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뜬 기철은 자기가 있는 곳이 처음에는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베개를 베고 이불이 덮어져 있어 어느 모텔의 방안인 줄 알고 언제 모텔엘 들어왔는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 음식상이 처만치 밀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때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차린다.
어제저녁 경숙이 자리를 뜬 후 그녀와의 상련으로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보듬고픈 마음에서 여기에 다시 온 자기가 어부에게 말을 들어 자기가 뻔히 알고 있는 남편을 대한 괜한 물음으로 경숙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스스로에게 화가 난 기철은 경숙을 볼 면목이 없어 소주잔만 기울었다.
그러다 사과를 하고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고 마음을 도사리고 있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그래서 더욱 기회를 잃게 되자 자신에게 화가 더 난 기철은 부지런히 소주를 마시다 고단한 몸에 과하게 먹은 술에 만취가 되어 자기도 모르는 새 그 자리에 쓸어져 잠이 들었나 보다.
출감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잔 것이다.
지치고 술에 취한 탓도 있지만 어쨌든 깊이 잘 자고 잠이 깨었다.
그렇지만 생면부지에 남의 음식점에서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져 세상모르고 잔 것이 쑥스럽고 여자 혼자인 집에 이렇게 결례를 했으니 더욱이 그냥 자게 두면 추위에 안 되겠단 생각에선지 베개와 이불을 가져다, 받쳐주고 덮어주고 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만 잤으니, 여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침에 여주인을 보면 민망할 것 같아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탁자에 음식값을 넉넉히 놓아놓고 소리 안 나게 조심히 문을 열고 나와 조금 떨어진 싸우나 장으로 갔다.
아침에 다른 날보다 일찍 잠이 깬 경숙은 자기가 나와서 소란을 피우면 밖에서 자고 있는 남자가 깰까 봐 잠자리에 좀 더 누워있다가 평소보다 다소 늦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고는 밖에서 자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남자가 자기는 언제인 줄도 모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매운탕값으로 돈도 놓고 나가고 없는 것을 보고는 한편으로 안도의 숨을 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린 남자가 야속하고 섭섭하기도 한 생각이 든다.
낯 모르는 남자와 한집에서 잤지만 아무 탈 없이 지냈다는 안도감이 이제는 그 남자를 영 못 보겠구나 하는 아쉬움과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잠을 재워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야속함이 일었다.
참으로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도 경숙은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남편이 죽고 십 년! 그동안 같은 마을에 사는 남자들이 그렇게 자기에게 접근하여 치근거려도 곁 한 번 주지 않던 여자가, 멀고 가까운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와도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던 여자가, 처음 보는 남자한테 처음으로 술안주를 만들어 주고 잠자리까지 제공하고는 아침에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고 섭섭해하다니, 그 남자가 죽은 남편과 닮은 특수한 점이 그렇게도 나에게 특별한 것이었는가
아니다. 그냥 어떤 남자가 혼자 추위에 떨고 들어온 것이 측은해서 그 남자가 멀리 서울에서 왔다고 하고 지쳐 보이고 술이 너무 취해 동정하는 의미에서 그의 말도 들어 주고 잠도 재워주고 했다고 스스로 변명하면서도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놓친 것 같은 허전함은 떨칠 수가 없었다.
혼자 먹을 아침이라 늘 그랬지만 오늘 아침은 더욱 식사 준비가 싫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벌써 오래된 남편과의 지난 일들이 생각 키우며 경숙을 우울하게 하고 어제저녁 꿈이 경숙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그러다 지난밤 뒤척이느라 부족했던 잠이 들었다.
잠결에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일어난 경숙이 이렇게 일찍 누구인가 궁금해하며 문을 열고 나가다가 주춤하고 멈추어 섰다.
어젯밤 그 남자가 손에 무슨 봉지를 하나 들고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아침 일찍 자기가 일어나기도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고 생각한 그 남자가
기철은 가까운 싸우나 장에서 땀으로 술기운을 빼고 너무 일찍 일어나 좀 부족했던 잠도 보충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열 시 다 되어 싸우나 장을 나오며 쑥스럽고 민망해도 술에 곯아떨어진 자기를 이불까지 덮어 재워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에 음식점으로 오다가 잘 익은 연시를 보고는 한 봉 샀다.
그냥 마주 대하고 말하는 것보다는 과일이라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덜 쑥스러울 것 같아서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자기를 멀끔히 쳐다보고 서 있는 경숙을 본 기철은 웃으며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하고 농을 한다.
그 말에 당황한 경숙이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가신 줄 알았는데.”
“아네! 그런데 또 나타나 염치가 좋다는 말이군요.”
“그런 말이 아니라.”
경숙은 말끝을 흐린다.
자기가 왜 이렇게 당황해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럼 이리 오세요. 오다가 보니 잘 익은 연시가 있어서 사 왔어요. 어제 일을 사과하며 이렇게 간단한 감사 표시를 한다면 부족하겠지만 우선 받으세요. 부족한 것은 다시 채울 테니.”
이렇게 너스레를 떨다가 자기가 언제 이런 농담을 해보았는지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철은 자기의 변화에 자기 자신도 놀란다.
기철의 농담에 경숙은 생각보다는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다가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은커녕 머리도 엉망일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뒤돌아선다.
그 모양을 본 기철이 의아한 얼굴로
“아니 왜 그러세요?”
하고 묻는다.
“아직 세면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렇게 말끝은 흐리며 왜 자기가 이 남자 앞에서 이렇게 허둥거리는지 모르겠다고 경숙은 생각한다.
“괜찮아요. 세면하지 않은 얼굴도 예쁘네요. 그리고 우리가 얼굴 가지고 탓할 나이에요? 그런 걱정 마시고 이리로 오세요.”
“그래도 세면을 해야 예의가 아니에요. 가까운 사이도 않인 데.”
“가까운 사이가 따로 있나요? 사귀고 나면 다 가까운 사이지. 우리 어제부터 이미 사귀었잖아요?”
오늘은 왠지 기철이 너스레를 많아 떤다.
좀 더 경숙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또 어쩜 경숙이 세면을 하러 가면 다시 나올 때까지 혼자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의 무료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말에 대강 머리를 만지며 기철에게 다가오다가 어젯밤 꿈 생각이 나서 경숙은 또 얼굴을 붉힌다.
그 모양을 보고 기철이
“세면 하지 않은 게 그렇게 마음에 걸려요? 또 얼굴을 붉히게. 걱정 말아요. 정말 세면을 하지 않았어도 예쁘니까.”
기철의 그 말에 경숙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더 얼굴을 붉히며 그냥 건성으로
“자꾸 놀리지 마세요. 그런 것 아니에요.”
“아니면 됐고요. 자 앉아요.”
하고 자기의 맞은편에 방석을 내놓으며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 자리에 앉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남자가 내어놓은 방석에 앉아본다고 경숙은 생각한다.
경숙이 자리에 앉자 기철은 봉지를 터서 잘 익은 연시를 꺼내 경숙의 앞에 놓으며
“어제저녁에는 참 감사했어요. 여행으로 고단하고 술이 많이 취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실례를 많이 범했지요. 미안합니다.” 너스레를 떨 때와 다르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니 경숙은 기철이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기철의 행동이 재미있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사과하지 않아도 되요. 방도 아니고 홀에서 자게 했는데. 춥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잘 잤습니다. 근래에 들어 그렇게 깊이 잠들어 보기는 처음입니다. 정말 잘 잤습니다.”
“술에 취해서 그러셨겠지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깊이 잠든 것은 근래에 드문 일이었어요.”
“왜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잠도 자지 못할 만큼.”
무심코 묻는 경숙의 그 말을 들은 기철은 그동안 자기가 우울증 환자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 생각나 얼굴에 우울한 표정이 나타난다.
경숙은 기철의 얼굴 표정이 시무룩 해지는 것을 보며 이 남자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구나 하긴 추운 겨울에 50이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 혼자 겨울 바다를 찾은 것부터가 일상적인 일은 아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제가 공연한 말을 했나봐요?”
하도 물었다.
기철은 그 말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아니에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하고 얼버무리며 자기의 이러한 행동에서 경숙이 자기가 우울증 환자라는 무슨 낌새라도 채면 하는 생각에 표정을 바꾸려고 했지만, 생각일 뿐 자기의 병에 생각이 미쳐있는 지금은 뜻처럼 쉽게 되지를 않는다.
정상인인 것처럼 행동한 자기가 우울증 환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경숙이 얼마나 놀라고 그런 우울증 환자를 재워주었다고 하면 또 마음이 어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철이 당황해하는 모습에 자기가 무엇을 잘 못 했나 하고 경숙은 다소 의아해하며 또 자기가 한 말을 생각하며 어떤 말에 잘못이 있었는지 되 삭여 본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는 말을 남기고 기철은 갑자기 일어나 나간다.
그 말에 경숙은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어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기철의 등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가 한 말 어디에 저 남자를 저렇게 당황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더 있다가는 자기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이 탄로 날 것 같아 허둥거리며 경숙을 피해 밖으로 나온 기철은 혹 경숙이 눈치를 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한 생각이 든다.
바뀐 환경과 숙면 그리고 경숙에 대한 관심으로 잠시 자기가 우울증 환자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는데 경숙의 질문이 그것 생각을 생각나게 한 것이다.
자기가 경숙에게 한 말, 잘 잤습니다. 근래에 들어 그렇게 깊이 잠들어 보기는 처음입니다. 라고 한 말에도 그런 암시가 들어있었는데 그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경숙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잠도 자지 못할 만큼” 하고 묻는 물음에서 자기의 병을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가져보지만, 해답을 찾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우울증 환자라면 그 여자가 자기를 피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며 자기의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자기가 그 여자의 죽은 남편과 닮았다는 말을 듣고 또 그녀가 사는 모습이 자기와 비슷한 실패한 삶 같아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래서 그녀에게 상련을 느껴 동지 비슷한 생각이 들어, 되지 않은 떼도 써보고 어쩌다 술에 취해 그녀의 집에서 잤지만, 우울증 환자라는 것을 그녀가 알면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허전함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겠다.
특히 여기까지 오며 때로는 처자까지 버리려는 생각까지 했던 자기가.
바닷가를 한참을 거닐며 이런 생각에 빠져있던 기철은 그래도 어떻든 짧은 시간이나마 자기가 정상인처럼 행동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경숙과 그냥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과 아직은 경숙이 자기의 병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에 아니 경숙이 자기의 병을 알고 자기와 만나는 것을 꺼리는 것이 확실해지면 그때는 두말없이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곤 점심 때쯤 다시 경숙의 음식점을 찾은 기철은 매운탕을 시켰다.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지키미님!
감사랍니다
강촌에 님은 처음이시네요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나마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