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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예썰의 전당> [15회] 왕의 무대 – 베르사유 궁전. 2022년 08월 14일 방송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열다섯 번째 주제는 화려함의 극치, 베르사유 궁전
17세기 바로크 건축의 걸작이자, 태양왕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왕의 무대, 베르사유 궁전. 웅장함을 자랑하는 본궁부터 기하학적인 대칭을 이루는 정원, 그리고 거대한 운하까지. 베르사유 궁전은 마치 하나의 도시를 연상하게 할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궁전이 보여주는 화려함 뒤엔 절대 왕권을 꿈꿨던 왕, 루이 14세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평가받는 베르사유 궁전은 어떻게 권력을 위한 무대가 되었을까.
✵ 예썰 하나, 태양왕의 질투,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 프랑스 재무장관,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미술가와 문학가를 보호하고 호화로운 보의 성관을 세웠으나, 자기의 욕심만을 채운다는 죄로 콜베르에게 고발되어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루이 14세(Louis XIV)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을 탄생시키다 17세기 당시의 프랑스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는 유명 건축가와 예술가를 불러 모아 지은 자신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는 호기롭게 왕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푸케의 화려한 저택을 보고 질투가 난 왕, 루이 14세. 그는 푸케에게 누명을 씌워 벌을 내린 후, 보다 더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는 명을 내리는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베르사유 궁전’에 얽힌 탄생 스토리를 들어본다.
✵ 예썰 둘, 루이 14세의 과시욕, 외교 전략이 되다?
한 판 가격= 1,000리브르
휘황찬란한 ‘거울의 방’에 숨겨진 비밀! 루이 14세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한 모습을 담은 천장화부터 고대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딴 방까지. 베르사유궁 곳곳에서 루이 14세의 과시욕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루이 14세가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공간은 단연 ‘거울의 방이다’. 값비싼 거울을 벽면 가득 채운 것은 물론, 온갖 귀한 장식품으로 호화스러움의 절정을 드러내는 거울의 방. 루이 14세는 이 공간을 국가 간 기선제압에 활용했다는데. 거울의 방을 활용한 루이 14세만의 특별한 외교 전략은 무엇일까.
✵ 예썰 셋, 왕의 침실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루이 14세의 혹독한 ‘귀족 길들이기’ 절대왕정을 꿈꾼 루이 14세가 귀족들을 길들이기 위해 선택한 최적의 무대,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의 귀족 길들이기는 매일 아침 왕의 침실에서부터 시작됐다.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공식 의례를 거행한 것. 그러나 모든 귀족이 의례를 참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왕의 선택을 받은 100명의 귀족에게만 주어진 특혜였던 것. 게다가 100명의 귀족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차지할 수 있는 일종의 VIP급의 특권도 존재했다는데. 귀족 간 서열을 만들고, 철저한 차별로 경쟁을 일으킨 루이 14세. 그의 ‘귀족 길들이기’는 과연 성공했을까.
✺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은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 시대에 건설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건설에는 무려 25,000~36,000명의 인부가 매년 동원되었다. 궁전 건물의 면적보다 더 넓은 정원이 유명하며, 별궁으로 대 트리아농 궁과 소 트리아농 궁이 있다.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들이 거주했다.
유럽에는 이 궁전을 모방한 궁전이 많다.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초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세고비아 근교의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Palacio Real de La Granja de San Ildefonso)이나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지은 토리노 근교의 베나리아 궁전(Reggia di Venaria Reale), 폴란드 바르샤바 교외에 얀 3세가 지은 빌라누프 궁전 등이 베르사유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진 궁전들이다.
베르사유에 최초로 궁전이 들어선 것은 1624년으로, 당시엔 U자형의 날개건물 구조의 궁성으로 외벽은 회칠만 한 상태였으나 1634년 모서리 쪽에 방을 증설하면서 현재의 정면부 파사드의 기초가 되는 붉은색 벽돌과 회색빛 귀퉁이 벽인 우석과 일정 간격으로 늘어진 조각상으로 된 파사드로 바꿔졌다. 이때는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으로 지어진 것이어서 큰 의미는 없었다.
루이 13세 사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1651년 루이 14세가 한 번 방문한 이후 1661년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보 르 비콩트를 척도로 삼고, 푸케가 자신의 궁성을 설계한 예술가들인 루이 르 보와 샤를 르 브룅, 앙드레 르 노트르를 시용해 각각 건축, 실내 설비, 정원 정비 등을 맡기면서 1665년까지 베르사유 궁성의 확장공사를 시작해, 궁성 남쪽에 궁성의 파사드와 비슷한 건물 몇 채를 신축했고, 옛날 궁성의 손님맞이 뜰을 대리석 포장을 했다.
이후 1668년 르 보의 개축 계획을 실행해 1670년까지 양 측면에 아파트먼트인 뒤 루아(Du Roi), 들라 헨느(De La Reine)라는 두 채의 날개 건물을 증개축 해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바뀌었고, 정원 쪽도 마찬가지로 양면에 새로 증축된 날개건물과 연결되는 두 개의 날개 건물을 증축했고, 양 측면과 마찬가지로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되었다. 이때 나중에 거울의 방이 들어설 부분이 발코니로 양쪽의 날개 건물과 연결되었다.
이후 1677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왕궁으로 삼겠다는 결정을 했고, 죽은 루이 르 보를 대신해 쥘 아르두앵 망사르를 베르사유 궁전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해 베르사유 궁전의 다음 증축을 계획하게 했다. 그리고 1682년, 루이 14세가 파리에서 베르사유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계속해서 대대적인 건설을 하여 1686년 후면 측 발코니를 개축해 거울의 방을 완성했고, 동쪽 측면 측에서 새로 aile du midi라는 새로운 날개 건물을 신축, 다시 궁전 남쪽으로 큰 마구간(Grande écurie)과 작은 마구간(Petite écurie)이 완공, 궁전과 두 마구간 사이에 aile des ministres라는 l자형의 건물 두 체를 신축했다.
뒤이어 aile des ministres와 aile du midi 사이에 정사각형에 중정이 있는 Grand commun이 세워졌고, 다시 서쪽 측면에 북쪽 날개(Aile Du Nord)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이 신축되어 베르사유 궁전의 전체모습은 지금의 ㅠ형의 구조가 완성되면서 화려한 궁전으로 거듭났다. 또한 귀족들의 권력을 누르고 절대왕정을 확립하려는 루이 14세의 의도에 따라 대귀족들은 강제로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겼으며, 베르사유 시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후로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1710년 북쪽 날개에 왕실 성당인 생루이 성당이 신축되면서 봉헌되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증손자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의 저택인 파리의 팔레 루아얄이 중심이 되고 루이 15세는 튈르리 궁전에 거처했다. 1722년, 성인이 되자 루이 15세도 베르사유로 옮겨와서 다시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몇몇 방을 제외하고, 기존의 바로크 양식의 인테리어 대신 로코코 양식의 인테리어로 리모델링되었고, 1770년 다시 북쪽 날개 끝으로 왕실 극장이 신축되었다.
1789년, 루이 16세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왕가가 민중의 압력에 밀려 거처를 파리로 옮겨오면서 베르사유는 방치되었고 이후 루이 18세나 샤를 10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조의 국왕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및 나폴레옹 3세 같은 황제들도 여기에 머물지 않아 궁전으로서의 기능이 정지했고,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리프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이 프로이센 왕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빌헬름 1세가 이곳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출범을 선언한 흑역사가 있다. 이후 1919년에 똑같은 거울의 방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강화회의가 열려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돼 베르사유 체제가 형성됐다. 현재는 박물관 겸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오디오 서비스가 지원되고 있다.
프랑스 합동 의회(Congrès du Parlement français), 프랑스의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궁전을 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상원은 뤽상부르 궁전에서 의정활동을 진행하며 하원은 부르봉 궁전에서 회의를 진행한다. 다만 헌법개정이나 대통령 연설이 있는 경우 한 자리에 모여야 하는데, 이럴 때 이곳 베르사유 궁전에 모이게 된다. 양원의 모임을 프랑스 합동 의회라고 부르며 La Salle du Congrès(의회당)은 1875년 전쟁 회랑과 시가지를 마주하는 구역 사이의 중정을 개조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물론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 크게 많지는 않으니 관광객들의 관광에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듯. 어차피 보통 휴관일인 월요일에 열린다. 가장 최근에 열린 합동 의회는 2018년 7월 9일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루이 14세가 이렇게 거대한 궁전을 건설한 목적은 다름아닌 절대왕정의 확립이었다.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이 세워지기 전인 1661년 9월 5일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를 체포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체포되기 전 푸케는 믈룅 근처에 자신의 궁정인 보 르 비콩트를 완공한 기념으로 왕을 비롯한 6천명을 초대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다가 결국 그의 부를 횡령으로 여긴 루이 14세의 눈 밖에 나 모든 재산이 몰수당하고, 종신감금형을 선고받았다. 일단 베르사유는 푸케의 궁전이었던 보 르 비꽁뜨(Vaux le vicomte)를 척도로 삼았고, 설계자들 또한 보 르 비꽁뜨를 설계했던 사람들이었다.
베르사유의 건설은 일종의 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오래된 도시인 파리는 여러 세력의 입김이 닿고 있었으며 부르주아, 대귀족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하지만 베르사유는 완전한 신도시라 왕실 이외에는 어떤 지역 권력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그 시대의 랜드마크였다. 거대한 건축물로 왕의 부(富)를 과시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귀족들을 베르사유에 집합시켜서 왕 앞에 줄서기를 하도록 강요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업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의 베르사유 출입을 크게 통제하지 않았다. 정장만 입으면 입장을 허락하여, 베르사유 궁 정문 밖에는 당시 정장의 필수품인 스몰 소드를 대여해주는 가게들이 생길 정도였다고. "왕은 우리의 아버지신데 아버지네 집에 가는 게 뭐 어떰?"이라는 논리였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에 이미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둘러보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가이드북(…)을 루이 14세가 친히 제작하여 민간인들이 베르사유를 구경하고 왕의 권력과 위엄에 감복하도록 했다. 민간인 자랑용(...)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구획과 실생활을 위한 소소한 공간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이외에도 선전 목적으로 공개한 것은 많아 왕실의 일요일 만찬은 누구나 구경할 수 있었는데, 루이 14세가 달걀을 먹는 모습이 최고의 인기였다고 한다.[8] 또 왕비의 출산 장면까지도 공개되었다. 다만 너무 많은 구경꾼 때문에 산모가 기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근대에 지어진 장엄한 건축물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정치적인 목적이 강하다보니 실용적으로는 그리 편안한 공간은 아니었다. 루이 14세 시절에는 사실상 왕의 일상과 사생활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었기에 프라이버시 따위는 고려되지 않았다. 왕의 침실 마저도 귀족들의 접견실로 사용되었고, 국왕의 쇼맨쉽을 위해 민간인에게 개방된 공간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왕이 한번 자리를 옮기는 것 조차도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온갖 요란하고 복잡한 의례로 치장되어 있어서 사생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불편함조차 평생을 감수할 정도의 오기가 있었지만, 그 뒤를 이은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등은 이를 부담스럽게 여겨서 차츰 국왕의 사생활 공간은 분리하기 시작했다.
온통 대리석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이다보니 난방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여름에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지만, 겨울이 되었다 하면 궁전 내의 기온이 그야말로 곤두박질쳤다. 그나마 벽난로가 군데군데 있기는 하였으나 넓고 웅장한 베르사유 궁전을 덥혀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겨울에 왕의 식탁에 오른 포도주와 물이 추위를 견디지 못한 채 얼어붙는 일은 예사였고, 생시몽 공작의 회고록에 따르면 궁정 내에 비장해두었던 향수, 시럽, 도수높은 술 따위을 담은 유리병들도 모두 얼어붙어서 터져버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특히 루이 14세가 베르사유에 들어와 살던 17세기 후반~18세기 초는 소빙하기의 징후로 겨울추위가 유난히 혹독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이 궁전에는 물도 없었다. 정확히는 궁전 인근에서 물을 퍼올릴 수 있는 지하수나 하천이 없었다. 그래서 세느 강에서 수차를 이용한 펌프로 물을 퍼 와야 했다. 세느강에 설치된 대형 수차는 14대의 바퀴가 짝을 맞춰 이루어진 거대한 펌프 시설이었고 여기서 퍼올린 물을 인근의 600m 고지에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8km에 이르는 수도교를 따라 베르사유까지 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공급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은 단순히 왕과 그 가족들, 그를 수행하는 시종과 호위병 뿐 아니라 지방 각지에서 올라온 귀족들이 상주하던 거대한 아파트 같은 공간이기도 하였다. 베르사유 궁전에 올라온 귀족들은 자신들이 살던 대저택 대신에 각자에게 딸린 작은 방에 만족해야 했지만 이조차도 큰 영광으로 여기며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당시 귀족들의 출세는 곧 국왕에게 얼마나 잘 보이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고생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루이 14세가 노렸던 점이었다. 일례로 국왕이 식사하는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던 귀족들에게는 막대한 부와 높은 관직을 비롯한 엘리트 코스가 보장되어 있었다. 훗날 루이 14세의 사생활을 세세하게 기록하여 프랑스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던 생시몽 공작도 출세를 위해 베르사유 궁전에 상주하던 수많은 귀족들 중 하나였다. 다만 그는 끝내 이러하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커리어를 마쳤다.
◦ 거울의 방,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진 방으로 전체길이 73m, 너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다.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전쟁의 방, 남쪽으로는 평화의 방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왕족의 결혼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장이 되었다.
이 방 전체를 빼곡히 수놓은 357개의 거울들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데, 르네상스 이후 거울 제조법은 베네치아에서 독점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자국의 거울 제조법이 타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베네치아의 거울 장인 2명이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제조법이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다. 물론 이 사실은 타국에는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프랑스가 이 방이 완성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베네치아의 사신들을 초빙하여 이 방을 보여준 것인데, 방에 처음 들어선 사신들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곳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빌헬름 1세가 신생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었고 이를 기록한 그림도 유명하다. 훗날 프랑스는 이를 설욕하고자 이 곳에서 독일에게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시키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역사적 순간을 함께 비교해보자.
독일 제국 선포식 (1871년)
베르사유 조약 서명의 순간 (1919년)
거울의 방에서 탄생한 독일 제국, 반세기도 못되어 같은 장소에서 몰락하였다. 독일의 영광과 굴욕을 함께 지켜본 곳이라 하겠다.
이 거울의 방을 본 따서 만든 건물들이 꽤 많다. 파리 중심에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의 사교장이나 스페인 마드리드의 마드리드 왕궁, 이탈리아 토리노의 베나리아 궁전 등에도 이 거울의 방을 모방해 만든 방이 있다. 특히 오페라 가르니에의 것은 한층 더 화려한 편. 하지만 오리지널에 비해서 너무 번잡한 느낌도 있다. 압도적인 거대함보다는 거울 중심의 화려한 장식 및 천장화가 볼거리임으로 꼭 밝은 날씨에 찾아가도록 하자.
◦ 천장화, 거울의 방 천장 프레스코화.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作, 1681년~1684년
거울의 방 천장 프레스코화.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作, 1681년~1684년
1672년 적군이 있는 라인 강 횡단. 1673년 13일만에 마스트리흐트를 정복한 왕(Passage du Rhin en présence des ennemis, 1672 et le roi prend Maëstricht en treize jours, 1673)
불란전쟁중 라인강 도하를 묘사한 그림. 그리스 신으로 묘사된 루이 14세가 번개를 들고 당당하게 전차를 몰고있으며, 뒤의 헤라클레스는 노에 발을 얹고 있는 라인 강을 공격하고 있다. 승리의 천사는 점령한 도시 톨후이스(TOLUYS) 깃발을 들고 있다. 왼쪽에는 미네르바와 영광의 신이 있으며, 하단에는 가면을 들고 있는 신격화된 스페인이 전차를 멈추려 하고 있다.
왼쪽의 여신은 신격화된 도시 마스트리흐트이고, 이 도시 이름이 새겨진 방패를 군신 마르스가 빼앗는 것으로 마스트리흐트 함락을 암시하고 있다. 오른쪽 말 고삐를 잡고 마르스를 지켜만 보는 여신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유럽 연합군을 상징한다. 이 부분 오른쪽에는 이를 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이 그려지고 있다.
상단 네 명의 승리의 천사는 왕의 수중에 떨어진 네개의 네덜란드 도시;오르소, 뷔데리히, 베젤, 라인베르크를 상징하며, 왼쪽 하단에는 열쇠가 올려져있는 금 쟁반을 들고 무릎 꿇고 항복하는 네덜란드 도시들이다. 오른쪽에는 검과 방패를 들고 있고, 라인을 건너 자신에게 오는 루이 14세를 보고 근심하는 신격화된 도시가 그려져 있다. 여신 왼편에 있는 화살통의 일곱 개의 화살은 아직 함락되지 않은 도시들을 가르킨다.
루이 14세의 말발굽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네덜란드를 상징하고 있다. 가장 왼쪽에 두 개의 왕관과 홀, 날개를 가지고 있는 신은 네덜란드의 야망을 상징하며, 엎드려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으로 야망의 꺾임을 그리고 있다. 중앙에는 네덜란드 상업의 혼란을 나타낸다. 자빠진 신과 펼친 책, 돈주머니에서 쏟아진 돈으로 이를 묘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닻을 잡고 육지로 기어오는 듯한 모습으로 네덜란드 해군의 패배를 나타낸다.
땅과 바다를 무장시키는 왕(Le roi arme sur terre et sur mer, 1672)
왼쪽은 밀 관과 낫을 들고 있는 데메테르 여신이다. 자신의 날개 달린 뱀이 끄는 전차에 곡식을 가득 싣고 온 것은 군대의 식량 보급을 상징하며, 뒤에는 과일이 담긴 풍요의 뿔을 가지고 있는 풍요의 여신이 보인다. 중앙 위의 모래시계와 수탉을 들고 있는 여신은 신중, 경계 이외에도 빠르게 전쟁을 끝낼 것을 상징한다. 그 하단의 아테나는 왕에게 붉은 술이 달린 투구를 씌우려 하고 있으며, 가장 위의 하데스는 턱을 괴고 이 장면을 지켜본다. 아폴론은 축성작업을 감독하고 있다.
그림의 가장 중앙에 루이 14세는 왼손에 검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포세이돈을 가르키며 해군에 대해 대화하는 듯 보인다. 왕 왼쪽에 있는 여신은 선견지명을 상징하며, 컴퍼스와 책을 들고 왕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왕 오른편에는 헤르메스가 왕에게 새 방패를 가져오고 있으며, 헤파이스토스에게 나머지 장비들도 가져오라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다른 한명과 갑옷 및 각종 병장기들을 작업하고 있다. 오른편에는 창을 들고 전차에 오른 아레스가 자신의 군대를 왕에게 데려오고 있다. 또한 아레스와 포세이돈이 둘 다 그림 내에서 전차를 타고, 창을 들고 있는 상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각각 강성한 해군과 육군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네덜란드 네 군데를 동시에 공격하라 명하는 왕(Le roi donne ses ordres pour attaquer en même temps quatre places fortes de Hollande, 1672)
이 그림에서 루이 14세는 세 장군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그림 밑에는 네덜란드 세 도시의 지도가 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지휘봉으로 첫 번째 목표 도시인 라인베르크 지도를 짓누르고 있는 왕은 큰 지도를 보며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의 동생 오를레앙공 필리프에게 라인베르크를 공격하라 명하고 있다. 왕과 같은 단에 있으며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 필리프는 순종의 표시로 자신의 손을 가슴에 얹고 있으며, 지휘봉으로 군대를 준비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옆의 콩데 대공 (Prince de Condé/Prince of Condé)은 부르봉 가문의 분가 였던 부르봉-콩데 가문 출신이었기에 한 쪽 발만 왕이 있는 단에 올려놓고 있다. 왕 오른편에는 백합꽃이 그려진 왕의 투구를 들고 숨어있는 듯한 비밀의 여신이 있다.
튀렌 자작은 강렬한 빨간색 망토를 걸치고, 왕이 있는 단 바로 아래에 두 발이 그려짐으로써, 그가 높은 신분이 아닌 장군임을 확실하게 암시하게 주고 있다. 옆 선견지명의 여신은 컴퍼스를 들고 그늘 안쪽에 왕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있다. 오른편에는 여러 천막과 일반 병사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전쟁의 방, 거울의 방 북쪽에 위치한 방이다. 국왕을 상징하는 방으로, 거울의 방을 통해 왕비의 처소였던 평화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즉, 거울의 방은 구조상으로 볼 때에 일종의 길쭉한 복도이며 그 북단과 남단에 각기 국왕과 왕비의 방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곳이 왕의 침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왕의 침실와 서재는 거울의 방 중앙에 위치하였다. 즉, 전쟁의 방을 통해 거울의 방에 들어서면 그 한 가운데에 왕의 침실이 있었던 셈이다.
전쟁의 방은 국왕을 상징하는 방 답게 대리석과 황금으로 매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한쪽 벽면에는 루이 14세를 신격화한 화려한 조각상이 황금으로 된 장식과 함께 놓여 있다.
◦ 평화의 방, 거울의 방 남쪽에 위치한 방이다. 국왕의 왕비를 상징하는 방으로, 거울의 방을 통해 왕을 상징하는 방인 전쟁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거울의 방이 일종의 복도라면 그 남단과 북단에 평화의 방과 전쟁의 방이 위치하고 있는 구조를 띈다.
전쟁의 방을 통해 거울의 방을 거쳐 남쪽으로 가면 바로 이 평화의 방이 나오는데, 그 곁으로는 왕비의 침실과 접견실, 경호병들의 방 등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왕비의 처소인만큼, 전쟁의 방 만큼은 못해도 몹시 화려한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는 호화스러운 방이다.
헤라클레스의 방을 통해 전쟁의 방과 거울의 방에 들어가서 이곳과 연결된 왕의 침실과 평화의 방 등을 구경하는 것은 지금도 베르사유 궁전의 주요 관람 코스이다.
왕실성당 외부와 내부 전경
◦ 왕실 성당, 부르봉 왕조의 수호성인인 생 루이(성 루도비코)[18]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1689년 쥘 아르두앙 망사르의 설계로 공사가 시작되어 망사르가 죽은 이후 로베르 드 코트에 의해 1710년 완공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프랑스 왕족들의 세례식과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결혼식이 치러졌고, 왕실 가족과 귀족들은 아침 미사에 매일 참례했다. 총 2층으로 구성되었다. 1층은 궁전을 방문하는 관리와 귀족의 자리였고, 2층은 왕족들의 자리였다. 내부에 늘어선 코린트식 원기둥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건물 내부의 수직 비례는 바로크 양식보다 고딕 양식에 가깝다.
◦ 프티 트리아농 궁, 베르사유 궁전 북서쪽에 위치한 별궁으로 루이 15세때 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서 별궁으로 18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졌다. 당대에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왕실 건축가 앙주 자크 가브리엘이 설계를 맡았고 공사는 1762년 시작되었지만 정작 완공된 것이 마담 퐁파두르가 죽은 이후인 1768년에 끝이 났기 때문에 궁전은 루이 15세의 마지막 애첩 뒤바리 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궁전은 왕비나 왕의 애첩들에게 주어졌으며 이 별궁에서 즐겨 머무르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의 두 번째 황후였던 마리 루이즈 등이 대표적이다.
궁전은 로코코 양식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변해가는 18세기의 건축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총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우 간결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내부는 궁전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방 일부가 공개되고 있으며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희귀한 가구와 아름다운 장식품,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 그랑 트리아농 궁, 베르사유 궁전 북서쪽 소운하 근처에 위치한 별궁으로 루이 14세 때 그의 애인인 매트농 부인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유명한 왕실 건축가 망사르가 설계를 맡았다. 공사는 1687년 시작되어 1688년에야 끝이 났다. 단층 건물로 완공된 그랑 트리아농은 아름다운 분홍빛 대리석 외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리석 트리아농’이란 별칭으로도 불렸고 방마다 기다란 창문이 나있으며 기둥의 끝 부분은 섬세한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 내부 또한 매우 화려하며 조각상, 그림, 가구 등을 비롯한 다양한 왕실 장식품 및 예술품 등을 볼 수 있으며 건물 주변에는 잘 정돈된 정원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기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나폴레옹 시기에 다시 사용되었다. 현재는 베르사유를 찾는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종종 국빈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1979년 베르사유 궁전 지구에 포함되어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 베르사유 궁전 지역 내부에 위치한 작은 시골 촌락 형식의 별궁. 18세기 귀족들 사이에서 시골 생활 체험이 유행했는데, 당시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이러한 유행에 심취하여 1783년 촌락 형식의 별궁을 베르사유 궁전 내에 조성했다. 촌락은 커다란 호수를 기점으로 총 10여 채의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전보다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왕비의 집을 비롯하여 시골의 전형적인 물레방아와 그 밖에 다양한 농가 시설, 단층집, 마리 앙투아네트 농장이라 불리는 소규모의 밭 등을 볼 수 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재미 삼아 낚시, 소 젖 짜기, 농작물 재배와 같은 시골 농사일을 경험했다. 오늘날의 전원 생활이나 주말 농장의 시초나 마찬가지.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대리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비디오 게임과도 맥락이 통한다. 현재는 유적의 보호를 위하여 건물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 위생 문제,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 프랑스 귀족들은 정원에서 아무데서나 똥을 쌌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있긴 했으나 그 수는 적었고, 흔히 아는 수세식 화장실과도 거리가 멀었다. 대체로 각 방마다 요강과 구멍 뚫린 의자(chaise percée) 등을 놓고 용변을 처리했다.(퐁파두르 부인이 사용했던 '변기') 그리고 내용물은 하인을 시켜서 정원에 갖다 버리게 했다. 문제는 정원에 분뇨만 따로 처리하는 공간이 없어서 하인들이 요강의 내용물을 정원 아무데나 갖다 버렸다는 것. 당연히 정원 전체가 악취로 가득할 때도 많았다.
루이 15세 치하인 1738년경에 와서야 'Lieu à l'Anglaise'란 명칭으로 영국에서 들여온 수세식 화장실을 궁전 내에 설치했고, 그제서야 악취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19] 하지만 이 수세식 화장실들은 프랑스 혁명 이후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현재 박물관이 된 베르사유 궁에는 궁전 정문 기준으로 궁전방향으로 왼쪽 건물 중앙부에 관광객들을 위한 화장실을 새로 만들었다.
◦ 관광, 파리 관광 시 하루 정도가 베르사유 관광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뮌헨 관광 시 하루 정도가 퓌센 관광으로 채워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 별도의 교통수단을 고려할 수 있는 부자가 아닌 이상 RER을 타는 것이 일반적. RER은 도시교통망이 아니라 광역교통망이므로 일반 패스를 가지고 있더라도 별도의 표가 필요하다.[20] 대신 RER 매표소에서 유레일 패스를 제시하고 RER 승차권을 요구하면 날짜를 하루 까고 표를 받을 수 있으니 현명하게 이용하도록 하자.
루브르, 오르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역시 파리 뮤지엄 패스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 아침 일찍 이동하여 개장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이 좋다. 또한 베르사유 궁의 내부는 사람이든 물가든 당황스러울 수준이기 때문에 빵 혹은 샌드위치를 싸가는 것을 추천.[21] 보통 궁전 내부를 구경하고 나와 정원으로 나오면 딱 점심시간이 된다. 멋모르고 관람 도중 출구로 나오지 않도록 주의. 재입장 시 다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일찍 도착하지 못해 대기 중인 사람이 많은 경우 정원을 먼저 구경하고 궁 내부를 나중에 보는 것도 좋다. 길게 늘어선 줄은 모두 궁 내부 관람대기 줄이다. 보통 궁 내부를 먼저 보고 다들 정원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반대 순서로 돌면 사람을 피해 한적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정원은 궁전 들어갈 때와 달리 표가 없어도 되고 짐 검사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관람은 짐 검사 때문에 궁전에 들어가는 것도 오래 걸리지만 표 사는 데도 꽤 오래 걸린다. 표 파는 창구 왼쪽 방에 티켓을 파는 기계가 있는데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걸 잘 모르거나 티켓 창구를 이용하는 걸 선호해서 티켓 파는 기계 쪽은 한산하다. 일단 표 사기 위해 기다리는 줄은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티켓 기계 쪽을 살펴보자. 어지간하면 10분도 안 돼서 표를 살 수 있다. 이런 것도 귀찮으면 그냥 인터넷 예매를 하고 표를 인쇄해 가자.
일반적인 경우 프티 트리아농과 그랑 트리아농은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좀 더 적극적으로 베르사유를 감상하려는 경우에나 포함되는 코스. 그도 그럴 것이 이곳까지 오려면 베르사유 내부의 이동 셔틀을 이용하거나 3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며, 때때로 특별 전시가 있기도 하다.
사족으로 정원 내부에 심각하게 벌이 많다. 그만큼 꽃과 식물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관람객에게는 공포스러울 수도 있다. 특히나 아이스크림이나 단맛이 나는 식품을 가진 경우 벌이 떼 지어서 몰려드니 조심해야 한다. 립톤은 뚜껑을 닫아도 병 입구로 벌들이 다닥다닥 붙는다. 참고로 내부에 인근 오랑쥬리에서 수확한 오렌지를 즉석으로 착즙하여 주스를 만들어 주는 오렌지 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주스의 양에 비해 꽤 비싸지만 그래도 먹을 만 하다.대신 앞서 말한 벌을 조심하자.그냥 웬만하면 생수만 가지고 가는 게 편하다. 더불어 고양이도 많아서 고양이에 환장하는 사람들에겐 천국이다. 하지만 붙임성은 없으니 무시한다고 슬퍼말자.
분수가 꽤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센 강과 거리가 떨어져 있고 높이도 더 높기 때문에 분수쇼를 하기 위해 물을 멀리서 끌어와야 한다. 지금이야 기계를 쓰지만 예전엔 인력만으로 이걸 유지하는 것도 벅차서 왕의 행차 때에나 겨우 쓸 수 있었다 한다.
26세 이하의 학생은 국적 불문하고 유학사증이나 (국제)학생증만 제시하면 일부 코스는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파리 내 박물관이라면 대부분 통용되니 관람료를 지불하기 전에 유학사증이나 (국제)학생증을 제시하고 무료 관람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베르사유 궁전 운영 측에서 미술 전시도 가끔 병행하고 있다. 한국 출신 작가로는 이우환이 이곳에서 전시를 열었다. 또한 세월호 참사로 논란이 된 유병언이 전시를 열기도 했다. 때문에 돈만 대주면 전시를 열어주는 곳이란 오명을 쓰지 않으려고 여러모로 쇄신하고 있다는 듯.
◦ 창작물, 드라마 베르사유 (Versailles) (2015~2018)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15회] 왕의 무대 – 베르사유 궁전,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