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간 동생이 편지와 함께 이 장문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간부 PC실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 까페에 글을 못올리고 있다고요. ^^;;
그 녀석의 열정이 대단하고 귀여운 동생의 부탁이라…열심히 쳐서 올리긴 하는데 명칭과 용어에 익숙치 않아서 오타가 있어도 양해바랍니다.
@ : 노리치의 주석
* : 내 주석
그 당시에 그는 물론 이탈리아의 주인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재위 초기 이탈리아 반도는 888년 케롤링거 제국의 붕괴 이후 혼돈 속에 빠져있었다. 이제 이탈리아의 왕관은 힘과 야망 그리고 도덕성의 결핍만 갖추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방제국을 이루는데 중요한 주춧돌 그 자체이기에 이제 이탈리아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이탈리아 토착 귀족세력과 이웃 나라의 야심가들이 다투는 상황이 되었다.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것은 롬바르디와 북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은 사실상 헝가리의 수중에 있었고 해안가는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로뱅스에 성채를 구축하고 있는 이슬람 해적들의 지속적인 약탈로 인해 거의 그들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 : 이들 사라센 해적들은 약 한세기 동안 존속하며 주변 인근 마을들을 완전히 황폐화시켰다. * : 896년 불가르의 시메온과 페체네그족의 합공으로 카르타피아 분지에 정착한 이들 마쟈르인들은 945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이 책에 나오는 작센의 오토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약 50년 동안 중부 유럽에 아틸라의 공포를 다시 떠올리게 할 정도의 약탈을 일삼고 다녔다. 이들의 무장은 경갑 위주의 기마 궁수들로 번개 같은 기습으로 노략을 일삼았다. 아우구스부르크 패전 이후 이제 그들은 그들이 그동안 괴롭혀 오던 주변 이웃 왕국의 역공으로 존립의 위기에 빠지는데 여기서 헝가리의 지도자들이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과 동화되기를 원했다. 처음에 이들은 비잔틴제국에 먼저 그들의 그리스도교로의 전향 의사를 타진했으나 제국의 미온적인 반응으로 제국은 향후 그들의 중요한 우방일 될 수 있는 세력을 놓친다. 서기 1000년 초대 황제로 이쉬트반 1세가 등극함으로써 초기 헝가리 왕국이 성립되었고 이제 이들도 서유럽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다. 이들 왕국의 명칭이 헝가리라 불리게 된 이유는 앞서 그들이 약탈 행태가 훈족과 닮았다 해서 훈가르라 그들을 부른데서 왔지만 그들은 훈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들의 조상은 우랄 산맥 근처에서 이동해왔다. 따라서 종횡무진 동로마사 274페이지에 나오는 역자의 주석에서 “훈족의 후예였던 탓으로” 라는 말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그것은 단지 당시 서유럽인들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외대 헝가리과 일원인 내가 보장하는 바이다. -_-;;)
가장 최악의 상황은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교회와 교황을 마치 자신들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책에서 포티우스 시대의 페이지에 나오는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앞 전 150여년 동안을 통틀어 가장 교황으로서 성실함과 능력을 갖춘 교황다운 교황이었다.
(* : 그러나 이러한 교황마저도 포티우스에게 (교황 입장에서 보면 한낱 동방교회 총대주교인 사람에게) 그에 의해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필라오퀘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직위 해임 & 파문을 당했죠… 그만큼 비잔틴의 위세가 대단했건만 어찌 13~14세기에는 오히려 서쪽이 필라오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까요 ㅜ.ㅜ)
그의 다음 다음 후임자인 교황 요한 8세는 귀족들의 질시 속에 헤머에 맞아 죽었으며 교황 포르모수스는 896년 죽은 뒤에 무덤에서 파해쳐져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사지절단 당하고 테베강에 버려졌다
(@ : 그것은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이뤄진 일이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후에 그의 버려진 사체는 다시 수습되어 복원되었고 무덤에 재안장되었다.)
최근으로 올라가서 928년에 악명높은 마로지아라고 하는 로마 명문 귀족의 딸이(그녀는 교황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이다) 그녀 어머니의 정부인 교황 요한 10세를 산탄젤로 성에서 목졸라 죽이고 그녀의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교황 세르기우스 3세로 추대했다. 그리고 932년 그녀는 두번째 남편인 아를의 위그와 결혼했다. (그는 불쌍한 교황 요한 10세가 왕으로 승인한 사람이며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남동생을 실명시켰으며 아내를 살해했다. -_-ㅗ) 이들 부부가 머지않아 서방제국의 황제와 황후가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일이었다. 그녀가 첫번째 남편사이에서 낳은 알베르크라고 하는 이름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위그는 도망가고 마로지아는 사로잡혀 산탄젤로 성의 지하 던전에 갇혔다. 그녀는 그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이런한 암울한 배경 속에서 우리에게 10세기의 동방제국과 서방제국 양쪽 모두의 풍부한 소스를 제공하는 중요한 인물이 나왔으니 그가 바로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드프란드 이다. 이미 이 시대의 이야기에서 몇 번 등장한 바 있는 그는 920년 롬바르디가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양아버지는 이미 그에 앞서 위그의 대사로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바 있다. 리우드프란드 자신은 그의 어린 시절을 파비아 궁의 음악 시동으로 보냈다. (* : single pageboy라 언급되는데 ‘종횡무진’에서는 이를 성가대원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문맥 사정으로 볼 때 그것 보다는 그냥 왕이나 귀족의 취향에 맞는 노래를 불러주는 악동이라고 보는게 좋을 것 같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왕은 음악을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위그의 사생활은 불운하게도 깨끗하지가 못했다. 리우드프란드는 필경 귀족으로서 지켜야 할 절도와 음탕한 색욕 사이에서 갈등했을 터이지만 그는 이탈리아와 속주에서 파비아 궁으로 넘칠듯이 공급되는 고급 창부들 사이에서 그의 사춘기 시절을 실로 잘 견뎌냈다. 어쩌면 이러한 문란한 여자들 속에서 느낀 회의감이 그를 교회에 몸담게 했을 터이고, 교회의 직분을 맡고 얼마 안가 그는 위그의 유력한 후계자인 이브레아의 베렝가르 밑에서 수석 비서이자 외교대사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사절로서 949년 8월 그는 외교적 임무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플로의 첫번째 방문의 닻을 올렸다.
리우프란드는 그의 글에서 이 방문의 목적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아 우리를 초조하게 한다. 그러나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같은 시기에 작센의 오토가 메인쯔의 리우테프리드를 사절로 보낸 것을 걱정하여 베렝가르가 이탈리아의 지배자로서의 그의 위치를 그의 경쟁자와 콘스탄티누스에게 확고히 하고자 보낸 것으로 사료된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사절은 베니스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가게 된다. 그리고 9월 17일 보스프러스에 도착한 이들은 곧 콘스탄티누스를 알현하기 위해 안내되어진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의 사저 옆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마그나우라(Magnaura)라고 부르는 – 시원한 산들바람 이라는 의미이다. Fresh breeze – 아름답고 놀랄 정도로 큰 궁전이 있었다. 황좌 옆으로는 금을 입힌 청동으로 된 나무가 있었고 나무의 각각의 가지 끝에는 역시 같은 재질로 된 새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각기 종류에 따라 다른 노래를 불렀다. 황좌 그 자체는 땅 아래에 있다가 일순간에 하늘 높이 올라가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실로 거대한 크기이고 나는 그것의 재질이 청동인지 나무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을 마치 수호하는 듯이 그 옆으로 황금으로 입혀진 사자상이 있었는데 그들은 꼬리를 물어뜯으며 무시무시한 포효를 질러댔다. 그들의 입과 혀는 마치 먹음직스러운 먹이에 군침을 흘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두 명의 환관의 어깨에 몸을 의지한 채 나는 황제의 거소로 안내되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사자는 표효를 질러대고 새들은 노래를 시작했지만 나는 최대한 내 얼굴에 이러한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이곳을 방문했던 다른 대사들과 통성명을 하며 그러한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 : 아마 그러한 것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시한다면 시작부터 콘스탄티누스에게 한 수 먹히고 들어가는 것이겠죠)
그의 앞에서 세 번 절을 하고 고개를 들자 오 세상에~ 황제가 앉은 의자가 땅에서부터 지붕 높이 정도까지 무시무시하게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어떻게 이 장치가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추측하건데 와인을 만들 때 포도즙을 짜기 위해 누르는 거대한 통나무를 끌어올릴 때 쓰는 도르레와 비슷한 원리인 것 같다. 그는 이러한 어색한 상황에서 거창한 인사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로고테테(Logothete)를 통해 베렝가르의 안부를 물어왔고 나는 거기에 적절한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통역가의 손짓에 따라 그의 방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 : 만약 황금나무가 일찍이 테오필루스 황제 시절에 만들어진 그 황금나무라면 우리는 여기서 비잔틴의 제작 기술의 유지 보수 능력과 수준의 척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일련의 이벤트에서 보여주는 리프팅 기어(실물과 같이 움직이는 새며 사자며 의자를 구동하는 장치)는 10세기 당시의 현식적인 기술이다. * : 테오필루스 시대가 829~842년 이니까 어림잡아 83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치더라도 무려 100여년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또한 리프팅 기어는 당시 세계 그 어떤 문명에서도 존재하지 않은 최신 과학기술(?)이다.)
알현을 마치고 나온 그는 오토와 코르도바 칼리프의 사절들이 막대한 양의 선물을 준비한 것을 보고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주인은 그에게 딸랑 편지 한통 – 그것도 거짓말로 가득 찬 – 을 딸려 보낸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개인적으로 콘스탄티누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기에 실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선물들을 마치 베렝가르가 보낸 것인 양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선물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9벌의 훌륭한 황금 갑옷, 7개의 훌륭한 황금 방패 그리고 은으로 입힌 컵과 칼과 창들 그리고 그것들 보다도 훨씬 더 황제가 고맙다고 표현한 4명의 카르지마시아가 있었다. – 그리스 이름을 가진 이들 청년들은 환관으로 쓰여지기 위해 고환뿐만 아니라 성기까지 제거된 자들이었다. 수술은 베르둔의 상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들은 스페인 등지에 높은 이윤을 남기며 수출되곤 했다. – 이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보다 많은 궁금증을 자아낼 수 밖에 없지만 이것에 대한 토론은 하지 않기로 하자. 특히 그 중에서도 왜 콘스탄티누스가 이들 불쌍한 청년들에 관심을 나타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는 실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노예(* 성적노리개로 쓸 수 있는)들을 공급받고 있는데 말이다. 슬프게도 리우드프란드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침묵으로 일관했다. 물론 그가 첫번째 알현 뒤로는 항상 황제를 가까이 할 수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선물이 도착하고 3일이 지난 뒤 그는 크리스마스 만찬회에 초대받았다.
“히포드롬에서 북쪽으로 ‘데칸네아쿠비타(Decanneacubita)’라고 알려진 놀랄만큼 높고 아름다운 궁전이 위치해 있었다…..(중략)…….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에 치뤄진 만찬연에 초대된 손님은 19명이었다. 이 날 황제와 그의 손님들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워서 음식을 먹는 일반적인 예식과는 다르게 식사를 치뤘다. 그리고 식사에 쓰인 모든 식기류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커다란 황금 그릇에 과일이 담겨져 나왔는데 그것을 나르는 틀과 그릇 사이는 3가닥의 굵은 줄로 지탱되고 있었다. 너무나 무거워 그것을 운반하는데는 4~5명 정도의 장정의 힘이 필요했다.
리우프란드의 크리스마스 만찬연 초대는 명확하게 뭐라 얘기할 수 없지만 그에게 실로 잊지못할 기억을 안겨준 일이었던 것 만은 분명하다.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머리 위에 높이 24피트 폭 3피트 정도의 나무 기둥을 세워올려 중심을 잡았다. 그는 결코 손으로 그것을 지탱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중요한 부위만을 살짝 가린 발가벗은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남자가 머리로 균형잡고 있는 나무 기둥 위로 타고 올라가서는 그 위에서 갖가지 묘기를 보여주고는 다시 머리부터 아래로 해서 기둥에서 내려왔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기둥은 마치 남자의 머리에 뿌리를 내린 양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체중과 나무 기둥은 일종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명이 먼저 기둥에서 내려가고 혼자 남은 한 명은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마침내 어떠한 비극도 없이 기둥에서 내려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닫을 수가 없었고 황제도 그런 나의 놀람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통역을 통해 내게 나무 기둥의 균형을 유지한 채 올라간 소년들과 머리로 기둥의 균형을 유지한 남자 중 어느 것이 더 환상적이었냐고 물어왔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그는 크게 웃으며 그 또한 그것을 판단하기가 무지 어렵다고 말했다. 그 역시 모르는 것이었다.
리우드프란드와 리우테프리드 그리고 코르도바 칼리프의 사절들을 비롯한 여러 외교사절들은 외교사절 이상의 대접을 콘스탄티누스로부터 받았다. 콘스탄티누스가 실권을 찾고 1년 후인 946년 시아프 에드 다울라가 포로교환 협상을 위해 사절을 보내왔다. 앞에서 거론한 3명의 대사들이 방문한 해와 같은 949년에 헝가리가 놀라운 영향력을 가져올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들을 통해 그들은 제국에 대한 불가침 의사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그리스도 개종에 대한 의사도 표현했다.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보다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방문이 957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키예프공국의 통치자인 이고르의 미망인이자 어린 후계자의 섭정인인 오르가가 평화 사절로 온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일련의 화려한 환영식의 클라이막스는 그녀가 소피아 성당에서 총대주교 앞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황후 헬레나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았다. 비잔티움인들은 이러한 의식의 결과로 많은 그녀의 백성들이 그녀 뒤를 이어 개종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후의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씨앗은 분명 심어졌다. 그리고 30년 후에 그녀의 손자 블라드미르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 씨앗은 비옥한 땅에 뿌려졌음이 증명되었다.
첫댓글 추가분이 여기있넹
잘 보았습니다.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