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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명장열전■ 6
궁파(弓巴),장보고( 張保皐 )
통일신라에서 해상강국의 꿈을 펼치다
장보고(張保皐)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이다. 그의 생년일과 출생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서남해안의 해도(海島) 출신으로,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 지역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 일본의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은 중국 기록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고, 일본에서는 장보고(張寶高)라고 적고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에는 각각 궁복(弓福)과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출신의 장보고가 어떻게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었고, 또 어떤 경위로 무령군의 소장까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시대 상황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8세기경부터 지방민들의 유민화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들 중 상당수가 당나라로 유입되어 무역상, 유학생들과 함께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다.
그러한 점들을 볼 때 장보고의 당나라행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또한 당나라 지방군에서 높은 직책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장보고의 무예 실력과 용맹함이 남달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보고와 정년(鄭年)은 모두 신라 사람이나, 그들의 고향과 부조(父祖)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모두 싸움을 잘했다. 또한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가면서도 물을 내뿜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좀 미치지 못했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年齡)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모두 당(唐)에 가서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槍)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권 4, 장보고
장보고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828년(흥덕왕 3)에 귀국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미 전부터 당나라에서 해상무역에 관여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특히 신라의 무역상들을 괴롭히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등 활약을 펼쳐 당나라 신라 거주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장보고가 이러한 활약을 펼칠 당시 동북아에서는 신라, 당나라,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발달해 있었다. 이들 삼국의 무역은 애초에 당나라의 조공무역을 기반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9세기에 접어들어 공무역이 쇠퇴하고 사무역이 발달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해상왕 장보고의 등장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다
이미 당나라에서 해상무역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던 장보고는 귀국 후 제일 먼저 청해진을 설치했다. 청해진을 설치한 이유는 신라인들이 해적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신라인들의 안전한 해상무역을 위한 군사기지였다.
당시 신라인을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는 당나라 내부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당나라는 이미 816년(헌덕왕 8)에 일명 신라노(新羅奴)라고 불리는 신라인 노비에 대한 매매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인 해적들을 중심으로 한 노비 매매 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일부 유민들까지 군소 해상 세력을 형성하고 동족을 당나라에 팔아넘기는 중간 상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보고는 이러한 불순한 해상 세력의 활동이 신라, 당나라, 일본 삼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척결을 다짐하고 청해진의 설치를 추진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해 대왕흥덕왕을 뵙고 말하기를, "중국의 어디를 가 보나 우리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고, 해적들이 사람을 약취해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바랍니다." 했다. 청해는 신라 해로(海路)의 요지로 지금 완도(莞島)라 하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청해에 설진(設鎭)하게 하니, 그 후로 해상에서 국인(國人), 신라인을 파는 자가 없었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권 4, 장보고
이 기록만 보면 마치 왕이 군사를 내 주어 청해진을 설치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 청해진의 설치와 운영은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봐야 한다. 청해진은 신라의 기존 군영들과는 그 성격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라는 직책 역시 오직 장보고에게만 쓰였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청해진은 무역선단을 이끌고 입국한 장보고가 본인의 역량으로 해상 기지를 꾸린 후 왕에게 재가를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던 신라 조정이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청해진 설치로 동아시아 지역 해상 권력 구도는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장보고는 우선 건전한 무역 활동을 방해하는 해적들부터 소탕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이미 해적들을 많이 상대했던 터라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의 뛰어난 항해술을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직접 건조한 선박은 우수한 성능과 규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청해진이 설치된 완도는 지리적으로 당나라와 신라, 신라와 일본을 잇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렇게 해적들이 사라진 바다에서 장보고는 거침없이 제해권을 장악해 나갔다. 튼튼한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장보고의 무역선단은 당나라와 일본을 넘나들며 해상 무역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렇게 장보고는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해상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왕위 쟁탈전을 측면에서 지원한 의리의 사나이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의 활약이 커질수록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는 점점 늘어났다. 장보고는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지 세력을 결집해 독자적인 지방 토호 세력으로 성장했다.
한편 당시 신라의 중앙 정계에서는 진골 귀족 간의 왕위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36대 혜공왕(惠恭王) 이후 심화된 왕위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정치력은 약화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수많은 유민들이 나라를 등지고 떠나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권력을 향한 귀족들의 다툼은 더욱 심화되었다.
장보고가 한창 청해진에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836년(흥덕왕 11), 장보고에게 청해진 설치를 허락했던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었다. 그러자 왕실에서는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원래 후계 서열상으로는 흥덕왕의 사촌동생인 상대등 김균정(金均貞)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사촌동생인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김제륭(金悌隆)이 삼촌인 김균정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왕실 종친들은 각각 김균정과 김제륭의 편으로 나뉘어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과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양(金陽)은 김균정의 편, 원성왕의 증손인 김명(金明)은 김제륭의 편에 섰다. 결국 이 싸움에서 김제륭이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희강왕(僖康王)이 되었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김우징은 간신히 몸을 피해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장보고는 귀국 후 흥덕왕(興德王)을 알현할 당시 시중이었던 김우징과 안면이 있었다. 아마도 김우징이 청해진 설치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장보고가 김우징과 그의 식솔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동안 왕실에서는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희강왕(僖康王)이 왕위에 오를 때 한 편이 되어 도움을 주었던 김명이 아찬 이홍(利弘)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희강왕은 난이 일어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명은 838년(민애왕 1)에 왕위에 올라 민애왕(閔哀王)이 되었다.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해로 피신해 있던 김양이 김우징을 찾아왔다. 그는 김우징에게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거사를 해 왕권을 차지하자고 했다.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김우징은 김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장보고에게 군사를 내어 줄 것을 요청했다.
"옛 사람의 말에 의분(義憤)한 일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했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복종하겠다."
이렇게 말하며 장보고는 군사 5천 명을 내 주었다.
이때 장보고는 군사를 이끌고 갈 책임자로 정년을 지목했다. 정년은 장보고의 오랜 친구이자 동생으로, 당나라에서 함께 무령군 소장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사이가 나빠져 신라에 들어온 이후로는 서로 등을 지고 살았다. 정년은 특별한 직업도 없이 굶주리며 살다가 사정이 급해지자 청해진에서 성공한 장보고를 찾아왔다. 장보고는 과거를 묻지 않고 정년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거사를 앞두고는 정년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아니면 화란(禍亂)을 평정치 못한다."
그러고는 그에게 군사를 내 주었다. 이것은 정년에 대한 장보고의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정년은 장보고의 군사들을 이끌고 김양을 총대장군으로 하는 김우징의 반란군에 합류했다. 반란군은 관군과 맞서 승전을 올리며 경주까지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였다. 반란에 성공한 김우징은 839년(신무왕 1) 왕위에 올라 신무왕(神武王)이 되었다. 신무왕은 자신을 지원한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을 내리고 식읍(食邑) 2천 호를 주었다.
장보고 죽음과 함께 사라진 해상강국의 꿈
장보고의 지원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말았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김경응(金慶膺)이 왕위에 올라 문성왕(文聖王)이 되었다. 문성왕 역시 장보고의 공로를 잊지 않고, 그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의 직위를 주었다. 이는 진골 귀족의 지위에 해당했다. 청해진에서 해상권을 장악하며 견고한 세력을 구축한 장보고는 이제 중앙에서도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섰다.
그러나 장보고의 출신 성분과 너무 커져 버린 세력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들여보내는 문제였다. 왕이 이 문제를 의논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의 딸을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부부의 도(道)는 인간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도산(塗山)으로 인해 일어나고, 은나라는 신(㜪)씨로 인해 창성했으며, 주나라는 포사(褒姒)로 인해 망하고, 진나라는 여희(驪姬)로 인해 문란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이에 있으니 어찌 삼갈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해도(海島)의 사람이거늘 어찌 그 딸로 왕실의 배우(配偶)를 삼으려고 하십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 《삼국사기》 권 11, 〈신라본기〉 권 11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했던 장보고의 계획은 이처럼 중앙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신라를 넘어서 당나라와 일본을 넘나들며 막강한 해상왕국을 건설한 천하의 장보고였다. 게다가 지금의 왕은 장보고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 앉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장보고의 출신을 문제 삼아 배척하려 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분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왕과 중앙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장보고를 무시했다기보다는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장보고의 불만이 커질수록 왕과 중앙 귀족들의 불안은 더 커졌다. 장보고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역으로 화를 입게 될까 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이때 염장(閻長)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왕과 중앙 귀족들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염장은 김우징이 민애왕을 치기 위해 일으킨 반란군에 속한 장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장보고를 암살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장보고가 눈엣가시 같았던 문성왕은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자신이 왕을 배신했다며 장보고에게 거짓으로 투항했다. 평소 무장들을 좋아했던 장보고는 아무런 의심 없이 염장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술을 대접했다. 그러다 그만 술에 취했는데, 염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보고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베었다. 846년(문성왕 8),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장보고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장보고의 죽음으로 청해진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신라의 해상 무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염장이 청해진을 장악하려 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어 실패했다. 또한 여전히 불안한 중앙 정치는 남도의 청해진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장보고 때문에 위축되었던 군소 해상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되찾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결국 828년(흥덕왕 3)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시작된 신라의 해상강국의 꿈은 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20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나고 말았다.
장보고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뛰어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거상이자 위대한 무장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장보고가 이룩한 시절만큼 해상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던 적이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패권을 차지한 나라들은 모두 해상강국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보고의 안타까운 죽음과 죽음 이후 누구도 그만한 해상 장악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보고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