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nd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1.
내 인생에 비수를 들이댄 운명에 저항할 힘이 지금의 나에겐 없습니다. 결국 운명에 밀려
가는 나 자신이 밉습니다. 나의 볼을 흘러내리는 이 눈물이 마르면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여행에서 해바라기가 활짝 핀 어느 마을 지날 때 나는 이런 말을 했었
지요. 어떤 어려움도 해바라기처럼 환한 웃음으로 받아들이자고. 당신은 대답했었지요. 나
의 빈터에 당신을 보듯 해바라기를 가득 키울 게라고요.
그 때 그곳에서, 해바라기 한 송이에서 따 반씩 나누었던 꽃씨를 당신에게 돌려보냅니
다. 나는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없을 듯 싶습니다.
사랑했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In twilight so blue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내가 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일부분이다. 그때 나는 장편의 편지를 썼었다.
나는 진정 사랑했다 또한 미안했다.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치의 인생은 또 저물어 가
고 있었다. 나무는 선 자리에 꽃을 피운다. 내가 뿌리박고 선 자리가 그의 땅임을 세월이 흐
른 후에야 알았다. 나는 지금 그를 찾아가고 있는 길이다. 조바심과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조바심은 그가 나를 어떻게 받아줄까 하는 것이었고, 그리움은 그리움의 의미 그대로였다.
그리움은 눈물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Rainbow through the skies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일방적이고도 당돌한 절연.
벌써 오래 된 일이었다.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당혹해 했을 것이다.
그리고 5년. 무모하게도 다시 그리움으로 찾아가는 나를 그는 어떻게 대해 줄까. 2년의 사랑
과 5년의 이별. 나에게도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느린 걸음이었지만 악몽에서 벗어났고 사회
적으로는 작으나마 성취도 했다. 힘들었지만 부족함을 별로 모르고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눈물이 마르면 잊혀지리라 생각
했던 그를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신을 위해 세운 성전도 무너져 내리는 세월 속에서 그는 나
팔꽃 같은 그리움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그리움에 비스듬 기댄 나팔꽃은 말이 없이 그를 향
해 피어 있었다. 잊기 위한 방법으로 공부와 일에 매달렸으나 매번 허사였다.
the lines of the reeds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2. 그 시절, 그와 나는 행복했었다. 사랑에 퐁당, 빠지면 온종일 종종거린다고 했다. 내가
그랬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농활에서였다. 토론이나 계획을 세울 때면 늘 뒤편에서 말
없이 바라보던 그였다. 방관자를 떠올렸던 그. 자신이 맡은 일을 할 때면 열성적인 그의 모
습에서 남다른 모습을 보았지만 그 뿐이었다. 이지적이고 마른 몸매. 다문 입. 그런 그를 다
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농활의 마지막 날 캠프 화이어를 벌렸던 날이었다.
Swimming there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일관되게 침묵을 고수하던 그가 조용히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구도 예측
하지 못한 돌발이었다. 침묵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의 탈출. 새가 멀리서 날
아오르듯이 느린 몸사위에서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잦아들어 잔잔해지기도 하면서
고른 숨을 죽이기도 했다. 계곡 물이 골짜기를 만나고 강에 이르러 침묵하다가 물의 시원인
바다에 이르러 동화되어 버리는 것을 연상하게 해 주었다. 너울너울 타는 불빛 주위를 신들
린 듯, 혼이 빠진 듯한 그의 춤은 막무가내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불을 배경으로 한
그의 춤은, 그의 배면에서 함께 살아 움직이는 묵직한 그림자와 함께 황홀경을 드나들고 있
었다. 나는 전율을 느꼈다. 춤은 지독하게도 영적으로 느껴졌으며 무아, 바로 그 경지였다.
몸을 태워 불길을 생산해 내는 불의 신비한 현상처럼. 농염하기도 하고 유혹적인 불의 체취
에 빠져들 듯 그의 춤에 나는 빠져들었다. 그것은 나만의 열병이 아닌 그 자리에 있던 모두
의 열병이었다. 마른나무를 타는 불 위에 얹으면 화염은 날름거리는 혀로 금새 마른나무를
불 속으로 빨아 들였다. 불의 전이현상. 그 어떤 전염성보다도 빨랐고 고혹적이었다. 그가
내게 그랬다. 자신의 아픔, 아니면 영혼을 태워 춤으로 발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의 춤을 바라보면서 나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그 무엇을 발견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역할이
었던 방관적인 자세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춤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름다움이라
는 낱말을 떠올렸다. 그래, 아름다움. 불길은 땀으로 범벅된 그를 끈질기게 유혹하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춤이 마무리를 지으면서 가쁜 숨을 토해낼 때 숨죽이고 바라보던 모두는 그
의 춤에 박수로 답례를 했다. 환호성도 지를 수 없는 벅찬 감동이었다.
A waterflower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우연은 사람을 미지의 길로 안내해 준다. 그의 춤이 끝나고 다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 그
와 나만이 남았다. 그것은 우연이라고 해야 할 듯 싶었다. 나는 남은 불씨를 그저 뒤적이고
있었다. 그 때 그가 다가온 것이었다. 불을 앞에 두고 함께 있으면서도 그와 나 사이에는 어
떤 교감도 없었다. 굳이 대라면 좀 전의 춤이 매개였을 뿐이었다. 그 만남이 나의 운명의
한 부분을 흔들어 놓았다.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왔지요?
-............
그의 웃음. 말없는 그의 웃음이 나를 흔들었다. 묘한 일이었다. 웃음에 내가 흔들리다
니. 바람이 그의 머리를 흩으러 놓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의 시선은 천천히
어둠이 내린 산으로 옮겨갔다. 시선의 이동은 천천히 움직여 갔다. 분명 천천히. 어둠 가득
한 7부 능선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영화의 느린 화면을 떠올렸다.
-늘 그래요?
-...........
방관자. 그의 행동에서 느껴지던 것을 두고 한말이었다.
-방관자적인 자세. ...... 그것을 견지하려는 듯한 행동 말이예요?
-.............
다시 웃음. 침묵을 동반한 웃음. 다시 나는 흔들렸다.
-연민 때문이지요.
그의 굵고 나직한 저음이 어둠에 묻혀갔다. 어둠에 익숙한 목소리 같았다.
-연민이요?
나는 다소 다급하면서도 건조하게 말했다.
-예, 연민이요.
-무엇에 대한 연민이지요?
나의 목소리는 형사의 다그침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언어에 기인한다고 생각했
다. 그의 대답은 매듭을 짖기보다는 공허하게 한마디 허공에 던지면 그 언어는 이내 의문을
남긴 채 사그라지고, 여운이 남는, 다소 아련하게 느껴지는 긴장의 여진 때문이라고 생각했
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역시 이어질 듯한 그의 언어는 여기서 그치고 말았다.
타다 남은 불씨가 남아 어둠 속에서 도톰한 온기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로 불
을 헤집었다. 속에서 맑은 불빛이 얼굴을 내밀었다. 내밀한 곳에 숨겨진 맑은 불빛이 밖으
로 나오자 재가되고 말았다.
말없이 사그라드는 불빛을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재가되는군요.
혼자말로 읊조리듯 말했다. 나의 응답을 요구한 말은 아닌 듯 싶었다.
Poetry of the reeds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속마음을 말로 표현하고 나면 그만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말듯, 불 속을 헤집어 밖으로 나온
투명한 불빛은 회색이었다가 마지막엔 흰빛의 재로 변해 날렸다. 불길에도 흰빛의 재는 가볍
게 떨며 날렸다. 나비의 날갯짓에도 흔들릴 만큼 가벼웠다.
-선영아. 뭐하니?
희숙이의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얼떨결에 나는 일어나 묵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왔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왜 그렇
게 경망 없이 서둘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의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당당하고 적극적인 나였다. 남자 선배에게도
형, 형하며 때론 남자답기까지 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 나였다. 그의 무엇이 조심스럽고 당황
하게 했을까. 그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없는데. 여성으로서 이렇게 흔들려 본 기억이 없었
다. 나의 마음과 행동은 분명 여성으로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구 무엇이었
다. 그는 분명 남성이었다.
돌아와서 아쉬움을 느꼈다. 그와의 첫 얘기는 이렇게 해서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날 헤어졌다. 농활에 참가한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 때도 나는 그에게 인사
도 제대로 못했다. 버스에 올라탔을 때 그는 뒷좌석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멀어 보였다. 그에게로 다가 갈 용기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행동하던 나에게 큰
변화였다. 서울에 도착해 헤어지는 인사를 할 때도 어설픈 목례가 다였다. 그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채 성큼성큼 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희숙이의 부르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별일이었다. 못 볼 것을 몰래 훔쳐보다 들키기라도 한 듯.
Rainbow through the skies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3 나는 밀린 공부와 회화공부에 매달렸다. 나의 꿈이었던 동시통역사의 길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을이 깔리면 농활
에서 있었던 그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마지막 불씨처럼 자작자작 사그라드는 노을 속에 함
께 타고있는 반추된 기억의 잔영. 서로 휘어 감는 불길과 불길의 육체적 탐닉. 상호 몸을 비
틀어 승천하듯 타오르는 불의 살녹임. 농염한 그 불빛을 돌며 춤을 추던 그. 그의 동작 하나
하나에 반응하며 어둠 속으로 침몰해간 그림자.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는 그림자의 모습에서
거인을 떠올리기도 했다. 긴 머리를 적셨던 땀방울. 몽롱한 눈빛의 시선까지 되살아나곤 했
다.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소문내며 찾아다닐 용기는 없었
다. 만나고 싶은 그리움은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리움은 사람을 얼마나 안타깝게 하는
가. 그런 그리움의 날들은 소나기 줄기만큼이나 가슴을 훑으며 지나갔다. 몇 개월이 내게는
그렇게 아쉬움을 간직한 채 보냈다.
얼마 후 농활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모임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잊었던 그에 대한 강한
인상이 다시 살아났다. 나는 다소 들떠 있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의 단
연 화제는 그였다.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농활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모임의 날. 그는
없었다. 그날 내가 알아낸 것은 그의 이름,
김 동하.
그리고 주소와 전화번호. 주소록에 적힌 많은 이름 중에 그의 이름만이 기억의 창에 저장
되었다. 아주 또렷이.
Violet after three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여보세요.
결국은 전화기를 들고야 마는 나 자신을 방관해야 했다. 벨 소리가 몇 번 상대방의 전화
벨을 울렸다. 그 신호음이 내 심장에서 울리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길게 그리고 짧게 신
호음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린 후,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그 목소리
는 내 가슴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의 목소리였다.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보세요. ....... 저는 농활에 함께 참가했던 임선영이라고 합니다.
-.............
-기억하세요.
-아, ...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분.
그의 말은 그때와 같이 마무리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더 할 얘기가 있는 듯 여운을 주
면서도 매듭을 지어버리는 어투. 그때와 같은 모습이로구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기억하고 있군요.
-예. ....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도 여전했다. 나는 보고싶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목이 간질간질 할 만큼 나
를 자극했다. 나는 긴장했다. 그리고 자제하려 애를 썼다. 진달래꽃의 여린 속살에 감도는
봄빛 같은 나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밝히고 싶지 않
았다.
홍대 입구. 거리가 내려 보이는 창 넓은 카페에서의 만남이었다. 반가웠다. 그의 인상도
밝았다. 차분하게 느껴지는 눈빛.
웃음으로 목례를 하고 앉았다. 눈빛이 그와 나의 중간쯤에서 부딪혔다. 잠깐의 정적. 그
리고 그는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자리에 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그가 한 말이었다. 내
가 하고 싶었던 말. 어제 그와 통화를 했을 때 전화 상으로 내가 하고 싶었으나 참았던 말
이 그의 입에서 편안하게 별 감정을 싣지 않은 채 나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어떻게 들으면
꾸밈이 없고 톤이 일정해서 건조하게 들리기도 하는 그의 목소리. 반가운 말이었다.
-저도요.
-..........
나의 저도요 라는 말에, 웃음. 그리고 침묵. 그의 농활 마지막날의 그가 보여 주었던 그
웃음과 침묵. 그대로였다. 그 때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환상에 빠졌다. 달라진 것은 산과 들
과 숲을 배경으로 했던 그 때와 건물과 건물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자연보다 인공이
주를 이루는 이 곳. 주위의 배경이 달라진 것뿐이었다.
-늘 그래요?
-............
나는 순간 놀랐다. 그 때도 그랬다. 그의 웃음과 침묵이 그랬듯, 내가 했던 말도 늘 그래
요? 였었다.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 때의 기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과
말. 그리고 분위기까지.
Waiting for the sun rising at three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연민에 대한 얘기 듣고 싶었어요.
농활에서의 질문을 떠올리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거기까지 들었거든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
-그 때 그 정황까지도.
나는 그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럼. 이 사람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는 이럴
때 고맙다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지만 달리 다른 말이 없었다.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하
고 나도 그처럼 소리 없이 웃었다. 이어진 그의 웃음. 그리고 침묵. 함께 소리 없이 웃고 있
었다. 분위기가 소리 없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그의 모습은 그 때
와 달라 보였다. 그때의 그는 농부와 다를 바 없이 시골스러운 복장에 일생을 농사를 지으
며 살아 온 사람처럼 조금은 더부룩했었다. 지금의 그는 말끔했다. 평범하나 헐렁한 남방에
청바지 차림.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신촌, 홍대 입구를 젊음과 낭만의 거리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내겐 그리 익숙지 않은 곳이었다. 객기에 가까운 술과 방황. 어깨와 어깨를 스쳐
가는 숱한 사람들. 모두가 바쁜 듯 총총한 걸음걸이. 도시는 새벽의 스산함이 더 싫었다. 길
가에 널브러진 휴지와 쓰레기들이 더욱 스산스럽게 했다. 그래서 나는 폭주를 하지 않았다.
깰 때의 기분과 도시의 새벽 공기가 어지러워서였다.
-어떤 생명도 사라지기 위해 이 땅에 생명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나의 질문, 연민에 대한 대답을 단정하듯 서두를 시작한 그의 말은 조용하면서도 나직하
게 이어졌다. 너무 나직해 물안개 같다고 느꼈다.
-겨울로 가면서 눈물대신 남긴 꽃씨. 겨울을 견디고 생명을 발아시켜 꽃을 피우는 일은
눈물 납니다. 꽃은 생명을 불질러야 겨우 피울 수 있습니다.
-시적이네요.
그의 웃음. 그리고 짧은 침묵. 상대방이 말을 하면 이어지는 그의 웃음과 침묵에 익숙해
질 즈음 나는 그에게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늪이었다. 빠져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
면서도 더 깊이 빠져드는 늪의 흡인력. 물론 나는 그의 늪에 빠져드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에게서 진지함은 천성 같았다. 들을 때나 말할 때 모두 신중했다.
그는 시적이라는 나의 말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땅엔 멸종도 있습니다. 산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는 눈물이 나곤 합니다.
저는 이렇듯 바보스럽습니다.
-왜지요?
-살아있음이 죄가 된 적이 없지만 살아가기 위해 죄 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기 위해 죄 됨을 인정해야 한다고요?
-예.
그는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대화 내용으로서는 적절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듯 싶었다. 첫 만남은 대개 신상 조사하듯 가족관계, 사는 곳, 고향, 취미 등이 주를
이루는 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춤, 인상적이었어요.
-아, 예....
나의 이어진 질문에 그의 대답은 그 뿐이었다. 무슨 말인가 할 듯한 여운을 남기고 침묵
해 버리는 그의 모습. 습관적이었다.
one Early morning at two o?clock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나는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목이 길어 참 시원하게 느껴지는 구나 생각했
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매에 긴 목이 헐렁한 옷에 잘 어울렸다.
그와의 만남은 따뜻했다. 가슴 가득 아늑함이 고인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당할 듯 싶다.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들어 조금 전 나눈 인사가 아
쉬운 듯 나를 향해 흔들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돌아갈 때는 허전함이 든다. 그에게서는
그런 점이 보이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구나.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의 긴 머리가 출렁거렸다.
우리는 자주 만났다. 우리라는 데 주저하지 않을 만큼 친숙해졌다. 나는 진지함과 발랄함
의 조화라고 여겼다. 사실 나는 줄곧 나에 대한 첫인상이 궁금했다. 농활 이후 처음 그에게
전화했을 때 그의 말처럼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 알고 싶었다. 스스로 좁은 소견
을 나무라면서도 일방적인 감정은 아니었나 싶었다. 안달하는 어린 소녀처럼.
아마 세 번 째 만남에서의 질문이었을 것이다. 팔짱을 낄 만큼 감정의 거리는 가까워 있
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진지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
대에 다녀 와 학년은 같았어도 학번은 빨랐다.
-내 첫인상 어땠어요?
-새끼 새가 떠올랐어요.
-새끼 새요?
나는 반문하곤 까르르 웃었다.
-눈 가득히 어두워 진 하늘이 담겨 있었어요. 예측하지 못할 방향으로 날아갈 것 같았습
니다.
사실 나는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의 춤에서 덜 깨어 몽혼한 상태였다. 자작자작 숨 죽여
가는 불빛의 여운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의외였어요.
-눈에 하늘이 가득 했거든요.
사실 그 눈빛은 내 것이 아닌 그의 것이었을 것이었다. 그의 춤에서 기인했을 테니까.
-사실 동하씨는 나의 가시권에 있지 않았어요. 너무 조용하고 늘 뒷전에 자리잡고 있어서.
-..............
그의 시선은 허공에 자리잡고 있었다. 별을 따려는 욕심을 가진 소년 같기도 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춤이었어요. 그렇게 영적이고도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본적이 없거
든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요? 그런 열정이 있는 분인 줄 몰랐어요.
-나사 하나가 빠지면 가능합니다.
-예?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 춤을 추고 나면 허기짐이 사라지거든요.
허기를 느낀다는 건 나사 하나 빠진 거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닌 것 같아요. 전문적으로........
-춤은 배운 적이 없고. 아마 응혈 된 자의 발흥, 그런 비슷한, ... 뭘 겁니다.
-응혈 된 자요?
-민주인사라는 이름으로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그 후 남겨진 자의 아픔 때문일 겁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았구나 하는 심정이 들 때면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이후 침묵 아니면 몰입인 생을 살았습니다. 방정식의 양변처럼. 삶의
모습은 항시 결핍된 구조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부족의 충족을 위해 사람들은 희망이
라는 애드벌룬을 띄우고 삽니다. 나는 부모님과의 결별 이후 참담한 심정으로 세상과 대면
했습니다. 늘 내가 패배자였지요. 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고 우리 엄마의 죽음이 그렇듯......
그의 아픔. 가슴을 파고들었다. 안아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안기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고 내가 안아주고 싶기도 한 이중성의 여성애를 자극하고 있었다.
At three 0 clock before daybreak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유복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어도 한 시대의 지식인의 아버지를 둔 가정으로써 안정된 집안을
가졌었다고 했다. 기자신분으로 가족이 자주 못 보는 날도 있었지만 정상적인 가정이었다.
유신시절 기자직에서 쫓겨나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에 뛰어 들면서 가정의 화목은 무너지기 시
작했다. 그리고 돌연한 아버지의 죽음. 주위에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 한마디 잘
못하면 어떤 곤경에 빠질 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어머니는 화를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다시
피 했다. 그리고 결국은 한을 간직한 채 이 세상을 떴다.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실한 현실에 부딪혀야 했다. 숙부
의 도움으로 대학을 진학하고 고향에 있던 땅에 정착하여 살았다. 서울이 멀지 않은 곳이라
통학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늘 혼자에 익숙해졌고 자폐증에 가까운 날을 살다 우연히 동
아리에 들었고 첫 행사인 농활에 참가했다가 나를 만났다고 했다. 그의 아픔까지도 받아들
일 수 있는 사이로 발전해 갔다.
나는 그의 곁에서 새처럼 종알대며 즐거워했다. 사랑이 감정이 어느 만큼은 유치해 사소
함이 극대화되는 현상을 즐기면서 그와의 사이는 친밀을 더해갔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파고
드는 성격이었다. 반면 나는 발랄했다. 그리고 적극적이었다. 나는 그와 여행을 하고 싶었
다.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을. 남모를 신비성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의 둘 만의 시간. 그리고 사랑. 생각만으로도 나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그와 내가 걷는 길
은 언제고 길이 앞질러 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주저 없이 그 길을 걸었다. 여행도 그렇
게 이루어졌다. 나의 제의였다.
아름다운 날, 분명 그날은 아름다운 날이었다.
Orange mist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나는 순결이라는 의미를 그에게 주었다. 나는 행복했다. 사랑했으므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방이었다. 한 남성 앞에서 나신이 되었다. 더 이상 벗을 것이 없어졌을 때 그의 몸을 파고들
며 나의 부끄럼을 숨겼다. 순결의식을 마치고 난 후 나는 그의 품에서 정말 행복했다. 바다
에 배 띄어놓고 미풍에 흔들리며 꿈을 꾸고 있는 환상에 잠겼다. 체온이 전해주는 교감은 넉
넉했다. 육체로 느끼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과 이해의 폭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체온은
어떠한 대화보다도 따뜻하고 깊었다. 누워 있어도 바다가 보였다. 그와 나는 한참을 누워 바
다를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비치는 경치는 변화가 별로 없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새는 어
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저 새들은 바다를 닮아 푸른 넋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 사람의 넋도 푸르리라 단정하고야 말았다. 함께 바라보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남빛
바다. 그 위로 고깃배가 오가고 하늘엔 구름이 거리를 두고 떠 있었다. 그의 품안에서 바라
보는 바다 위로 또 다른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사랑은 그리움을 밟으며 찾아왔다. 그리움의 길은 아늑하면서도 스산했다. 만나고 헤어
진 날에도 그리움으로 불면의 밤을 가지기도 했다. 사랑의 초기증세는 약간의 불면증으로 자
각한다고 했다. 내가 그랬다. 마당을 간지럽히는 꽃 그림자의 잔영처럼, 어둠 속에 떠오르
는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새벽에 이르러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 잠은 깊고 혼곤했다.
그는 나무였고 나는 새였다. 그는 변함없는 자세로 같은 자리에서 나를 맞았고 나는 분주
히 그를 만나러 오갔다. 그가 만들어 놓은 둥지에서 그늘을 즐기고 녹음을 즐기며 사랑의 힘
을 감격해했다. 그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프리즘처럼 형형색색의 빛깔을 만들어냈다. 바람
에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은 햇빛을 담았다 버렸다하는 빛의 축제를 즐기는 일은 또한 즐거웠
다. 눈빛 하나에 비가 오기도 했고 바람이 불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은 그의 나뭇가지 밑
둥치에서 비를 피했고 눈이 내리는 날은 그의 품에서 숙면에 빠지기도 했다.
Two suns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4. 나무와 새의 동거는 아름다웠다. 새의 투정에 나무는 관대했고 어루만져 주었다. 그와의
관계가 힘들어 진 것은 사랑의 변화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린
또다시 바다를 찾았다. 처음으로 사랑의 순결을 나누었던 바다가 바라보이는 방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의 모습처럼 바다는 늘 여전했다.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바다는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움을 가진 사람에게 바다는 그리움이었고 고
독한 자에게 바다는 더 큰 고독을 안겨 주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바다는 사랑과 희망이었
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방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은 깊고도 격렬해 비를 맞은
사람 같았다, 땀에 젖어. 그의 품에 새 새끼처럼 안겨 있었다. 아늑했다. 그는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는 살며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아, 행복은 이런 것이구나. 나는 수건으
로 젖은 머리칼을 감싸며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잠든 그의 얼굴에 비치는 바깥 외등의 짤룩
한 불빛. 평화로운 모습. 나는 침대 속으로 들어가려다 그의 숙면을 깨우지 않으려 바다로
나갔다. 동해의 노을은 언제나 바다를 등지고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동해는 일출이 아름다
운 곳이지 일몰은 짧았다. 어둠이 소나기 내리듯 해변을 적셨다. 파도는 밀려왔다 몸을 낮
춰 바다에 재편입 되는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파도가 스러지는 해변을 걸으며 그를 생
각했다. 그는 내 마음에 찾아와 머문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의 가슴에 나의 마음을 묻고 싶
었다. 좋은 사람.
The trees have their leaves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운명은 우리의 행복을 시샘했다. 행복에 젖어 바다를 걷고 있었다. 그 때 나를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 두 사람이었다. 말만 들었지 폭력이나 강도란 말에 생소하게 들리는 안전지대
에서 나는 살아왔다. 서울이란 곳이 우범지대와 다소 거리를 두고 살면 별 위험을 모르고
살 수 있는 곳이다. 밤낮 구분 없이 일정한 밝기를 유지하는 도시. 전철에서 치근대는 사람
을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둠을 그리 무서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여행지라고 생각한 곳은 마음을 비우거나 쉬러오는 장소로
만 알았던 내가 잘못이었다. 두 사람이 다가올 때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기는 했지만 그리
대사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불빛을 등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은 나를 스쳐 가는
듯하다 순간 나를 가로챘다. 나의 몸을 나꽈채더니 한 사람은 내 입을 막았고 조금 떨어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다. 저항도 할 수 없는 전폭적인 폭력. 그리고 일방적인 그들의 욕망
충족. 나는 그들에게 끌려가 그렇게 당했다. 윤간을 당한 것이었다. 치욕의 순간은 그리 길
지 않았으나 내게는 길게만 느껴졌다. 나의 비명은 허공에 메아리쳤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은 인간의 잔혹성을 확인하게 만들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곤 전혀 배려되지 않
은 동물성의 극치. 나는 몸을 움츠리며 어둠 속에서 어찌 할 줄 모르고 떨고 있었다.
불행도 행복도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그 때의 나의 정황은, 분명 폭력
의 세계를 몰랐던 나의 행동이지만 폭력을 저지르려는 자에게는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돌아오지 않는 내가 걱정이 돼 나를 찾아 나섰다, 나를 발견했을 때
는 악몽은 상황 종료된 후였다. 좌절감. 그리도 그에게 미안했다. 무엇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절망의 나락은 깊었다.
A blue bench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5. 어떻게 서울로 돌아 왔는지 몰랐다. 이어진 그의 전화와 방문. 나는 만날 수 없었다. 만
남을 모두 끊었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없었다. 제일 먼저 세상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것과
나를 배반한 세상. 눈물로도 위안이 되지 않는 아픔. 가슴에 못을 박히듯 깊숙이 박힌 기억
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마음이 닫혀 있었고 그 문은 견고했다. 그 문은
흡사 벽과 같아서 열리지 않았다. 들판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나는 피할 곳이 없었다. 짙은
먹구름은 더욱 몰려왔고 나는 여전히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서리맞아 파리하게 말라 가는
잎 같았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커튼을 제쳤을 때 방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가로등 밑에 그가 서
있었다. 표정 없는 그의 모습. 아픔도 기쁨도 담겨있지 않은 멍한 그의 시선이 나와 만났
다. 나는 숨이 턱, 막혀왔다. 나는 순간 다시 커튼을 닫았다. 다시 어두워진 공간. 나는 어
찌할 줄 모르고 커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의 가슴에 박힌 채로 있었
다. 그의 모습과 마음이 궁금했으나 마음뿐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대로 나의
마음과 몸이 증발해 버린다면 차라리 좋을 듯 싶었다. 나 자신과 육체가 부담스럽기만 했
다. 거부해도 나는 있었고 나는 존재함으로 아파해야 했다.
만나주지 않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문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며 서 있는 그를 목격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땅거미가 집 앞을 점령하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질 때에도 그는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태양광의 그림자가 전등불에 의한 그림자로 교체되고 시간은 자정
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그 자리를 지켰다. 어느 순간 내다보면 그는 없었고
다음날이면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 시계는 흐르는 시간을 부질없이 초침,
분침, 시침으로 조각 내며 먹통 같은 공간을 돌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
모두가 아픔이었지만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계의 폐쇄성처럼 양보 없는 전쟁은
지속되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마음으로 미안해요, 라고 말했다. 그에게 전해
지지 않을 말이었다.
그는 며칠을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다 사라졌다. 그가 서 있었던 자리. 비어 있었다. 그
빈터의 공허. 그가 서 있는 것을 바라보는 아픔이 크더니만 빈자리의 공허는 또 다른 공허
를 불러왔다. 며칠 후 배달된 편지. 그의 편지였다. 가슴이 떨렸다. 봉투를 뜯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솔직히 두려웠다. 그를 거부하면서도 그가 떠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받아들이
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Dreaming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사람에겐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큼만 찾아온다고 합니다.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그늘까지
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결국 빛을 찾아 비밀스레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겨울은 봄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 것입니다. 상처를 비집고 새로운 잎이 돋고야 말 것을 나는 믿습니다. 길은 그리움을 안
고 갔습니다. 그 길에 잊혀지지 않을 당신의 이름을 마음에 묻고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
니다. 그 사람은 당신의 친구, 김동하입니다.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Northern summernight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눈물이 볼을 적시고 있었다. 고마워요. 나는 울었다. 사랑해요. 또 목놓아 울었다. 그가
서 있던 그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가 기댔던 가로등
도 젖고 길이 젖어가고 있었고 눈물은 계속 흘러 내렸다.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이래서는
안 되는데. 시계의 초침은 원통 속을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바보스럽도록 고집스럽게.
나는 결심했다. 떠나기로.
사랑하는 그를 남겨두고. 나의 아픔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그리 부유한 집이 아니었
지만 나는 서울을 떠나 유학을 준비했다. 가족 모두가 흔쾌히 받아 주었다. 엄마가 더욱 적
극적이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고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라 다짐하며 비행기에 올랐
다.
호주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일은 선 글라스였다. 유학생 중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
는 것이 싫어서였다. 다행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생소하고 언어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별도
의 노력이 필요했다. 서울보다는 사뭇 좋았다. 그 악몽에 대해 걱정해 주는 위로의 말이 더
거슬리곤 했는데 이 곳에선 아무도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적응해야 하는 것
이 급선무였으므로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다. 집에 들어오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안정을 어느 정도 찾아가고 있었다. 영어에 익숙해지고 유학생활이
무난하다고 느껴질 즈음, 찾아 온 그리움. 그리움에 밤을 지새는 날은 다음날, 일을 더 만
들었고 어떻게든 약속을 했다. 술자리든 춤을 추는 곳이든 학점에 관계가 잇는 일이든 가리
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얼마간은 지쳐 생각할 틈도 없이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Full of water-lilies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번민과 고뇌. 이를 악물고 전념한 공부. 그래서 얻어낸 성과. 그 성과 후에 찾아온 빈자
리. 어디에도 낙원은 없었다. 살아가야 하는 생활이 있었고 견뎌야 하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
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흔들던 절절한 그리움. 떨쳐 버리려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그는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어렵게 유학을 마
치고 돌아왔다. 힘들고 벅찬 일을 해낸 것이었다. 유학에서 돌아 와 집에 도착했을 때 내 눈
길이 향한 곳은 집 앞에 있는 가로등이었다. 변하지 않았다. 등 하나 이마에 달고 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 그 밑에 서 있던 그가 떠올랐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잊어야 했고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대견할 만큼 잘 해내고 있었다.
유학에서 돌아 온지 1년. 마음의 평정을 어느 정도 찾았다고 생각했다. 직장을 잡았고 사
회인으로서 적응을 잘 하고 있었다. 잘도 견뎠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의 소식은 어디에
서도 들을 수 없었다. 어떤 모임에도 그는 모습을 감추었다. 친한 친구에게도 그에 대한 얘
기는 하지 않았다. 친구도 내게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가슴속에 그에 대
한 그리움은 화산의 마그마처럼 끓어 견딜 수 없었다.
그를 찾기엔 나는 너무 준비되지 않았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변했을 것이
고 나도 변했다. 5년은 짧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여전한 그리움. 그는 어떻
게 변해 있을까. 그의 오래 전 보내온 편지의 내용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욕심이
크구나 혼자 실소했다. 어제는 그가 서 있던 가로등 밑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사람들
은 아무 표정 없이 그 밑을 지나갔다.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
A Reflection with light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6. 보고싶어요.
나는 진정 보고 싶어 그렇게 말했다. 보고 싶단 말이 가슴속을 떠돌았다. 자제되지 않는
말. 울음으로 사죄하고 그를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가 나를 받아 줄 수 있을까. 그
는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나 일방적인 절연. 그리고 유학. 돌아와 1년. 이 세월을 기다
려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해도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Message in a bottle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7. 나는 가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가 살던 그 곳으로. 아직도 그 곳
에 살고 있을까. 버스 차창 밖으로 산과 들이 흘러갔다. 숱한 상념과 회한이 몰려왔다 몰려
갔다. 이것이 올바른 행동인가 하는 자책도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버리자고 생각도 했다. 아
직도 한참을 더 가야했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있었다. 과거는 시점은
지난날에 머물러 있지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영상은 현재의 순간에 현실과 별다르지 않게
시리고 아프다. 가슴에 머무는 아릿함,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은 감성이었다. 차창 밖으
로 내다보이는 광경들은 그 시절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 덧씌워져 뭉게구름만큼이나 뭉클뭉
클 피어올랐다. 그리움과 아쉬움, 희망과 절망. 그리고 사랑과 이별.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기쁨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도 그 때였다. 따뜻하고 포근함으로 엮어진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나를 성숙시킨 것은 결국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고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 많은 번민과 고뇌.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은 그리움
이나 아련함뿐만이 아닌 현실의 문제였다.
버스는 나의 마음에 아랑곳없이 달려갔다. 산과 들은 가을로 가고 있었다. 쨍쨍한 볕. 차
안에는 에어컨을 틀어야 했다. 그와 함께했던 날들. 2년의 만남과 5년의 이별. 만남보다 이
별의 시간이 길었다. 그리움과 조바심. 나를 받아줄까 하는 조바심과 얼굴만이라도 봐야 한
다는 그리움. 차는 아무런 감정 없이 달렸다. 가로수는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비라도 내렸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산으로 그리움을 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아님, 그에게 다가갈 동안 얼굴이라도 숨길 수 있을 텐데. 산언덕을 넘어가는 차는 여전히
빠른 속력을 죽이지 않고 달렸다. 몇 번의 정차. 그때마다 타고 내리는 승객들. 그 때마다
파고드는 긴장 그리고 초조함. 해는 머리 위에 있었다. 그림자는 발 밑으로 숨고 햇빛은 한
껏 따가웠다.
차는 멈추었다.
이곳은 그가 살던 곳. 지금도 살고 있을까. 살고 있다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다시 깃드
는 긴장. 밖을 내다보기가 두려웠다. 사람들을 따라 마음을 잡으며 내렸다. 더운 바람. 상쾌
하게 느껴지는 산내음. 그의 집은 도로에서 제법 걸어 들어가야 했다. 나를 내려놓은 버스
는 떠났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속력을 더하며 멀어져 갔다. 그와 함께 걸었던 길을 향해 눈
을 돌렸다.
A weir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해바라기.
열을 맞춰 정렬해 있었다. 노란 꽃, 해바라기. 줄기마다 하나의 꽃을 피우는 식물. 올곧
은 줄기 위에 꽃은 피어 있었다. 햇볕을 받아 맘껏 노란 꽃 속엔 알알이 씨가 박혀 있었다.
빈틈없이 들어 찬 씨는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와 해바라기에 대해 얘기했던 말이 떠올
랐다. 그리고 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 돌려보냈던 해바라기 씨가 떠올랐다. 그에게 썼던
마지막 편지 내용이 생각났다.
당신과 함께 했던 여행에서 해바라기가 활짝 핀 어느 마을 지날 때 나는 이런 말을 했었
지요. 어떤 어려움도 해바라기처럼 환한 웃음으로 받아들이자고. 당신은 대답했었지요. 나
의 빈터에 당신을 보듯 해바라기를 가득 키울 게라고요. 그 때 그곳에서 해바라기 한 송이에
서 따 반씩 나누었던 꽃씨를 당신에게 돌려보냅니다. 나는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기 때문입
니다. 이제 나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없을 듯 싶습니다, 라고.
감회에 젖어 걸어 올라갔다. 갈수록 해바라기는 늘어났다. 그의 집이 보일 즈음에는 아
예 해바라기 밭이었다. 그의 집 주위는 해바라기로 덮여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
면 강물이 출렁거리는 듯 싶었다. 다른 꽃과 달리 내 키보다 한 뼘 이상 큰 해바라기는 장관
이었다. 가슴이 아파 왔다. 아, 나는 어쩌라고 이렇게 해바라기를 심었나. 그대는 왜 나를
울리는가. 그를 만나 묻고 싶었다. 해바라기는 웃고 있었다. 외다리로 서서. 그의 집이 이
제 가까이 있었다. 해바라기로 가득한 꽃밭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갔다. 그의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놀라고 말았다.
A water-circle by Johanna Sippola Canon PowerShot S230
김동하
임선영
그의 집 입구에 붙어 있는 문패에 적혀 있는 이름이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
나 분명했다. 나란히 적혀 있는 이름. 그의 이름과 내 이름이었다. 벅차 오르는 감격. 울음
도 웃음도 나오지 않는 감격이었다. 한참을 서 있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집안을 들여
다보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인기척이 없었다. 어찌해야 할 지 모르면서도 안으로 들어갔
다. 사람이 없었다. 흩어져 있는 농기구. 멀리 가지는 않은 듯 싶었다. 적막한 고요 속에서
나는 그의 편지를 꺼냈다. 그에 대한 기억과 기억을 유발시킬 만한 것은 다 버렸었다. 허나
이 편지만은 버리지 못했었다. 사건이후. 만나주지 않을 때 그가 며칠을 집 앞에서 기다리
다 그 자리를 비운 후, 보내온 편지였다.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빛 바랜 그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사람에겐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큼만 찾아온다고 합니다.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유
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그늘까
지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결국 빛을 찾아 비밀스레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겨울은 봄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 것입니다. 상처를 비집고 새로운 잎이 돋고야 말 것을 나는 믿습니다. 길은 그리움을 안
고 갔습니다. 그 길에 잊혀지지 않을 당신의 이름을 마음에 묻고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
니다. 그 사람은 당신의 친구, 김동하입니다.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끝』
글, 신광철
리하르 슈트라우스 - 외딴 샘물 작품 9-2 An eisamer Quelle, Op. 9 No. 2 티모페이 독쉬처 트럼펫 연주 Timofei Alexandrovich Dokshizer (1921~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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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면에 일렁이듯.......아련한 사랑극,읽고 또 읽고,대리만족인가.......!
좋은날님 잘 봤어요. 나중 다시 또 볼께요. 멋진 배경사진들이 감동을 더 하네요.
블루다크의 숙연함속에 한오래기 실같이 몸을 감쳐내는 연민의 마음이 ......아름다운 동화같은 마음이시네요. 음악 사진.글....잘 어우러진...
침묵속에 담겨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보았네요,아파한 세월의 서너배 만큼 세월이 흐르면 평온하게 제 자리로 돌아갈수 있으려나하는 생각과함께 기다림의 끝에 만난 빈자리를 바라보던 그 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보내지못할 편지를 읽으면서 감당할만큼의 고통은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것일까?그녀는 알까?
만남과 헤어짐,,인연은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없이 가는것이라 말씀하시던 知人의 말이 떠 오릅니다.. 대문에 나란히 걸린 문패는 귀한 슬픔의 상징,/휴일 아침 조용한 음악과 더불어 짧은 단편속에서 건져낸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가슴에 가득 찬것 같습니다... // 좋은날님! 글과 그림과선률이 아름답습니다
좋은날님, 정말 글과 그림과 음악의 삼박자가 딱 어우러져 너무나 좋습니다. 탐나서 스크랩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