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곤란한 지경에 빠지면 무의식중에 ‘나를 지켜줘’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특히 약해져 있을 때 그런 경향이 쉽게 나타난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낸 사람은 심각한 병에 걸려도, 죽음의 심연 가까이 다가가도 결코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되므로 인간은 좀 더 강해진다. 나는 그런 두 소녀를 만났다.
내가 대표로 있는 ‘일본이라크 의료지원 네트워크(JIM-NET)’는 이라크 바스라에 살고 있는 한 소녀의 백혈병 치료를 계속 지원했다. 자이나브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는 소녀였는데, 상태가 호전되어 거의 관해상태(일시적이건 영속적이건 자타각적 증상이 감소한 상태)까지 왔지만 재발에 대한 불안감은 늘 존재했다.
그 아이의 집은 가난했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림도 썩 잘 그렸다. 우리는 여러 차례 자이나브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병원에 설립한 원내 교실의 보조교사로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며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병원에서 일하면 혹시 병이 재발해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제가 아픈 아이들의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요.” 집안형편 때문에 변변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그녀가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가 병동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라크에서는 백혈병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고 알고 있었다.
이라크에는 원내 교실이라는 제도가 없었다. 우리는 돈을 모아 수학을 가르치던 이브라힘을 선생님으로 처음 고용했다. 그 역시 아내를 백혈병으로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그는 온 힘을 다해 투병 중인 아이들을 도왔다.
우여곡절 끝에 자이나브가 이브라힘의 보조교사가 되었다. 그러자 병동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어머니들의 눈빛 또한 변했다. 자기 아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백혈병 병동에 새로운 희망이 번져갔다. 아이들이 햇병아리 교사인 자이나브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의 아이돌이라고나 할까? 자이나브 역시 그런 아이들에게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누군가에게 준 1%, 누군가에게 받은 1%. 겨우 1%가 오갔을 뿐인데, 피가 통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기 아이만 생각하던 어머니들이 병으로 고생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치료 효과가 개선된 것이다. 10년 전 소아의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의 5년 생존율이 30%였는데, JIM-NET에서 10년 동안 지원한 결과 약 60%로 개선되었다. 대단한 성과였다. 많은 의사선생님들이 테러 단체의 위협에 못 이겨 떠나려 했지만 우리가 지원하자 계속 이라크에 남아 아픈 아이들을 돕겠다고 했다. 누군가 아주 작은 손길이라도 내밀면, 도움을 받은 사람은 온 힘을 다해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소소한 응원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순식간에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라크 바스라에서 만난 또 다른 소녀가 있다. 사브린이라는 15세의 이 소녀는 우리의 지원으로 5년 동안 극도로 힘든 상황에서 수술과 방사선 치료 등을 받았다. 눈에서 시작된 암이 몸 전체로 전이되었다. 결국 두 눈 모두 시력을 잃게 된 이 아이는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이제 죽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했답니다. 이곳 원내 교실에서 이브라힘 선생님과 자이나브를 만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란 걸 했습니다. 공부가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 알게 되었지요. 그림 그리기를 배웠는데, 순식간에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졌어요. 제 그림은 칭찬을 받았고, 일본으로도 건너갔습니다. 제 그림이 초콜릿 상자에 인쇄되어 일본인들이 그것을 사면, 그 수익금이 병에 걸린 아이들을 위한 약이 되어 이라크로 온다고 하더군요. 저는 죽지만, 이라크의 아픈 아이들을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브린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기쁨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든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하다 보면 신기하게 사는 것이 즐거워진다. 어린아이들의 선생님이 된 자이나브는 이제 매우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강인하면서도 따뜻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하다. 이런 식으로 따뜻한 피가 통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라크에서 테러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하게 된다. 전쟁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나라에서 나는 뜻밖에도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거나, 선뜻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