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제목: 부활, 혁명이 시작되다!
날짜: 2023년 4월 16일 부활절 후 제2주
본문: 요한복음 12:31
https://youtu.be/OL-EY0kJYxs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는 성경의 표현은 여러가지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사건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창조로 묘사된다. 안식 후 첫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 창세기의 창조가 세상을 관리할 대리인인 인간의 창조로 완성되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세상을 새롭게 할 대리인 공동체인 교회를 창조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는 판타지들이다.
물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마리아는 무덤에 갔다가 문득 무덤 안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두 천사를 보았다는 이야기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두 천사는 각각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에서 머리맡과 발치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던 지성소의 언약궤를 생각나게 한다. 언약궤 덮개에는 금을 쳐서 만든 그룹 두개가 서로 마주보는 형상으로 앉아 있다. 그곳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요한복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되며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발견한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구약성경의 여러 은유와 판타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이것은 실제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고 깨달은 사람들의 공로다. 사실 어떤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새롭게 조명하여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요한복음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판타지 또는 은유가 있다면 그것은 혁명이다. 혁명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하는 인간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노력이다. 헌법에서 벗어난 통치행위를 하여 국민의 주권이 침해되고 권리가 유린당할 때 시민들은 일어나 나라를 새롭게 한다. 그것이 혁명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4.19혁명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혁명도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으로 전환하게 한 혁명이다. 산업혁명은 경제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혁명과 같은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소개한다. 그 대표적인 구절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에 드러난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한복음 12:31
내가 이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한복음 12:32~33
그러나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28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을 쫓아내시고 그를 따르며 그의 종살이를 하던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 세상 전체를 주관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신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사실 예수님의 최초이자 핵심메시지에 온전히 담겨 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위대한 확신을 가지고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확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부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확증한 사건이었다. 그뿐 아니라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 모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으로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그들은 확신했다(빌 2:6~11).
이런 확신은 사도들에게 현실에서 기존의 불법과 불경건에 타협하지 않게 했고 장차 주님이 속히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베드로가 교회에게 권면한 말씀에 이 믿음이 잘 드러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 기독교 신앙은 주님이 시작하신 혁명을 지속하는 것이며, 주님이 속히 오셔서 그 혁명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혁명은 어떤 세상을 목표로 하는가? 그것은 회개해야 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사는 것과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판타지로 그려진다. 예언자들은 모든 사람이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을 알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꿈은 인간의 표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요약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이다(로마서 8:29~30).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 형상은 참 제사장으로 그리고 참 왕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드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 임무는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여 생명 충만한 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임무를 위하여 예수님은 사셨고 가르치셨고 죽으셨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시고 지금도 성령을 보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지도하시고 그 혁명을 후원하시며 이어가신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되 조롱과 비방을 견디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했다(벧전 3:16~18).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혁명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잠깐이었지만 광주에서는 대동단결과 상부상조의 정신이 실현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함께 일어났고 함께 헌신했다. 그들은 운명을 같이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녹여주었다. 혁명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기독교 정신과 문화, 또는 영향력이 점점 미미해져 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지금,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이 혁명이었음을 기억하고 우리가 그 혁명에 동참한 주역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그 혁명의 내용과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불의와 불법을 대항하고 왜곡된 문화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그 혁명은 단지 교회부흥이나 심령의 천국 같은 일로 변질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그 혁명 정신이 다시 살아나고 회복되어야 교회는 회복되고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시대의 교회에서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끊임없이 다시 근본으로(ad fontes) 돌아가야 한다. 그처럼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혁명이 시작되었음을 교회에게 일깨워주는 대 사건이다!
이 혁명에 동참하여 영광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그 미리 아신 자들 중에 우리도 포함된 것 아닐까! 그런 확신이 있다면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다!
<끝>.
설교안 전문:
https://cafe.daum.net/Wellspring/W9oM/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