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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8주)
주님의 자비로 바라보는 삶
렘23:3~6; 에베소서2:11~22; 마가복음6:30~34, 53~56
오늘 우리가 ‘새로운 예배시편’으로 읽은 시편23편은 누구나 다 좋아하고 애송하는 시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이 시편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냥 그러려니 습관적으로 암송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부름 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의 깊은 곳에서 마음을 담아, 이 시편을 고요히 읊조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늘 체감하다시피, 우리의 삶이 얼마나 메마릅니까? 적어도 늘 풍요롭지만은 않지요? 근심걱정은 바람 잘 날 없지요? 어떨 땐 잠을 못 이룰 만큼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지요? 그런 중에 잠시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깊이 호흡을 고르면서, 마음을 다하여 읊조립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어떤 고요한 공간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마도 처음부터 바로 이 말씀에 깊이 잠기지는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 우리의 깊은 갈망과 아픔을 담아, 간절함을 담아, 우리의 기도를 담아, 이 말씀을 읊조리다보면, 어느 사이에 우리 안에는 우리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가 마련된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을 위해 이런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내가 내 자신에게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대로, 스티로폼 신앙이 아니라 빙산의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티로폼 아시지요? 요즘 같이 집중호우가 내려서 시내나 강이 범람하면, 온갖 이물질들이 다 떠내려 옵니다. 그중에서 압권은 스티로폼입니다. 이것은 너무 가벼워서 물속에 거의 잠기지 않기 때문에 물만 있으면 어디든 떠오릅니다. 이런 스티로폼 신앙은 생각의 파도가 몰려올 때, 걱정근심의 쓰나미가 몰려올 때, 여지없이 떠올라 휩쓸려가는 신앙입니다.
반면에 빙산의 신앙이 있습니다. 빙산은 무겁기 때문에 10/9는 물속에 잠기고 10/1만 물 위에 떠있다고 하지요. 9할이 바다에 잠겼기 때문에 빙산은 바다 위에 부는 바람과 파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바다의 흐름인 해류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센 폭풍이 몰아쳐도 빙산은 결국 해류에 붙잡혀 해류를 따라 움직입니다.
여러분, 스티로폼과 빙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얼마만큼 물속에 깊이 잠기는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깊이 잠기면 잠길수록 우리는 스티로폼이 아니라 빙산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느껴지지 않는데? 할지모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얕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끝 모를 사랑과 자비에 거의 잠기지 못하고, 그냥 표면 위에서만 겉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에 조금도 잠기지 못했으니,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휙휙 정신없이 요동치고 맙니다. 생각이 잡아끄는 대로, 걱정과 근심이 몰고 가는 대로, 자신을 그냥 허용하고 맙니다. 결국 우리의 수많은 생각과 걱정근심의 파도는 우리를 홍수 끝의 쓰레기처럼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은 심판을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정죄가 뭔지를 모르는 분입니다. 죄를 모르는 분이 어떻게 심판을 할 수 있습니까? 온통 사랑인 분이, 온통 자비인 분이 어떻게 가혹하게 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 없음, 무자비 가운데 몰아넣음으로서 스스로 허용한 징벌입니다. 사랑 없음, 무자비는 하나님은 모르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냥 표면 위에서 떠돌다 스스로 고통의 쓰나미에 쓸려가 버리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래서 오늘 시편 말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신다.”를 고요히 읊조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조용히 발을 담그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이것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이 메마른 때에 쉴 만한 물가, 우리가 피할 바위, 우리가 숨을 요새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것은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쉼터, 피난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이런 고요와 평화의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세상이 어쩌지 못하는, 폭풍과 파도가 어쩌지 못하는, 그 고요와 평화의 자리!
그러니까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십니까? 살다보면,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순간입니다.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이고 갑자기 들이닥친 쓰나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인은 그 자리에서 오히려 주님을 더욱 가깝게 만납니다.
전에도 제가 말씀드렸듯이, 시인은 앞에서 3인칭 “주님” 혹은 “그”라고 부르던 분을, 이 구절에서는 갑자기 2인칭 “당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아타 임마디>), 당신의 막대기와 당신의 지팡이로(<쉬브테카 우미쉬안테카>) (그것들이) 나를 보살펴 주시니(<여나카무니> 이것은 안심시켜주고 위로해 주고 위안을 주는 것입니다),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편번역은 히브리어 원문의 느낌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4절의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고 앞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다 3인칭, “주님”으로 번역했고, 반대로 3절의 “그의 이름을 위하여”(<레마안 쉬모>)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로 바꾸어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3인칭이 2인칭으로, “주님” 혹은 “그”가 “당신”으로 바뀌는 이 감(感)을 알아차리시겠습니까? 이때 느끼는 친밀감, 이 안도감을 알아차리시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에서 파도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순간에, 고요히 이 시편 말씀을 읊조리는 가운데, 여러분 안에 고요한 공간이 마련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당신”이 되시고, “너”가 되시고, 마침내 “그래 나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친밀함, 그 위안을 느끼시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말씀의 깊이에 잠길 때, 그 사랑의 깊이에 잠길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안이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쉼터요 피난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땅히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사도바울이 말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온전히 누리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상속의 담보가 되시는 성령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확인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명상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서구에는 오래 전부터 명상이 유행이 되고 있지요. 영국에서 상담을 하는 친구를 통해 들은 말인데, 영국에서는 명상이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정신치료과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와 긴장이 일상사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쉼터, 피난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대로, 이제는 주인이 따로 있어서 노예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를 착취해야 하는 극도의 착취사회, 피로사회에서 스트레스와 긴장은 도를 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똑똑한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전통적으로 주요 종교전통에서 해오던 명상(관상기도)이 바로 이에 대한 최고의 치료제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모두에게는 이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피난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상속자들입니다. 고요히 자리 잡고, 혹은 단순한 일거리를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오늘 시편23편을 고요히 읊조려 보십시오. 마음 깊이에서 진심을 담아 천천히 읊조리다보면, 우리 안에 쉼터가 마련되면서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주님께서 우리 머리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고,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며, 우리의 잔을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척박하고 고된 삶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늘 빈 잔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인생의 잔은, 고요한 중에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늘 채워주시는 잔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마가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 몰려든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마가복음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에는, “그래서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병자를 고쳐주신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인간을 향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암구호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깨우침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오늘 본문 이어서 나오는 말씀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이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스플랑크논/스프랑크나>라는 말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스플랑크논>이라는 말은 본디 동물의 “내장”, “신체의 깊은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애타는 마음”, “자비” “사랑”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는데, compassion은 “함께”라는 뜻의 com과 “고통, 고난”이라는 뜻의 passion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도는 헤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의 내장, 그의 깊은 곳에서부터 아픔이 올라온 것이, 애타는 마음이 올라온 것이 바로 바로 <스플랑크니조마이>,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외딴 곳으로 피해간 예수님과 제자들을 찾아 여러 마을에서 헐레벌떡 발걸음을 재촉하여, 배타고 떠난 제자들보다 더 빨리 그곳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 후반부에 나오는 구절에도 사람들은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가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상에 눕혀서 그곳으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는 그의 내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com-passion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이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어디에 내가 쉴 곳이 없을까, 어딘가에 내가 피할 곳이 없을까, 전전긍긍하며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수많은 염려와 생각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예수님은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아픔을 가지시고 바라보십니다.
예수님 당시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그렇게 헤맸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그들이 깊은 갈망이나 열망을 가지고 그렇게 찾았겠습니까? 아마도 누가 병자를 고쳤다, 누가 기적을 행했다 하니까 우르르 몰려가서 옷술이라고 손을 대보려고 안간힘을 썼겠지요. 당시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글에 보면,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이들이 여럿 나왔고 군중들이 무리지어 그들을 쫒았ㄷ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처음에는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로 알았을 것이고, 어쨌든 지금 당장의 고통과 질병을 고쳐보겠다고 안간힘을 썼겠지요.
그 갈망이 진심이든 피상적이든, 이렇게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깨우침은, 치유는,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 암구호를 신호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사실 이 무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고침 받아야 할 병자들이고, 위로받고 깨우침을 받아야 할 무리들이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필요한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우선 우리 자신들이 이런 무리들과 똑같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깨우치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나를 꼭 집어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은 우리 스스로가 나를 불쌍히 여기는 자기연민, 자기자비, 자기돌봄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연민은 자기 안에 틀어박혀 자기애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자기고통 자기상처에만 빠져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불쌍함에 빠져 자기에 매몰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치유하시고 돌봐주셨던 것처럼, 그런 태도로 우리 자신을 돌봐주라는 것입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마라”, “네 자리를 집어 들고 일어나 걸어라”
여기에는 실재에 대한 선명한 직시가 있습니다. 똑바로 보고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돌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은 그 중심에서, 내장에서, 그분 깊은 곳에서, 실재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실재를 알았던 걸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신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 안에 어느 누구도, 세상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고요와 평화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 안에 진정한 쉼터가 있고 피할 바위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목자 없는 양 같은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그런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 돌봄, 치유, 자비는 바로 여기서 나왔고,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스플랑크논>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삶은 의미와 모순, 질서와 부조리, 생기와 허무, 빛과 어둠, 희망과 좌절이 늘 공존하고 있습니다. 매일 숨쉬는 우리의 숨결 속에 죽음도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늘 좋기만은 않습니다. 늘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늘 생기로 가득차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은 모순의 바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순의 바다 속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던 요나처럼,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흘 밤낮 고래 뱃속에 있을 때에도,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가 가려는 다시스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라하시는 니느웨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요나의 고래 뱃속을 히브리어로 <메에>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았던 <스플랑크논>입니다. 내장, 뱃속, 신체의 깊은 곳입니다. 불쌍히 여김, 자비가 나오는 자리, 그리고 역설적으로 우리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고요와 평화의 자리입니다.
처음에는 여러분이 고래 뱃속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주님의 사랑에 잠겨야 합니다. 처음에는 물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응답도 없고,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고, 캄캄한 어둠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사랑에 잠기면, 서서히 그 <메에>, 그 뱃속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자리, 더 나아가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자리, <스플랑크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