하고 그런 입장에서 영원히 같이 있었고, 영원히 같이 살고 있고, 영원히 같이 살 것이라는, 변함없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논증의 기원을 스스로 세울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참된 길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아버님이여, 이제 누구보다도 귀한 당신을 저희 마음 가운데 모셔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음의 자리에 절대자이신 아버지를 모셔 가지고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상응적인 입장에서 주체적인 아버지와 더불어 상대적인 나 자체의 무한한 가치의 입체성을 발견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있다 할진대,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그 악한 권내에서 무한한 가치를 배가시킬 수 있는 역사 창조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나가는 다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요, 그는 사망의 물결이 충만된 이 땅 위에 있어서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요 행복을 위한 사람인 것을 저희들은 알게 되옵니다.
통일교회 무리들은 이와 같은 길을 가야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수난의 길이요 핍박의 길이요 외로운 길이었지만, 그 핍박과 외로움이 엇갈리는 교차로에서는 그때마다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은 뚜렷했습니다. 인간들이 가져야 할 가치의 인연을 심어 놓는 데는 자기의 행로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뻗쳐 교차되는 그 길까지 흘러 넘어갈 수 있는 선의 인연을 남기기 위해서 사방으로 몸부림쳐 나온 통일교회의 역사적인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비참하였지만 그 가운데 남이 모르는 감사의 심정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준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그런 자리에서 뿌리를 박고 연마하여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 벅찬 희망과 더불어 아시아를 바라보며 세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애국자의 심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당신의 사랑을 중심삼은 아버님의 가정과 아버님의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고 살겠다는 천정을 따라서 충신의 도리를 배우려고 하고, 천정을 따라서 효성의 도리를 배우려고 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를 찾아 나가는 이들의 가는 길 앞에 축복의 손길이 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그 생활에 있어서 가중된 가치는 오늘날 평면적인 세계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의 어떤 가치보다도 비할 데 없는 고차원적인 내용임을 알고 나가는 이들 위에, 당신의 긍휼과 사랑이 더더욱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이 악한 세상을 끌고 가야 할 주체적인 힘은 보다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외로울 때도 아버지의 힘과 능력을 대신하여 우리는 외로워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아오니, 저희들이 이 세상 앞에 영향을 끼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이 마포 지구에 참석한 당신의 어린 자녀들, 오늘 저녁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이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시옵고, 그 누구도 추구할 수 없는 최고의 차원에서 제정된 원칙적인 가치를 지니는 새로운 존재들,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로 결정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도 분립시킬 수 없는 세계를 중심삼고 엉클어질 수 있는 가정이 되고,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고, 세계 인류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누구 보다도 강하게 느낀 무리가 오늘 이 시대의 통일의 무리들이옵니다.
과거에 원수였던 일본 사람들도 식구의 이름을 갖게 될 때는 형제가 되는 것이요, 수많은 색깔이 다른 인종들도 식구라는 이름을 중심삼고 어느 민족 가운데서도 찾지 못하고 찾을 수도 없는 형제의 우애를 갖고 살 수 있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오늘 이 땅 위에서 기반을 잡고 실천적 단계를 향하여 돌진하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긍휼히 보셔서 여기에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중시키시어 내일의 승리의 판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졸장부가 되지 말고 승리자의 모습을 갖춰, 강하고 담대하게 직행하고 전진하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날의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맡기오니 남아진 시간도 친히 당신의 뜻가운데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