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월순 全月順(1923~2009)】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여성광복군"
19912년 9월 27일 경상남도 진주군(晉州郡, 현 진주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다른 이름으로 김석(金石)·왕석(王碩·王石) 등을 사용하였다.
1935년 5월 중국 난징(南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화북 지역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8월에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제2구대 소속으로 만주 선양(瀋陽)으로 파견되어 선전 공작 등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에게 항일 투쟁 의식을 일깨웠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에 통합되자 광복군 제1지대에 배속되어 산시(山西)·화베이(華北) 지구 등지에서 지하공작 등에 가담하였다. 이 무렵 같은 대원인 전월순(全月順, 일명 전월선)과 결혼하였다. 전월순은 경북 상주(尙州) 출신으로 1939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였고 1942년한국광복군 제1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두 사람은 동지로서 함께 항일운동에 매진하였다.
1944년 6월 주화(駐華) 미국대사관 무관 버드 대령이 “만주에 있는 일본군의 정보를 얻고 싶으니 만주에 갈 공작원을 추천해 달라”라고 요청하였다. 라오허커우(老河口) 주둔 제1지대 제1구대에서 활동하다가 충칭(重慶)으로 왔을 때, 만주지구 공작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7월에는 미국 대사관 초청으로 유원해(柳原海)·윤원장(尹元章)·안원생(安原生)·안우생(安偶生) 등의 동지들과 버드 대령을 면담하고 첩보 공작에 대해 협의하였다.
만주지구 공작반 파견 전에 유원해·윤원장 등과 함께 임시정부 요원 및 한국광복군 간부들로부터 20일에 걸쳐 특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후 동지들과 함께 중국 군사위원회의 각종 증명서를 휴대하고 8월 초순 충칭을 출발하여 파둥(巴東)·라오허커우를 거쳐 난양(南陽)으로 갔다. 그후 쉬창(許昌)·정저우(鄭州)·스자좡(石家莊)·베이핑(北平) 등을 경유하여 선양(瀋陽)으로 갔고, 유원해·윤원장은 쉬창·카이펑(開封)·쉬저우(徐州)·지난(濟南)을 거쳐 9월 선양에 도착하였다. 선양을 중심으로 김세원(金世元)·김언수(金彦洙)·고윤원(高允源)·안흥기(安興基) 등을 포섭하여 조직망 구축과 첩보 공작을 전개하였다.
김세원을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류허(柳河)로 파견하는 한편 김언수·고윤원·안흥기 등을 국내로 침투시켜 조직망을 연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1945년 초에는 한국광복군과 미군 측에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유원해를 충칭에 파송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았다. OSS 훈련이 시작된 6월에는 국내 정진대 연결과 미국 측의 요구에 따라 충칭으로 돌아왔다. 그 후 미국 측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아 다시 만주로 진출하려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한국광복군 본진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13일 서울로 귀환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최용덕(崔用德) 국방부 차관의 특임행정보좌관 직책을 지냈다. 1955년에서 1956년까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최고위원직, 1958년 충청남도 도지사 직무대행 서리 직책도 잠시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