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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뽑은 명가수]
윤심덕(尹心悳)
윤심덕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가수로 꼽힌다. 1897 평양에서 나고 1926 겐카이나다[玄海灘]에서 죽었다. 숭의학교 졸업, 경성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강원도에서 교사로 일했으나, 나중에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동경대학)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선생으로 있으면서 극예술협회 등의 연극공연에 출연했다.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외모로 이름을 떨쳤고,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 무대에도 섰으나 연기력이 부족해 그만두었다. 당시 성악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어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방송에 출연하거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1926년 여동생 성진의 미국유학길을 배웅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했다. 귀국길에 김우진을 만나 현해탄에 몸을 던져 함께 죽음으로,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유명해졌다. 레코드를 남긴 최초의 한국 성악가로 외국노래를 널리 보급한 공로를 기념하고 싶다.
이바노비치, 다뉴브강의 잔물결(사의 찬미) 윤심덕- 동생 윤성덕 피아노 반주(1926)
'도나우강의 잔물결’ 중 '사의 찬미(윤심덕 노래)'부분 재편집 악보 원본 다시옮김(2006.7.27) 출처 : http://cafe.naver.com/sorirang/822 악보 원문 출처 : http://cafe.naver.com/pphony/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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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 레코드에서 윤심덕이 녹음하는 장면)
3녀1남의 자식들에게 서양음악을 가르쳐준 부모 덕분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고, 레코드를 취입하며 적극 활동하던 중... 동생의 해외 유학을 위해 후원자를 구하다가 부호의 첩으로 추문의 대상이 되었고, 실력에 상관없이 사회적 논란 등으로 교사발령을 미루는 사회의 푸대접 속에서 대중가요에 도전하고, 예술혼을 드러낼 곳이 없어 방황하던 차에 이를 도와주던 극작가에게 하릴없이 끌렸던 여인.
당시 신여성의 대표로 불리던 또 한명의 여인 나혜석(羅蕙錫, 1896-1948). 화가 나혜석은 <개벽> 잡지 1923년 7월호에 ‘1년만에 본 경성 잡감’이란 글을 쓴다. 그 글 속에는 윤심덕에 관한 근거없이 실랄한(?) 비호감이 담겨 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불륜남하고 함께 자살을 하는가?> 신문물을 소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여성의 갑작스런 비련과 자살. 윤심덕의 자살은 염세적인 시대풍조가 절묘하게 반영된 개인적인 불행의 결과이다. 세계적인 염세주의 유행과 순종의 죽음 등 당시 우리나라의 우울한 분위기도 한몫한 셈이다.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던 활달한 신여성으로서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탓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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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변사의 말솜씨가 무성영화의 재미를 이끌어 나가듯 BigMouth님의 해설 또한 일품이네요. 잘 감상했습니다.
하하하~ 윤심덕을 소개하는데 변사효과를 느끼셨다니... 참 기쁩니다.
BigMouth님우연히 윤심덕님을 보고듣는 그의 목소리 오케스트라연주때 가사는 조금 생각했지만 자세히 읽어보면서 그를 떠올리니 인생의 오묘함을 새삼느낍니다 ......두분을 추억하며 아침을 시작합니다 좋은하루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