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쾌감에 묻혀버린 타자에 대한 관계의 윤리
- 나홍진 감독의 <HOPE>, 장르 영화의 쾌감을 좇다
김 문 홍
2016년 <곡성> 이후에 나홍진 감독은 꼬박 10년을 차기작 <HOPE 호프>에 몰입했다. <추격자>(2008), <황해>, <곡성> 까지는 장르 영화였지만, 나름대로 주제의식이 서사 맥락 안에서 일관되 게 흐르고 있었다. 무능한 사회와 인간의 무력함(추격자, 2008), 구원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파멸하는 인간(황해, 2010), 믿음과 의심,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악(곡성, 2016) 등으로 선명한 주제 의식이 서사의 추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사를 밀어붙이는 집요한 연출력이 섬찟하기까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10년의 은둔 끝에 뚜껑을 열게된 <HOPE 호프>(2026, 156분)는 주제는 단 몇 마디의 상징적인 은유로 슬쩍 내비칠 뿐 시종일관 장르적 쾌감을 좇는 상업영화의 외피를 쓴 작품으로 그의, 집요한 연출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보통 주제 의식은 제목의 함축적인 은유로 드러나게 돼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무슨 희망'이고 '누구의 희망일까? 영화의 후반부에서 차를 버리고 도로 위를 달리던 호포읍 출장소장인 범석(황정민 분)이, 자신의 부하인 순경 성애(정호연 분)에게 "안 그래도 아까 창고에서 본 어린 외계생명체 때문에 기분이 이상한데, 말 좀 그만할 수 없어?"하고 말문을 닫게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창고 안에서 어린 외계생명체를 가둔 것이 빌미가 되어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즉, 그들 외계 생명체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우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르적 쾌감과 주제의 불편한 동거
영화는 예술인 동시에 산업적 속성이 있으니까, 장르 영화의 외피를 쓴 상업영화라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6백 억에서 8백 억까지의 제작비를 투자했으니, 적어도 보통 영화 7, 8 개의 제작비가 들어갔으니, 투자 대비 수익이 들어와야 맞다. 그런데 예술영화도 아닌 상업의 외피를쓴 장르 영화 한 편 만든다고 10년의 제작 기간과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세계영화사에 걸작으로 등재될 영화도 아닌데, 장르적 쾌감이라는 쾌락적 기능에 시간과 돈을 투입해야 하느냐는 점이다.
장르적 쾌감으로서의 상업적 속성과 예술영화의 가치를 결합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도 나홍진이라는 감독의 예술적 고집과 밀어붙이는 뚝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의당 품어 봄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외계생명체가 피붙이를 데려가기 위해 지구를 찾은 것이나,싸우지 않고도 서로 관계의 철학으로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는 실마리는 이미 작품 속에 포진되어 있다.
왜 우리는 정체성이 맞지 않은 존재와는 이를 악물고 싸워야만 하는가.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어린 외계생명체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남자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봐,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지적 수준과 문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타고 온 우주 함선이 산에 부딪쳐 파괴되고, 자신들도 돌아갈 길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실마리만으로도 서사는 관계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개연성이 크다. 그런데 왜 나홍진 감독은 장르적 괘감에만 매달렸는지 의문이다.
상대를 생각지 않는 섬뜩한 폭력 본능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지구인의 가학적 폭력성을 다룬 것 같기도 하다. 휴전선 근처의 비무장지대에 있는 가상도시 호포읍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마을을 초토화시킨 괴생명체를 추적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마치 피에 굶주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냥꾼 성기(조인성 분)의 제보로 출장소장 범석이, 밭 한가운데 도로에 방치된 소의 사체를 살피는 오프닝 시퀀스 장면은 마을 사람들의 생태적 특성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범석이 한 청년의 총을 살피다가 경찰에 신고한 총기류가 아닐 것이라고 넘겨짚자, 성기 일행인 한 청년은 신고했다고 우긴다.
그런데 오프닝 시퀀스 이후의 추적 신 이후부터는, 비무장지대답지 않게 마을 사람들이 총을 일상화하고 있는 것처럼 별별 총이 다 등장하고 있다. 또한 성기 일행의 추적팀이 산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장면에서는, 김밥과 총각김치를 씹어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 같은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입에 욕을 달고 있는가 하면, 온갖 총기류가 모두 동원되어 하나같이 인간의 야수성을 은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지구인의 야수적인 가학 본능을 표집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괴생명체에 대한 불안과 공포적인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에 대한 관계성의 윤리와 철학을 아예 배제하는 모습을 시종일관 보여주고 있다.
달리 생각하면 관계성의 윤리나 철학이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간의 가부장적 폭력 본능을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호포읍의 주민들은 어떻게 보면 한국 전체 남성들의 폭력적인 가학성의 본능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허기야 요즈음의 세태는 지극히 이기적인 풍조로 자신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입에 욕을 달고 사는 폭력성이 난무하고 있는데, 그런 세상의 축소판처럼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관계성의 윤리나 철학이 부재한 세상
어떤 유명 감독은 나홍진 감독과의 인 터뷰에서 이 영화는 장르적 쾌가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장르영화의 결정판으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의 생각은 요즈음 침체되고 있는 한국 영화의 중흥에 대한 일종의 '캄플주사'적인 발언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는 나홍진 감독의 연출적 고집과 독창성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기원하고 있는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떤 인텨뷰 자리에서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를 계기로 3부작을 구상하고 있는 속내를 내비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 그의 진의를 확인하는 듯한 속내가 내비치기도 한다. 괴 생체의 외계인들이 타고 돌아가야 할 우주선이 산에 부딪쳐 폭발하고, 여성 외계생명체인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 분)의 상심을 위로하는 남성 외계생명체의 함축적인 은유의 언어에서, 관계의 윤리적인 철학에서 완전 배제된 외계인의 고립무원이 보여지고 있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3부작을 예언하고 있는 듯한 대화이다.
이 영화는 막혀있던 우리의 속내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장르적 쾌감을 보여주어 흥행 조짐을 예상하게도 한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폭력성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그들 나름대로의 폭력에 대한 근거를 정당화시켜 줄 서사적 완결성이 미흡한 것 같아 아쉽다. 거의 2시간 40분 정도의 러닝타임(상영시간)을 통째로 남성적 폭력성을 보여주기만 해, 뭔가 생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여백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외계인과 관계의 윤리와 철학을 버무려 장르적 쾌감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관객이 이 영화를 통해 그동안 막혀있던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는 장르적 쾌감과, 우리와 다른 대상에 대한 포용적 관계의 윤리를 함께 보여주지 못한 서사적 아쉬움이 크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폭제
나홍진 감독의 장르적 쾌감의 완결판인 <HOPE, 호프>는 이번 제79회 칸영화제 마켓에서 제작비 8백억 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익(선 판매)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작비의 손익분기점 달성을 위해서는 아직도 약 천만 명의 관객 확보가 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계기로 다른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아직까지 우리의 지적인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 3부작 중 2부작이 크랭크 인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 영화의 장르적 쾌감은 배가되어 막혔던 속내를 뚫어주기에는 충분하다. 마지막 엔딩 시퀀스의 고속도로 장면은 장르 영화의 압권이다. 경찰차의 질주와 외계생명체의 추적, 그리고 사냥꾼 성기가 말을 타고 경찰차와 함께 질주하는 장면은 우리 영화의 기술적 수준이 거의 세계적 수준에 버금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씬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장르 영화에 충분히 값한다고, 아울러 연출적 고집과 뚝심으로 밍어붙이는 나홍진 감독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을 만큼 이 영화의 완성도는 뛰어나다.
관객의 긴장감도 배가된다. 특히 범석이 탄 차와 나란히 달리던 외계생명체와 서로 눈이 마주치던 장면까지 완벽하게 계산할 정도로, 이 작품은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그 눈이 마주친 이후에 범석의 마음이 많이 움직였을 것이다. 그는 아마 외계생명체의 눈에서 절망의 섬뜩함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외계인 남녀가 자신들이 타고 갈 우주선이 산에 부딪쳐 침몰하는 것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마치 덧입혀진 것이 들통나는 것처럼 어색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못내 아쉽다. 그리고 초반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줘 관객들에게는 마치 '뒷심'이 없어 보이는 마라토너처럼 갑자기 서사 리듬에 맥이 빠져 보이는 것도 다소 아쉽다. 서사적 리듬과 템포를 고려하지 못한 탓이다. 배우 임현식이 순경 성애 앞에서 외계생명체를 숲속에서 목격하는 장면을 구수한 입담으로 진술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었다. 그래도 10년을 애타게 기다린 보람은 있다. 이런 영화는 집안의 OTT처럼 작은 스크린보다는 극장의 제대로 된 스크린으로, 그리고 '돌비 애트머스' 음향 시스템이 갖춰진 스크린에서 반드시 봐야 제대로 장르 영화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홍진 감독이 구상하고 있는 3부작 완결편을 봐야 이 영화가 마스터피스의 수준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2026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