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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연대 월례토론회
- 복지살인의 기억: 형제복지원 인권유린의 기억과 현실
2013년 9월 5일(목) 오후 7시 30분~, 사회복지연대 강당
- 이 날 토론회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씨를 모시고 대담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이영달, 이진섭, 류종주, 성향숙, 김영미, 유동철, 최진일, 윤문용 회원이 참석해주셨으며, 류종주 회원의 소개로 조영진 님께서 신입회원으로 가입해주셨습니다.^^
- 장애인 인권단체 '발바닥 행동'의 활동가 여준민 님과 이지숙 님, 그리고 광주의 활동가 손님께서 와주셨습니다.
토론회를 시작하기 전, 형제복지원 홍보 영상 '종점에서 시발점으로'(1981년 제작)를 함께 보았습니다.
총 25분짜리 영상인데, 당시 형제복지원의 원장 박인근을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 복지사업을 하는 인물'이고 일종의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부랑자를 사회부적응자로 묘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영상에서 그려지는 형제복지원은 하루 3끼의 푸짐한 식사와 1~2차례의 간식이 제공되며, 형제복지원 내에는 도서관이 있어 사람들이 공부를 할 수 있고, 근로를 통해 일정한 수입을 얻고 이를 차곡차곡 잘 모아서 결국 독립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박인근 원장은 '사회부적응자인 부랑자들이 원장의 깊은 속내를 몰라주어 외롭고 고독하지만 바른 길을 가는 사나이'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상은 당시 보건사회부의 지원으로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상을 보고, 그리고 2013년 3월 형제복지원 문제를 다룬 뉴스타파 영상도 보았습니다.
이 영상에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종선씨와의 인터뷰, 형제복지원의 조장 원생이었던 분과의 인터뷰 등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저녁 8시.. 김종건(정책위원장) 회원과 오늘의 초대손님 한종선씨와의 대담이 시작되었습니다.
▲ 한종선씨와의 대담을 시작하면서..
- 한종선씨는 1976년생, 올해로 38세입니다.. 그는 9살이었던 1984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랑자도, 고아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그 날, 종선씨의 아버지께서는 맛있는 음식도 사주시고, 영화도 보여주셨다 합니다. 그리고 저녁에 경찰서에 가서 '잠시 여기있어, 아버지 좀 있다 올께' 하셨는데, 그 길로 형제복지원으로 가는 차에 태워져 강제로 입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날 저녁에 들었던 말을 종선씨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낯설고 무서운 곳에 끌려와 두려움에 떠는 그에게 복지원 직원은 '다른 애들도 다 똑같이 끌려왔으니, 오늘은 암말말고 내 옆에서 자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 형제복지원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4시에 일어나서 세면을 10분만에 마친 후, 여섯시가 될때까지 구보를 돈다고 합니다.. 복지원 홍보영상에서 보면 식판에 밥을 가득가득, 그리고 반찬도 여러종류가 있어 원생들이 골라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피죽?정도? 주어진 것이 전부라고 하죠..
복지원 내에서 있었던 폭력은 정말 상상 이상의 수준이었습니다.
종선씨는 어느 추운 겨울날, 세면장에서 발가벗은 채로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흠씬 두들겨맞고, 차가운 물을 계속해서 퍼붓고.. 아픈 것을 떠나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 아홉살이었습니다.
복지원은 여러 소대로 구성되어있는데, 소대 분류의 기준은 나이, 성별, 장애유무 등의 기준으로 소대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속한 소대에서는 성추행, 성희롱, 성폭행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종선씨가 그의 기억을 더듬어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종선씨의 아버지와 작은 누나 역시 형제복지원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복지원 퇴소 후에도 계속 정신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 당시 형제복지원은 부랑자 수용시설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일반 시민을 강제로 끌고가서 입소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던 사람 중에는 부산으로 휴가를 왔다가 부산역 대합실에서 잡혀간 사람, 술을 먹고 취해서 거리에서 비틀거리는 사람,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사람,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 등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갔다고 하지요.
형제복지원에 부랑자를 입소 시키는 경찰에게는 가산점이 주어지곤 했다네요.. 정말 일종의 '혐오인 청소'나 다름없습니다.
박인근 원장은 부랑자 수용시설을 운영하면서 '거리를 깨끗하게 해서' 독재정권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답니다.
종선씨 역시 부랑자가 아니었음에도,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끌려갔습니다.
아홉살짜리 꼬마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이나 되었나요?
▲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지고 복지원은 폐쇄되었습니다.
그러고 종선씨는 같은 나이 또래의 원생들과 서울의 소년의 집으로 이동하게 되었지요.
형제복지원에 끌려갈 때 탔던 버스는 일명 닭장차라고 하나요. 창문을 열 수 없도록 창 전체에 장치가 되어있는데
소년의 집으로 갈때는 창에 아무런 장치가 되어있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동중인 버스에 타고 있던 원생 대부분이 뛰어내려 도망쳤다고 합니다. 도망치지 않고 남은 일부의 원생들은 소년의 집으로 갔지요.
▲그에게 목표는 단 하나. 아버지와 누나를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누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겠지요.. 그런데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쳐서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판단을 한 그는, 갱생원에 가서 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종선씨는 군대를 다녀오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던 기간동안 각종 노역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몸 상태는 무조건 현역수준이었는데, '사회부적응자' 라는 이유로 군대를 가지 못했다고 해요...
형제복지원은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평범한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갈취해갔지요.
그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지원 퇴소 후에 잠시 어울렸던 불량배 친구들을 제외하곤요.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던 그에게 친구란? 교과서적인 개념뿐이었다고 하네요. 교과서에 나오는 오성과 한음처럼요.
▲ 형제복지원은 1975년 문을 열었고, 1987년 폐쇄되었습니다. 시설은 폐쇄되었으나 그 법인은 건재하지요.
12년동안 531명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원장 박인근은 고작 2년 6개월의 형을 살았을 뿐이고요.
당시 지방법원에서는 징역 10년, 벌금 6억 5천만원의 판결을 내렸는데,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올라가면서 형은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벌금 또한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복지원은 '형제복지지원재단' 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부산에서 건재합니다
형제복지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던 중, 유동철 회원도 한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2001년. 회원께서 중증 장애인 생활시설 평가를 나갔는데, 형제복지지원재단에서 운영하는 시설에도 가게 되셨다네요.
그 시설에서 살고 있는 중증 장애인들은 제대로 케어가 되지 않아 욕창이 생기고, 이동식 변기를 사용해야 하는등(심각한 인권 침해지요..).. 문제는 계속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박인근 원장의 변명? 해명? 또한 1987년 형제복지원의 인권수준에 머물러 있었고요..
그리고 얼마전,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부산시로부터 약 180억원을 장기차입을 했는데, 상환하기로 한 날짜를 훨씬 넘겨도 차입금을 상환하지 않고, 그리고 상환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요. 형제복지원과 박인근의 비리는 정말 뿌리가 깊고, 잔뿌리 역시 많은 것 같네요...
▲ 그가 형제복지원을 증언하기 시작한 이유는?
종선씨의 아버지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당한 일들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지요.
이처럼 당한 일이 많은데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입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지요.. 입을 떼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자리를 함께해준 참가자들 중에도 형제복지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형제복지원이 있었던 개금-주례 지역에 30년이 넘게 거주하시는 분도 있으셨고..
그리고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자리를 90년대 초반,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 하게 되었는데요..
이진섭 회원의 부친께서는 묘지이장업을 하셨는데, 그때 그 지역에서는 모포담요나 비닐에 쌓인 시신이 나오곤 했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사람이 죽어나갔고, 제대로 된 장례절차를 지키지 않은채 암매장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한, 형제복지원 부지에 들어선 아파트에서는 잠자리가 사납다는 등의 이야기가 돌아.. 한동안 아파트 매매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몇년 전, 원장 박인근은 형제복지원에 대한 자료집을 내었다고 합니다. 총 열 두권 짜리라는데..
이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고, 나는 결백하며 억울하다..라는 마음에서 당시 형제복지원의 행정정보와 자료 등을 종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때, 아 박인근 원장은 망상장애?를 가진게 아닌가 했어요..
어떻게 자신이 한 행동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 나는 결백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제정신이 아닌것은 틀림없습니다.
▲ 광주에서 오신 활동가님.. 얼마전 서울에서 있었던 변방 연극제도 함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성함은 기억이 잘.. ㅠㅠ
댓글로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분이 하셨던 말씀이 참 기억에 남았습니다. 형제복지원은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우리 가족 중에 누구라도 형제복지원에 강제입소당할 가능성이 있었지요. 부랑자가 아닌 일반 시민도 마구잡이로 잡아갔으니깐요.
그런데도 부산은 아직도 형제복지원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 이에 대해 부산사람들이 나쁜 이웃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옆 사람의 상처와 아픔과 사회의 부조리를 방관하는 나쁜 이웃..
▲ 이날 토론회 바로 전날. 종선씨가 만든 '진실의 오뚜기' 입니다.
오뚜기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지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바로 오뚜기 내부에 있는 '진실의 돌' 때문인데요.
진실의 돌이 무게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거지요. 그간 힘든 일을 많이 겪은 그의 내부에도 진실의 돌이 있기 때문에.. 종선씨도 오뚜기처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게 아닐까 싶네요..
▲ 제 2의 도가니 사건.. 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형제복지원 문제. 단지 형제복지원과 원장 박인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지요...아이고.. 어제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글을 쓰다보니 두서없이 많이 길어졌네요.
형제복지원에 대한 자료들을 읽고, 영상을 보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도 사실 선뜻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마치 40년대 50년대 나치의 만행과도 같은 일이 불과 27년전 부산에서 있었다니..
국가가 한 개인의 인생을, 그리고 한 가정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리고 이에 대해 우리는 알면서도 침묵하는 나쁜 이웃이 아닌지..그리고 형제복지원은 '형제복지지원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전혀 개선된 것 없이 부산지역에서 복지 마피아처럼 건재하고 있다는 소름끼치는 사실이...이 비리와 부정부패의 뿌리는 어디까지 닿을까요?
우리는 침묵하는 나쁜 이웃이 되어선 안되겠죠.. 앞으로도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계속됩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동네 이야기니까요..
첫댓글 충!격!적!이!네!요!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