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 터미널에서는 강릉행 버스를 탔다.
특별히 강릉을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터미널에서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동해가 보고 싶은 생각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 훨씬 마음이 상쾌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강릉을 택하게 한 동기인지 모른다.
가끔 휴가 때면 영희와 아이들과 가던 이 길이 혼자가 되어 가니 새로워 보이고 처음 보는 길같이 흥미로워 진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여태 묶여있던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며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하는 모양이다.
교도소에서 그리고 출감 후 집에서 지내는 동안은 누구를 만나면 모두 자기의 처지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동정을 하거나 경멸하는 것 같아 불편한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만나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고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편한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와 단절하고 다른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고 그렇게 해보고 싶어지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가정과 직장과 아는 사람들을 떠나 전연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휴게소에서 쉴 때 무슨 생각에서인지 신분증과 자동차 운전 면허증 및 카드 등 자기의 신분이 나타날 염려가 있는 것은 호주머니와 지갑을 여러 번 뒤져 모두 꺼내 적당히 절단하여 휴지통에 깊숙이 묻어버리고 지갑에 돈만 넣었다.
돈도 외국에서 크리디티 카드를 사용한다고 많이 넣지 않아 모두 합쳐 백만 원 정도뿐이었다.
이 돈을 다 쓰고 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여행이 끝나면 집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망망한 바다에 한 점 포말이 된다.
기철이 탄 버스가 강릉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다 되는 시간이다.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을 빠져나오며 공항에서부터 가지고 온 간단한 소지품이 든 손가방도 일부러 버렸다.
손가방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자 정말로 이제까지 일구어 온 가정과 사회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 같은 생각이 피부로 느껴지고 무슨 새로운 세계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 같은 생각이 든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까지 모두 새로 사서 바꾸어 입으면 이런 감정이 더 하리라 생각되어 시간이 나는 대로 목욕도 하고 속옷까지 모두 바꾸어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동해의 바닷바람을 직접 맞는 강릉의 날씨는 서울보다 더 추운 것 같다.
자기같이 허망한 사람도 추위를 느끼는 것은 보통 사람과 같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기철은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살아있는 생명체가 추울 때 추운 것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택시를 타고 바닷가로 갔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생각했던 것 같이 우선 넓고 푸른 바다가 보고 싶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쏘이고 싶다.
겨울 바닷가에는 사람은 없고 무심한 바람만 몰아친다.
찬바람이 전신을 휘감고 흔든다.
바람 따라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고 하늘은 나는 갈매기도 바람에 깃털을 날리며 가오리연처럼 오르며 찬 기류를 가른다.
겨울 바다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닷속에 숨겼던 이야기, 파도가 실어온 저 먼 나라의 이야기 그리고 부서지는 파도가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차고 맑은 바람 속에 서 있으니 심신이 좀 맑아진다.
이런 기분 때문에 사람들이 겨울 바다를 찾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시간여를 바닷가에서 배회하며 시간을 보낸 기철은 어스름이 찾아 들고 추위로 입술이 파랗게 된 뒤에야 바닷가를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허름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살아있는 짐승은 추우면 따뜻한 곳을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어두워지면 잘 곳을 찾는 것이니까
손님을 기다리며 혼자 앉아 있던 예쁘장하고 인심 좋아 보이는 50대 초반의 주인아주머니가 기철의 모골을 보고
“어서 오세요.”
하며 일어나 기철을 난로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춥다는 생각에 기철은 아무 생각 없이 주인아주머니가 인도하는 대로 난로가로 가서 난로 근처에 있는 탁자에 앉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매운탕을 시켰다.
기왕이 먹는 바에야 푸짐하게 먹어보자는 심사에서
주문을 받은 주인아주머니가
“어디를 다녀오시는데 입술이 파랗도록 얼굴이 어셨어요?”
하고 묻는다. 추위에 젖은 기철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바닷가에 좀 있었습니다.”
“네! 그러세요.”하고 무슨 말인가 더 할 것 같던 주인아주머니는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간다.
어느 정도 몸이 녹았을 무렵 음식을 날라 온 주인아주머니가
“손님은 여기 사람 같지 않은데 어디서 오셨어요.”
하고 다시 묻는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네! 그러시군요. 겨울 바다를 무척 좋아하시나 보군요?”
아주머니의 이 물음을 받은 기철은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 할지 난감했다.
외국 해외여행을 하려다 비행기를 놓쳐 무작정 바다를 찾았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얼떨결에 “예!”하고 대답했다.
“황량한 겨울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는 바닷가에 오래 산 사람이지만 겨울 바다는 사람을 너무 쓸쓸하게 해요.”
바다에 대하여 그것도 겨울 바다에 대하여 특별한 감상이 있어서 찾은 것이 아닌 기철로서는 그 말에 대답할 말이 더욱 궁해져 음식만 씹었다.
자기가 바다를 찾은 것은 그냥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지 특히 겨울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겨울 바다에 온 것은 아니까
그러면서 속으로 음식 장사하는 여자답지 않게 감성이 풍부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기철이 말이 없자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 자기의 말에 기철이 노여워하는 줄로 생각했는지 주인아주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죄송해요. 내 감정에 치우쳐 내가 그만 실수를 해서---”
하며 사과를 한다.
“아니 그러실 것 까지는 ---.”
아주머니 말에 별생각이 없던 기철은 주인아주머니가 사과하자 당황하여 이렇게 얼버무렸다.
주인아주머니가 그렇게 하고 간 후 혼자 밥을 먹으며 기철은 생각에 잠긴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제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면 그 짧은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그녀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인생의 깊은 골이 되는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겠지.
남에게 말 못 할 깊은 상처가 있는 사연을
그런 사연을 안고 많은 사람이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사연에 치여 이렇게 허망한 여행아닌 여행을 하는 나는 무엇인가?
어차피 인간은 자기의 능력으로는 자기의 운명조차 어쩌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 자기의 운명조차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아니 어쩌면 그것이 더 다행인지 모른다.
자기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자기 운명을 자기의 뜻대로 하려는 사람들로 해서 이 세상은 더 소란스럽고 참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던 기철은 나같이 나약하고 심약한 위인이 이게 무슨 개똥철학인가 하고 피식 실소를 흘렸다.
기철이 음식을 다 먹고 나오도록 손님이 없었다.
음식값을 치르는 기철을 쳐다보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또 붉어진다.
너무 심하게 민망해하는 것 같아 그녀에게 자기가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손님이 별로 없네요?”
하고 기철이 말을 건낸다.
“우리 집은 간판이 낡고 집도 허름해서 원래 손님이 적은데 더욱이 겨울이라 손님이 거의 없어요.”
“그러면 집도 간판도 손을 좀 보시지 그러세요?”
“돈도 없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살려고 심하게 경쟁하는 대열에 함께 끼어 복닥거리기는 것이 싫어요. 그냥 주어지는 대로 살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 기철은 장사하는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래도 세상에서 살자면 어쩔 수 없이 남과 경쟁을 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며 나는 그 경쟁에서 패하여 이러고 다니고 있지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전에는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죠. 누구보다 열심히. 그러나 언제나 얻어지는 결과는 실망뿐이었어요.”
하고는 자기가 또 필요 이상의 말을 한 것 같은 생각에
“아! 미안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하고 사과를 하며 붉어진 얼굴을 외면한다.
그러고 보니 식당 주인아주머니에게는 식당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그런 분위기가 난다.
주인아주머니의 몇 마디 말에서 인생을 달관한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다.
아니 어쩌면 혼자 싸워온 세상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어 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자기와 비슷한 입장인 것 같아 식당 주인아주머니에게 상련을 느낀다.
돈을 치르고 나온 기철은 주인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나 집을 한 번 돌아보았다.
주인아주머니의 말대로 정말 다른 집에 비해 집도 허름하고 간판은 아주 낡아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 다만 유리창에 쓰여 있는 몇 가지 음식 이름이 여기가 음식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위에 휘황찬란한 다른 음식점과 비교하면 너무 허름해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은 누구나 그 집으로 음식을 먹으러 들어가기를 주저할 것 같다.
추위에 정신이 없던 기철은 유리창만 보고 그 음식점으로 들어섰나 보다.
그러나 음식 맛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몇 번 뒤를 돌아보며 가던 기철은 일어나는 상련과 또한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가?
권리침해
첫댓글 즐~~~~감!
무혈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즐감하고 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