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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김재화의 유머 풍속사] ① 이승만 편 ②윤보선 편 ③ 박정희 편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89 15.06.15 19: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김재화의 유머 풍속사] ① 이승만 편

 

전방에서 총 맞은 병사 ‘빽’ 하고 죽는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에 참석한 맥아더 장군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백성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 역할에선 왕(대통령)과 광대(코미디언)에게 같은 임무가 주어져 있다고 본다. 대통령은 코미디언의 대중성과 호감이 필요하고, 코미디언은 또 다른 의미의 권위와 신뢰감을 갖춰야 하기에 그렇다. 정치 선진국일수록 이런 구도가 뚜렷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한국은 통치자 1인이 전횡하는 정치구조여서 정치현실상 유머가 수용될 공간이 아주 좁다. 집권당과 야당이 상대 당을 전투개념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가.

일제지배, 6·25전쟁,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며 우리 서민들이 갖고 있던 해학은 약화되고 말았다. 말꼬투리를 잡아 난리를 치려 잔뜩 기다리는 판에 건전한 재담이 나올 수 없을뿐더러 유쾌한 조크가 환영받지도 못한다.

 

한국 정치판에서 ‘쇼’는 ‘속임수’로, ‘코미디’는 ‘저질 실수극’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의 의회에서는 ‘쇼’나 ‘코미디’라는 말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

왜 한국인들은 짜증스러운 정치인들의 행태를 ‘즐거워야 할’ 코미디에 비유하는 걸까?

한국 정치판 메커니즘이 코미디언의 세계와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건국시기부터 그랬다. 돌아가 보자.

 

일왕의 항복으로 맞은 8·15광복. 민족의 미래는 불투명했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데 광복을 맞은 지 열흘이 지나기도 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했고 나흘 뒤엔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때 천재시인 박봉우가 외쳤다.

“산과 산이 마주하고 서 있는 땅을 밟고, 요런 자세로 꽃이 돼서야 쓰겠는가?”

하지만 시대를 날카롭게 꿰뚫어본 지식인의 은유는 우매한 백성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대신 코미디언 명진과 박응수가 미국사람들과 비슷한 하이칼라 양복을 입고 다소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게 속지 마라! 일본은 일어나니 조선아, 조심하라!”

 

특히 가난에 찌든 반쪽 나라 국민들의 분노는 반일감정으로 표출됐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을 골탕 먹이는 코미디는 지금껏 단골메뉴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개그맨 필수코스, 이승만 성대모사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 최대 비극 6·25 전쟁을 막지 못했다. 그가 외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지금도 코미디언 지망생들의 성대모사 기본 예문이다.

난리 틈바구니에서도 부패는 극에 달했다. ‘빽’과 ‘돈’은 그때부터 서민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전방에서 총에 맞은 병사들이 ‘빽’하는 비명을 지르고 죽는다는 자조 섞인 우스개가 나돌았다.

 

이 무렵 시장에서 만병통치약을 파는 ‘개그맨(약장수)’들은 최고위층을 향해 비수와도 같은 유머를 날렸다.

 

“이승만은 ‘삼신할미’라네!” 외교에는 ‘귀신’, 내무에는 ‘병신’, 인사에는 ‘등신’ 이라는 풍자가 여기에 숨어있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거리의 코미디언들이 뿜어낸 독설에 귀 기울였다면, 아마도 하와이 망명이라는 불행은 면하지 않았을까? 아님 말고!

 

이승만의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위해 이른바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억지 산술을 유행시켰다. 재적의원 202명 중 3분의 2는 135명인데, 이것은 사사오입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담꾼들은 무대에서 말했다.

 

“이봐 친구, 꿔간 돈 갚아야지.”

“여기 있네.”

“아니, 60환뿐이잖은가? 난 100환을 빌려줬는데.”

“이런 사사오입 원리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구먼. 60을 반올림하면 100이 되잖은가?”

 

이승만 대통령은 소심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신의 권력을 누가 훔쳐 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밤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런 사람에게서 유머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선거 때마다 “이번 ‘이승만대통령선거’에 누가 출마한대요?”라는 식의 가치의식이 실종된 말들이 유행했다.

1인 독주에 혐오를 느낀 사람들은 입담꾼의 혀를 빌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풍자를 해봤지만, 기득권층은 어용 코미디언을 동원해 “갈아봤자 별 수 없다”라고 받아쳤다.

사람들은 기운을 잃고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으며, 영국의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길 바라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화투놀이에 ‘나이롱뽕’이라는 게 있다. 같은 패가 석 장이면 다른 사람이 내질 않아도 던질 수 있는 ‘자연뽕’이 된다. 이승만은 신익희의 급서와 조병옥의 병사 덕에 ‘자연뽕’을 치기도 했다.

 

우리 현대정치 초기에 유머가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내용과 표현방식이 사뭇 음울했다는 얘기다.

 

 

*세상을 내게로 당겨주는 유머화술

 

Tips. 노래는 연습하면서 유머는 안 해도 된다?

 

누구나 집에 엄청 웃기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기계가 있다. TV다. 개그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는 당신이야말로 최고의 유머리스트다. “개그맨 해도 되겠어”라는 칭찬을 들었다면 이미 해학대가로 인생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볼 때는 알겠는데, 막상 해보려면 잘 안 돼”란 얘기를 많이 하는데, 맘 속으로만 시도해서는 안 된다.

노래는 수도 없이 반복해 따라 부르며 익히면서 개그는 왜 단번에 하려 드는가. 맘에 드는 코너를 녹화해 놓았다가 몇 번씩 반복해 본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방송 개그 코너, 흉내낼 수 있는 개그맨이 분명히 있다. 개그 CD를 차 안에 넣고 다니며 들으면 노래처럼 외워진다.

노래는 가사와 음정을 틀리지 말아야 하지만, 개그는 비슷하기만 해도 대박 나고 자기만의 것으로 응용 가능하다. 방송에서든 실생활에서든 재미있는 말 들었으면 얼른 메모해 놓는다.

미팅에서, 선보는 자리에서, 취직 면접에서, 축사나 자기소개하는 자리에서 ‘개인기’가 필수인 세상이다. 어려운 음치(音癡)도 고치는데, 소치(笑癡)를 왜 못 고치겠는가.

 

 

 

 

[김재화의 유머 풍속사] ②윤보선 편

 

한국영화 전성시대였던 1960~70년대 활약한 불세출의 희극배우 서영춘(1928~1986)

 

 

서영춘, 숨 거두기 직전에도 폭소 자아내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육사를 나오든가 상고를 졸업하거나 서울시장을 지내야 한다.

4대 대통령 윤보선은 마지막 요건에 해당된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됐으니까. 윤보선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입후보해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1962년 사임, 1963년 전두환의 ‘민정당’ 아닌 다른 민정당(民政黨)을 만들어 대통령되기 쟁탈전에 나가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1패, 1967년 6대 때 박정희에게 다시 패하여 2연패.

 

윤보선 대통령은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한 고고한 선비로 지조 있고 서양식 매너가 넘치는 국제신사다. 일제시대에는 나라 잃은 설움 때문에 밥을 일부러 굶기까지 했다는 강직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인으로는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영국신사인 그가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마다 TV에 자주 나왔던 영국 코미디 <미스터 빈>의 로완 와드킨슨을 왜 닮지 못했을까?

 

미스터 빈은 자신의 이익이 보이면 다소 치사해 보여도 얄미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땅에 떨어진 음식도 다시 집어먹고, 새치기도 하고, 교통신호도 눈치껏 위반한다. 하지만 윤보선은 굶어 죽어도 땅에 떨어진 음식은 먹지 않고,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고, 빠져 죽어도 개헤엄은 치지 않는 선비였다.

정치가의 풍모는 있었으되 정치꾼의 사술은 없었던 것. 만일 그가 미스터 빈의 코미디를 접할 수 있었거나, 미스터 빈이 윤보선과 같은 시대에 활동해 그 연기를 보여주기만 했어도 한국사회 민주화는 훨씬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윤보선은 5대 대선에서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적은 표차인 16만 표로 박정희에게 패했다. 그 무렵 윤보선은 잠시 ‘코미디언’이 된 일이 있다.

“박정희는 부정선거를 했어. 그래서 내가 정신적 대통령이야!” 라고 외쳤으니까…. 원, 세상에! 대통령 따로 있고, 정신적 대통령 따로 있는 나라가 어딨냐구?!

 

웃음경작지 여의도, 방송사와 국회

 

윤보선과 박정희가 두 차례 정권쟁탈전을 벌일 때 왕성하게 활약하던 코미디언 가운데 양훈, 양석천 콤비와 서영춘, 백금녀 커플이 있다. 그들은 무대와 영화에서 정치가들이 못해준 국민위안을 대신 하느라 그야말로 종횡무진 누볐다.

 

윤보선과 ‘살살이’ 서영춘. 신분은 달랐지만, 같은 시기에 비슷한 일을 하다가 큰 시차 없이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이다. 국민을 상대로 인기를 얻었고 그걸 유지했어야 했던 2인은 처음에는 빵빵 터졌으나 나중에 1인은 대선에 거듭 실패한 것을 빗댄 ‘버선도 버선도 떨어진 버선은?’ 답은 ‘윤보선’  하는 식의 넌센스 퀴즈 대상이 되고 말았고, 다른 1인은 아까운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서영춘은 극장 간판을 그리던 3류 화가였는데, 당시 유행하던 극장쇼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배우 한 명이 펑크를 냈다. 평소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서영춘이 대타로 올라갔고, 데뷔 이후 ‘하늘이 내린 뛰어난 코미디언’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승승장구했다.

그와 친구였던 <전국노래자랑>의 코미디언 송해(1926년생)는 지난 2000년 12월19일 전북 임실의 예원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고 서영춘 동상 제막식 추념사에서 이런 평가를 내렸다. (고 서영춘 동상 비문은 그 학교 교수였던 필자가 썼다.)

 

“아, 영춘이! 그대가 외쳤던 말, 지금 생각해 보면 60년대 70년대 사회를 향한 통렬한 질타였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예언이 되는 교훈이었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없던 시절 아무 거나 잘 먹자는 소리였으이.

뿐인가? ‘살살이 요건 몰랐을 거다’ ‘배워서 남 주나’는 면학을 장려한 말이었고,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 없으면 못 마시네’ 이 말은 가진 것을 잘 활용하라는 일침 아니었나?”

 

필자부터 서영춘을 위대한 코미디언이라고 보는 이유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사람들을 웃겼다는 데 있다. 병문안 간 여러 후배 중에 최고로 잘 나가는 이경규가 있었다.

곁에 있는 그를 보고 겨우 입을 연 서영춘 “경규야, 요즘 어떠냐?”

당시 실의에 빠져 있던 이경규 “(무심코)아이, 죽지 못해 살고 있죠!”

잠깐 미소 지은 서영춘 “나는 살지 못해 죽는다…!”

 

죽어가는 이 앞에서 엄청난 폭소가 일었다.

 

사람이 편안하고 즐거울 때 짓는 가장 보편적 감정표현이 웃음이다. 중요하고 재밌는 사실은 먼저 웃어도 우리 몸은 편안한 상태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웃음의 마력이다. 요즘 웃음경작지는 여의도다. 방송사 개그맨들과 의사당의 국회의원들이 웃음을 심고 키워내 유통시키는 웃음메이커들이다. 암튼 그들은 국민들을 웃긴다. 서로 웃기는 방법이 크게 다르긴 하지만.

 

*세상을 내게로 당겨주는 유머화술

 

Tips. 듣는 사람이 믿게 하려면?

 

믿게 한다고 거짓말이나 술수로 속이라는 말이 아니다. 유머가 ‘말이 되기에’ 듣는 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치게 한다.

그러려면 첫째, 상황이 합리적이어야 한다.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맞았다”는 말은 과장으로 웃기는 것일 뿐. 갈팡질팡하는 말이 웃길 수는 있어도 고급 유머는 되지 못한다.

둘째, 조크라고 수치가 틀리거나 인명·지명이 엉터리여선 안 된다. 강성범의 지하철 1호선 역명 대기는 정확해서 찬사를 받았던 것이다.

셋째, 자기 역량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말한다. 능력이 20인 사람이 90 이상을 얘기하려 했다가는 고개를 갸웃하게 할 뿐이다.

넷째, 가능하면 본인의 경험을 유머 소재로 삼는다. “~가 그러는데…” “책에서 봤더니…” 등을 전제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간접경험으로 알게 된 특이한 얘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현이 생생하지 못하고 불명확한 정보를 말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가능하면 확실한 직접경험을 말하는 게 호응을 얻는다. 오락 프로그램 패널들이 토크쇼에서 말할 때 남에게 들은 극적인 경우보다 소박한 자기 경험을 말하는 것을 많이 보지 않았던가.

 

 

 

 

[김재화의 유머 풍속사] ③ 박정희 편

 

1965년 5월31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연예인들을 접견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위키리, 곽규석, 구봉서, 박재란, 이미자씨 등 <사진=정부기록사진집>

 

 

정권호위 ‘수훈갑’ 코미디언들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박정희는 코미디와 코미디언을 정권 홍보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했다. 전 국민 일체화가 필요한 정권은 모든 사람들의 촉각을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화 과업에 바쁜 박정희정권에게도 딱 그것이 필요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라며 “바보처럼 만족하며 사니 이 얼마나 행복하냐”고 내세운 사람이 바로 배삼룡이었다. 국민을 ‘행복한 바보’로 만들던 시절, 1등 공신은 단연 코미디였다. 좀 과하게 말하면 배삼룡은 ‘전 국민 우민화 작전의 총사령관’, 또 하나의 혁명 기수였다.

 

최정호 연세대 신방과 교수는 당시 시대상과 배삼룡의 관계를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근대화 기차가 시동을 걸고 산업화 비행기가 이륙 엔진을 켤 때인 1970년대 배삼룡은 각광받았다. 한국 현대화의 전위적 ‘지진아’ 배삼룡은 그 얼간이짓으로 우리로 하여금 변화하는 시대를 충격 없이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그의 바보행위는 근대화 노동에서 오는 육체의 뻐근함을 잊게 해주었다. 그에게 위안을 받지 않은 근대화 전사들이 어디 있었을까?”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상대적 우월감을 느낄 때다. 나보다 지능이 낮고, 나보다 못생기고,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렇다. 배삼룡이 그랬다. 그는 정부가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눠준 행복의 도구였다. 배삼룡은 도시화 시대에 촌뜨기로, 공업화 세상에 거름 지고 가는 농사꾼으로, 찬란하게 서구화되어 가는 시절에 짚신 신고 나타난 꼴불견으로 박정희 정권이 펴는 모든 정책을 ‘역설적으로’ 찬미했다.

 

배삼룡의 대표적 코미디 ‘양반 인사법’ 은 부를수록 좋은 명곡처럼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명재담이었다.

한 번 보면 지겨운 코미디의 특성을 무너뜨린 특별한 것이었다.

내용인즉, 무식한 두 상민이 양반이라고 속여 혼담을 주고받는데, 등을 맞댄 채 양반 말투를 적은 쪽지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코미디다. 구봉서와 배삼룡이 각각 혼주고, 박시명이 인사법을 적어 주는데, 웃음이 터지는 대목은 모두 배삼룡에게서 나왔다.

 

구봉서 “별 밑에 인사법!”

배삼룡 “그건 제목이오!”

 

구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배 “상면이오. 면상이 아니라.”

 

구 “아명은 일봉이라 하오.”

배 “아명은…(쪽지를 소개꾼에게 보여주며) 이거 무슨 글자요?”

 

구 “으이구~ 심하다, 심해!”

배 “아명은 심해라 합니다.”

 

두 상민이 양반인 체하면서 주고받는 인사가 짧고 경쾌한 박자로 리듬을 탄다. 사람들은 허리가 끊어질 듯 웃어대며 생활의 시름을 잊었다.

박정희를 도운 또 한 사람은 ‘합죽이’ 김희갑이다. 정권 홍보로 치자면 그도 배삼룡 못지않은 수훈갑이다. 1940~50년대 이산의 한과 모정, 애향을 그리는 대다수 대중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김희갑은 이미 30대부터 60세 이상의 노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김희갑은 유려한 말솜씨로 라디오 토크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했다. 누군가가 현 사회행태를 따지거나 각종 규범에 나타난 독소조항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에이 모르는 소리!”하고 핀잔을 줬다. 당시 분위기에서 이 말은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나 들을 수 있는 추상같은 호령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누가 감히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 박정희에게 반기를 든단 말인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김희갑에게 먼저 제동이 걸리는 것이다. 김희갑은 ‘팔도강산 시리즈’로 지방 각 도시의 눈부신 발전을 소개하는 공보담당 역도 완벽하게 수행했다.

 

사회비판엔 “에이 모르는 소리!”

 

국민총화로 잘살아보자고 하던 때 다른 어떤 목소리도 반역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제방공사 완공식을 끝으로 저 세상에 가기 전까지는.

 

구봉서도 어떤 점에서는 본의 아니게 박정희 대대 2중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코미디언이다. 그는 1963년 6월부터 라디오에서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라고 날마다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전근대화된 인물에게 가한 일침이요, 산업화로 가는 길에 ‘민주화…어쩌구 하면서 재를 뿌리는’ 반정부인사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정권홍보 선발대로 감히 거론한 배삼룡, 김희갑, 구봉서가 국민의 편에서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풀어준 때도 많았다. 좌충우돌하는 방식으로 서민들이 감히 저지르지 못하는 미필적 고의 사고를 내는 것이다.

파출소에서 경찰에게 대든다거나, 돈 많은 부자들을 골려 주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때 서민들은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대리 만족을 느꼈다. 나중에 5공 정권도 박정희의 수법을 쏙 대물림 하게 되는데….

 

 

 

By 김재화 말글커뮤니케이션 대표,

‘유머1번지’ ‘웃으면 복이 와요’ 등 TV코미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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