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건국 3년 …… 국민소득 : 61$
01.02 국방부, 간행물 사전 검열제 실시
01.03 정부, 임시 수도 부산으로 이전
01.04 서울 재함락(1.4 후퇴)
▲ 남행 열차에 몸을 싣고 남으로, 남으로 향하는 피란민들.
01.05 독립운동가 서재필(徐載弼), 미국에서 별세(향년 88세)
소설가 김동인(金東仁) 사망(향년 52세)
01.17 대한민국, 국제 전신 연맹 가입
01.25 유엔군, 선더볼트 작전 개시…방어선 돌파 하여 한강 이남 일대의 중국 공산군․인민군의 위치, 규모, 상황 파악 성공
01.31 유엔 총회, 중국 침략자 규정 결의
02.10 거창(居昌)양민학살사건 발생…국군, 양민 719명을 공비 내통 혐의로 집단 학살(~02.11)
02.11 인민군․중국 공산군, 2월 공세 개시…유엔군의 반격으로 실패(~02.18)
02.18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 개강
6,500여 명의 학생 재학.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이 속했다.
02.20 선교사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사망(향년 61세)
한국명 : 원한경(元漢慶)
02.21 국회, 국회법 개정안 통과…국회 정․부의장 임기 4년에서 2년으로 단축
03.05 소작농 120만 명에 대한 농지 분배 완료
03.07 유엔군, 리퍼 작전 개시…서울 포함 38선 이남 거의 전지역 수복(~03.31)
교육법 개정안 국회 통과(6․3․3․4 학제)
03.14 서울 탈환
03.15 서울 재수복
▲ 중공군에 의해 유린당한 뒤 재수복된 서울의 전경.
03.24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38선 이북 진격 명령…03.25 동해안 지역 국군, 38선 돌파
맥아더의 전쟁 확대 주장은 미 본국과 전혀 협의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03.29 국회서 국민방위군사건 폭로…국회 내「국민방위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구성 결의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의 고급 장교들이 23억 원 이상의 예산을 횡령하는 바람에 장병들에게 군복 · 식량 등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결국 1951년 1월 후퇴할 당시 50만여 명의 장병 중 9만 명 이상이 아사 · 동사함.
04.11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해임…후임에 미 제8군 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 임명
▲ 해임되기 전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
04.22 인민군․중국 공산군, 제1차 춘계 대공세 개시…서울 재점령이 목표였으나 유엔군의 방어로 저지(~04.30)
05.09 이시영(李始榮) 부통령 사임
05.15 국회, 제2대 부통령에 김성수(金性洙) 선출(05.17 취임)
05.16 인민군․중국 공산군, 제2차 춘계 대공세 개시(~05.23)
06.23 유엔 소련 대표 야콥 말리크(Yakov Aleksandrovich Malik), 한국 전쟁 휴전 제의
06.27 이승만 대통령, 소련의 정전 제의 반대 내용의 담화 발표…정전 협정 조인 시 한국군의 독자적 행동 가능성 천명
06.29 미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hippe Truman), 유엔군 총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에게 한국 전쟁 정전 교섭 지령(06.30 유엔군 총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 함상(艦上) 회담 제의 07.01 공산군, 개성(開城) 회담 제의)
07.08 개성 내봉장에서 정전 예비회담 개최
공산군 측은 정치적 선전 목적으로 유엔군 측에게 회담장 진입 시 백기를 달고 올 것을 요구.
▲ 1951년 7월 21일 개성 내봉장.
07.10 정전 본회담 시작
07.11 서울서 정전 반대 시민 궐기 대회 개최
07.15 경부선 철도 재개통
당분간 군사용으로만 이용됨.
08.03 정전 반대 국민 대회 각지서 개최
08.13 국민방위군사건 관련자 5명 사형 집행
09.09 국회, 임시토지수득세법 통과
전근대적인 현물세법. 도시의 식량과 군량미의 확보 목적으로 양곡 수집을 해야 했던 이승만 정권이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화 팽창(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정하였다. 이는 되려 농민들이 자급할 식량을 수탈하는 꼴이 되어 보릿고개를 겪는 농가가 속출하게 되었다.
09.20 이승만 대통령, 정전 회담 재개 수락 4대 원칙 제시
① 중국 공산군 한국 철수 ② 인민군 무장 해제 ③ 유엔 감시 하에 북한 총선거 실시
④ 10일 이내에 공산군이 동의하지 않을 시 정전 회담은 종결되어야 할 것
10.01 대한 신문 협회 결성
한국 조폐 공사 창립
10.09 국무회의, 프랑스 파리 유엔 총회 파견 한국 수석대표에 장면(張勉) 국무총리 임명 결정
10.12 국무회의,「고급 요정 및 유흥 영업 임시 조치안」의결…고급 요정 폐쇄 및 무허가 음식점 정리 명령
10.17 국무회의, 대통령 직선제․양원제 개헌안 의결(11.30 국회 제출)
10.21 일본 수도 도쿄(東京)에서 제1차 한-일 회담 예비회담 개막
10.25 정전 회담 장소를 판문점(파주)으로 변경…정전 회담 재개
10.28 육군대학 창설…고급 장교 양성 기능 담당
11.05 공비, 순천에서 열차 공격(사상자 24명)
11.06 국무총리 서리에 허정(許政) 임명
11.27 정전 회담서 현 전선을 잠정적 군사 분계선 확정 및 이후 30일 간의 임시 휴전 기간 동안 정전 협정 조인 실패 시 군사분계선 재설정 합의(30일 간의 임시 휴전 돌입)
12.01 정부, 부산․대구를 제외한 충북․전라․경상 각지에 비상 계엄령 선포…후방 공비 소탕 목적
12.02 서남(西南)지구(지리산 일대) 공비 토벌작전 개시(1952.03.14 종료)
인천 상륙 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남게 된 인민군 패잔병과 영 · 호남 지방 게릴라로 구성. 작전 결과, 공비 5,000여 명 사살, 4,000여 명 생포됨. 그 당시 게릴라들의 보급 투쟁이 격렬하여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생겨남.
12.17 원외 자유당(自由黨) 창당(당수 이승만, 부당수 이범석)
12.18 정전 회담서 양측의 포로 명단 교환
|
포로 |
실종 |
공산
진영
발표 |
국군 |
유엔군 |
국군 |
유엔군 |
7,142 |
4,417
(미군 3,198포함) |
88,000 |
11,500 |
자유
진영
발표 |
인민군 |
중공군 |
남한
강제
징집병 |
|
|
95,531 |
20,700 |
16,243 |
|
|
12.23 원내 자유당 창당…(중앙위원회 위원장 이승만, 부위원장 이갑성(李甲成)․김동성(金東成))
소장파 국회의원 중심 결성. 이승만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이를 둘러싸고 자유당 창당 세력 간 심각한 의견 대립이 벌어졌고, 결국 “자유당”이라는 동일 명칭의 두 정당이 만들어졌다. 원내 자유당은 93석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 정치 파동(1952)을 거치면서 원외 자유당에 흡수되었다.
첫댓글 전쟁 일으킨 건 북조선. 끼어든 중공. 중재하는 소련...? -_-
정작 남한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 ㅠㅠ
국민방위군 사건 `51 .
부산 정치 파동은 국군이 의원들 탄 버스 납치한 사건 말하는 거죠?
아마 이때부터 직선제가 되었던걸로.... 정말 웃지못할 코미디같은 사건
버스 통째 털어가는 싱먼리의 기☆상
국민방위군사건 예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