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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4399(1942)년 11월 19일 만주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서 일본경찰이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사건을 날조, 교주 이하 간부 모두를 검거하여 박해를 가한 사건을 임오교변이라 한다.대종교에서는 1920년 9월에 있었던 청산리전투를 고비로 무력투쟁의 방법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시교활동에 주력하는 방법으로 전환하여, 외견상으로 평온한 듯한 양상을 띠었다. 항일정신으로 교세를 확장해 오던 대종교가 1934년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기고, 특히 1937년부터는 발해고궁유지(渤海古宮遺址)에 천진전(天眞殿)의 건립을 추진하는 한편,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설립하여 초·중등부를 운영하는 등 교세 확장에 큰 진전을 보였다. 일본경찰은 점점 감시를 엄하게 하며, 교단 내부에 교인을 가장한 밀정 조병현(趙秉炫, 당시 약 50세)을 잠입시켜 교계의 동향과 교내 간부들의 언행을 일일이 정탐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경성(京城) 조선어학회에 계시는 이극로(李克魯)가 천진전 건립 관계로 교주인 단애종사(檀崖宗師)께 보낸 편지 속에〈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가 있었다.
일본경찰은 이를 압수하여 사진을 찍어두고, 제목을〈조선독립선언서〉라고 바꾸고, 그 내용 중에 "일어나라 움직이라"를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일역(日譯)하였다. 그리고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단군 문화를 다시 발전시킨다는 기치 아래,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만큼 조선독립이 최후의 목적이다."라는 죄목으로 국내에서의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와 때를 같이하여 교주 단애종사 이하 25명(그중 1명은 다음해 4월 검거)을 일제히 검거하였다.이때 투옥된 간부 중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鐵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囿) 10명이 고문으로 옥사하였고, 그 밖의 간부는 교주인 단애의 무기형을 비롯하여 15년에서 7년까지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8·15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이때 옥사한 10명을 순교십현(殉敎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한다. <김정신>
'영당'은 선종사(先宗師) 즉, 홍암대종사, 무원종사, 백포종사, 단애종사의 초상을 모신 자리며, '감실'은 임오(순교) 10현의 초상과 위패를 모신 곳을 말한다.
김서종(金書鍾, 1893~1943)
호는 설도(雪島). 경남 함안 출생. 1915년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한 후 대종교 신자가 되었으며, 양원(養源)여학교에서 3년간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6년 참교(參敎)가 되어 8월 15일에 교조 나철(羅喆)이 구월산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항의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할 때 입회하였다. 40세 때 만주로 들어가 빈강성(濱江省) 오상현(五常縣)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하얼빈[哈爾濱]에 북만농구공사(北滿農具公司)를 창립하고 사업가로서 활약함으로써 동포들의 어려운 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대종교 포교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상교(尙敎)로 승진된 후 선도회(宣道會) 총무, 경의원 참의(經議院參議), 총본사 전강(總本司典講) 등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1942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문을 받고 이듬해 8월 옥사하였다. 정교(正敎)로 추승(追陞)되고 대형호(大兄號)가 추증되었다.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재유(李在囿,1878∼1945) 대형.
대종교의 중진·순교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백람(白嵐).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고향에서 10년 동안 사숙교원(私塾敎員)으로 근무하였다.191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하여 3년 동안 활약하였다.1921년 대종교를 신봉하여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로 승질되면서 북일도시교원(北一道施敎員)·경의원참의(經議院參議) 등을 역임하였고, 특히 교적간행회(敎籍刊行會)와 천전건축주비회(天殿建築籌備會) 일에 헌신하였다.1942년 11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영안현서(寧安縣署)에 수감되었다가 액하감옥(掖河監獄)으로 이송, 1년반 만에 5년형을 언도받고 병보석 되었다. 그러나 다시 길림성 감옥에 수감되어 복역 중 1945년 2월 순교하였다.그 뒤 교단에 대한 생전의 공적이 추앙되어 1946년 8월 정교(正敎)로 추승되었고, 동시에 대형호(大兄號)가 추증되었다.
일도 나정문(羅正紋, 1891∼1944).
대종교의 중진·순교자. 호는 일도(一島). 본관은 나주. 전남 벌교 출신. 대종교 초대 도서교인 나철의 둘째 아들이다.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였고, 19세 때 서울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원산농공은행(元山農工銀行)에서 2년, 성진척식은행(城津拓殖銀行)에서 6년간 근무하였다.1909년 1월 대종교가 처음 조직될 때 입교한 이후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로 승진되면서 총본사에서 중책을 맡았으며, 특히 교적간행회(敎籍刊行會) 총무와, 천전건축주비회(天殿建築籌備會)의 발기인으로서 많은 공적을 쌓았다.1942년 11월 만주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영안현서(寧安縣署)를 거쳐 목단강경무처(牧丹江警務處)에 구금된 지 15개월 만에 병보석 되었으나, 출감 3일 뒤에 죽었다.그 뒤 종단에서는 생전의 공로를 기려 1946년 8월 정교(正敎)로 추승함과 동시에 대형호(大兄號)를 추증하였다. 독립유공자로서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염재 나정련(羅正練, 1882∼1943)
대종교의 중진·순교자. 본관은 나주. 호는 염재(念齋). 전남 벌교 출신.
초대 도사교인 나철의 장남이며, 임오교변(壬午敎變)때 같이 순교한 나정문(羅正紋)의 친형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수업하였고, 가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 1월 대종교가 처음 조직될 때 곧 입교하였으며, 1914년 만주의 연길현 의란구(延吉縣依蘭溝)에 이주하여 1922년 밀산현 당벽진(密山縣當壁鎭)으로 이주할 때까지 8년 동안 구룡학교(九龍學校) 교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독립정신과 민족혼을 고취하는 한편 계몽·교육사업에도 힘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기밀참모로서 군자금조달·군량미보급·의병모집 등에 헌신하였다.1922년 당벽진으로 이주한 뒤로는 시교원(施敎員)으로서 일반교인들을 인도하는 일에 힘써 근 20년 동안 교세확장에 진력하였다.1941년 총본사가 있는 영안현 동경성(寧安縣東京城)으로 이주하여 경의원참의(經議院參議) 등 총본사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던 중 1942년 11월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 영안현서를 거쳐 액하감옥(掖河監獄)에 구금된 지 9개월 만인 1943년 8월 옥중에서 순교하였다.그 뒤 종단에서는 생전의 공적을 기려 1946년 8월 상교(尙敎)에서 정교(正敎)로 추승(追陞)함과 동시에 대형호(大兄號)를 추증하였다. 독립유공자로서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구금고황(拘禁苦況)
단암 이용태
임오교변(壬午敎變)은 처음에 만주(滿洲) 영안현(寧安縣) 특무과(特務科)에서 기안(起案)되었으므로 만선각지(滿鮮各地)에서 한때에 검거된 교형제(敎兄弟) 20여인이 영안현(寧安縣) 공서(公署)의 구내(構內)에 특설(特設)한 구류소(拘留所)로 함께 모이는데 적정(敵偵) 조병현(趙秉炫)이 일일이 간증(看證)하였다. 구류소의 구조(構造)는 한 채 5칸의 토옥(土獄)인데 좌우로는 두텁게 벽돌담이 높게 쌓였고 앞뒤에 이중(二重)으로 토벽(土壁)과 목책(木柵)을 세웠다. 칸마다 목책으로 막은 복판에는 허리를 굽히어 출입하는 문이 있으나 낮·밤 할 것 없이 굵은 자물쇠를 채우고 그 곁에 밥을 받는 작은 창구(窓口)가 있다. 그 실내(室內)에 길고 높은 연돌(煙突)을 놓아서 갈자리[蘆席] 한 잎을 펴고 그 전변(前邊)에는 두터운 널을 칸에 맞도록 두었으니 제물에 걸상이 되고 목침(木枕) 노릇도 한다. 연돌 앞에는 넓이가 평반(坪半)쯤 되는 바닥에 벽돌을 세워 깔았으며 한편에 오줌 누는 양철통을 두었다. 뒷벽 위로 복판에는 작은 철창(鐵窓)이 있고 천장에 전등을 장치하였다. 한방에 네 사람씩 이름지어 있게 하고 한노(悍奴) 8명-모두 왜놈-이 번갈아 들면서 몽둥이와 죽편(竹鞭)을 끌고 문밖에 오락가락 잔학무도(殘虐無道)한 저희들 소위 감방규칙(監房規則)을 우리에게 실행하려고 그야말로 불면불휴(不眠不休)코 최후발악(最後發惡)을 다 하였다. 그 당시 소조(所措)를 대강 적어본다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벙어리가 되어 말이 없어야 하며 또 어기어기 돌아앉아 서로 낯을 못 대하고, 누울 대는 얼기설기 머리와 발을 맞춘다. 앉으면 앉은 대로 해를 보내고, 누우면 누운 대로 밤을 지낸다. 밤 열시 잘 때던지 아침 일곱 시 일어날 때에 한번 호령이 떨어지면 3분시 이내에 모두 정돈되어야 한다. 이불과 요는 사람마다 따로 있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제자리에 걷어 두고 아무리 추워도 이불을 몸에 두르거나 요로 무릎을 덮지 못한다. 연돌(煙突)은 하루 한 번씩 불을 때는데 땔 때마다 쥐구멍으로 연기가 너무 많이 피어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또 구들은 더울 때보다 추울 때가 많다. 하루 두 끼씩 먹는 조밥은 끼마다 작은 공기로 수북하게 한 공기씩인데 돌이 많고 또 채탕(菜湯)이 한 공기씩이고 혹 소금만 주기도 하고, 그도 없을 때가 있으며 한 끼에 숭늉 한 공기씩 마신다. 돈 있는 사람들은 소위 사식(私食)을 받아 흰밥에 고기반찬을 한자리에 따로 먹는다. 이것을 볼 때에 인류(人類) 진화(進化)를 꾀하려면 반드시 사회혁명(社會革命)을 먼저 할 것이라 하였다. 또 각수(各囚) 본가(本家)에서 병과(餠果)·어육(魚肉)·혜장 등 식물을 자주 차입(差入)하지만 본인(本人)은 겨우 맛이나 볼 정도이었다. 날마다 조기(早起)시에 수십 분 동안의 실내체조(室內體操)와 오후 한두 시간씩 꿇어앉아 명상[冥想-회개(悔改)한다는 의미]함은 비록 심신수련(心身修練)의 중요한 과제라고는 하나 기한(飢寒)과 질병(疾病)에 시달린 노쇠자(老衰者)로는 도리어 고역(苦役)될 뿐이다. 매일 점심때에 한 번씩 변소 출입이 있는데 반드시 긴 밧줄로 왼팔을 단단히 묶고 일노(一奴)가 두 사람을 끌고 윤차(輪次) 왕래하며 각실(各室)의 오줌통은 제가끔 청소한다. 일주간에 한번이나 낯을 씻게 하되 3·4인이 한 통물에 같이 씻게 하고 혹 눈[雪]도 퍼다 준다. 이상에 적은 것이 곧 죄수(罪囚)로서 지킬 감방규칙이오 날로 되풀이하는 일상행사(日常行事)이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위규범칙(違規犯則)만 하게 되어 갖은 악형(惡刑)을 돌려 받아 규통(叫痛)하는 소리가 밤낮 끊일 새 없었다. 간수(看守)하는 왜노(倭奴)에게 악형(惡刑)을 받는 것이 몸에 고통보다 마음에 치욕(恥辱)됨을 깊이 깨닫는 우리가 어찌하여 그 치욕을 날마다 받게 되는가? 그 수형(受刑)하는 벌목(罰目) 몇 가지를 들면 1.체조할 때 동작을 왜 남과 같이 못하느냐? 2.밥 먹을 때 밥과 국을 왜 남을 주느냐? 또 왜 받아먹느냐? 3.앉았을 때에 왜 졸고 코를 고느냐? 왜 머리를 돌리어 서로 웃느냐? 왜 서로 눈을 흘기느냐? 4.명상(冥想) 할 때에 두 무릎을 바로 꿇어야 할 것인데 왜 한 다리를 뻗었느냐? 5.잠을 잘 때에 왜 몸부림을 치느냐? 왜 잠꼬대를 하느냐? 6.설사(泄瀉)할 때에 왜 바지에나 오줌통에 똥을 싸느냐? 하는 등등인데 하나도 고의범(故意犯)으로 볼 것은 아니다. 이제 제6항만을 설명하여 보자. 실내 온도가 항상 체온(體溫)을 보유(保有)할 수 없고 음식의 질(質)과 양(量)이 또한 장위(腸胃)를 조양(調養)치 못하니 복통(腹痛)하고 설사(泄瀉)함은 생리상(生理上)으로 누구나 면치 못할 환증(患症)이거늘 이것을 이해치 않는 간수놈들은 이미 규칙된 시간외에 아무리 애걸(哀乞)하여도 변소출입을 불허하니 그래 인간적(人間的)으로 이 범과(犯科)를 능히 피할 사람이 있을까? 온몸에 땀이 날만큼 참다가 똥을 싼 사람을 다시 기진력진(氣盡力盡)하도록 무수히 난타(亂打)하고는 2·3일씩 밥을 굶긴다. 이것은 그놈들이 조선인(朝鮮人) 사상자(思想者)라면 그저 때려 보자 죽여 보자는 것밖에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소위 제일심(第一審)의 취조가 끝나는 넉 달동안이며 그 동안에 날마다 2·3인 내지 4·5인씩의 개별로 최조할 때에 고문(拷問)하는 각종각양(各種各樣)의 악형은 전부 다 기록할 수 없거니와 우리 일행(一行) 중에 장로(長老)이신 아현대형(亞峴大兄-權寧濬)은 당년 72세로서 체력(體力)이 강왕(康旺)하고 기백(氣魄)이 강의(剛毅)하여 취조(取調)중 불굴(不屈)은 일반이 예측하든 바 몇 날 동안 취조 끝에 감시노(監視奴)가 취조자(取調者)의 지시에 의하여 혹독한 벌을 특시(特施)하되 대형(大兄)을 감방(監房) 공간(空間)에 "차렷"자세로 서게 하고 백묵으로써 두발 밖에 금을 그어 가로대 "일주간을 꼭 이대로 서서 지내야 한다. 만일 요동(搖動)을 하던지 함부로 앉거나 누우면 곧 타살(打殺)하리라"하고 왜노(倭奴) 두 놈이 번갈아 감시하더니 약 2주야부터는 다리가 자연 떨리고 발이 조금 옮기게 되매 곤봉(棍棒)으로 난타(亂打)하여 유혈(流血)이 임리하고 골절(骨節)맞는 소리가 감방(監房)의 공기(空氣)를 밤낮 긴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형(大兄)은 간혹 "이놈들이 참으로 사람을 죽이려한다"는 말씀뿐이었다. 그렇게 5주야가 되자 정말 기력이 쇠진(衰盡)하여 자연 혼도(昏倒)하는지라 두 놈이 번갈아 밤새도록 난타(亂打)하는데 대형은 정신을 차려 자진(自盡)을 꾀하되 그 두골(頭骨)을 목책(木柵)에 타쇄(打碎)코저 하더니 체번(遞番)한 다른 놈이 특무과(特務科)에 고급(告急)하여 의사를 보내 진찰하고 해벌(解罰) 구명(救命)되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며 대강 적는 오늘에도 몸에 소름이 끼치고 붓대가 떨리거늘 하물며 목도(目睹) 체험(體驗)하던 그 당시에 우리의 심경이 어떠하였을까? 졸렬(拙劣)한 붓으로써 구금(拘禁)중 모든 고황(苦況)을 역력히 상술(上述)치 못하나 다만 이 몇 줄 글월로도 혹시 십현(十賢)의 최후(最後) 참경(慘景)을 상상(想像)할 수 있을는지요. 이 설움과 이 분통을 뼈에 새겨야 할 우리 형제 자매들이시여! 자손만대에 다시는 이런 치욕이 없도록 민족 또 국가사업에 분투수성(奮鬪輸誠)하기를 심원혈축(心願血祝)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