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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늪지대>
기원전 209년 7월. 진나라 조정은 마을의 왼쪽에 사는 자들을 북쪽 어양군의 수자리를 서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징발되었다. 그 중 900명 정도 되는 무리가 지금의 안후이성에 있는 대택향이란 늪지대를 지나가게 되었다. 하필 이 무리가 대택향에 접어들자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늪지대에 큰 비가 내리니 당연히 이 무리는 며칠간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어양군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은 확정되었다. 이는 진나라 법에서 금하는 바였고 당연히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 수호지진묘죽간의 일부. -
사기에서는 진나라 법률은 수자리를 서야 될 자들이 기일보다 늦으면 무조건 참수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900명의 무리들이 벌벌 떠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1975년 후베이성 윈멍현 수호지의 진나라 시대 무덤에서 진나라 법률이 적힌 죽간이 발견되었는데 이 죽간에는 수자리, 부역 등에 동원된 사람들이 지각했을 경우 인솔자에게 2개의 갑옷을 벌금으로 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 즉 이렇게 되면 지각하는 것이 죽을 죄까지는 아니었다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어찌 되었든 인솔자들은 지각을 했으니 갑옷 2벌을 벌금으로 바쳐야되는데, 전근대에 갑옷을 2벌씩이나 바쳐야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여기에 고려해야될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수호지진묘죽간에서는 진나라 법률상 갑옷 2벌을 바치면 된다고 하지만 수호지진묘의 주인은 기원전 217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택향에서 900명이 비를 맞고 있는 것은 기원전 209년이다. 이 때는 호해가 즉위하고 조고의 간언에 따라 법령을 더욱 엄하게 하고 부역을 과중하게 부과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진짜로 법령이 부역에서 지각했을 시 사형당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이왕 이리 된 거 한번 크게 일을 벌여보자!" -
이 때 900명의 무리에는 진승, 오광이란 자들도 섞여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둔장이란 하급 인솔자에 가까운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둘은 징발되기 이전엔 소작농도 아닌 머슴으로 살고 있었다. 당연히 갑옷 같은 걸 마련할 재산은 존재할 리가 없었다. 설령 재산이 있었다고 해도 호해가 해당 법을 사형으로 개정했을 경우엔 소용이 없었겠지만.
이들은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쥐가 사람을 문다는 말이 있다. 거기다 진승은 평소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다는 말을 하고 다니고 그걸 주변에서 비웃자 "제비와 참새가 홍곡의 뜻을 어찌 알리오!"라고 할 정도로 꿈이 큰 자였다. 진승과 오광은 이왕 이리된 거 나라를 만들다 죽자고 결의한다.
<왕후장상 영유종호>
진승과 오광은 거사를 결의한
후 점쟁이에게 일의 성사여부를 묻기로 한다. 점쟁이는 일이 성사되겠지만 성사여부는 귀신에게 물어보라고
답하였다. 진승, 오광은 이를 귀신의 위신을 빌리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둘은 흰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쓴 뒤 그걸 900명의
무리들에게 팔릴 물고기 배 속에 몰래 넣었다. 이 물고기를 사서 요리하던 수졸들은 진승왕이란 글자를
보고 당연히 놀랐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오광은 몰래 낡은 사당 앞에 장작불을 피우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며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가 크게 흥하리라!"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더욱 놀라고 동요했다. 이렇게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틈타 평소 사람들에게 인망이 높았던 오광은 술에 취해있던 잔나라 장위 앞에서 모두 도망치자고 소리를 쳤다. 장위는 화가 나서 오광에게 매질을 가했다. 오광은 매를 단단히 맞았고, 사람들은 화가 쌓여갔다. 마침 술에 취한 장위가 아예 오광을 죽이려고 하자 오광은 바로 칼로 장위를 베어버렸다. 진승은 오광이 장위를 베자마자 자신도 나머지 장위들을 베어버리고 무리를 모았다.
- "왕후장상 영유종호!" -
"여러분들은 모두 기한을 넘겼으니 참수될 것이고, 설령 참수되지 않아도 수자리 서면서 죽는 자가 10명 가운데 6~7명일 것이다. 또 장사란 죽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그러자 모두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2) 진승과 오광의 뜻을
따르기로 결의한다.
진승과 오광은
사전 공작도
벌이고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느냐고
했지만 내심
사람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렇다면 가장 쉬운 건 역시 권위가 있는 자를 사칭하는 것이다. 진승 자신은
진시황의 장남
부소를, 오광은 초나라의
장군으로 진나라
이신의 군대를
무찌르고 창평군을
옹립해서 끝까지
저항해 반진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항연을 사칭했다.
사칭까지 한
뒤 둘은
장위들의 목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호를
대초(大楚)라 칭하였다.
진승은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가 되었다..
- "우리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
이들은 일단 대택향의 관아를 급습한 뒤 근처의 기현(지금의 안후이성 쑤저어시)(3)을 공격해 점령했다. 기현을 점령한 뒤 진승은 갈영(4)에게 따로 군대를 떼어주어 기현 동쪽을 공격하게 한 뒤 인근 현들을 휩쓸었다. 그 결과 회양군의 치소였던 진(陳)현에 이르러서는 전차 6~700승, 기병 천여기, 보병은 수만명에 이르는 대군이 되었다. 비록 전차나 기병은 아직 적은 편이었지만 처음 900명의 인부들로 시작한 반란이란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이었다.
이 기세에 놀란 진현의 수령들은 전부 도망가고, 수승(수령들을 보좌하던 직책)만이 초문(譙門)(5)에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회양군 일대가 진승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왕을 칭하는 문제>
진승이 회양군 일대를 장악하자 많은 사람들이 진승 밑으로 모여들었다. 이 중에는 장이, 진여 같이 진나라에 위험인물로 찍혀 수배된 명사들도 있었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진승에게 모여들어서는 그에게 아부하면서 그의 공과 덕, 그리고 통솔의 필요성을 위해 왕을 칭하라고 권유하였다. 마침 그가 있던 진현은 초나라가 수도 영이 백기에 의해 함락된 후 수도로 삼았었던(6) 땅이기도 했다. 진승은 이 제안에 솔깃했지만 그래도 만일을 위해서인지 현자로 이름난 장이와 진여에게 이 문제를 상담하였다.
- "섣불리 왕을 칭하시면 아니되옵니다! 부하들의 이탈 우려가 있습니다!" -
장이와 진여는 진승이 왕이 되는 것은 천하에 사욕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대신 그들은 6국의 후손들에게 자기 나라들을 되찾아주어 우군으로 삼아 동맹을 늘리고, 진나라를 멸한 뒤 함양에서 천하를 호령하라고 조언하였다.
장이와 진여가 이렇게 권유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첫번째로 진승을 도와줄 우군을 여러 개 만들어 진승군에 대한 공세를 분산시키려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두번째로 혈통적 문제도 고려된 것인데 진승 자신은 6국 후손이 아니라는 점이 그것이다. 장이와 진여는 6국 후손이 아닌 진승은 왕을 칭한다면 개나소나 자신들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왕을 칭하며 진승을 배신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물론 진승은 왕이 되고 싶어했다. 그걸 알기에 그들은 대안을 내놓은 것이다. 일단 6국의 후손들에게 다시 나라를 찾아주면 진승은 존왕을 하는 셈인데다가, 6국 후손들은 진승에게 고마워할 테니 쉽게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진나라까지 멸망시키면 존왕, 복국으로 높아진 명예에 진나라를 멸망시킨 거대한 공으로 왕을 칭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경우 춘추시대 패자처럼 다시 살아난 6국의 왕들 위에서 그들에게 호령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 "글쎄... 왕이 되고 싶은데~"
하지만 진승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전개를 보면 진승의 안목이 짧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승에게도 할 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별동대로 보내놓은 갈영은 이 무렵 동성(지금의 안후이성 딩위안현)까지 진격했는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양강이란 자를 초왕으로 옹립한 것이었다.
이 소식이 이 무렵의 진승 귀에 들어갔을지는 알 수가 없다. 만약 이 소식이 진승 귀에 들어갔다면 그의 입장에선 장이,진여가 주장하는 섣불리 진승이 왕을 칭해, 부하들이 개나소나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우려가 있다는 것은 어차피 별 의미가 없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이미 부하 중 한 놈이 멋대로 왕을 옹립했으니 이미 부하의 이탈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 셈이니 말이다. 이미 부하의 이탈 조짐이 보이는 판이니 팔자 좋게 6국 후손들을 옹립하고 왕으로 세우면서 자신은 그냥 장군, 왕 옹립자 즉 속칭 킹메이커로만 있으면서 별 권위 없이 부하들의 이탈을 걱정할 바엔 왕을 칭해 왕의 권위로 부하들을 통솔하고 이탈을 방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위기의 진나라>
- "아몰랑. 어찌 됬든 일단 난 왕이다. 국호는 장초다!" -
어찌 됬든 진승은 국호를 장초(張楚)로 정한 뒤 왕을 칭했다. 그는 채사란 자를 상주국(7)에 봉하고 친구 오광을 가왕, 즉 임시왕에 봉한 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삼천군으로 진격하게 했다. 송류에게는 남양군을 치게 하고, 등종에게는 구강군을 치게 하며 주불(周巿)(8)에게는 옛 위나라 땅을 공략하게 했다. 또한 소평이란 자 역시 자발적으로 진승을 위해 광릉을 공격했다.
한편 자신들의 제안이 거부된 장이와 진여는 진승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여는 진승에게 하북으로 별동대를 보내고, 자신이 하북 지리를 잘 아니 같이 보내줄 것을 청했다. 그 말을 들은 진승은 무신을 대장으로 삼고, 소소를 호군으로, 장이, 진여를 좌우교위로 삼아 하북으로 보냈다.
이 때 진승 밑으로 찾아온 자들 중 주문, 혹은 주장이라고 알려진 인물이 있었다. 진현에서 현인으로 통했던 그는 과거 춘신군의 식객이었고, 춘신군이 암살되고 춘신군의 집안이 쑥대밭이 될 때 운좋게 살아남아 항연의 군대 밑에서 시일(점을 치는 일을 담당하는 자)을 맡았다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용병술을 익혔다고 말하고 다녔다. 사실 그는 항연의 군대에 있었으니 군사 다루는 법을 어느 정도는 알았겠지만 점치는 일이나 했던 만큼 근본적으로 장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막 건국된 장초에서 그 정도면 군사 경험이 꽤 풍부한 편이었다. 진승은 주문에게 군대를 맡겨 함양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 시기 멋대로 양강을 왕으로 세웠던 갈영이 돌아왔다. 그는 진승이 왕이 됬다고 하자마자 양강을 죽이고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배신행위에 가까운 짓거리를 저질렀던 갈영을 진승은 용서하지 않고 처형한다.
- 장초군의 진격로. 다만 이 지도들은 항우, 유방, 전담의 진로도 포함한 것이다. -
그러거나 말거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무신의 군대는 하북을 평정했고, 주불의 군대도 위나라 일대를 거의 다 장악했다. 다만 오광의 병력은 이사의 아들인 삼천군수(9) 이유에게 막혀 형양성을 포위하기만 할 뿐 함락시키지는 못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문의 군대였다. 주문의 군대는 처음엔 소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진격하면서 그 수가 점차 불어났다. 호해가 전선에서 올라오는 보고들을 사실대로 고하는 자는 벌을 주고 도적떼라고 하는 자들은 놔두고 있을 동안 주문의 군대는 계속 진격해 함곡관에 도달했다. 함곡관에 이를 즈음에 주문의 군대는 전차 천승에 병사가 수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으로 성장해있었다. 전차 수만 따지면 만승을 기본 척도로 삼던 전국시대 7웅의 기준에는 못 미치는 감이 있지만 막 건국된 장초 입장에선 엄청난 규모의 군대이긴 했다.
- 함곡관.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가는 입구. 난공불락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
그리고 수십만에 달하는 주문의 군대는 그대로 함곡관을 돌파해버렸다!
이건 중대한 위업이었다. 함곡관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 방어를 담당하던 강력한 방어요새였다. 함곡관은 난공불락으로 유명했으며 전국시대 신릉군이나 합종군을 이끌던 춘신군조차도 돌파하지 못했던 절대방어선이었다. 그런데 그걸 가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잘것없는 무리가, 저소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농기구와 가시나무로 급조한 창을 든 군대가 전국시대 6국의 정예병들도 돌파하지 못했던 함곡관을 돌파한 것이다.
함곡관을 돌파한 주문의 군대는 곧 희(지금의 산시성 린퉁현 동북쪽)에 이르렀다. 이 곳은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 불과 50km밖에 안 되는 곳이었다. 주문의 군대는 수도 코앞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진승이 처음 봉기하고 2달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잔나라는 반란이 최초로 일어난 지 고작 2달만에 망국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 "우리 진나라는 아직 망한 것이 아니다!" -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가는 법이었다.
(1) 이 수호지진묘죽간은 2010년 한국에서도 번역되었다.
(2) 고대 중국에선 어깨를 드러냄으로써 맹세한다는 뜻을 표현하는 관습이 있었다.
(3) 하필 기원전 224년 왕전, 몽무에 의해 항연의 군대가 대파되었던 곳이다. 이 곳에서의 패배로 초나라는 사실상 망하였다. 진시황본기에선 진나라에서 벼슬을 지냈던 초의 왕족 창평군이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초나라 왕이 되어 저항을 했다는 기록도 있긴 하지만.
(4) 제갈씨의 조상. 한나라 시기 갈영의 후손들이 제(諸)땅에 봉해져 제갈씨가 된 것이다.
(5) 성문 위에 세워둔 망루의 문
(6) 기원전 241년경 초나라 주도로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합종군이 함곡관에서 패퇴한 이후 초나라는 불안감을 느껴 진에서 수춘으로 천도했다.
(7) 대장군에 해당하는 초나라의 최고무관직
(8) 주시라고도 알려져있는데 주불이 맞다. 주시라고도 알려진 이유는 활자의 문제때문이다. 저자 시와 슬갑 불은 모양이 비슷하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한자인데 활자를 만들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슬갑 불과 저자 시가 같은 글자인 것처럼 활자가 만들어져 널리 퍼져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9) 군을 다스리는 수령이 태수라 칭해진 건 한나라가 그 시초였다. 진나라는 단순히 군을 다스리는 수령을 수(守) 라고만 지칭했다. 참고로 삼천군은 지금의 뤄양 일대를 가리킨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덧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곡관이 저렇게 좁은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유방 지지자들이 항우를 죽자살자 막는게 가능했던 건가.
그거라면 아주 금방 뚫렸습니다.
험하고 좁으니까 강력한 요새지대가 되는 거죠.. 방어 지역이 너무 넓으면 투입해야 할 병력도 많아지니까요..
왠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진승의 말은 들으면 들을 수록 뭔가 엄한 2차창작 냄새가 난단 말이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