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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코린 2,1-5
복 음 : 루카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오늘의 묵상
유청 안셀모 신부
예수님께서는 고향인 나자렛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군중은 처음에는 그분을 좋게 말하였지만,
곧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분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은총이 주어졌던 일을 말씀하시자(루카 4,24–27 참조)
이내 화를 내며 폭력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들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입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거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복음 말씀에서
‘이 말씀은 나랑 맞지 않아.’, ‘이 말씀은 나와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며,
듣고 싶은 말씀만 골라 듣고는 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늘 달콤하고 편안하면 좋겠지만
그분께서는 우리 삶의 변화를 요구하기에,
때로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신]”(4,30) 예수님처럼,
우리를 붙잡고 방해하는 여러 가지 유혹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데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힘들더라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끈기 있게 실천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디오게네스가 있습니다.
그는 견유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견유학파는 쉽게 말해 ‘개 같은 삶’을 살자는 주의입니다.
개처럼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야 말로 행복한 삶이며,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관한 인상 깊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노예가 이 주인 밑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도망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른 쫓아가서 잡아 오라고 권했지요. 그러자 웃으며 말합니다.
“그가 나 없이 살 수 있는데, 내가 그 없이 살 수 없다면, 노예는 누구인가?”
이런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재물을 소유한다고 해도
오히려 재물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지키느라 불안해하고, 이것들을 불리느라 바쁘고,
잃을까 봐 잠도 못 자는 것이 아닐까요?
재산이 주인이고, 나는 그 노예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맞게 살 것을 늘 명하십니다.
그러나 주님보다 물질적인 것이 더 위에 늘 위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늘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당신의 사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명의 대상은 이렇습니다.
첫째, 가난한 이들입니다.
물질적 빈곤뿐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는
겸손한 영혼을 가진 이들입니다.
둘째는 잡혀간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로,
죄, 사탄, 질병, 사회적 불의의 멍에 아래 묶인 인간 실존의 해방을 이야기하십니다.
셋째는 눈먼 이들입니다.
육체적 시각장애를 넘어 영적 무지와 어둠 속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의 치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선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유하고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구약이 고대하던 메시아 시대의 구원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인격과 현존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워하고 또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면서
인간적인 출신과 혈통의 틀에 예수님을 가둡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관습이나 미래의 막연한 기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 자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해방과 은총을 누리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세상의 것에 익숙해져서
주님의 참된 현존과 권능을 오히려 제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속적인 자기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명의 대상이 곧 우리의 복음 선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참된 은총의 삶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언하십니다.
이 희년 선포는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게 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희년 선포’는 한 마디로,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며,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는 스스로 잡혀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명 선언과도 같은 장면을 전해 준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으시며,
그분의 사명이 무엇인지 밝히신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18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아’
즉 ‘기름 부음 받은 이’로 오셨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말씀 선포’와 ‘해방’으로 요약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힌 이들에게 자유를, 눈먼 이들에게 시력을,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분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었다.
믿음이 없으니 기적도, 구원도, 그들의 삶 안에서 열매 맺지 못했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선언”으로 보았다.
성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목적은 단지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속박된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데 있다.”
(De Orat. Dom. 18 요약)라고 강조했다.
성 이레네오는 이사야의 예언 성취를 주목하며,
“그리스도의 현존은 구원의 현실을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내는 사건”
(Adv. Haer. III,20,2 요약)이라고 말했다.
곧 ‘오늘’이라는 말씀 안에 구원의 시급성이 드러난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시력의 회복이 아니라,
불신의 어둠에서 벗어나 믿음의 빛을 보게 하는 것이다.”
(Exp. Evang. sec. Luc. IV,44 요약)라고 풀이한다.
교회도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인간 존엄의 회복으로 이해한다.
사목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충만히 실현시키기 위하여 오셨다.”(22, 13, 17항 참조)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사명에 동참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작은 나눔, 억눌린 이들을 향한 위로와 정의로운 목소리,
절망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는 희망의 증언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곧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우리 삶의 자리이다.
또한, 우리 안에도 여전히 믿음의 눈이 가려진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익숙함 속에서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주님의 현존을 쉽게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구원 사명을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이며,
우리 또한 이 세상 안에서 작은 해방자, 작은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풍요로운 가을에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계절이 바뀌듯이 우리의 삶에도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떠남과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8월에는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포트워스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 사목하였던 신부님도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바른길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정표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교포 사목을 하며 함께 고백성사를 주었고,
여행도 다녔으며, 사목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은 이웃에게는 깊은 배려를 베풀었지만, 자기의 삶에는 철저하였습니다.
매사에 성격이 급한 저와는 달리 신부님은 ‘산해숭심(山海崇深)’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높은 산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깊은 바다처럼 많은 것을 품었습니다.
말보다는 삶으로, 주장보다는 실천으로
포트워스 본당 교우들에게 사목자의 참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달릴 길을 충실하게 달렸으니, 이제는 잠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충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하시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당 사목은 혼자 끝까지 뛰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사제들이 주님의 뜻을 이어 전하는 이어달리기와 같습니다.
한 사제가 충실하게 달려온 길을 다음 사제가 이어받고,
또 다른 사제가 그 길을 계속 달리는 것입니다.
새롭게 포트워스 한국 순교자 성당에 부임하는 신부님을 환영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새로 오시는 신부님에게 교포 사목을 위한 작은 이정표가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간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고, 오늘 내가 걷는 길은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갑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한 나라의 이야기를 채우면 역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를 채우면 교회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나의 선택과 행동을 채우면 그것이 나의 인생이 됩니다.
서산대사는 이런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걸을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남긴 발자국을 보고 뒤에 오는 사람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른길을 걸으면 뒤에 오는 사람도 바른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된 길을 걸으면 뒤에 오는 사람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목자에게 더욱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사목자는 말로만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사목자의 말과 행동, 선택과 판단, 기도와 희생은 교우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흐르는 시간 속에 성공과 명예와 재물과 권력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시간 속에 나눔과 희생, 겸손과 친절을 채우려고 합니다.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저도 한국을 떠나온 지 8년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채우기보다
제가 원하는 것을 채우려 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주님의 뜻보다 제 계획을 앞세웠고, 기다리기보다 서둘렀으며,
섬기기보다 인정받으려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시간 속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이정표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길은 성공과 권력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길이었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길이었고,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 주고, 죄인을 용서하며, 외로운 이의 벗이 되어주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말씀으로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몸소 걸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국은 오늘도 교회의 길이 되고,
사목자의 길이 되며, 모든 신앙인의 길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오늘 독서에서 참된 사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끈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참된 이정표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이정표는 목적지를 가리킵니다. 사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자신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만 사목자는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목자이고, 교사는 학생에게 사목자이며,
본당의 봉사자는 공동체의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길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심코 남긴 발자국을 누군가가 따라올 수 있습니다.
이제 8월을 보내고 순교자의 달인 9월을 맞이합니다.
순교자들은 말로만 신앙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삶과 피로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들이 남긴 발자국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새롭게 신발 끈을 매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압받는 이에게 자유를 주며,
슬퍼하는 이에게 위로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을 우리 자신에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으시는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30여년 긴 세월 동안 고향 나자렛에서 조용히 공생활을 준비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활을 위해 30년 세월을 기도와 침묵 속에서 준비해 오신
예수님의 모습,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 10여년 세월도 너무 길고 혹독하다고 하소연하는데,
예수님은 장장 30년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출발하셨습니다.
길고도 긴 자기 양성 기간의 결과였는지, 내공이 대단합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원시원하고 거칠 것이 없습니다.
기존의 예언자나 설교가들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말씀이 힘이 있고 깊이가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금의환향하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어서 회당에 들어가시어 성경을 봉독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예수님께 건네졌는데,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한 구절을 찾아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동적이며,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그 희년에 이루어질 엄청난 일들을 나열하시는데,
그 일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예수님 당신의 손으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봉독하신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앉아있던 청중들의 눈이 예수님께 집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 말씀에 대한 약간은 긴 해설의 말씀을 덧붙이시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웬걸! 예수님께서는 딱 한 마디만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 당신의 존재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당신과 함께 머무는 것이 모든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 길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분과 함께 있으면 그 순간이 지상천국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따뜻함과 자상함, 친절과 겸손의 덕은
둘러앉은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기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존재셨고,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즉시 이런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들은 합세해서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벼랑 끝까지 끌고 가 아래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엄청난 박해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분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예견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힘은 빼야 하지만 또 있어야 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의 오늘 강론의 주제는 “힘은 빼야 하지만 또 있어야 한다.”입니다.
사실 힘이 있어야 빼기도 하는 것이지 힘이 아예 없다면 뺄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왜 강론 주제를 이것으로 잡았냐 하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힘 얘기를 하기 때문이고,
저도 힘 얘기를 전보다 자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이 빠지기 때문이고,
그만큼 힘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주 김장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었는데
밭고랑을 내고 퇴비를 밭에 뿌리는 일을 하면서
불과 5년 전과 비교해도 그 일들이 힘에 부치는 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힘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좋다는 생각도 하고
오늘 바오로 사도에게도 같은 가르침을 우리는 받습니다.
코린토에 처음 갔을 때의 그는 약했으며 두렵고 떨리기까지 했지만
자기가 하는 일이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되게 하려 했다고 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바오로 사도는 매우 강했고 두려워 떨던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매우 지혜로웠고 설득력도 대단한 분이었지요.
그러나 그럴 때는 성령의 힘과 지혜를 지니지 못했고,
자기의 힘과 지혜를 믿고 주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데 그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를 당신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의 힘을 꺾는 일을 먼저 하셨고 약해지게 하셨지요.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약해졌을 때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힘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의 야코는 죽이고 성령을 체험케 하심으로 그리된 것입니다.
보통 인간적으로는 힘이 약해졌을 때 마음도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졌을 때, 다시 말해서 심약해졌을 때
갖가지 마음병과 정신병이 들게 되는 것으로 끝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힘이 약해졌을 때
그 힘이 약해진 것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나이 먹어 약해진 것도 나이 먹어서 약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이와 함께 약해지게 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약해진 것을 보약을 많이 먹어서 회춘하려고 들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강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하고
그래서 내 힘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할 수 없게 되고,
마구잡이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면
내 힘을 빼고 성령의 힘은 채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과 여정”
<깨달음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날마다 일기 쓰듯 강론을 씁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밤에 도착한 카톡의 메시지가 좋아 전문을 나눕니다.
이제 60대에 접어든 거의 50년전 초등학교 6학년 때 천주교 신자인 제자입니다.
“‘평범함을 사랑하라’는 시평이 너무 좋아서 제 마음속에 더 깊어집니다.
‘성숙한 영성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은총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저녁을 맞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하루,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하루가 사실은 온전히 선물이었다는 깨달음입니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하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선생님!
<가을공부>시도 너무 좋습니다!
‘가을 들꽃들 자연스레 어우러진 내 마음의 빈 뜨락입니다.’
너무 정겹고 순수한 선생님의 모든 시는 들꽃들 같아요.
편안함을 주는 선생님의 모습처럼요. 오늘도 주신 선물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름다운 편지요 제자의 필력도 참 좋습니다. 중심 말마디는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며,
자유롭게 하고, 순수하게 하고, 단순하게 하고, 진실하게 합니다.
깨달음의 은총이요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특히 신자들에게는 <말씀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과 여정>은 절대적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대로 깨달음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주일미사 중 따뜻한 감동과 충격도 잊지 못합니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음악가 젊은 부부인데,
독일인 남편은 반주하고 한국인 아내는 노래하고 꼬마 아이 둘은 곁에서 놀고 있는데
부부와 아이들간 사랑이 너무 보기 좋아 미사 중 내내 주목했습니다.
바로 노우희 체칠리아 자매로부터 우리 수도형제들 거의 모두가 발성법지도를 받았고
저도 용기를 내어 479장 1절 짧은 성가를 보지 않고 불렀습니다. 제 생애 초유의 일입니다.
그대로 <말씀을 통한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한 성가 3절까지 내용이 은혜로워 자주 나눕니다.
앞으로도 시간되면 자주 부르고 싶은 곡입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기쁘고도 복되어라, 기쁜 이맘 못 이겨서
온 세계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을 날
이 좋은 날 천한 이몸 새사람이 되었으니 이몸과 맘 다 바쳐서
영광의 주 섬기리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새 사람 된 그날부터 주 나의 것, 나 주의 것, 주만따라 살아가며
복된 말씀 전하리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아침 산책 때 마다 동요와 유명 애창곡을 부르지만
이렇게 온몸과 온맘으로 열정적으로 성가를 노래하긴 생전 처음입니다.
주의 말씀 전하는 마음으로 매일 강론을 나누니
<일일시호일> 날마다 기쁜 날, 좋은 날입니다.
그러니 그동안의 무수한 제 자작시들과 강론들
그대로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의 은총 선물>이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아주 예전 봄철 깨달음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한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라는 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동안거를 끝낸 겨울나목들
잎눈들 꽃눈들 임사랑에 활짝 열리니,
오, 찬란한 태양, 광활한 창공,
모두들 깨달은 꽃나무 각자(覺者)가 되었네.
내 존재의 미소함, 공허함, 깨달음으로부터 임 향해 터져 나오는
끝없는 찬미와 감사!
웃음 같기도, 눈물 같기도 한 꽃 같은 깨달음이여!
새롭게 놀랍게 열리는 온 세상이여!
아름다운 사람들이여!”<2007.4. >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깨달음의 결정적 순간을 소개합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출사표와 같고 오도송과도 같은 말씀을 통한 깨달음으로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확인합니다. 이처럼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사랑이요 빛이며 영이요 주님의 현존입니다.
바로 이사야서 다음 내용을 읽는 순간 전광석화 깨달음의 은총이 주님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이사12,1-2>
시종여일 평생 이 깨달음의 말씀대로 사셨던 주님입니다.
깨달음의 샘처럼 그분의 입에서 샘솟듯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모두가 놀라워합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불세출의 진리를 실천하는 각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 생명력을 발휘하는 말씀의 위력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막힘이 없이, 두려움 없이, 샘솟듯 솟아나는 말씀들!
참으로 초연한 대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례를 들어, 무지에 눈먼 고향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만
우이독경이요 이에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자기 길을 갑니다.
고향 사람들은 적대적이 되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유유히, 홀가분하게 떠나갑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러 자유로운 구도자요 각자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한두 번 말씀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평생 <깨달음의 여정>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이래서 영성생활에 렉시오디비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그토록 절실합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불세출의 각자요 대자유인이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 그대로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바오로의 말씀들은 거의 모두가 말씀과 성령을 통해
주님을 만난 깨달음의 고백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참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제가 당신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 가르침을 묵상하나이다.”(시편119,97). 아멘.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승화 시몬 신부
본당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행사를 가능한 줄이고
기도와 성사, 교육에 집중하면 됩니다.
일을 줄이는 만큼 여유가 생기고
사람들 사이에 분란이 줄어들기에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유혹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떠나곤 합니다.
행사를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는 시도
이것저것 나눠주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시도
듣기 좋은 말만 하여 사람들이 위로받게 하려는 시도
이러한 시도들은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행사나 이벤트가 사라지면 사람들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마주한 고향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듣기 좋은 말을 들었을 때에는 예수님을 좋게 보지만
듣기 불편한 말을 들으니 화를 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갔을 뿐이죠.
유혹을 경계하며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주님을 빛이 우리를 통해 더욱 멀리 뻗어나가며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 내어맡길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