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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장32~44절/삶과 죽음 앞에서우리 인생에 있어서 풀기 어려운 세 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첫째, 어려운 문제는 허무의 문제입니다. 정말 인생의 의미가 있을까? 세상의 모든 철학은 예외 없이 헛되고, 헛되고 헛된 인생을 말합니다. 젅도서1장14절에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헛되지 않은 것이 없도다." 야고보서4장14절에 "인생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잠간 있다 없어질 안개니라." 베드로전서1장 24절에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도다." 이렇게 헛되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첫 번째 인생의 숙제입니다. 둘째, 모순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선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끔찍한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얼마나 착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마음속이 얼마나 선의지로 꽉 차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선을 좋아하는데 실제로 악이 이 세상에 만연해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악이 내 인생의 한 복판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로마서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사망의 몸에 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셋째, 생(生과) 사(死 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정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면 인생 간단하지요. 얼마나 쉽습니까? 한번 멋지게 살면서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살다가 질고나 고통이 찾아오면 쉽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쉬운 인생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죽음 저편의 생명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로 고뇌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은 우리 인생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다음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성적표가 개봉되는 날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인생의 세 문제 가운데 마지막 문제만 해결되면 앞의 두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생명과 죽음 앞에 서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될 줄로 압니다.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해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가정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이 가정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리실 때에 자주 가던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온 소식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는데 오셔서 치료해 주십시요(3절) 하는 간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4절에 “이 병은 죽은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셨고 이들에게 소식을 들은 후 이틀이 지난 다음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말합니다.(7절) 제자들은 우리가 방금 유대에서 나올 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8절) 하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번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자신이 시간이 되면 당연히 일어날 것인데 깨우러 간다고 하니 제자들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제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절) 하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로 행하여 가는 것을 막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안전을 위한 것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9절) 하고 말씀하시며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 말씀하십니다.(14절)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이미 죽을 줄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자신이 생명이요 부활인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15절)제자 중의 한 사람인 의심 많은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 하고 오기로 뒤따라 나섰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있지만 주님께는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로 거짓말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예수님께는 실수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또 기적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창조주 그분에게 무슨 기적이라는 단어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생명의 주되신 주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빛 앞에는 어둠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인생에게 이 죽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죽음은 존재의 중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분리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설명되어집니다. 어느 날 모두 '끝났다'가 아닙니다. '분리되었다' 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분리되어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또 다른 죽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생명선에서 공급받지 않고는 인생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은혜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 속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삶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2장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분리되었던 인생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생명선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마치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피가 공급되듯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절을 생명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 인생을 가리켜 사활대속의 은혜를 받고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 앞에 나아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베다니 마을 어귀에 들어서기 전,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쫒아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나가서 말합니다. 21~22절에 "주께서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을 내가 아나이다."(21~22절) 정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23절에 "네 오라버니가 살아나리라."(23절) 그랬더니 마르다가 말합니다. 24절에 "예수님, 마지막 날 부활 때 내 오라버니가 살 것을 아나이다.(24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25~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 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의 거듭된 말씀에 마르다는 고백합니다. 27절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여러분, 이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마르다는 정확한 신앙고백을 가졌습니다. 교리적으로 흠이 없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말에 "당신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계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하는 대로 될 줄로 아나이다." 라고 해놓고 마지막 날 살줄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과거에 도와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내 삶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그는 안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도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라고 주께서 명령하시니까 마르다가 쫒아나가서 39절에 "주님 시체가 썩어서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냄새가 진동합니다."라고 반대까지 합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객관식 문제들의 정답은 잘 맞춥니다. 예를 들자면 "당신 생각에 불쌍한 장애인들을 위해서 좋은 시설에서 도와주는 것,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러면 "좋습니다."100이면 100명이 정답을 씁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 가까이 장애인 돕는 시설을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100이면 100 거의가, 1000명이면 1,2명 제외해놓고는 안된다고 합니다. 객관식은 정답을 써요. 그런데 주관식은 틀립니다. 우리들은 물어보면 정답을 쓰고 실제로는 제 마음대로예요. 마르다가 그런 신앙을 가졌단 말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의 객관적인 정답은 아는데, 그 정답이 내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17세기 영국에 윌리엄 캐리라는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계속해서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며 대학 도서관마다 돌아다니면서 당시에는 없는 세계 선교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각 지역마다 거기에 어떤 나라가 있고, 어떤 부족이 있고 그 부족들은 어떤 신앙을 가졌고 그분들에게 복음 전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자료 조사를 해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젊은 청년이 목사님들의 회의에 그 자료를 보내 세계 선교를 하기 위해서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일주일 동안 열심히 세미나하고 회의한 다음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런고로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이 자기 구원하실 자를 스스로 구원하신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밖에 나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여러분, 그것이 절대주권을 믿는 것입니까? 우리 주께서 명령하신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이 단순한 말은 안 믿고 하나님 주권 믿는다고요? 객관식으로는 잘 알아듣는 말이에요. 그런데 주관적으로 살아있는 신앙이 저들에게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마지막 대화를 한 후, 자기 동생인 마리아를 예수님께 인계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니까 마리아가 쫒아 나옵니다. 그리고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울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했을 것입니다."(32절) 여기까지는 마르다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무 말이 없습니다. '주님, 이것이 내 형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 슬픔입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오빠가 죽었기 때문에 이 슬픔을 나는 가눌 길이 없습니다.' 라는 뜻으로 울고 있는 마리아입니다. 마르다는 척척 정답도 말할 뿐 아니라 "주님, 당신 이렇게 해야 됩니다." 라고 까지 지시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아닙니다. '내 모든 형편, 처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하고 그대로 내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신 주님께서 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큰 짧은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우시니라."(35절)영어 성경에는 그냥 두 단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한 단어입니다. 울고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들은 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신 분들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다시 만날 텐데 뭐, 천국에서 영광의 자리에 계실 텐데, 그래서 안 울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마리아도 울었고, 마리아 보시면서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슬픈 것은 슬픈 것입니다. 천사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생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을 눈물로 표현합니다. 이 땅에 오셨던 참 하나님, 예수님, 그러나 참 육신을 가졌던 고로 슬픔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셨고, 이 슬픔의 원인 자체를 분하게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은 창자가 갈라지는 듯한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창자 끊어짐이라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우는 모습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그런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젊은 사람이 세상 떠나면 원통하겠다. 그래서 슬픔이 더 클 것이다. 오래 오래 함께 사시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질력이 나서 별로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더라고요. 살아왔던 세월의 모든 정이 얽혀서 슬픔으로 타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는 아예 죽으실 각오를 하고 사시는 것 같아요. 병원에 안 가시려고 얼마나 그러시는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10톤 트럭에 반친 충격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에 대해서 우리는 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한번은 홀아비 됩니다. 한번은 과부 됩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피해요. 아무도 순서가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될 날이 반드시 옵니다. 이별의 땅에서 한번은 이별을 합니다. 그 깊은 좌절과 고통을 겪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고통과 아픔을 보시고 우셨단 말이에요. 우리 주님, 눈물을 보이시는 분입니다. 히스기야가 우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가 나를 향해서 눈물과 간구로 나오는 것을 내가 보았다. 네 눈물을 보았다"(사 38:5)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 눈물을 보십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 그 아픔의 고통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 주님은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내가 울 때, 함께 우신 주님입니다. 그 깊은 아픔의 고통을 찾아가셔서 아무도 위로할 수 없고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까지 쫒아 가셔서 함께 우신 주님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우시는 주님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우리 하나님은 보십니다. 자녀 문제를 내어놓고 울면서 기도하는 부모의 눈물의 기도를 우리 하나님은 보십니다. 보실 뿐 아니라 아무도 위로 해주지 못하는 그 슬픔의 깊은 골짜기까지 찾아오셔서 함께 우시는 주님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과 21장 보면 우리가 천국에 입성할 때, 그분이 쫒아 나와 우리를 맞이하시면서 가장 첫 번째 행하시는 동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두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세상과 다른 것은 눈물이 없습니다. 다시 곡하는 것이 있지 않은 땅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아프면 아프다고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십시오. 교만 떨지 마십시오. 약하면 약하다고 내놓으십시오. 울고 싶으면 주님 앞에 실컷 우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슬픔을 아십니다. 우리의 간구를 아시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만은 어느 때든지 내가 울 때 나와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내 두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눈물의 의미를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시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무덤에 같이 가셨습니다. 돌문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굴을 파놓고 그 굴속에 사람의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그래서 동물과 다른 사람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큰 돌로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9절에 "돌문을 열어라."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을 참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그 영광에 함께 참여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혼자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할 여분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에 비하면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내가 겸손을 가장한 게으름으로 내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죄입니다. 무덤 문을 열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먼저 감사 찬송을 돌립니다.
41~42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돌리고 난 다음에 고백합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상 내 밀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을 믿습니다. 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6장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6장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8장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일이 제자들과 사랑하는 유대인들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42절)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F.B. 마이어라는 성경학자가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만약 주께서 그냥 나오라고 했으면 그 동산에 있는 모든 시신이 다 일어날 뻔했는데, 나사로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나사로만 나왔다.' 우리 주님은 정확하게 나사로를 아셨습니다. 여러분을 알아요. 나를 아셔요. 그 날에 나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내가 하늘 끝까지 날아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고 내가 저 음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거기서도 나와 함께 하셨다"(시 139:8)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 십니다. 빛이 있으라. 명령하시매 빛이 생겼던 그 분의 말을 누가 감히 어길 수 있습니까? 낙원에 있던 그 영혼은 낙원 문을 열어서 썩어 문드러진 시신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고, 그 말씀을 따라 썩었던 시신이 다시 소생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우리 주님 부활하실 때는 그의 세마포가 그대로 포개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또 우리에게 할 일을 맡기십니다. 영적으로 이런 일은 참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죽었던 인생, 하나님과 우리 주님과 그 사람 사이에 막힌 돌문을 우리가 열심히 열어놓으면 주께서 그 영혼을 불러내십니다. 예수 안 믿을 것 같던 친구들이 장애물을 제거해서 치워놓으면 주께서 그 영혼을 살려주시더라고요. 살려주시는데, 가만히 보면 이제까지 살았던 인습, 이제까지 살았던 삶의 습관, 이런 것에 둘둘 칭칭 얽어 매어가지고 신앙생활을 잘못합니다. 그것을 먼저 믿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풀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마음껏 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우리 주님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주께서 명령하셨습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순종하는 사람들이 가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