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3월30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이동화 동문과 같이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성북동 골짜기를 돌아 보았다.
우린 그 동안 단지 동문으로 만 알고 서로 잘 몰랐는데 얼마전에 어려운 어린시절을 같이 보낸 동네 친구인 사실을 알고 우리가 살던 동네를 언제 한번 돌아보가로 약속 했었는데 차일피일 하다가 이제야 실행에 옮겼다
그러니까 6.25가 일어나던 해 이동화 동문도 부친을 동네 빨갱이의 고발로 잃었다고 하는 가슴아픈 사연을 지니고 었는데 나 또한 6.25가 일어나던 해 미쳐 피난을 못가고 그곳에서 살았는데 부친이 어느 날 빨갱이들에게 끌려 가셔서 생사를 모르는 체 산지 어언 60여년 .
그리고 세월이 지나 노인정에 다녀오시던 어머니 마저 노인정 앞 길을 건느시다 달리던 트럭에 치어 교통사골 돌아 가신후 에는 옛집이 아직도 그 곳에 있지만 웬지 발 걸음이 내키지 않아 자주 안 가 보 았다.
원래 성북동 골짜기는 옛날에는 한적 한 시골 같은 곳 이 였고 우리가 자랄 적에는 그렇게 큰집들도 많이 없었고 산 비탈에 판자집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많이 있었다.
그리고 좁은 비포장 도로 옆을 흐르는 개천에는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 그 당시 동네 아낙네들의 유일한 빨래터 였었는데 여름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온 날에는 발가 벗고 멱을 감고 물장구를 쳤던 기억이나는데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개천이 모두 복개되고 그 많던 다리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디가 어딘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
정겹던 이름인 수통배기 도둑골.삼선교다리,양회다리, 마전터 검정다리,꿩의 바다 등도 모두 흔적 없이 사라져 아쉬움만이 남아아았다. 단지 왜정때 부터있던 파출소만 그자리를 지키고있었다
어렸을 적 밥만 막으면 찾던 우리들의 단골 놀이터인 전형필씨 집 공원 같은 넓은 정원(하도 넓어 6.25때는인민군 말 마차차부대 보급소 ), 유명한 .김연수네씨 정원과 넓은 텃밭,그리고 골짜기를 올라가면서 개울 앙편에 있던 정겨운 터밭등에는 현대식 가옥이며 이름도 모를 고층건물. 학교건물, 대형교회그리고 은행까지 들어섰다.
맑은 물이 흐르던 개울은 성북동 입구부터 복개도로로 변해서 삼선교 전철입구를 나서니 동서남북을 구분 못 할 정도로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삶의 여유가 없던 시절에는 주변에 있는 많은 문화유적도 모른채 몇 십넌을 살아 왔으니 .어렸을 때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청운각이라는 요리집은 길상사라는 커더란 절로 바뀌었다
절 안을 들어가보니 예전에 한번 회식을 하러 와서 술을 마셨던 건물이그 대로 있다 그 당시 회식을 하고 내려오다 술이 취해서 계단에서 굴렀던 생각이 나는데 자세히 보니 그 건물이 지금은 극락전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불당으로 변해 있었다
.그걸 보느라니 오래전에 보았던 어떤 소문난 깡패가 개과천선해서 유명한 교회 목사가 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생각이난다 . 건물도 용도에 따라 술집되고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변하고 스님들이 수련하는 도량으로 변하는것 같다.하긴 좋은 약초도 뱀이 먹으면 독초가 되니까.....
가파렀던 산골짜기 언덕에는 장소에 어울리지리지 않게 유엔 총회 건물 앞 국기 계양대처럼 만국기가 줄 지어선 계양데에서 펄럭인다.
자세히 보니 주한 외교관 사택단지 입구다.그 어덕을 내려서니 설넝탕집이며 만두집등 꽤 큰 음식점들이 줄지어 들어서있고 그 앞 넓은 주차장에는 자가용들이 즐비하다.
가파르고 좁았던 골목길에도 마을 버스가 누비고 30분가량은 걸어 내려가야 전차길이나오던 이 산 골짜기에도 시내버스 종점 도 생겼다. 비록 시간제이지만 ...
예전엔 나도 이 곳까지 와서 종종 와서 땔 나무를 해 간 적이 있는 사람도 안 살던 산골짜기인데 ..
또 고등학교 시절 집집마다 야경 배당이 나오면 돈으로 때울수 없어 야경돌기 (방망이로 딱딱소리를 내면서 도둑 쫓던 야간순찰)로 때우느라 어른을 따라 외등도 없는 컴컴한 비탈 진 골목을 어렵게 오르며 무서워서 진 땀을 흘리며 애궂은 딱딱이만 열 나게 치던 생각도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좁고 가파른 언덕 골목길을 오르자니 어디선가 내가 야경돌면서 쳤던 딱딱이 소리가 남아서 들리는듯하다.
그곳엔 아직도 좁은 길이그대로 남아있다.나라가 발전되었다고 해도 뒤 안길엔 아직도 그 늘진 곳이 많이 있다 소득 2만불이라고 외치지만 그곳 사는 사람에겐 아마도 먼남의나라 얘기로 들 릴것이다.
그래서 이런곳에 사는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끔 무슨일이 일어나면 그걸 빌미로 불만 표출의 방법으로 죽기살기로 극한 투쟁에 참여하는게 아니가 하는생각이든다
성북동엔 유명한 재벌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문 앞까지 자가용이 닫는 그들을 보면서 아침저녁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 내리면서 빈부의 격차를 얼마나 실감 했을까하는 생각도 하면서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니 성북구에서 관리하는 문화유적인 만해 한용운선생의 고택이 있었다.대문에 尋牛壯 이라는 간판이붙어 있었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조용한하다. 안내판과 돌로만든 조그마한기념비만 있고 일자의 작은 기와집과 관리동 인듯 한 작은 벽돌집이 있었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독립선언식 때 33인의 그림과 사진 몇점이걸려있다.
앞에 조그마한 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전망이 확 트였는데 .집 뒤 쪽은 북악산 성벽 줄기가 자리 잡고 있어 시내 쪽은 꽉 막혀있었다 문중에서 만해를 위해 마련해 준 집인데 민해가 중앙청 건물의 일본놈들을 보기싫다고 일부러 비탈진 이곳에다 집을 구해 달라고 부탁 했다고 이동화 동문이 말해준다
모파쌍이 에펠탑이 보기 싫어서 매일 에펠탑에 올라와서 글을 섰다고 하는 말이 생각이난다
얼마나 아니로나한 얘기인지 실체는 그대로 있는데 정신만 외면하니..
좁은 언덕길을 내려와 설넝탕집에서 갈비탕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경신고등학교와 보성고등학교 사이의 언덕길을 내려오느라니 그엣날 초등학교시절 혜화동 에서 걸어서 눈보라 치는 날 보성학교 언덕을 넘어 집에 오다가 눈보라로 숨이 막혀서 눈물을 흘린 생각이난다
우리 동네사람들은 이 길을 성 넘어 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성을 허문사이로 난길이라 그렇게 불렀고는데 성곽을 따라 삼선교로 내려가는 길은 어렸을적에는 호랑이가 나온다고 무서워서 가기를 꺼려한 기억도난다.
옛날 우리집 대문에서 보면 성 넘어 길 입구가 훤히 보여서 고개를 넘어 오가는 사람들을 볼수 가 있었다. 지금은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서 그런 낭만을 느낄수도없다
성 넘어 길도 고개가 낮아져서 마사토길은 아스팔트 대로로 변했고 버스까지 다니니 세월이 많이 좋아졌다 유명한 보성학교도 이미 이사한지 오래고 그자리엔 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섰다
한참을 내려오니 명륜동길이 나오는데 자유당시절 그 유명한 벡두산 호랑이라고 부르던 치안국장 김종원이 살던 집이며 4.19전 국무총리를하던 장면 씨가 살던 집앞을 지나느라니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이 길을 수없이 지났는데 지금은 옛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어 아쉬운 생각이 더 든다 이곳도 길옆에 있던 개천을 복개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혜화동 노타리엔 예전에는 달 같이 생긴 둥그런 분수대가 있었는데 고가차도를 민들면서 없에더니 다시 철거후 노타리가 생겼다
해방후 여운형씨가 혜화동노타리에서 저격을 받아 사망했는데 그 때 노타리가 있어서 차가 속도를 늦추는 바람에 괴한이 차 뒤 범퍼에 올라 저격했다고한다
해방된후 우리가 어렸을 땐 승용차는 뜻도 모르면서 무조건 하이야,닥꾸시, 세단,이라고 했고 트럭은 무조건 지에무시 ,스리코타는 무조건 닷지차 라고 했던 시절 이 있엇는데 승용차는 뒤에 범퍼가 사람타기 좋게 돌출되어 붙어 있었고 스페어 다이어가 뒤에 붙어 있어 범퍼는 발판으로 스페어 다이어는 손잡이로 차 뒤에 많이 매달려 무임승차를 하다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운전수가 뛰어 나오는 바람에 운전수한테 붙잡혀 치도곤이도 많이 맞었는데..
혜화동 노타리에는 아직도 옛날 자리에 남아 있는 건 혜화동우체국과 파출소 뿐인데 그것도 리모델링 한 것 이였고 동성고등학교도 그자리에 있는데 정문 부터 많이 변했다 예전엔 언덕배기에 붉은 2층인기 3층인가 교사건물이 하니 있었고 동소문 언덕길엔 붉은 벽돌의성당이 고작이였는데 .지금은성당도 현대식으로 변한지오래다.내가초등학교시절 6년동안 걸어 다니던 한가했던 대학로도 지금은 명동같이 번화한 거리로 바뀐 걸 보면서 쥐 구멍에도 햇볕들 날 있다 고 해야하나 왜냐하면 내가 어렸을땐 대학로엔 가물에 콩나기로 자동차가 가끔가다 다녀 길 가운데로 활보했으니 참 세상은 무섭게 변한다. 그래서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치를 떨고 공산당 앞에선 한 목소리를 내던 우리가 김정일을 찬양하고 공산당을 좋아 하는무리가 30%돠는 세상으로 변했다고 하니 변한 건 참많다
번영도 분열앞에는 맥 을 못 춘다고 하는데 걱정이 많다.모처럼 어렸을적 친구와 살던 곳을 거닐다 보니 옛생각이나서 두서없 이 적어본다 우린 옛 것을 너무모른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넓은 도로가 나 있으니 예로 부터 그런줄 안다
가끔 조선 말기에 한양사진을 보면서 우리의 그당시 우리의 국력 과 형편을 알게되고 그래서 일본에게 먹혔구나 .그리고우리가 참 못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듯이..
어느 날 시간이 나면 어렸을적 성북동 이야기를 기록 으로 남기고 싶은데 잘 될른지 모르겠다.
우린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고 각자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여졌다.
첫댓글 어렸을 적 기억력이 대단하오. 비록 桑田碧海가 되었을지라도 어렵게 살면서 지내던 곳을 거닐어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추억이며 ‘즐거운 悲鳴’으로 들리는 것은 죽기 전에는 어렸을 적 지내던 곳을 가볼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오. 두 분의 友情 어린 ‘追憶散策’ 부럽소이다.
박춘경씨, 나도 이 세상 뜨기 전에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평안남도대동군시족면ㅇㅇ리...번지. 대성산이 동서로 평원가도를 따라 누워 있는 곳. 남쪽으로 들판을 건너지르면 고방산을 넘어 내가 다니던 고방산국민학교, 또 그 남쪽으로는 대동강 정겨운 물줄기. 그 산, 그 들판에서 나와 함께 개구리 잡고 온갖 것 서리해 먹던 코흘리개들도 지금은 모두 김정일의 졸개가 되어 있을까? 1946년 5월 어느날, 내가 '엄마' 동생들과 함께 헐떡이면서 뛰어 넘던 그 삼팔선 동네도....
나, 그동안 추억을 밟듯이 성북동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지만 이곳에서의 추억을 글로 남길 생각은 하지 않았었지요. 고명호씨가 올려 놓은 이야기들을 보니 말 그대로 감회가 새로워 지네요.
나는 황해도 黃州郡 黑橋面 黑橋里가 고향인데 1947년 평양 仁興里의 電車 종점 부근인 西平壤에 살면서 1949년도쯤 연필을 사기가 어려워 김일성대학 구내매점에 가서 연필을 사서 썼는데 그곳에서 大城山(해발 270m)이 그리 멀지 않아 몇 번 가보았는데 다른 기억은 없고 깨지고 흩어진 옛날 기와들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동화씨 고향 근처군요. 산에는 3~5세기에 쌓은 총 길이 9,284m의 大城山城과 20개의 성문터, 식량창고 터, 안학궁터, 古墳群 등 고구려 때의 역사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