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길다. 마당 끝에 서 있는 키다리꽃을 끈으로 묶어 비바람을 견디게 해 주었다. 귀향한 첫해 친정집 마당에 자라던 키다리꽃 모종을 가져와 언덕에 심었다. 어린 시절 노랑꽃이라 부르던 키다리꽃은 오래전에 귀화한 식물이라, 토착 식물처럼 정이 가는 꽃이다.
키다리 꽃은 무더운 여름, 우리 집 뒤란에 풍성하게 피던 꽃이다. 지금도 흑백사진처럼 명징하게 남아 있는, 그 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 노란 꽃을 보려고 부엌을 생쥐처럼 들락거렸다.
그 꽃이 정감이 가는 건 부모님이 그 꽃을 심고 온 식구가 함께 보았던 동질감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그리움을 삼키는 날이면 유년에 보았던 꽃들이 스크린 처럼 지나간다.
정지라 부르던 제법 큰 공간에는 땔감 나무를 쟁여 놓았던 자리, 반질거리던흰 국솥, 검은 밥솥 위 작은 선반 위에는 흰 사발이 등잔처럼 앉아 있었다. 그 정갈한 사발 안에는 새벽에 길어온 맑은 정안수가 담겨 있었다. 성스럽기까지 하던 그 자리는 엄마가 두 손을 모으던 기도처였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고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던 엄마는, 키다리 여린 순이 적당히 자라면 나물무침을 했다. 향긋하고, 고소하고, 아삭한 맛은 세월 저 너머의 설강과 정지 칸에서 환상처럼 입맛을 다시게 했다.
오랜 세월 도시에 사는 동안 볼 수 없었던 그 꽃이 60여 년을 떠났다 돌아온 고향 곳곳에 꽃을 피우고 있는 게 신통하다. 부모형제는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첫 기억의 꽃이 나를 반기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
기록적인 비가 쏟아지고 곳곳에서 수해 소식이 들려오는 안개가 자욱한 날이다. 산사태가 집을 덮치고 사람이 수몰되고, 가축과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고 아수라장이다. 수해를 당한 어느 집 마당에 키다리꽃이 화면 속에서 흔들리며 서 있다.
내가 사는 삼봉산은 안개에 갇혀 이웃집의 형체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키다리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건재하다.
꽃을 자세히 살펴보니 꽃망울 안에 무수히 많은 꽃잎이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망울들은 알 수 없는 비밀을 꽁꽁 감싸 안은 채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자 하는 자세다.
잎이 삼잎을 닮았다고 해서 ‘겹삼잎국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루드베키아 라치니아타’라는 학명을 가지고 있다.
긴 장마와 폭우가 지나니 불볕더위에 가까운 날씨다. 그런 날도 의연하게 서 있는 키다리 꽃은 장마와 더위도 견뎌야 하는 인내의 꽃이다. 앞을 볼수 없을 정도의 비바람에도 마치 등대처럼 불을 밝히고 서 있는 키다리꽃은 먼 어느 곳을 응시하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폭염과, 폭우, 태풍까지도 견디는 저 꽃을 바라보며, 내가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고 다짐하게 된다.
오래전 우리나라에 찾아와 큰 키를 세우고 서있는 이 고마운 꽃은 북아메리카에서 바다를 건너온 꽃이다. 이꽃을 누가 우리나라에 가져왔을까? 불현듯 전주예수병원 ‘마티 잉골드’ 노랑머리 여선교사의 기사가 떠올랐다.
1897년, 당시 한국은 가난과 질병으로 말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그런 한국인을 위해 의료 선교사를 자원한 이가 있었다. 미국 볼티미어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전주로 온 푸른 눈의 의사 ‘마티 잉골드’ 였다.
전주예수병원 최초의 설립자인 그분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그 선교사는 사랑의 수고를 몸소 실천했던 분이다. 126년전 1898, 11월 3일, 전주성 서문 밖 은송리에 조그마한 초가에 진료소를 세운 후 가난하고 소외된 한국인을 위해 첫 진료를 시작했다. 머나먼 아메리카에서 온 푸른 눈의 ‘마티 잉골드’ 선교사와 키다리 꽃이 겹쳐지는 건, 60년전 아버지가 병환으로 예수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오신 인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그 병원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우리에게 큰 아픔을 주었을 것이다. 어찌 나의 아버지뿐이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뿌린 씨앗으로 인해 많은 열매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때, 그 병원에서 받아온 손바닥만 한 성경이 우리 네 자매를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해 주었고, 엄마도 세상을 떠나실 때 환한 얼굴로 천국의 종소리가 들리신다며 찬송을 부르시다 눈을 감으셨다.
키다리 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30살 처녀의 몸으로 고향을 떠나 노스캐롤나이주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다시 일본 요코하마로, 인천 제물포에서 전주까지 먼 길을 찾아온 노랑머리 선교사!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그분의 사랑처럼, 노랑꽃은 나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다. 몸이 불편하여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28년이라는 세월 동안 환자를 섬기며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그분의 수고와 헌신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키다리 꽃은 꽃씨가 맺히지 않는 꽃이라 뿌리를 소중히 안고 오지 않았을까. 꽃대가 바람에 쓰러져 아예 누워서 고단한 꽃을 피우고 있다.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환자를 돌봐야 했던 마티 잉골드’선교사‘의 기진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언제나 이기적이지않게 저를 도우시고 제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올렸던 그분께, 아직 피지 못한 연두빛 꽃망울로 꽃반지를 만들어 손에 끼워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