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인 병조판서 유전이 우연히 활터에서 이순신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순신의 활 실력을 구경하던 유전에게 이순신이 차고 있던 화살통이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 화살통 참 찾아 보이는구만. 나한테 선물로 줄 수 없겠는가?”
그러자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께 이깟 화살통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화살통 하나 때문에 대감이 부하의 화살통이나 바쳐서 출세하려는 인물로 오해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병조판서 유전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37-38)
이순신은 항변했다.
“병력이 부족하니 군사를 증원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음을 기억하오. 그 공문이 바로 나에게 있소이다. 조정에서 만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죄가 나에게 있다 하지 않을 것이오. 또 내가 힘껏 싸워서 녹둔도를 지켰고, 바로 추격하여 잡혀간 백성들을 여러 명 구출해 왔거늘, 이것을 패배로 치는 것이 옳단 말이오?”
(109-110)
전투 시 거북선의 실내는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어두웠을 것이고 바닷물은 계속해서 새어 들어왔을 것이다. 실내에서 쏘는 포의 소리와 진동은 갑판 위에서 함포를 쏘는 판옥선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투원들의 귀는 먹먹함을 넘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적선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진동으로 몸이 붕 뜨고 온몸을 여기저기 찍혀가며 피를 흘린 채 노를 젓고 포를 쏘았을 것이다. 공포감이 치열함으로 바뀌고 노를 젓는 틈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바다에 떠다니는 일본군들의 시체와 먹먹해진 귓속을 뚫고 들려오는 살려 달라는 일본군의 아우성에,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무적의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거북선을 바라보며 외관의 멋스러움만 생각하지 말고 거북선에 탑승해서 전투를 치렀을 선조들의 처절함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132)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원균의 수급 베는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순신은 적의 수급을 베는 것에 대해 이런 지시를 내렸다.
“적의 수급을 베는 데 매진하지 마라. 너희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내가 다 보고 있노라.”
“너희들의 공을 내 직접 장계를 써서 낱낱이 밝힐 테니, 너희는 다만 전투에 이기는 데 집념하라.”
(152)
그러나 한산도의 패전으로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서해 바다로 10만 병력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올려 보내지 못했다. 증원병과 군량미, 무기 등 보급이 완벽하게 끊긴 고니시는 평양에 발이 묶이며 의주를 공격할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산도대첩은 이순신이 조선의 임금 선조를 살려준 전투였고, 바다의 재해권을 완전히 조선이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였으며, 육지로 북상해 있던 일본군이 장기간 굶주리며 춥고 불안에 떠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였다.
(181)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했던 날은 1592년 9월 1일이었다. 이를 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 5일이다. 그래서 오늘날 ‘부산 시민의 날’이 10월 5일이다. 이순신이 부산포를 공격해서 대승을 거둔 날이 바로 부산 시민의 날이 된 것이다.
(187)
이순신이 재해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 바다를 돌아서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예성강을 타고 개성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의 군대 충원과 보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압록강을 타고 들어가 의주에 있는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가는 길을 막았을 것이고 조선의 임금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해전에서 조선군의 승리가 일본 육군의 발을 묶었고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234-235)
장문포해전은 분명히 실패한 작전이었다. 총 지휘를 해야 할 도체찰사 윤두수는 장문포 근처 전장에 없었다. 장문포해전 당시 그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에 있었고, 그 긴박한 전투 상황에 이순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순천 부사 권준을 탐관오리라는 죄명을 씌워서 잡아들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도원수 권율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권율 역시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구례에 주둔하고 있었다. 임금의 명으로 수륙양면작전을 시행한다면 육군이 먼저 나서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곽재우나 김덕령이 이끄는 의병들로 하여금 왜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권율 자신의 육군 병력은 장문포 공격에 투입시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상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에서 최고 지휘관인 윤두수와 권율은 전장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순신에게만 무리한 공격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수군은 장문포해전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2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다.
(242)
임금이 이르기를
“원균은 국사를 위하는 일에 매우 정성스럽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원군은 전공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러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김순명이 아뢰기를
“충청도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원균은 마음이 순박하고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1596년 10월 21일>
(256)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 모(이순신)은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하고, 큰 벌을 내기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285)
다른 지휘관들 역시 칠천량에서 머무르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원균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원균은 분노의 술만 들이킬 뿐 소통을 거부했다. 이 상황에 대해 원균에게 항명을 했던 이가 경상우수사 배설이었다. 배설은 칠천량에 진을 치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한산도로의 회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자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칠천량의 조선권 진영을 이탈했다. 배설의 행동은 분명한 항명이었고, 칠천량에 남은 조선 수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323)
명량해전 이전에도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 승리 이후 이순신은 성웅이 되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명량해전 승리는 실로 천운이었다.”
칠천량의 대패를 보고받은 선조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패배는 하늘의 뜻이었다.”
(353)
전쟁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적을 막아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진린도 잘 알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려는 자들의 발악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러나 적이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면 끝날 전쟁을 기어이 막아선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너무 훌륭한 신념이었다. 나라와 강토를 짓밟은 외적이 살아서 돌아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국가의 자존심을 건 큰 신념이었다.
전린 입장에서 이순신의 이러한 신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전투에서 이순신이 단독으로 공을 세운다면, 진린 자신은 명나라 본국에 돌아가서도 입장이 난처해질 터였다. 울면서 겨자 먹듯, 진린의 명나라 수군은 이순인의 함대와 함께 참전을 결심하였다.
(368-369)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마다 항상 혼자였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388)
조선의 명나라 제독으로 참전하여 이순신과 깊은 전우애를 맺고 돌아간 진린의 자손들은 청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거 조선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이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 있었던 고금도까지 왔고, 그 옆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니 이들이 광동 진씨이다. 지금도 해남에는 광동 진씨 집성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