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
이 속담은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된 이래 가장 많이 써먹은 것이다.
나에게 오랫 동안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대부분, 특히 소위 정신증(psychosis)에 해당되는 분들은 귀가 닳도록, 반복적으로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관계 사고(idea of reference) 혹은 관계 망상(delusion of reference)이라는 증세가 있다. 정신분열증, 망상성 장애, 조증이나 우울증 등 다양한 병에서 흔히 보이는 증상이다.
일자리를 알아보다 지쳐서 귀가 길에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았는데 우연히 고개를 돌려보다가 뒷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쳐다보지? 그냥 우연히? 아니면 혹시 저 사람이 내가 실직자란 것을 알고 있어서? 이런 생각 속에 그는 불안해 진다. 다시 돌아보니 그 사람이 씩 웃는다. 야...정말 알고 있구나...그래서 저렇게 비웃는구나..더 이상 그는 버스에 앉아있지 못하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버렸다.
수업 시간이다. 나는 남자 수학선생님을 좋아한다. 어제는 그 선생님의 허리띠 아래 쪽을 보면서 선생님의 성기에 대한 상상을 했다. 그런데 오늘 수학시간에는 선생님이 나와 눈길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제 내가 상상한 불경한 내용을 알고 계시나 보다. 이런 큰일 났네....쉬는 시간에 다른 여자 얘들끼리 이야기 나누며 깔깔 거리고 웃는다. 내가 옆에 갈라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아니 우리 반 애들에게까지 다 소문이 났네? 이제 부끄러워서 난 어떻게 학교를 다니지...
직장에서 나는 창사기념일에 모범 직원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 후로 동료 직원들이 나를 피하고 접촉을 꺼린다. 나를 시기해서 그럴까? 과의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다. 노조원들끼리 쑥덕거리는 폼이 나를 회사의 끄나풀로 생각하는 것 아니야? 이런...퇴근하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렀다. 혼자 한잔 하는데 옆 사람들이 자꾸 나를 흘끔거린다. 건장하게 생겼다. 혹시 나를 미행하는 남자들 아닐까?
남의 평범한 행동을 자신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 관계 사고의 핵심이다.
남과 나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그 사이에는 엄연한 경계(boundary)가 있다. 나는 나의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상대방은 상대방의 그것에 따라 움직인다. 이 분명한 경계가 무너진 것 때문에 관계 사고가 생긴다. 전문 용어로는 자아 경계의 이완(loosening of ego boundary)라고 한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느끼는 것. 이것이 관계 사고다.
학문적으로는 투사(projection)의 정신 혹은 심리 기제(mental mechanism)를 사용한 결과로 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를 남들이 나에게 화내는 것으로...자신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나 죄악감을 남이 나를 비난하고 비웃는 것으로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남을 못 믿는 사람이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서 많다. 열등감이 그 뿌리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나는 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한다. 물론 말로 말이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오만"아니냐... 남들은 자기 앞가림에만도 바쁠텐데 당신에게...당신의 말하지 않은 생각에.. 그렇게 관심이 있어 할 것 같은가? 당신은 나의 마음을 아느냐?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에 꼭 한 마디...정신과 의사인 나도 당신에 대해서, 당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당신이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척 보면 압니다"였으면 정신과 의사하기 무척 편하고 좋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나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다. 고로 자신감이 없더라도, 자신에게 약점이 있다고 느끼더라도, 또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끼더라도.... 당당하게 행동하라(물론 실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죄를 지어놓고도 뻔뻔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이것이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해 주는 도움말이다.
- 전남의대 정신과 최영교수
< 출처 : 서인병원 >
내가 생각한 것, 몰래 말한 것들을 누군가가 알고 있거나 듣고 있다는 가정 속에 살아야 한다면 어떤 상태가 될까?
아이들은 부모에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아이가 부모를 정말 속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비밀을 만들고, 그걸 통해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세우려는 무의식적 노력의 결과로 본다. 거짓말에 부모가 속아 넘어가는 경험을 하면 아이들은 그 순간 부모로부터 잠시나마 독립된 개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사람의 자아가 발달하는 것은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하여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한 내가 세운 자아의 경계선 안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 내 생각을 알거나, 또 내가 하는 말들을 엿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자기가 세워놓은 가상의 경계선이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남의 생각인지 헷갈린다. 심한 경우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고, 나와 얘기하는 사람은 내 마음을 훤히 읽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를 ‘관계 사고’라 하는데 정신분열병 핵심 증상의 하나다.
오래전 뉴스 생방송 중 "내 귀에 도청장치가 달려 있다”고 소리쳤던 한 정신질환자를 기억하는가. 그는 바로 그런 관계 사고 속에 있기에 자기가 항상 도·감청을 당하고 있다고 여겼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저질렀던 것이다.
프로이트와심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