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과 북쪽의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침공으로 국력이 약화된 비잔틴 제국은 7세기에 새로이 등장한 이슬람 세력에게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상실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플 까지 침공당하는 등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717년 마슬라마가 이끄는 이슬람의 대군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으나 레오 3세(717~741년)의 설득에 넘어온 불가리아 군이 아드리아노플 남쪽에서 이슬람 군을 격파하고 레오 3세가 이끄는 제국함대가 이슬람 함대를 괴멸시킴으로써 이슬람의 침략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어 739년 레오 3세가 이끄는 비잔틴 군이 프리기아에서 이슬람 군을 패배시킴으로써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냈다.
서기 802년 이레네 여제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비잔틴 제국의 혼란기는 바실 1세(867~886)에 의해 막을 내리고 이후 200년간 비잔틴 제국은 황금기를 맞는다. 로마누스 2세(959~963년)휘하의 명장이자 황제였던 니케포로스 포카스는 제국의 영토를 유프라테스 강까지 확장하고, 961년 크레테, 969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크를 탈환한다.
요한 1세(969~976년)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다마스커스, 티베리아, 나자렛, 카이사레아를 탈환했다.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의 학살자 바실 2세(976~1025년)의 치하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데 바실 2세는 사라센으로부터 아르메니아를 탈환해 아르메니아를 요새화 시키고, 남이탈리아를 재탈환했다. 1014년 바실 2세의 비잔틴 군은 벨라시자에서 불가리아 군을 전멸시켜 불가리아왕국을 복속시키는 등 바실 2세의 치하에서 비잔틴 제국은 유스탄틴 대제 이후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바실 2세의 사후 비잔틴 제국은 내부에서는 혼란이 거듭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노르만 족이, 다누브 강 유역에서는 파지나크 족이, 동쪽에서는 신흥세력인 셀주크 투르크가 비잔틴을 위협했다. 1071년 로마누스 황제가 8만의 병력(보급 부대 및 공성부대를 포함하면 20만)을 이끌고 비잔틴 제국의 위협세력으로 떠오른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침공했다. 전쟁 초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지닌 비잔틴 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밀린 보수에 대한 불만으로 비잔틴 영내를 약탈한 독일계 용병의 반란, 투르크 계열 유목민족의 이탈, 분산시킨 병력의 패배, 후위대를 지휘하던 안드로니코스 듀카의 배반, 결정적인 순간에서 명령계통의 혼란 등 겹쳐진 악재로 비잔틴 군은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3~4만 명의 셀쥬크 군에 대패를 한다.
이어 셀주크 군은 비잔틴 제국의 주요 병력 제공지역 이었던 아나톨리아 등 제국 동부를 완전히 초토화해 비잔틴을 철저하게 와해시켰다. 만지케르 전투 패배 이후 알렉시우스 1세, 요하네스 2세, 마누엘 1세 가 어느 정도 비잔틴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하나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완전히 쇠퇴기에 들어서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7주간의 농성 끝에 오스만 투르크 군에 함락되면서 멸망한다.
전성기(9~10세기)의 비잔틴 군은 15만의 정병을 지니고 있던 강대국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조직된 군대였다. 비잔틴 제국이 동쪽에서는 자국보다 인구도 많고 영토도 넓은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들의 침공에 천년 가까이 자국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는 주위 국가들보다 우수한 군사제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극히 보수적인 군사정책 덕분에 비잔틴은 4차 십자군에 수도가 함락되는 1204년까지 계속 우수한 군사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수한 군대와 더불어 뛰어난 외교정책도 도움이 비잔틴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황제의 1급 정보기관인 야만인국(Office of Barbarians)에서 나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 국가를 교란하는 공작을 펼 수 있었다.
전성기의 비잔틴 군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는 중앙군 타그마타가 군의 핵심전력이고 지방군인 테마(군관구)의 군인들이 방위의 핵을 이루는 군제였다. 국경지대 및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각 테마의 병력은 비잔틴을 방위하고 전쟁 시 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긴 전선을 방어해야 했던 비잔틴 군의 기본전략은 청야전술 이었다. 즉, 상대방의 군세가 아군보다 강력하면 강력한 요새로 물러나 농성을 하고, 적군이 물자가 떨어져 공성을 풀고 자국의 약탈에 들어갔을 때 약탈을 위해 흩어진 적군의 병력을 기동력 있는 기병을 중심으로 격파하는 방어 전략을 애용했다.
비잔틴 군은 기병을 중요시해서 중장기병과 궁기병으로 이루어진 기병의 수가 전군의 반에 가까웠다. 보병은 중장보병과 궁병으로 편성됐다. 전성기의 비잔틴 군은, 궁기병으로 이루어진 이슬람 제국군과의 정면대결에서도 우세를 보였다. 회전에서 비잔틴 군의 기본전술은 중장기병과 궁기병이 선두에 서고, 중장보병이 그 다음에, 궁병을 맨 뒤쪽에 배치시킨 다음 중장기병이 적군의 진형을 무너뜨리거나 적군의 기병을 기병이 불리한 지형으로 밀어 붙이면 중장보병이 그 뒤를 따라가 적군을 압박하고 궁병은 아군의 머리 위로 지속적으로 지원사격을 해주는 충격전술(혹은 돌격전술)과 장거리 공격이 결합된 전술이었다.
비잔틴 제국군의 장교들은 제국의 군사학교에서 우수한 지휘관로 키워졌는데, 이들의 우수한 전술적 능력은 비잔틴 군의 장점 중 하나였다. 비잔틴 군의 지휘관들은 비잔틴의 손자병법인 마리우스 황제의 Stragegion과 레오 6세의 Tactica의 병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교과서적인 전략, 전술을 구사했으나, Stragegion과 Tactica이 워낙 뛰어난 전술, 전략서 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전성기의 비잔틴 군은 강력한 제국함대의 지원과, 잘 정비된 도로, 잘 정비된 보급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9~10세기의 비잔틴 군은 당시 가장 잘 훈련된 군대와 질 좋은 장비를 보유한 군대였다.
1. 조직:
비잔틴의 군제는 로마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군제로 6세기 말 마리우스 황제에 의해 정비됐다. 이후 비잔틴의 군 조직은 10~11세기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비잔틴 군의 조직은 대대(bandon)를 기본 골격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비잔틴 군은 군단- 연대- 대대- 날개- 조(혹은 십인대)로(왼쪽으로 갈수록 좀 더 큰 부대구성 단위) 구성되어 있었다.
군단(turmai, merai): 6000~700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됐으나 9~10세기 들어 비잔틴 제국의 병력감소로 2000명 수준까지 병력이 급감.
지휘관: 군단장(turmarchai, merarchai)
연대(moira, dhoungoi): 2~5개의 대대로 구성됨. 원래 2000~3000명 정도의 인원을 포함했으나, 10세기 들어 그 병력이 급감.
지휘관: 연대장(moirarchai, dhoungargokometes)
대대(bandon): 기병 및 보병부대의 기본단위. 보병은 4개의 날개로, 기병은 6개로 구성됨. 보병은 3개의 날개가 창병으로 1개의 날개가 궁병으로 이루어졌음. 200~400명 정도의 병력.
지휘관: 대대장(kometes)
날개(allaghion): 보병은 1개의 날개가 4개의 조(組)로, 기병은 1개의 날개가 5개의 십인대로 이루어짐. 보병의 경우 1개의 날개가 3개조의 창병과 1개조의 궁병으로 편성됨. 기병날개는 총 5열로 앞의 2개열은 창기병으로 중간의 2개열은 궁기병으로, 마지막 열은 창기병으로 구성됨.
지휘관: 오십인장(pentekontarchai)
조(lochaghia): 보병의 기초부대 단위. 총 16명으로 구성.
지휘관: 조장(lochago)
그 아래 지휘관들: 십인장(dekarchos), 오인장(pentarchos), 사인장(tetrarchos), 후위장(ouraghos)
십인대(dekarchiai): 기병의 기초부대 단위 총 10명으로 구성.
지휘관: 십인장(dekarchos)
그 아래 지휘관들: 오인장(pentarchos), 사인장(tetrarchos), 후위장(ouraghos)
2. 비잔틴 군의 봉급:
비잔틴의 병사들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봉급을 받았다. 비잔틴 군 병사들은 지방군의 경우 보통 3년에 1년 정도 복무를 했다. 9~10세기경 이들의 복무기간 중의 봉급은,
지방군: 연간 금 1/6~1/4파운드
중앙군 해병 및 중장보병: 연간 금 2파운드
지방군 해병: 연간 금 4파운드
지방군 기병: 연간 금 4~12파운드
이 외에도 비잔틴의 병사들은 복무 중에 보너스를 받기도 하고, 부상자는 연금을 사망 시에는 병사의 가족에게 금 5파운드 정도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장교들의 봉급은
십인장(dekarchos): 연간 금 1파운드
오십인장(pentekontarchai): 연간 금 2파운드
대대장(kometes): 연간 금 3파운드
연대장 및 군단장: 모시는 장군의 급수에 따라서 결정됨.
5급 장군: 연간 금 5파운드
4급 장군: 연간 금 10파운드
3급 장군: 연간 금 20파운드
2급 장군: 연간 금 30파운드
1급 장군: 연간 금 40파운드
3. 비잔틴 군의 장비:
비잔틴 군의 갑옷은 라멜라 아머(lamellar armor), 메일 아머(mail armor), 스케일 아머(scale armor) 중에 하나였는데 이중 라멜라 아머를 가장 많이 입었다.
라멜라 아머는 사각형의 작은 철판 여러 개를 가죽 끈으로 연결한 형태의 갑옷이었다. 비잔틴 군에 가장 널리 퍼진 라멜라 아머는 클리바니온으로 이 갑옷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소매가 없거나 반팔의 갑옷이었다. 스케일 아머는 유연성이 떨어지는 갑옷으로 몸통만을 감쌀 수 있었다. 메일 아머는 비잔틴 군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갑옷으로 소매가 있고 무릎까지 감싸는 형태였다. 때로는 메일 아머 위에 라멜라 아머를 겹쳐 입기도 했다.
가죽, 양털, 천 갑옷은 최소 2cm 이상의 두께를 가지고 있었는데 주로 메일이나 라멜라 아머 안쪽 혹은 바깥쪽에 겹쳐 입었다. 이중 방수가 되는 천 갑옷도 널리 퍼져 있었다. 팔과 다리에는 각각 벰브레이스(vambrace, 팔뚝에 다는 호구)와 그리브(greave, 정강이를 보호하는 호구)를 착용했는데 주로 철로 만들었으나, 나무나 가죽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발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된 사각형의 발 모양을 가지는 부츠를 신었다. 손에는 주로 가죽 건틀렛(guantlet)을 착용했는데, 중장기병은 메일로 된 건틀렛을 착용하기도 했다. 투구는 비잔틴 군 전부가 비슷한 모양의 철 투구를 착용했다.
비잔틴 군의 중장보병은 3~4피트 길이의 타원형의 방패나 지름 30인치 정도의 원형 방패를 사용했다. 일부 기병은 지름 30인치 이하의 원형 방패를 지니고 다녔다. 경보병이나 궁병, 중장보병은 직경 12인치 정도의 방패를 사용했다. 10세기 말에 이르면 카이트 실드가 비잔틴 군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해 보병은 길이 54인치 정도의 카이트 실드를, 기병은 36~40인치 길이의 카이트 실드를 가지고 다녔다.
비잔틴 군의 주요 무기는 창과 검이었다. 알란족 과 사마티아 족에게서 도입한 길이 12피트 정도의 창인 콘토는 기병과 보병이 사용했다. 이 밖에도 9~10피트 길이의 경 투창인 립타리온과 베루툼, 중장보병이 사용한 중 투창 메나울라토이, 기병이 안장에 넣어두고 사용한 짧은 투창인 마르조바르울론 등이 비잔틴 군이 사용한 창이었다.
비잔틴 군이 사용한 검은 스파티온과 파레메리온 두 종류였다. 스파티온은 길이 36인치 정도의 한손 검이고, 파레메리온은 한쪽에만 날이 날린 길이 36인치 가량의 곡도로 9세기 말부터 비잔틴 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비잔틴 군의 보조무장은 도끼나 메이스 가 쓰였는데 도끼는 바랑기안 가드를 제외하면 비잔틴 군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메이스는 기병의 보조무장으로 애용됐다.
비잔틴의 궁병은 주로 짐승의 뼈로 만들어진 길이 45~48인치 정도의 합성궁을 사용했다. 보병과 기병 둘 다 합성궁을 사용했는데 서기 8세기 이후로 비잔틴 출신의 궁기병은 점차 줄어들고, 아시아계 유목민 출신이 비잔틴 군의 궁기병으로 참전하게 된다.
레오 6세의 군제개혁에 따라 비잔틴 군의 기병 중 중장기병 대 궁기병의 비율은 3:2 로 정해졌다. 이 중 중장기병은 창을 주무기로 궁기병은 합성궁, 및 슬링(sling, 돌을 던지는 무기), 투창을 사용했다. 경장보병에게는 솔레나리온 이라고 불린 일종의 석궁이 지급되기도 했다.
4. 중앙군(Tagmata):
이 시기 비잔틴 군의 주력병력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고 있는 타그마타(Tagmata, 중앙군)였는데 타그마타는 스콜라에(Scholae), 엑스큐비티(Excubiti), 아리트모스(Arithmos), 이카나토이(Ikanatoi)의 4개의 기병연대와, 누메리(Numeri), 근위대(Hataereia), 제국함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기병 4개 연대(스콜라에, 엑스큐비티, 아리트모스, 이카나토이 연대) 는 타그마타의 핵심을 이루었는데, 타그마타의 4개 연대는 각각 4000명 정도의 기병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전쟁에 참가할 때에는 보통 타그마타의 연대 중 1만~1만 2천 명 정도의 기병이 황제를 따라 참전했다.
스콜라 연대: 비잔틴 제국의 제 1 기병대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기병대. 지휘관은 도메스티코(domestiko, 내무관)라고 불렸으며, 미카엘 3세 때에 이르러 스콜라 연대의 도메스티코는 아나톨리콘의 스트라테고스(군사령관인 군인총독)를 제외하면 제국군 최고의 직위를 가졌고 황제 부재 시 전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엑스큐비티 연대: 타그마타의 제 2 기병 연대. 도메스티코를 지휘관으로 두었다. 레오 1세(457-474)시대에 편성된 연대로 9세기에 이르러 서부 테마(Thema, 군관구) 중 제 1기병대 로 승격됐다. 또한 엑스큐비티는 지방군에 배치된 의무병을 총괄하는 임무를 가졌다.
아리트모스 연대: 타그마타의 제 3 기병 연대로 6세기 경에 창설됐다. 전쟁 중에는 황제의 경비 및 명령 전달의 임무를 맡았고, 포로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카나토이 연대: 타그마타의 기병연대 중 가장 늦게 창설된 기병연대로 니케포로스 1세(802~811)가 창설했다.
누메리 연대: 외성 방어군과 더불어 수도의 방어를 담당한 보병 연대. 4000명의 인원으로 구성돼 있었다.
근위대(Hetaereia Basilike): 1000명 정도의 인원의 부대로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부대는 대 근위대, 중 근위대, 소 근위대 로 나뉘었다. 주로 외국인이 이 부대에 입단했으며, 항상 황제를 동행했다. 주로 유목민족으로 이루어진 카자르 기병연대, 파르가노이 기병연대 도 황제를 호위하는 부대 중 하나였다.
5. 바랑기안 가드(Varangian Guard):
스칸디나비아 및 러시아 출신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비잔틴 제국 황제의 친위대. 10세기 무렵부터 비잔틴 군 휘하에서 싸운 이들은 988년 키예브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 제국의 바실 2세에게 6000명의 전사를 제공하면서 비잔틴 황제의 친위대로 편입됐다. 그리스 인들보다는 충성심이 높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몇 몇 반역에 이들이 관련되기도 했다. 이들은 높은 수준의 봉급을 받았다. 비잔틴 인들은 바랑기안 가드를 음란하고 용맹하며, 지독한 주당인 야만인들 이라고 평가했다. 11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인, 노르만 인이 바랑기안 가드에 추가됐다. 주 무장은 도끼와 방패로 주로 체인메일을 착용했다.
6. 군관구제도(Theme System):
7세기 들어 소아시아 지역에서 등장한 제도로 아랍의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진 제도. 콘스탄스 2세와 콘스탄틴 4세가 제국 동부의 안톨리아 속주에 테마(Thema, 군관구)를 만들어 아랍의 침략에 대비했다. 테마는 국경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속주로, 각 테마에 소속된 둔전병들이 속주의 방어를 담당했다. 10세기 무렵에는 대부분의 테마가 군인 총독인 스트라레고스(Strategos, 군사령관)에 의해 통치됐다. 스트라테고스는 다수의 백인대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가지고 있었고,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관(protonotarius),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한 법무관(praetor), 세금 및 회계를 담당하는 징수관(chartularius)이 장군을 보좌했다.
군관구제도는 둔전병이 주를 이루는 군제로 국가에서 일정량의 땅을 하사받은 자유민 가족이 1명의 기병을 제공하는 군제였다. 이 때 하사된 땅은 장남이 대를 이어 기병으로 근무하는 한 상속이 가능했다. 이들 지방군 대부분은 하인을 소유하고 있었고, 부유한 지방군은 노예를 소유한 지주였다. 부유한 지방군들이 지방군의 핵심을 이루는 1급 기병(중갑 기병)을 제공했다. 9세기에 이르러 부유하지 못한 둔전병 몇 가구가 기병 1명의 장비와 말을 제공하는 법안이 상정됐다. 기병을 제공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둔전병들은 각 요새의 주둔군으로 배치되거나, 보급품을 운반하는 등의 잡역을 담당했다.
각 테마에 소속된 병력은 2~3개의 군단으로 편성됐다. 각 테마의 병력 수는 그 군관구의 넓이나 인구 등에 따라 제각각 이었는데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인 10세기 초 무렵 동부 테마에 등록된 기병의 숫자는,
으로 이 중 실전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1급 기병의 숫자는 한 테마에 최대 4000명 정도였고, 전쟁에 투입될 수 있는 지방군 기병의 총 수는 3만 명 정도였다. 테마에 속한 기병의 수는 이 시기를 고비로 점차 줄어들어 서기 970년경에는 한 테마에 3000명 정도의 기병만을 등록하고 있다. 보병은 주로 징집에 의존을 했는데 한 테마에 최대 2만 4천명의 보병을 소집할 수 있었으나, 이 중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1급 보병의 숫자는 제한돼 있었다. 지방군 보병은 경무장 보병 및 궁병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10~11세기에는 군관구 제도가 점차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속주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한 스트라테고스와 귀족들은 권력을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데 사용했다. 점차 스트라테고스와 귀족들에게 땅을 빼앗기는 소지주들이 늘어났고 소지주 수의 감소는 테마 내 둔전병의 감소로 이어졌다. 중앙정부에서는 군관구제도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점차 스트라테고스의 특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10~11세에 계속된 각 스트라테고스간의 내전과 반란으로 11세기에 이르면 비잔틴 제국 내의 지방군은 병력 수가 현저히 줄고 그 질도 떨어지게 된다. 군관구 제도의 붕괴에 따라 점차 비잔틴 군은 용병이 제국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군제로 변화한다.
7. 용병:
전통적으로 비잔틴 군에는 많은 수의 용병이 포함됐다. 10~11세기 기존의 군관구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비잔틴 군내의 용병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1세기 중반에 이르면 비잔틴 군 궁기병의 거의 전부를 아시아 계열의 유목민으로 구성하기에 이른다. 11세기 중반의 비잔틴 군은 그 반 이상이 여러 나라에서 온 용병으로 구성됐다.
용병 대부분은 투르크 족 계열의 유목민이었으며, 1096년 1차 십자군 당시 알렉시우스 1세의 비잔틴 군에는 그리스, 불가리아, 쿠만, 영국, 베네치아, 이탈리아, 크레테, 파지나크, 알만, 투르크, 아말피탄 인이 포함돼 있었다.
비잔틴 군의 용병은 보통 비잔틴의 위성국가나 동맹국에서 차출되었다. 비잔틴에서는 1049년 1만 5천 명의 파지나크 족을 고용했고, 1071년 만지케르 전투 패배 직후에는 2000명의 노르만족을, 1078년에는 6000명의 알란족, 8000명의 노르만족 및 다수의 이탈리아 군과 파지나크 족을 1091년 레부니움 전투에서는 4만 명의 쿠만족을 고용했다.
용병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충성도였다. 프랑크인 용병이 특히 문제가 되었는데, 이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여겨 이들을 싸우게 하려면 막대한 양의 돈을 제공해야 했다. 용병은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전투 도중에 상대방에 투항하거나, 비잔틴 제국 내의 영토를 약탈했다. 만지케르 전투에서는 투르크 족 출신의 용병부대가 전투 중 셀주크 군에 투항해 비잔틴 군을 패배하게 만들기도 했다.
8. 비잔틴 군의 병종
스쿠타토이(Skukatoi):
비잔틴 군의 중장보병. 이들은 8~16열의 밀집 진형을 만들어 창으로 기병이나 보병을 상대했다. 중장보병은 라멜라 아머나 메일 아머등의 갑옷을 몸에 입고 그 위에 두꺼운 천 갑옷을 걸쳤고, 어깨에는 어깨를 보호하는 가죽 끈을 두르고 있었다. 중장보병의 제복은 빨간색, 파란색, 짙은 녹색, 혹은 보라색의 색깔로 만들어졌다. 뱀브레이스(정강이를 보호하는 호구)는 앞 2열의 중장보병에게만 지급됐으나, 그리브(팔을 보호하는 방어구)와 메일 코이프(머리에 쓰는 체인 메일), 투구는 중장보병 전원에게 지급됐다.
스쿠타토이는 주로 창과 방패로 무장했다. 창은 12~14피트 길이의 창을 사용하거나, 8~9피트 길이의 관목이나 오크로 만들어진 중 투창을 사용했다. 원래 이들은 지름 24~30인치 정도의 방패를 사용했으나 11세기 말부터 카이트 실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조무장은 검이나, 곡도, 작은 손도끼를 애용했다.
펠타스토스(Peltastos):
비잔틴 군의 경 중장보병. 11세기 후반 비잔틴 제국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등장한 병과로 중장보병의 비싼 장비를 감당하지 못해 등장한 병과. 펠타스토스는 중장보병과 경보병의 중간정도의 무장을 갖춘 군인이었다. 이들은 두꺼운 가죽갑옷과 투구, 12~14피트 길이의 창, 원형방패, 투창, 곡도로 무장했다.
종자(Servants, tuldum):
종자는 보통 보급품을 나르거나, 각종 잡역을 담당했다. 근위대, 중앙군 기병 및 지방군 1급 기병에게는 한 사람당 한 명의 종자가, 3~4명의 2급 기병 당 1명의 종자나 하인, 노예가, 보병에게는 16명에 한 명의 종자나 하인, 노예가 배정됐다.
보병의 종자는 노새가 끄는 수레를 몰았는데, 이 수레에는 보급품과 맷돌, 톱, 2개의 삽, 작은 망치, 바구니, 큰 낫, 밀낫, 과 2개의 도끼가 들어있었다. 이들은 주로 진영지의 참호를 파는 데 동원됐다. 부대 내에 종자가 부족하면, 탈영자나 질이 나쁜 병사들을 종자 대신 동원하기도 했다. 종자는 방어무기로 슬링을 가졌고, 때로는 비잔틴 군 전투 진형 맨 끝에 배치되기도 했다.
노새(Pack mule):
노새는 비잔틴 군의 보급품을 나르는데 사용됐다. 중앙군에 소속된 노새는 가축국(Logothethe of Herds)에서 운영하는 황제의 목장에서 제공했다. 황가의 일원들도 황제의 목장에서 나오는 말이나 노새를 이용했는데 황가 소유의 외양간들은 빨간색을 칠했다. 가축국에서 운영하는 목장에서는 국가나 교회에서 말이나 노새를 기부받기도 했다. 황제가 전쟁에 참가 할 때는 수백 마리의 말과 노새가 황제의 물품을 운반했다. 황제를 따라가는 물품은 노새 100마리가 끄는 요리 재료와 은 식기, 노새 30마리가 운반하는 샹들리에, 테피스트리, 은 그릇, 요리기구가 있었다. 이 외에 황제를 따라간 물품은 도서관, 목욕탕, 옷장, 및 개인용 교회가 있었다.
경장 보병(unarmored infantryman):
11~13세기 비잔틴 군내에서 보병의 역할이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생겨난 병종으로 경 중장보병 펠타스토스를 대신한 병종이었다. 방어구는 투구만을 착용했으며, 주 무장은 투창과 원형방패를 보조무장은 검을 차고 다녔다. 중장보병과 마찬가지로 밀집 진형을 이루어 전투에 임했다.
프실로스(Psilos):
비잔틴의 궁병. 주요무장은 합성궁으로 투창을 가지도 다니기도 했다. 비잔틴의 군사교범에는 최대한 많은 궁병에게 얇은 메일 아머나, 라멜라 아머를 지급할 것을 명시하고 있으나 궁병의 대부분은 갑옷을 입지 못했다. 비잔틴의 황제 니케포로스 2세는 궁병이 갖추어야 할 무장을 작은 방패, 두 개의 합성궁, 4개의 활줄, 슬링, 검, 작은 도끼, 화살통 2개(화살 100개)로 규정했다. 일부 궁병에게는 석궁이 지급되기도 했다.
카타프록토스(Kataphroctos):
비잔틴의 중장기병. 비잔틴 군의 주력 기병이었던 이들은 창과 활을 주 무장으로 하고 몸에는 라멜라 아머, 스케일 아머, 메일 아머를 입거나 메일 아머 위에 라멜라 아머를 겹쳐 입었다. 팔과 다리에는 각각 나무로 만든 벰브레이스와 그리브를 손에는 가죽 건틀렛을 껴 얼굴을 제외한 거의 모든 몸 부위를 방어구로 덮었다. 케트라프락토스 중 창기병은 두 개의 길이 12피트 가량의 기병창과 24~30인치 길이의 카이트 실드를 지녔고, 궁기병은 화살, 활줄과 30~40개의 화살이 든 방수 화살통과, 작은 방패를 가지고 다니거나, 짧은 투창을 휴대하기도 했다. 갑옷 위에는 방수가 되는 갈색의 망토를 걸쳤는데, 전투 중에는 망토를 안장 뒤에 묶어 놨다. 케트라프락토스의 말에는 갑옷을 입히지 않았다. 케트라프락토스의 장교에게는 메이스가 지급되기도 했다.
클리바노포로스(Klibanophoros):
비잔틴의 돌격기병. 니케포로스 2세가 만든 병과로 말과 사람 둘 다 중무장을 시킨 병과였다. 갑옷은 몸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철제의 라멜라 아머와 그 위에는 두꺼운 가죽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철제투구와 얼굴을 눈만 빼고 감싸는 2~3겹의 체인메일로 만든 메일 후드, 팔과 다리를 보호하는 철제의 벰브레이스와 그리브, 손을 감싸는 메일 건틀렛, 발을 감싸는 철 부츠로 전신을 감싸 눈만 제외하면 모든 부위를 철재 방어구로 감쌌다. 클리바노포로스의 말은 대게 힘이 강한 말로 콧구멍과 눈, 다리 아랫 부분을 제외하면, 소가죽의 갑옷이나 2~3겹의 깃털 갑옷, 또는 철제의 라멜라 아머를 입혔다.
클리바노포로스는 쐐기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돌격했는데 첫째 열에는 20명의 중갑기병이 제 2열에는 24명의 중갑기병, 제 3열에 28명의 중갑기병, 그리고 제 마지막 열인 12열에는 64명의 중갑기병을 배치해 총 504명이 한 진형을 이루었으나, 10열 384명의 중갑기병이 쐐기진형을 구성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무기는 기병창과 검, 짧은 투창을 주로 사용했으나, 화살로 무장한 중갑기병도 있었다. 클리바노포로스에는 300명의 창기병당 최대 80명의 궁기병이 배치됐다.
클리바노포로스는 유지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전성기의 비잔틴 군에서도 중앙군에서만 이들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만지케르 전투의 패배 이후 비잔틴 군내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루스족 용병(Rus Mercenary):
러시아 지방에서 살던 루스족은 황제의 친위대인 바랑기안 가드의 구성원 이었다. 주로 몸에는 메일 코트(몸만 감싸는 체인메일)를 걸치고 도끼나 검, 단검 등의 무기를 사용했고, 사각형의 방패를 가지고 다녔다. 이들은 손에서 어깨까지 문신을 했고, 구레나룻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비잔틴 인들은 이들을 야자나무만큼 키가 크고 금발이나 빨간 머리에 붉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트라페지토스(Trapezitos):
비잔틴 출신의 경기병. 이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고, 주로 2~3개의 투창과, 기병창으로 무장했으나, 일부는 화살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방패는 직경 12인치의 소형 원형 방패나 지름 27인치 가량의 대형 원형방패를 들고 다녔다.
파지나크 족 용병(Patzinak Mercenaries):
투르크 계열의 유목민으로 9세기 말부터 비잔틴 군에 고용돼, 11세기 중반에서 말까지 비잔틴 군의 용병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파지나크 족 용병 중 많은 수가 지방의 경비군 으로 고용됐다. 십자군 원정 중에는 비잔틴에 고용된 파지나크 족이 제국 내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킨 1차 십자군을 감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합성궁으로 무장한 궁기병 으로 일부 족장과 그 친위대를 제외하면 갑옷을 입지 않았다. 근접무기로는 창, 세이버, 손도끼, 올가미 줄 등을 가졌고,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작은 방패를 지니고 다녔다.
셀주크 족 용병(Seljuk Mercenary):
셀주크 출신의 용병은 1071년 로마누스 4세가 만지케르 전투에 패배한 후 1071년부터 1081년 사이 비잔틴 군의 병력부족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고용됐다. 이들은 뛰어난 궁기병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셀주크의 군사들을 피에 굶주린 야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셀주크 용병의 지휘관들은 메일 아머를 입었으나, 일반병사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합성궁으로 무장한 이들은 안장에 투창, 올가미 줄, 1~2개의 예비 화살, 1~2개의 화살 통을 넣고 다녔다. 접근무기로는 메이스를 애용했고, 작은 방패를 들고 다녔다. 셀주크의 궁기병은 보통 밝은 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었다.
이탈리아, 노르만 용병(Italo-Norman Mercenary):
1038년 이후로 헤르브 프랑코파울로스, 로버트 크리스핀, 러셀 드 바이루엘 등이 이끄는 노르만의 용병들이 비잔틴 군의 용병으로 고용되기 시작했다. 곧 노르만 용병들은 비잔틴 동부에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들어냈다.
비잔틴의 황녀였던 아나가 쓴 책 “Alexiad"에서 묘사한 노르만 용병은, ‘켈틱 아머는 쇠사슬을 여러 개 연결한 (갑옷)이다. 질 좋은 철을 써 만들어 화살이 침투하지 못한다. 위가 넓고 아래는 뾰족한 방패로 갑옷을 보조한다. 방패의 안쪽은 약간 굽어졌고, 바깥쪽은 평평하고 빗나는데 황동으로 방패를 보강했다. 이 방패는 어느 화살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 그것이 스키타이 인이던 페르시아 인이던 거인이 화살을 쏘던 이 방패에는 화살이 튕겨나간다. 노르만의 갑옷은 그들을 화살공격에 거의 무적으로 만든다.’
"로마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로마 제국 때부터 내려온 군제입니다. -_-;; 그리고 몇 가지 추가하자면... 사실 "아리드모이" 즉 "옵티마테스" 타그마는 6세기에 창설되진 않았고 이것도 본디는 엑스쿠비토레스하고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창설되었지만 그때는 아르메니아군 예하여서 드러나지 않았었습니다. 6세기에 그 자체로 독립 부대가 되었지만 부대 자체는 그전부터도 있었습니다.
첫댓글 중요자료임
"로마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로마 제국 때부터 내려온 군제입니다. -_-;; 그리고 몇 가지 추가하자면... 사실 "아리드모이" 즉 "옵티마테스" 타그마는 6세기에 창설되진 않았고 이것도 본디는 엑스쿠비토레스하고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창설되었지만 그때는 아르메니아군 예하여서 드러나지 않았었습니다. 6세기에 그 자체로 독립 부대가 되었지만 부대 자체는 그전부터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