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654호]
또 다른 나
정진명
활을 살피면 활에 속고
살을 살피면 살에 속고
바람을 살피면 바람에 속고
설자리를 살피면 자리에 속는다.
수도 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남 탓을 내려놓을 때
활은 그제야 완성된다.
완성된 활에는
활도 없고
살도 없고
바람도 없고
자리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나' 홀로
또 다른 나를 기다린다.
- 『과녁을 잊다』(학민사, 2019)
*
정진명 시인의 신작 시집 『과녁을 잊다』는 그야말로 "활을 위한, 활에 의한, 활의 시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활로 시작해서 활로 끝을 맺으니 말입니다.
춘천의 박기동 시인께서도 활에 관한 시편들을 시집에 싣긴 했지만
시집 한 권을 통째로 온전히 활에 관한 시로 채운 것은 이번 정진명 시인의 시집이 유일하지 않나 싶네요.
그야말로 '활시집'이라 하겠습니다.^^
시집 속에서 한 편 띄웁니다.
「또 다른 나」
수십 미터 전방의 작은 과녁에 화살을 꽂아넣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양궁이든 국궁이든 말입니다.
누구든 명중을 시키기 위해, 백발백중을 위해 사대(설자리)에 서지만, 명궁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요!
오히려 화살이 빗나갈 때마다 핑계를 찾기 바쁘지요.
활 때문에, 화살 때문에, 바람 때문에, 자리 때문에....
그런데 시인은 그게 아니랍니다.
활은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키는 일이 아니랍니다.
'공(空)'이랍니다.
'공(空)'의 참뜻이 무엇인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참뜻이 과연 무엇인지 여전히 그 실체를 알지는 못 하지만
시인은 아무래도 그 참뜻에 조금은 다다른 모양입니다.
그러니 마침내 이런 시구를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과녁 하나 얻어서 모든 걸 읽고 / 과녁 하나 버려서 모든 걸 얻으니 / 활 쏘는 나를 들여다보느라 / 눈앞에 어른대는 과녁을 잊다."(「과녁을 잊다」)
문득 활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
문득 활을 깨닫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
이 또한 속는 일은 아닐까 싶기도 한... 그런 아침입니다.
2019. 4. 29.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첫댓글 詩 사랑 정모 공지가 떴지요.
이번 정모를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편집장님이 참석 하신다는,
그래서 다래는
목이 긴 짐승이 되어 기다리지요.
강건하셔요.
감사합니다.
다래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