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를 근본적으로 분리함으로써 무슨 문제가 벌어집니까? 구원받았다, 이미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 선언 받았다(법정적 칭의), 그리고 최후 심판은 우리의 무죄 선언 받음을 위한 확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화는 무엇이냐?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면 좋은데, 못해도 최소한의 구원은 받는다, 상급 받는다, 상급 신학이 들어옵니다. 한국 개신교를 어지럽히는 것이 중세 상급 신학입니다. 이러다 보니 칭의론이 윤리로부터 구분됩니다.
성경을 보면 경고, 탈락의 가능성을 곳곳에서 이야기합니다(히브리서 2:1~4, 3:7, 4:13, 5:11~6:12, 10:26~31, 12:1~29). 고린도전서 15:2절을 보면 “헛되게 믿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12절을 보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등입니다.
구원과 경고, 탈락이라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함께 견지할 때 그것이 견고한 신앙입니다. 예정, 성도의 견인(끝까지 지켜 주신다) 이것을 펼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탈락, 경고 이것을 펼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같이 봐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를 약화하면 안 됩니다. 의로운 삶이 약화 됩니다. 의로운 삶을 안 살면서 “의인”이라 외칩니다. 윤리가 없습니다. “윤리 없는 신앙”, “윤리 없는 신학”이 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말씀합니다. 13절을 보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의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최후 심판 때에 불로 시험합니다. 우리 하나님 나라의 믿음 순종에 관한 질의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죄가 섞인 것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 불태웁니다.
금, 은, 보석으로 짓습니다. 불시험을 통과하면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것이 상입니다. 14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상”은 헬라어 “미스톤”으로서 “대가”를 의미합니다. 15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 공적이 다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해를 받다”라는 말은 “제미오떼세타이”로서 “손해를 입다” 또는 “처벌을 받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 “미스톤”(대가)과 “제미오떼세타이”(처벌을 받다)라는 말은 15절에 “구원을 받되”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상” 혹은 “대가”는 종말론적인 구원입니다. 상은 구원 + 알파(덧붙여짐)가 아닙니다. 성화 + 덧붙여진 상급이 아닙니다. 구원은 신적 충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적 충만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에로의 참여입니다. 신적 생명,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로마서 3:23, 5:2, 8:17~18).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완벽한 “보상(대가)”입니다.
본문은 위로의 말씀이기보다는 종말론적인 살벌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래도 구원은 받는구나”라고 위로받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빌립보서 2:12), 목숨을 걸고라도 이런 무서운 결과는 피하라는, 구원받으라는, 교회를 세워나가라는 명령입니다. 자기 자신은 구원받을지 모르지만, 이는 그야말로 불을 통과한 상태와 같을 것입니다. 15절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를 원어대로 직역하면 “마치 불길을 나온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는 집이 화염에 휩싸인 상황에서 그 거센 불길을 뚫고 자기만 간신히 빠져나오는 이미지입니다. 바울이 기대했던 바는 “어쨌든 구원은 받네”하는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섬뜩한 결과는 피해야겠구나”하는 경악과 두려움입니다.
고린도전서 9:18절을 보면 나의 상이 무엇이냐? 무료로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산 삶, 자기가 맡는 한 부분을 살아내기입니다. 행위 심판 때 다 드러납니다. 면류관, 상입니다.
면류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원 자체입니다(고린도전서 9:23~27, 빌립보서 3:12, 로마서 2:5~10, 골로새서 3:24). 다른 하나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9~20, 빌립보서 4:1). 흠 없는 자체가 면류관입니다.
최후 심판 때에 하나님의 통치에 얼마만큼 순종했나 시험합니다. 이것이 행위 심판입니다. 인간적인 것 다 불태우고 내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한 의의 열매가 확실히 나타납니다. 구원의 표징이면서 이것이 면류관입니다. 교회가 면류관입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가 흠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상입니다(고린도전서 3:14~15, 9:18, 빌립보서 4:1, 데살로니가전서 2:19~20).
마태복음 20:1-15절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누가복음 17:7-10절의 무익한 종의 고백(“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을 보면 상급은 결코 인간의 수고에 상응하는 동의어가 아니며,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고 공로로 얻을 수도 없는 분에 넘치는 은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상급이란 결코 인간이 요구할 수 없는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뜻과 자비하심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근거는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행위도 무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구원받는 이유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바울이 본문 15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은혜를 받는 사람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게 될 구원의 은혜에는 부족함이나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급, 면류관이 구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는 상급으로 표현되는 구원 이후의 미묘한 차이점에 대해 고려해야 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은혜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고린도전서 3:15절의 말씀처럼 겨우 구원받게 된 사람과 상대적으로 당당하게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더 부끄럽고 덜 부끄러움의 차이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의 동등성 안에서 상급의 차등 성입니다. 구원의 상급 차이는 없지만(동등성),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차이는 있습니다(차등 성).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구원 자체는 곧 우리가 받은 행위 심판의 결과로 주어지는 영생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받게 될 구원이 곧 우리가 받게 될 상급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상급(선물)은 지극히 완전하고 충만하여 부족함이나 차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적 충만입니다.
상급에서의 차등이 있다면 이는 구원에 더해지는 선물이기보다는 완전함 가운데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향유)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더 감사하게 어떤 이는 더 부끄럽게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평생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은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향유 하는 정도에 있어서 더 친밀함을 지닐 수 있다는 최소한의 차등의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이것이 영광의 충만함 안에서의 향유(구원) 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상급 차이의 가능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