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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봉건제 하에서의 가족의 생성
중세시기의 가족구성은 결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9세기에 이르게 되면 점차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어가지만, 귀족계층에서는 정략결혼과 본인의 동의라는 원칙이 서로 부딪치기도 했다. 중세초기인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 때 귀족계층은 주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예컨대 샤를마뉴와 결혼했던 힐데가르트는 15살에 결혼했으며, 비잔틴의 황녀 테오파노는 11살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민간계층은 이보다는 훨씬 늦게 결혼했으며 13세기 여성들의 결혼적령기는 대략 18-19세였다. 반면 남성들은 대개 25-27세에 결혼했다. 하지만 귀족층의 결혼관과 가족구성,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제약과 서약의 의식, 승계의 여러 측면들이 많은 기록들을 통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세사회의 피지배층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최근에 국내에서도 신문화사의 영향아래 이러한 혼인과 가족의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저작물들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미미한 상태이다. 예를 들어 중세 봉건사회의 위계를 볼 때 왕과 영주들, 기사들, 그리고 그들을 떠받들고 있는 농노라는 체계는 변하지 않았으며, 시대적인 배려 또한 미진한 가운데서 정작 중세를 살아가는 인간의 참모습은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즉 중세사회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개략적이나마 중세시기 봉건제 하에서의 혼인과 가족구성, 그리고 그에 따른 농노계층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생활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정리는 이제까지 세계사 교육 중 중세시기에 대해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새롭게 정리해봄으로 해서 중세사회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결혼에 대한 교회의 입장
중세시기를 논함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을 떼어놓고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결혼과 가족의 생성에 있어서도 교회는 끊임없는 개입을 통하여 영향력을 확대코자 하고 있다. 중세초기에는 교회의 역할이 그다지 주도적이지 못했으나 13-14세기에 이르게 되면 교회는 혼배 성사를 종교적인 현상으로 만들게 된다. 이 시기가 되면 교회가 이전에는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혼인에 있어서 혼인의 증인 역할을 맡았던데 비해서, 이제는 결혼의 축복과 다산과 정절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내부의 여러 가지 교리상의 이론이 합쳐진 결과이다.
초기 교회의 결혼에 대한 입장은 노예제에 기초한 제약을 해제하는데서 출발한다. 이것은 메로빙거 시대에 비자유민의 가족구성원을 인정토록 하는데서 출발하며, 노예와 자유민 사이의 혼인을 허용하면서 계층간의 분리를 해소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계층간의 구분이 애매해지면서 기존의 자유상태와 노예제의 형태간의 구분이 극도로 희미해지고, 점차 소멸해가는 양상을 띄게 된다. 이것은 비록 자유민이 자신의 자유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중세전반기에 걸쳐서 등장하게 될 ‘농노’라는 예속적 신분에 대한 원인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보자면 결혼은 신분제의 생성에도 밀접한 관련을 띄고 있었고, 고대 노예제에서 중세 봉건제로의 전환에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이 도출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중세라는 시기적 구분 속에서 서유럽의 전반적인 사항에 농노의 형성에 대한 이론을 일률적으로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봉건제라 칭해지는 제도사 시행되던 지대, 신분을 둘러싼 일련의 제도가 서유럽 전역에서 동시에 구축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시기적인 구분이나 지역적 특성보다는 개략적인 특성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유럽 봉건제하의 생활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귀족층보다는 피지배층인 농노와 자유민들을 중심으로 가족의 생성과 그들의 생활상을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일상적인 모습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중세 초기의 혼인
중세 영국 봉건사회에서의 혼인은 통상 혼인당사자들의 동의, 부모의 조력, 주군이나 영주의 승인, 혼인식 거행 등의 의식과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 물론 그 이전에 색슨족의 결혼 풍습은 결혼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세속적인 결합이기 때문에 세속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색슨족이 영국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결혼의 윤리적인 문제보다는 재산의 적절한 분할과 자식의 양육이라는 실질적인 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으며, 그들이 남긴 법전에 따르면 여자도 원한다면 스스로 결혼을 파기하거나, 여자가 자식을 양육할 경우 재산의 절반을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결혼을 위한 남녀의 의무는 그리 강조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앵글로색슨 특유의 - 혹은 영국의 경우 - 법적 원리가 담겨져 있는데, 이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워길드(wergild)라 칭해졌던 나름대로의 가격표가 따라붙어 있었단 것이다. 심지어 도덕적으로 짊어져야 했던 죄 값까지도 실리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켄트 왕국의 한 법전에는 “자유민이 자유민의 아내와 잠을 잤다면, 그 여자의 워길드에 해당되는 값을 남편에게 치르어 주고, 개인의 돈으로 남편에게 다른 아내를 제공해주어야 한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와 같은 법전은 공공도덕을 금전으로 계산하려는 것을 반영한다.
특히 결혼을 둘러싼 재산 분할권에 있어서도 위의 실리적 계산법은 동일하게 적용되어서, 결혼계약은 신혼 첫날밤을 만족스럽게 치뤄지고 난 후 남편이 지불해야 했던 아침선물에 대해서 두 집안의 가장(家長)이 벌인 협상을 의미했다. 이 아침선물은 상당한 금전이나 토지를 포함했고, 신부의 몫이 되었다. 즉 처녀성을 지킨 것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법규는 반드시 신부가 처녀여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았고, 남편의 이의가 있을 때만 개입하였다. 한편으로 간통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범죄를 허락하기도 했는데, 알프레드 대왕시기의 법전에서는 “아내가 밀폐된 공간이나 같은 이불 밑에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혹은 법적인 딸이나 누이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혹은 아버지의 법적 아내인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침입자를 해치더라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설령 그 침입자를 죽였더라도, 그의 친척들에게 복수가 허락되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조항은 질투 때문에 벌어진 치정극에 대해서 관대한 조처를 내리는 것이며, 나아가 간통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복수를 허용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색슨족 이전에서부터 영국의 법규는 여성에 대한 보호를 남성에게 요구했다. 남자는 "무기를 든 사람(waepedmann)"이라 불렸던 반면, 여자는 부인인 사람(wifmann)이라 불렸다, 또한 ‘부인’이란 의미인 wif는 “적조하다(weave)"라는 낱말에서 파생되었다. 이런 책임분할은 각각의 무덤에 소장된 부장품에서도 발견되는데, 11세기 경 교회가 천국에서는 물리적인 장식이나 액세서리가 필요 없다고 강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봉건사회 속에의 혼인
교회는 혼인을 남녀간의 신성한 정신적 결합으로 간주하여 성사(聖事)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혼인당사자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인 혼인동의, 혼인예고제를 통한 혼인장애의 검증, 교회에서의 공개혼 등 혼인의 형식 요건에 중점을 두어 그에 대한 합법성을 부여하려는 교회의 규제는 당연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인은 여전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목적이 결부된 것이었기에, 부모들은 혈연계승과 재산상속에, 주군들이나 영주들은 혼인으로 인한 재산의 이동과 그로부터 야기될 각종 의무와 권리의 지속적인 확보 및 봉신과 농민에 대한 인신적 지배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속적 요인들이 충족될 때 혼인이 성립된다면 이점에서 결혼은 곧 계약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시기 혼인의 핵심과제는 성사로서의 혼인과 계약으로서의 혼인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였다.
10세기에 이르러 교회와 기독교 사상가들은 남녀의 결합이란 신이 준 신성한 선물로서 사랑을 바탕으로 성립된다는 정신적 결합으로서의 혼인관을 강조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레고리 7세는 그의 개혁과정에서 혼인을 남녀간의 단순계약(contract)으로 보기보다는 聖事로 간주하여 혼인당사자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합의야말로 혼인성립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교령을 발표하면서 이것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움직임은 귀족층의 통혼정책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혼인의 불가해소성과 근친혼 규제론을 제시하게 된다. 이러한 혼인에 대한 구체적 규제와 함께 교회는 혼인당사자간의 자발적인 혼인동의의 교환이 전제된 육체적 결합을 통하여 양자가 완전한 부부로 결속된다는 것을 제시하였고, 이는 배우자간의 사랑(marital affection)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확인시켜 주게 된다. 이처럼 부부간의 내밀한 행위까지 정의 내리면서, 교회는 성사로서의 혼인을 확인시키기 위해선 성직자가 관장한 종교의식에 따라서 공개혼으로 이루어져야만 하고, 그럴 때에만 혼인이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된다고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13세기에 들어서 영국의 통상적인 혼인절차속에 포함된 혼인예고제(banns)와 혼인미사의 과정을 포함하게 되면서 더더욱 구체화되어간다. 이러한 혼인식의 공개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리차드(Richard)가 1175년에 언명하였고, 1200년에는 대주교 월터(Walter)가 세 차례에 걸쳐 ‘혼인예고’ 없는 혼인을 금지시키면서 합법성을 띄게 된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노력이 전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개인의 저택, 야외, 심지어 침실에서 혼인식이 사적으로 행해지더라도 그것은 합법성을 띈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와 세속간의 혼인의 적법성을 둘러싸고 중세기 내내 끊임없는 논란이 지속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적혼인이 근절되지 않은 이유에는 혼인이 세속인들 사이에서는 남성 중심의 혈연계승과 재산상속의 수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해 교회는 근친혼의 범위, 적자의 조건, 합법적인 재산권 소유의 조건 등을 혼인 형식이나 절차와 결부시킴으로써 세속인들의 사적 혼인을 규제하려고 노력했다. 교회가 이처럼 혼인에 대해서 간섭하고 나선 이유는 세속적 이유인 교회의 영향력 확대, 재산권의 향방과 같은 세속적 이유도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천년왕국의 기반이 되는 가족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점을 내세운다. 따라서 토지의 상속이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은 세속법정에서 다루되 이혼의 심리 사유나 적자의 범위와 조건에 대한 판단은 교회법정이 가짐으로써, 결국 혼인은 물론 그와 관련된 재산권 소유의 범위가 교회의 판단에 따라 결정될 여지를 만들게 된다. 그 판단기준은 교회에서 공개혼을 행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교회가 승인했는지에 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원칙일 뿐이었으며, 결혼이란 결국 당사자간의 합의에 따라 합법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봉건사회의 구조자체가 사적혼인을 양산시켰는데, 이는 합법성 여부보다는 친족결속을 통한 정치적 세력 확대, 재산상속이나 그 이동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 혈연계승 등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혼인계약은 혼인당사자의 가장(家長) 사이의 동의와 함께 주군이나 영주의 동의가 유효한 혼인의 기준이 되었다. 여기서 혼인동의의 주체를 두고서 교회와 충돌이 일어나게 되지만 주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혼인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가문이 주군의 가문과 적대관계인지의 여부와 지속적인 충성의 확보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봉토에 부가된 각종 의무, 특히 군역납부를 비롯한 각종 의무의 안정적인 징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주군은 각종 권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혼인허가권은 물론 후견권이나 상속권 등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혼인 허가세 징수라는 방법을 통하여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영주들도 자유민은 물론 예속민의 혼인에 대한 관심과 규제가 필요했던 것이 장원의 사회ㆍ경제적 필요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주군과 봉신의 관계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농노층의 혼인
혼인허가세(merchet)란 명칭은 11세기부터 나타난 것으로 귀족을 비롯하여 농노 층에게까지 적용된 것으로 혼인시에 자신의 영주에게 허가세를 지불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여성측이 많이 납부하였는데, 이는 여성의 결혼이 상속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농노의 딸이 영지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시집가면, 영주로서는 그 여자와 그 여자가 낳을 자녀들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경우는 여자가 그에게 와서 살게 되고, 그 자녀들의 노동력도 확보되기 때문이다. 물론 11세기 이전인 앵글로색슨 시기에도 여성이 혼인할 때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불한 제도가 있었으나,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영국의 보통법에 따르면 농노는 영주에게 인신적으로 종속되어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곧 영주의 소유이기 때문에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았다. 따라서 농노의 자녀들도 영주에게 인신적으로 예속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그들의 결혼에는 영주의 동의가 필요하며, 그 징표는 혼인 허가세 납부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비록 혼인허가를 영주로부터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배우자 선택권이나 혼인 계약권 마저 규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와 함께 농노를 비롯한 농민층 여성들의 혼인 허가세는 신분세인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보유권을 확립시켜주는 이중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즉 신분적으로 자유롭더라도 보유한 토지의 성격이 예속적이면 농노의 딸이 혼인할 때와 마찬가지로 혼인 허가세를 납부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영주의 지배권을 벗어난 혼인에 따라 재산의 이동이 일어날 경우에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 부과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영주지를 벗어난 배우자와 혼인할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혼인허가세액이 많이 부과되었으며, 또한 상속자인 여성이 혼인할 경우에 상속자 규모에 따라서 혼인허가세액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혼인 허가세는 신분세인 동시에 보유한 토지의 성격에 따라서도 납부되며, 한편으로 사안에 따라서 부과되거나 액수가 결정되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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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혼인 허가세와 유사한 성격의 벌금으로 농노의 딸이 혼전에 순결을 상실하면 징수된 혼전순결상실세(lecherwite)가 있다. 이와 같은 벌금은 혼전임신과 영주의 승인 없이 혼인한 경우, 심지어 능욕 당하여 처녀성을 상실하여도 징수되었다. 여기에는 남성에게는 부과하지 않는 벌금이라는 점에서 차별적인 조치이지만, 여기에는 촌락공동체로서의 감시역할이라는 제도적 공동의무 부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영주로부터의 혼인허가를 받는 일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촌락공동체의 공동의무였으므로 만약 구성원 중에서 어느 자가 이를 위반하면 위반자 방지를 게을리 한 대가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벌금이 부과되었으며, 이 업무를 grave가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결혼에 관한 규율들은 매우 더디게 확립되는데, 처음에는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그것은 강화되어 나가는데, 여기에는 봉건제하에서의 농노의 종속적 위치 이외에도 토지 경작을 둘러싼 경제적인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즉 토지는 많았으나 그에 비해 인력은 모자랐기 때문에, 토지 관리자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든 땅을 놀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노의 결혼은 현재의 인력이 아닌 미래의 인력생산까지 고려된 지극히 경제적이고 세속적인 이유로 규제되었고, 이를 위한 촌락공동체적 - 장원적 - 인 장치가 고려되었던 것이다.
결혼 의식
14세기 프랑스의 농민이나 혹은 자유민과 같은 이들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몇가지의 통과의례와 절차가 필요했다. 특히 결혼은 공적인 행위로서 사실상 사회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같은 고장의 젊은이들은 온갖 전통적인 요구사항을 내세우기도 했다.
1390년 드뢰에서 벌어진 결혼축하연에서는 초대된 손님들이 결혼 청첩비를 요구하며 소란을 피운 기록이 남아있다. 탄원자는 그들이 연회에 초대받고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이것이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결혼 청첩비를 타내기 위해 꽤 많은 젊은이들이 모였고, 그들에게 신랑 측은 술과 음식을 제공하거나 혹은 돈으로 회사하여 그들을 달랬었다.
1568년에 그려진 피터 브뤼겔의 그림 <농부의 결혼식,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에서는 피로연장에서 다소곳한 모습으로 기다리는 신부와 함께 손님들에게 청첩비 명목의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 술을 따르고 있는 신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술과 음식을 ‘접대주’ 혹은 ‘취침주’라 하였다.
이와 함께 신랑 측이 결혼식에 찾아온 친구들에게 내는 돈으로 ‘신혼신고비’ 가 있었다. 이것은 본래 신랑이 영주에게 바치는 부과세였으나, 이후 왕의 지배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결혼식에 짖굿은 친구들을 달래기 위한 비용으로 바뀌게 된다.
재혼일 때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샤리바리(charivari-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야유를 보내는 소란 행위)를 한다. 1441년 니베르네 지방에서는 재혼한 신부의 집앞에서 샤리바리를 하는 것을 두고 벌어진 분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재혼하는 것에 대한 애교있는 불만표시로 하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규칙이 있는데, 첫째로 신부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되고, 해가 지고 난 저녁에 해야 하며, 사용 도구는 뿔피리와 구리로 만든 기구여야 했다. 샤리바리를 하는 사람은 결혼 적령기의 젊은이들이었으며, 지방 사법 당국은 이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노의 신분 세습
이 시대의 농노라는 신분은 크게 종교적 관점과 일반인들의 관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농노들의 농노’라는 표현을 쓰면서 자칭했다는 것은 농노 곧 '종'이라는 개념이 그다지 혐오스럽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만 목적상에서 농노에게 부과된 부담과 제약들은 기독교 신앙 바깥 세계의 노예 신분이 부과하는 것에 비해서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으며, 이 경우 바르지 못한 인간들 - 정욕에 이끌리는 -에게 겸손과 신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기 위함이 농노제의 종교적 관점인 것이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세속 농노가 됨으로써 얻는 여러 가지 유익함 - 겸손, 복종,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앙의 완성과 같은 -을 신앙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극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매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농노제는 끊임없는 변칙성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즉 주군의 변덕과 혹은 현실적인 이유 - 전쟁, 성의 증축, 그리고 결혼 - 때문에 농노들은 끊임없는 노동과 적절한 양의 금전으로 자신의 미덕을 보여야만 했던 것이다. 기욤의 예는 이러한 농노의 신분세습에 대한 적절한 예를 보여준다.
후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 즉 레지날(Reginald)의 형제로서
우리를 섬기는 기욤 (William)이라는, 사람이 자유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
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 또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공로대로
대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선대해 주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자신을 마르무티
에의 성 마르탱(St. Martin)에게 농노로 바쳐졌다. 자기 자신만 바친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후손들도 바침으로써 영원히 종의 신분으로 그 대수도원장과 이
곳을 수사들을 섬기게 했다. 그리고 이 예물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종 끈을 목에 매고 머리에 4페니를 얹은 다음 그것을 성 마르탱의 제
단에 떨어뜨렸으며, 그로써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렸다. 그 상황의 전말
을 보고 들은 증인들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투르 지방에 있던 마르무티에 수도원 수사들이 기록한 이 문서에서 몇가지 특이점을 찾아볼수가 있는데, 기욤은 부모로부터 자유민의 신분을 물려받았고, 그가 농노가 된것에는 종교적 동기가 있었다는 것, 그렇게 새로 갖게 된 신분이 세습되어서 항구적이라는 것등이다. 여기서 동기에서의 종교적 이유를 떼어놓고 생각하더라도 당사자의 한번의 행위가 가족 전체의 자유(신분)를 영구히 말살할 수 도 있었다는데 특이점이 있겠다. 즉 13세기 무렵의 농노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농노였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서 농노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신분의 변천과 세습을 둘러싼 여러 가지 변화는 사회에 널리 알리되 당시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여기서 위의 기욤은 종 끈을 목에 매고 머리에 돈을 얹은 행위를 하는데 이는 새로 농노가 되는 사람이 종교적인 의식과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머리에 돈을 얹는 것은 인두세(돈)로서 종이 되어 얻은 첫 열매를 복종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12-13세기에는 많은 지역에서 인두세를 내는 것이 당사자가 농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결정요인이었다. 이 시기 사회의 등급은 무수히 많은데다가 신분과 재산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성
86년에 나온 러셀 멀케이 감독의 영화<하이랜더>에서는 이러한 중세 대가족제에 의한 분쟁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이 속한 스코틀랜드의 맥클라우드 가문은 이웃한 가족들과 싸우기 위해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다. 이처럼 중세시기의 가족은 가부장적이든 혹은 부족적이든 간에 대가족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가족은 ‘친척’ 과 ‘인척’ 등의 혈족으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였다. 그 기원은 중세 초 게르만 사회에서 나타났던 느슨한 결연 가족 집단의 재편과정에서 나타난 한 단계였고, 구성원들은 가족 연대에 의해 결합되었다. 이들은 전쟁과 분쟁을 통해서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관행으로 이러한 연대를 공고히 한다. 부르고뉴 지방에서 벌어지는 한 가족전쟁의 기록은 이러한 관습을 자세히 밝혀준다.
“싸움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 싸움은 원래 포도 수확을 하던 어느 날
양편의 토지 소유권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 싸움으로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와 관계된 가문의 아들과 손자들 11명이 죽었다. 세월이 지나도
싸움은 계속되어 증오감만 더해갔다. 수많은 재앙들이 이 집에 계속 들이닥쳐
30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중세의 가족이 공동 가산(家産)을 유지하는 것을 그 토대와 목적으로 하는 부계 가족 단계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봉건적 부계 가족에서 특이한 것은, 상급자에게 항상 충성을 바쳐야 하는 군사적 역할과 개인적 관계가 가족의 남성 집단에게는 가족의 경제적 역할만큼 중요하단 점이다. 더군다나 폭력의 긴장에 따른 가족구성원의 책임은 매우 막중했다. 하지만 신의를 지키는 것보다는 형제간의 분쟁이 훨씬 많았다는 것은 특이한 사항이기도 하다. 이것은 장자상속제가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에 경쟁을 통하여 획득한 권위가 다른 형제들에게 자기의 명령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인데, 때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때로는 강압적인 폭력수단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정복왕 윌리엄의 세 아들들(윌리암 루푸스, 로브터 쿠르토스와 헨리1세)은 이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귀족계층에서는 혈통 또는 가문이라는 낡은 개념이 살아 있어서 혈통 속에 모든 친족이 묶여 있게 된다. 즉 혈통은 연대감뿐만 아니라 이름에 대한 자부심, 이름을 영원하게 만들고 자신과 함께 후세에 전하려는 의지, 될 수 있는 대로 재산, 토지, 권리, 관직과 거기에 붙어 다니는 직책을 늘리려는 의지까지 포함하였다. 이것은 피의 관계와 공동이익으로 결합된 동성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더욱 굳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부계적 형태의 가족의 모습은 농민계급에서도 나타나는데, 토지 경작과 경제적 상속에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은 같은 집에서 살면서 같은 토지를 경작하는 모든 구성원들을 결합시킨 형태이다. 나탈리 데이비스 원작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주인공의 정체가 탄로 나는 이유는 토지의 상속권과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원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농노에 있어서는 크게 두 가지 가족공동체의 형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묵계형과 계약형으로 볼 수가 있는데, 묵계형 또는 공유재산제 가족은 일족간의 공동체로서, 한 집에서 형제와 사촌들이 모여 살며 소유주가 공동재산과 이익을 관리하는 생활이다. 계약형 공동체는, 공증인 앞에서 계약을 체결하여 생기는데, 토지의 공동경작과 공동생활을 목표로 계약을 맺어 이루어진 확대가족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일정한 돈을 받고 숙식을 제공해주는 ‘음식계약’도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모든 구성에 대해서 합법적인 인정을 받는 것으로 경제적으로 절실한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한 확대가족이거나 혹은 다세대 살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중세 봉건 사회 속의 농노가족에 대한 것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 농노는 법률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며, 폐쇄적인 공동체 속의 삶은 말 그대로 “침묵의 공동체”라 불리 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생활로서의 가족
자손번식은 결혼 제도 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 시기의 결혼은 “하나님의 종이 될 자녀들을 낳기 위해서 정해진 육체와 정신의 결합”으로 설명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질 드 롬(에기디오 로마노)은 “ 한 남자의 집과 가정은 부부에게 자식이 없다면 완전치 않다”고 말했다. 혼외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은 푸대접을 받았고, 특히 귀족 계층의 사생아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가정의 불임은 매우 큰 문제였다. 특히 많은 기적담들은 자식을 낳지 못하여 성인이나 성모의 증보를 간구하는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고 한 노력들도 보인다. 피임과 낙태 그리고 때로는 영아살해가 행해졌다. 중세의 전기간에 걸쳐서 교회는 자연 - 자연은 신으로부터 나왔고, 따라서 의당 선한 것으로 여겨졌다 -을 거스르는 이 같은 관행들에 맞서 싸웠다.
피임은 상속자의 수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빈민계층에게는 식구 수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지만, 살인과 마찬가지의 죄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유행했다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 무엇보다도 부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이런 관행들은 실효가 없었고, 대다수의 중세 남녀들은 출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기 자녀수를 줄이기 위해서 가장 권장되었던 방법은 1년 혹은 1주일의 특정 기간 동안 금욕하라는 교회법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낙태 또한 행해졌다. 중세시기는 낙태에 대해서 유난히 엄격했는데, 고의로 임신중절을 행한 자들에 대한 처벌도 임신의 정황과 태아의 월령이라는 두 가지 기준에 따라 달라졌다. 입법자는 극도의 궁핍 때문에 낙태를 행한 이와 자기의 부정을 은닉키 위해 낙태한 이를 구분하여 처벌하였고, 당연히 후자에게 좀더 엄중한 벌을 규정하였다.
또한 입법자들은 태동여부도 고려하였다. 가령 7세기에 씌어진 비드의 참회규정서에서는 “임신한지 40일이 되기 전 태중의 아이를 죽인 어머니는 1년 동안 금식할 것이며, 40일이 지나서 그렇게 한 경우에는 3년 동안 금식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임신여부를 그렇게 쉽게 알 수도 없다는 점에서 단지 이론상의 문제였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영아살해보다는 유기가 훨씬 유행하였다. 비록 영아살해가 존재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대대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여러 공의회들은 함께 자는 아이들을 깔아 죽였거나 혹은 불 가까이 두어 태워 죽인 어미들을 정죄 하려 했지만, 대부분이 고의적이라기보다는 부주의의 소산이었다. 또 영아살해에 대해서도 입법자들은 가난한 여인들과 그렇지 않은 여인들을 구별하여, 전자에 대해서는 벌을 경감시켜 주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세례 받은 아이들과 세례 받지 않은 아이들을 구별하는데, 후자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해당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죽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벌의 가중치는 더욱 무거워진다. 따라서 교회는 극빈자들의 아동 유기를 허용했고, 다른 방도가 없는 부모들에게는 아이를 공공장소, 특히 교회 문 앞에 - 아이들이 좀더 확실히 발견될 수 있도록 - 가져다 두도록 권장했다.
영아살해(Massacre of the Innocents) 는 헤롯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행했던 것에서 유래한 만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극히 반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메모를 완성시키기 위해 정리했던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정리한 부분임.
마을의 발전과 농민층의 정착
중세 초기의 집단 거주 지역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대략 9-10세기 사이에 새로운 주거지역이 형성되면서 마을이 형성되는데, 먼저 성채와 성곽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그리고 소교구가 거주지역의 중심이 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는 교회가 들어서고 공동의 묘지와 기독교의 예배공간은 신도들을 모으는 역할을 했으며, 주변지역은 개인 소유지이거나 토지를 소유한 영주가 양도한 토지로 구분되었다.
마을이 생기고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멀리 있는 땅을 경작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11~13세기 중엽까지 인구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대규모 황무지의 개긴이 촉진되었다. 유럽 도처에서 농민들은 해마다 경작지를 넓혀갔고, 이는 지명과 토지 사용료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다.
농촌에서의 생활 - 1년을 주기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달력을 통해서 중세 농민의 생활을 정리해보자면 이 시기 생산된 달력은 1년을 주기로 해서 농촌의 사계를 구분하고 있다. 12월은 돼지를 잡는 달로서 농부는 돼지를 도살하여 고기를 만드는 달이다. 1월달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로 상징되는데, 이것은 가는해와 오는 해를 나타내준다. 2월의 그림에는 두건을 쓰고 불씨를 뒤적이며 온기를 쬐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결국 겨울은 한 해를 결산하는 계절이었지만 다음 계절의 준비도 못한 채 보내야 하는 죽은 계절이었다.
3월은 그해의 농사를 위해서 땅을 갈고 둔덕을 뒤엎어야 하는 달이었다. 4월의 달력에는 주먹 위에 앉아 있는 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귀족의 전유물인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달에는 겨울에 태어난 가축들을 축사 밖으로 데려나왔으며, 버터나 치즈를 만들기 위해 우유를 가공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4월은 또한 사냥을 떠난 영주에게 성탄절 이후 처음으로 토지와 농기구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시기였다. 5워에는 꽃이 만발한 과수원에 앉아 있는 노인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계절의 포근함과 앞으로의 힘든 노동을 암시하고 있다. 6월에는 긴 낫으로 낫질을 하는 장면과 짧은 낫으로 곡식을 베는 장면이 등장한다. 7월에는 짧은 낫으로 곡식의 이삭부분만을 베고 나머지는 가축의 먹이로 남겨 두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쓴 농부 뒤에는 베어 낸 곡식단이 쌓여 있다. 8월은 타작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는 농부의 모습과, 때로는 바람에 키질을 하여 낱알을 작은 통에 담는 농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월은 수확의 계절을 나타내준다. 사과와 포도의 수확과 포도주를 담그는 모습이며, 11월은 겨울밀을 파종하는 계절이다. 새로 개간한 경지에서 배낭을 메고 파종하게 된다. 이렇듯 농민들의 생활은 노동의 연속이었다. 특히 부정기적인 부역과 세금 납부는 노동의 증가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을 해소할 길은 1년중에 끼어있는 몇몇 축제의 기간뿐이었다.
도시의 노동
원칙적으로 야간에는 모든 노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모든 일은 해가 뜰 때 또는 해가 뜬 지 한 시간 후에 시작되어 소등 시각이나 종과(終課)의 종이 울릴 때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달라서 소등 시각의 종은 겨울에는 6시에, 여름에는 7시에 울렸는데, 주간 작업 시간의 한계를 정하기 위해서 직종에 따라 여러 가지 기준이 마련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가죽을 무두질하는 이는 부활절에서 성 레미의 날(10월 1일)까지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하기로 하는 등의 예외조항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시간은 점차 확대되어 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경제적 요구와 함께 도시의 발전과 상업자본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14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 왕 필립4세는 야간노동을 공개적으로 허용하였고, 15세기에 들어서면 노동자들 스스로의 탄원에 의해서 노동시간의 연장을 공식화하게 된다. 이처럼 노동시간의 연장은 도시에서 진행된 반면 시골(농촌)지역에서는 여전히 구습에 맞춘 노동시간이 지켜진다. 무엇보다도 농민 대중은 봉건적 지대라는 착취를 통해 자신의 잉여 생산물과 때로는 그들의 필수적인 생존 수단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노동 산물 중의 상당한 몫을 현물납이나 화폐납의 형태로 영주에게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능력도 영주들이 요구하는 변칙적인 부역이나 면역조의 납부로 인해 저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3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봉건 지대가 농민 수입의 50% 이상을 차지했으며, 이를 제외하고 나면 비자유민 계급은 자신들의 가족의 생존을 겨우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중세초기에 인구의 증감이 영주의 가장 큰 문제 거리였던 것에서 한층 발전한 형태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중세기의 봉건적 사회구조는 기술상의 느린 발전과 함께 중세 서양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
기근
기근의 만연은 위에서 보았던 봉건제하에서의 피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와 함께 자연의 예측불가능성과 큰 관련을 맺고 있다. 기근의 직접적인 원인은 흉작, 즉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였으며, 이것은 긴 주기로 식량부족을 초래했다. 대략 3년에서 5년마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식량 부족은 기근을 가져오고, 이것은 또 다른 악순환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일기가 불순하고 그 결과 흉작이 발생하면 식료품 가격은 급등하며, 빈민들은 궁핍이 생긴다. 빈민의 궁핍은 사망자의 증가를 가져오며, 이를 통해 기근은 가라앉는 순환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