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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사적 제502호)는 경주 토함산에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석등, 사리석탑, 당간지주, 석조, 각 건물의 기단과 초석 등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26호)은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毘盧殿)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이 이 부처님에게서 탄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가 이 부처의 응신(應身-부처의 몸: 부처의 삼신인 법신, 보신, 응신의 하나)이라 한다. 비로자나불은 삼세(三世: 과거, 현재, 미래 또는 전세, 현세, 내세)에 걸쳐 항상 설법하고 있으나 부처의 형상은 없고, 일체중생을 감싸 보호하시는 청정법신(淸靜法身)이라 하여, 우주 중심에 있는 불국토인 영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서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이처럼 형상이 없는 부처를 표현하기에는 무척 힘들었다. 그러다 7세기 무렵 중국에서 형상도가 없는 불상이 만들어졌다. 시간은 흘러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비로자나불의 특징은 가부좌를 하고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이라는 수인을 취한 자세를 하고 있다.(단, 비로자나불의 지권인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오른손 아래, 왼손이 위)되어 있다.) 지권인(智拳印)이란 "비로자나불이 짓는 손 갖춤으로 이치와 지혜,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은 본래 하나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비로자나불상이 처음부터 가부좌에 지권인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은 입상(立像)으로 지권인, 시무외인/여원인 등의 수인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비로자나불이 가부좌에 지권인 수인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부터 시작해 널리 펴졌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은 결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右肩偏袒]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두 손은 가슴 쪽으로 올려 지권인(智拳印)으로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 불국사 극락전, 전각 앞 석등과 배례석, 극락전 복돼지 상 -
형태는 한마디로 ‘긴장감이 이완된 장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 보물 제1744호)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 할 수 있도록 꾸몄다.
경주 불국사는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土含山) 서측 기슭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의 지형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와 동측이 높고 서측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으로 지형에 따라 석축을 가구식으로 조화롭게 쌓았으며, 동측 사역에는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을 남북 축선에 배치하면서 회랑을 둘러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불국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중창단확기(大雄殿重創丹雘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불국사 대웅전 전면의 동측에는 다보탑이 배치되어 있고, 서측에는 석가탑이 배치되어 있다. 또,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 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불국사 삼장보살도(慶州 佛國寺 三藏菩薩圖, 보물 제1933호)는 1739년 밀기(密機), 채원(彩元), 서징(瑞澄) 등이 경주 거동사(巨洞寺) 오주암(五周庵)에서 제작하여 불영사에 봉안하였다는 분명한 화기를 남기고 있어 18세기 전반기 삼장보살도 도상 및 화풍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천장보살이 범협(梵夾)같은 지물을 들고 있다든가,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협시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장형의 인물을 배치하였다든가 하는 점은 이 삼장보살도가『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을 근거로 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팔공산 지역과 구미, 상주 일원의 경북 중북부 지역의 결합된 화풍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더불어 삼존을 동일선상에 수평으로 나란히 앉힌 구도는 시각적으로 안정을 구가하며, 인물의 세부 묘사력도 섬세하고 정취하다. 명도는 낮고 채도가 높은 붉은색과 녹색, 황색, 육색 계통을 주조 색으로 사용하여 종교회화가 지향하는 숭고함과 장엄함을 잘 표출하였다. 물론 앞선 시기의 담백한 담채풍의 맑고 명랑한 색채감에 비해 좀 더 짙고 탁해진 느낌은 있지만, 이는 시대적 미의식과 작가의 취향 등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구사된 선묘는 주로 변화가 드문 일정한 선을 사용하였으나, 머뭇거림 없는 붓질도 유려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강조색으로 사용된 백색은 색감이 또렷하게 돌출되어 평면적인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한 점도 기법상 주목할 만하다.
삼장보살도는 모든 면에서 18세기 전반기 불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며, 이 시기 화풍 및 삼장보살도의 도상 등 불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극락전에 봉안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불국사사적기(佛國寺史蹟記)』 가운데 최치원(崔致遠)이 찬한「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毘盧舍那文殊普賢像讚)」의 내용처럼 진성여왕이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의하여 조성한 불상으로 생각되어,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은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極樂殿)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아미타불(Amitabha, 阿彌陀佛)은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살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역사상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은 그가 현화된 것으로 간주된다.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색은 빨강, 상징하는 자세는 선정인, 타고 다니는 것은 공작, 배우자는 판다라, 성은 라가, 상징하는 요소는 물, 상징하는 방향은 서쪽, 상징하는 감각은 미각, 상징하는 감각기관은 혀, 인체에서 머무는 장소는 입이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은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肉髻)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수인은 아미타구품인 가운데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는데 양손의 좌우가 바뀐 것은 불국사비로자나불좌상에서도 보이는 공통된 특징이다.
경주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慶州 佛國寺 靈山會上圖 및 四天王 壁畵, 보물 제1797호)는 1769년에 영조(英祖)의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1737∼?)와 상궁 김씨(尙宮 金氏)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2점의 사천왕 벽화(四天王 壁畫)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조성연대는 영산회상도에만 1769년이라는 연대가 있고 사천왕 벽화에는 조성연대 없이 화원의 이름만 적혀 있는데,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과 안정적인 구도 등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경주 불국사 사리탑(慶州 佛國寺 舍利塔. 보물 제61호)은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리탑은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구성함에 있어 거는 그림과 벽화가 한 세트를 이루는 구성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조선 후기(朝鮮時代 後期) 불화조성(佛畫)의 한 면을 잘 보여주는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慶州 佛國寺 多寶塔. 국보 제20호)이 있는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慶州 佛國寺 多寶塔. 국보 제20호)과 석가탑(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불탑이란 열반한 석가의 유골을 봉안하여 모시기 위해서 만든 부처의 무덤이다. 그래서 탑을 만들면서 탑 내부에 신사리(身舍利)라고 부르는 유골을 상징적으로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는 열반에 들기에 앞서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내가 설한 법과 너 자신에 의지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부처의 설법을 담은 경전인 법사리(法舍利)도 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담아 모셔둔 것이 사리장엄구다. 사리장엄구는 탑의 몸돌과 지붕돌이 차례로 얹어져 각 층을 이루는 탑신부 내부에 주로 위치한다. 발견되는 유물로는 소탑, 금동제 사리함, 불상, 다라니경 등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대표적이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국보 제21호)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 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우주(隅柱: 모서리 기둥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탱주(撐柱: 면석 중간에 일정 간격으로 세운 기둥)를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 하짓날 정오가 되면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국보 제23호)는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紫霞門)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자하문(紫霞門)과 연결된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본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국보 제22호)는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安養門)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안양문(安養門)과 연결된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 조각이 희미해져 있고 현재는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慶州 佛國寺 架構式 石築. 보물 제1745호)은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土含山) 서측 기슭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의 지형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와 동측이 높고 서측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으로 지형에 따라 석축을 가구식으로 조화롭게 쌓았으며, 동측 사역에는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을 남북 축선에 배치하면서 회랑을 둘러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가 있어 대웅전으로 진·출입 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대웅전 서편에 한 단 낮은 사역에는 회랑을 둘러 별도로 구획한 공간의 중심에 극락전이 배치되어 있고, 남측에 있는 연화·칠보교와 안양문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도록 꾸며졌으며, 극락전 동북측에 있는 석축에는 아미타불의 48원(願)을 상징하는 16계단 3열로 조영되어 있는 석계를 통하여 대웅전과 연결된다.
불국사는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歷惠恭世,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國家及畢成...)’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불국사는 아홉 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되어 석조물만 남았다. 창건기의 석조물로는 사찰 앞 석축과 연화·칠보교, 청운·백운교, 석탑 2기, 석등, 사리석탑, 당간지주, 석조, 각 건물의 기단과 초석 등이 있다. 불국사 대웅전 석축은 조선후기를 지나면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크게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23년에 석축과 석조물을 보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복원공사를 위하여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에 중창되었다.
불국사 건축은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축조된 가구식 석축과 조화를 이룬 청운·백운교가 놓였고, 그 앞에는 평지를 이루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구품연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있다. 가람서쪽에 있는 극락전 중심의 구역은 대웅전구역보다 한 단 낮추어 배치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면에 안양문을 세우고, 그 앞에는 연화·칠보교의 계단을 축조하였다.
극락전 주위에는 안양문과 연결하여 회랑이 둘러졌는데 동쪽에는 대웅전 회랑과 연결되어 별도의 회랑을 두지 않았다. 안양문과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꾸민 가구식 석축이 동서로 놓였는데, 동쪽 자하문 앞의 것은 백운교의 계단 위에서 단을 달리하여 상단의 석축을 변화 있게 꾸며 조화를 이루었다. 안양문 앞에서는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석축을 쌓되 중간 중간 칸을 이루어 다듬은 석주(石柱)와 인방석을 가구식으로 걸고, 그 가운데를 자연석으로 채운 행태이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의 하층 석축은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범영루의 돌출부 기둥 밑에는 점차형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석교 밑에서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구역의 서측회랑 하부 석축이 포함되는데,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수직의 석주와 수평의 주두석 및 동자주, 초석, 갑석으로 장방형의 격자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자연석을 밀실하게 채워 넣는 수법으로 쌓았으며, 대웅전 석축은 1단, 극락전 석축은 2단으로 구성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의 지정 가치는 신청 가구식 석축과 연결되어 있는 청운·백운교 및 연화·칠보교는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번에 신청된 가구식석축 또한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조건축으로 건축적 조형미는 물론 그 기법이 매우 독특하여 신라 석조건축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고있다.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제28호)은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백률사는 신라 불교의 융성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예로부터 신령스럽고 유서 깊은 사찰로 인식되었다. 이 약사불은 불국사의 아미타불, 비로자나불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금동불상으로 손꼽힌다. 등신대의 크기임에도 주조기술과 조각수법, 전체적인 비례가 우수한 편이다. 그러나 긴장감이 감소된 불신(佛身)의 형태와 약간 형식화된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양감이 풍부하고 신체의 굴곡을 강조하던 8세기 중반의 불상과는 차이가 있어 8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동방 유리광(琉璃光) 세계를 다시리는 부처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의 협시하며, 12지신장의 주인이다. 부처(藥師如來)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생들의 병이나 고통을 치료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막론하고 섬겨지고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한 손에 보주나 약병을 든 약인을 취했다면, 조선시대 때는 아미타구품(阿彌陀九品)인 약병(藥甁)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삼존불(三尊佛)은 본존불(本尊佛)과 좌우에서 시립하는 보처불보살(補處佛菩薩)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미타 삼존(彌陀 三尊: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 석가 삼존(釋迦 三尊: 석가여래-문수보살-보현보살), 약사 삼존(藥師 三尊: 약사여래-일광보살-월광보살)이 있다.
우주의 부처는 불·물·흙·바람·마음 이렇게 다섯이다. 삼존불이란 없다 석가모니는 부처가 아니고 인간이다 그래서 자신이 이 부처님들을 방해를 할까 봐서 불상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 그 유언을 지키는 사람들은 네팔의 티벳사람들이다. 우리 한국 불교는 잡탕이고, 유언을 지킨게 한가지도 없다.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은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백률사 대웅전(慶州 栢栗寺 大雄殿, 문화재자료 제4호)은 불교를 국법으로 허용해줄 것을 주장하다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 ‘자추사’라는 이름의 절을 세웠다고 한다. 언제부터 ‘백률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이 불상의 우람한 신체와 불의의 선묘적(線描的) 특징에서 조성 연대는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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