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여행 24.09.29~10.03 4박5일~5~
12.서안 성벽
당나라 때 장안 황성(长安皇城)으로 축조했던 성벽이 원조다. 당나라 말기에 장안 황성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수도를 뤄양으로 옮겼고, 1374년 명나라가 방어 체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새로이 성벽을 쌓았다.
시안 시가 1983년부터 무려 20년에 걸쳐서 명나라 때의 성벽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높이 12m, 폭 15m, 총 길이 13.7km에 달하는 성벽으로, 총 98개의 성루가 성벽을 따라 이어진다.
성벽 바깥쪽 바닥에는 적의 침입을 막고자 판 연못인 ‘해자’가 있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성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서문(안정문(安定门, 안딩먼)은 고대 실크로드로 가는 길목이라서 중요시되었고, 싸움이 잦았던
북문(안원문(安远门, 안위안먼)은 도성을 수호하는데 매우 중요했다.
지금은 시민들이 성벽을 드나들기 쉽도록 문을 몇개 더 설치했다. 총 18개 문 중에서 13개 문을 통해서 성벽에 오를 수 있는데,
자전거 하이킹을 하려면 대여점이 가까운 남문(영녕문(永宁门, 융닝먼)으로 오르는 것이 편리하다.
참고로 남문은 비림 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도착한다. 한여름 시안의 무더위는 상상 그 이상이다.
되도록 한낮에 오르지 않는 게 좋지만, 시간이 그때뿐이라면 얼음물을 꼭 챙기자. 걷기는 부담스럽고,
자전거 하이킹이 내키지 않는다면, 전동차를 타고 일주할 수도 있다.
13.흥경궁 공원
흥경궁공원은 당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살면서 집무를 보던 흥경궁(興慶宮) 유적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인데요,
실제 흥경궁의 반정도 크기라고하는데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14.팔로군 기념관
서안 사변(1936.12.12)
서안 사변은 중국 현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으로
1931.9.18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을때
장개석의 국민당은 양외필선안내(壤外必先安內 밖을 막으려면 안을 먼저 안정 시켜야 한다.)
정책으로 일본 보다는 공산군을 토벌하는데 힘씀.
장개석은 공산군을 토벌함과 동시에 직계 군대가 아닌 동북군
(만주군. 만주 군벌 장작림의 장남 장학량 張學良이 지휘)과 서북군(양후청 楊虎城 지휘)의
역량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양군을 섬서(산시) 북부로 옮겨
공산군을 토벌하는 선두에 서게 함.
양군이 모택동이 지휘하는 공산군에 수차 패하고
공산군의 항일민족통일전선 공작(내전을 그만 두고 일본 침략자를 물리치자는 공작)을
적극적으로 벌여 양군은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에 반감으로 항일 사상이 고양되고
당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항일 사상이 고취되어 국공 합작을 요구함.
이에 1936년 10월 장개석이 공산군 토벌을 직접 지휘할 목적으로
경호대 1개 연대를 데리고 남경에서 서안으로 와 화청지의 오간청에 머무른다.
장학량과 양후청은 공산군 토벌을 포기하고 공산군과 연합하여 일본을 물리치자고
건의하나 묵살당한다.
이에 두 사람은 장개석을 오간청에 무력으로 연금하고 강제적으로 국공합작에 서명토록 한다.
그 후 공산군이 장개석의 죽임으로 내전이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장개석은 장학량의 호송하에 남경으로 돌아온다.
남경에서 장학량은 체포되고 연금된다.
1949.12.7 국부천대( 국민당의 대만으로 이전) 시에도 데려 감.
이 사변으로 열세에 있던 공산당이 전열을 정비하는 여유를 주게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16.운호공원
첫댓글 이곳 서안이라는 도시는
우리나라의 경주와 청주를 합해놓은 도시같았어요
경주와는 자매도시이기도
하답니다
교육도시라는 명칭이
제대로 어울리는것 같았구요
수고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서안 여러곳 숨어있는 장소들까지 사진으로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범일이 회원님!
열정으로 다듬어진 여행후기에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운 추억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날마다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