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한, 달보드레한 묘미
秀景 金喆慶
어제 아침, 청소년 인성교육 협의를 위해 한양대 뒤편 홍익교회를 찾았다. 집에서 여유 있게 나선 덕분에 약속 시간보다 무려 4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무인 카페에 들러 따스한 레몬차 한 잔을 뽑아 들고, 교회 앞 공원 의자에 앉았다. 컵을 감싼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어폰을 꽂고 클래식 음악을 틀자, 삼월의 햇살이 잠시 세상의 소란을 밀어내는 듯했다. 삼월 말의 아침 공기는 포근하고도 부드러웠다.
언덕 위 한양대 생활관은 몇 해 전 공사 중이던 모습과 달리, 이제는 단정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그마한 쉼터 공원에는 노란 산수유꽃이 피어 있었고, 오르막길은 이전보다 훨씬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파트 외벽에 걸린 ‘재개발 확정’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 역시 변화의 흐름을 피할 수는 없는 듯했다. 오래전 걸었던 그 길은 여전히 같은 자리였지만, 이제는 한층 더 정돈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단독주택들은 전면 재개발이 아닌, 리모델링보다 한 단계 높은 주거환경 개선 사업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공원 의자에 앉아 내려다본 집들은 나를 자연스레 추억으로 이끌었다. 이곳에 살았던 적은 없지만, 그 풍경은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과 닮아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작은 집들, 그 속에서 피어나던 일상의 온기가 떠올랐다. 귀에는 「쇼팽의 녹턴」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눈앞의 주택들, 피아노 선율, 따뜻한 레몬차, 그리고 봄 아침 햇살의 온기가 어우러져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내가 앉아 있던 그곳은, 언덕 아래 한양대 정문과 마장역 주변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인간적인 포근함이 살아 숨 쉬는 작은 마을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재개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초고층 아파트와 세련된 카페, 편리한 시설들이 들어서는 도시는 분명 발전의 상징이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풋풋함이 사라진 삭막함이 스며들기도 한다. 고요와 변화, 머묾과 이동이 한 장면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묘한 질문과 마주했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새로워지려 하는가. 그 새로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낡은 것을 허물고 더 높고 편리한 것을 세우는 일은 시대의 요구이자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그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기억이며 시간이고 삶의 보드라운 결이다. 우리는 발전을 통해 편리함을 얻었지만, 동시에 머물고 사유할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성북동 북정마을의 북향집, 심우장이 떠올랐다. 경복궁 뒤편 성북동 차로에서 좁은 골목길 목재 계단을 오르면, 숨소리조차 낮추게 되는 적막 속에 고즈넉한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툇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만해 한용운 선생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라는 뜻의 심우도에서 이름을 따온 심우장은, 민족시인 만해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공간이다. 조선총독부 건물과 등을 지고 지었다는 그 집에는, 시대를 향한 그의 비통한 의지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 고요한 한옥에서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갔지만, 그것은 결코 현실을 외면한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가장 치열하게 시대를 마주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등짐」은 도피가 아닌 선택이었고,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저항이었다. 그 선택은 개인의 내면을 넘어 결국 사회를 향한 「책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세계는 여전히 불안하고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지닌 존재다. 그렇다면 망중한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책임을 다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아닐까. 쉼 없는 노동은 인간을 소모하게 하고, 사유 없는 행동은 방향을 잃게 한다.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더 바르게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 속에서 다시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어떤 방식으로 이 사회에 이바지할 것인가. 혼란한 국제 정세와 끝없는 갈등 속에서 느끼던 번민과 외로움이, 이 순간만큼은 한결 가벼워졌다. 따스한 햇살 아래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보내는 이 망중한의 시간이, 나 스스로 다독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사근동 언덕에서 느낀 달보드레한 정경과, 심우장에서 떠올린 한용운 시인의 시대정신은 묘하게 겹쳤다. 변화된 거리보다도, 조용한 골목길이 내 사유를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언덕 아래 변화된 거리와 여전히 남아 있는 골목의 온기는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인간다운 삶이란 단순히 더 나은 환경에 머무는 그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 속에 있다는 것을. 망중한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조용한 나침반이자, 사회를 향한 책임을 다시 새기는 내면의 시간이다.
나는 눈을 뜨고 식어가는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한층 또렷해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시가 더 나아지되, 반드시 더 인간다워지기를 바란다. 높아지는 건물만큼 삶의 깊이 또한 함께 자라나기를 바라며.
망중한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내며 한 가지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공원 의자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약속 장소를 향했다.
첫댓글 鑑賞 잘했습니다.
김선생님의 망중한을 몰래 엿보듯, 살곰 읽었습니다. 저또한 개발에 태해 많은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