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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7;16-34. 넓혀가는 세계와 영역, 아덴에서의 시작과 인식, 2025. 5. 18.
여러분, 베뢰아를 떠나 아덴을 마주한 바울이 어떨까요? 아테네와 바울, 두 이름의 결합자체가 갖는 의미와 영혼을 향한 바울의 생각이 무엇일까요? 아테네는 인간적인(humanities) 것의 가장 신성한 성지인데, 바울은 기독교적 정신과 열정의 메신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방인의 그릇으로서 세워진 사도 바울이 뵈뢰아를 떠난 그리스의 아테네, 아덴에서의 역할입니다. 넓혀가는 영역과 세계로의 전진인데, 영역은 넓어지고 복음의 세계는 확장되어지는데, 핍박과 어려움은 끊어지지 않았고 계속 되었습니다. 어떻게 아덴을 들어가게 됩니까? 바울을 해치려고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을 피하여 베뢰아에 모였던 형제들의 안내를 받아서 바닷가에까지 왔습니다. 아덴까지는 200마일입니다. 약 320 키로 미터 입니다. 베뢰아의 믿음의 형제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동역했던 누가는 데살로니가에 남았고, 실라와 디모데는 아덴으로 동행하고 못했으며 베뢰아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바울의 부탁과 소망이 나오는데, 남겨진 동역 자들에게 빠른 시간 안에 아덴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피하여 아덴으로 오는 그 때가 얼마나 다급했는가를 말씀합니다. 위급하고,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을 위해하려 하고 주의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을 피해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몸만 빠져 나왔기 때문에 누가와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교만 그렇습니까? 내가 살아가는 삶도 다급하게 삶의 현장을 떠나야 될 때가 있습니다. 형제자매와 부모님을 뒤로하고 떠날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두고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넓혀가는 영역과 더 새로운 세계라면 아쉬움과 함께 새로운 기대가 됩니다. 그 기대가 어떤 결과인지를 모르지만 황급하게 빠져나올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러면 남겨진 동행자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함께했던 분들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앞선 사람이 챙길 몫입니다. 피치 못해서 혼자 빠져 나왔으면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해야하지요? 제가 1999, 12, 13일 이후로 지금까지 히메지에서 나만 살고 나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들을 못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어서 혼자이었지만. 조금 지난 이후에는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몸부림을 치고 물질로 도와주고, 꿈에서라도 만나기를 사모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내일의 여유도 없이 모든 것을 헌신하며 베풀어 주는 분들이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디모데와 실라가 위협을 받았고 지금도 위협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걱정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 세계의 모든 백성과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앞장을 선 지도자들이 국가와 백성의 안위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일들이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동행 해야만 했던 누가는 복음을 위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함께하는 사역을 위해서 아덴으로 오라고 합니다. 여러분, 전도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 보다는 세 사람이 낫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을 위한 선교와 전도 뿐 만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연합과 협력과 동행이 중요합니다. 이 일본, 그것도 히메지에서 여러분의 사람이 넓어지는 영역과 새로운 세계로의 전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이런 동기 속에서의 오늘 본문입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가 16-21절까지입니다. 첫 번째는 아덴이 바울에게 준 인상과 바울이 아덴에게 준 인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22-34절인데, 첫 번째 인상에 이어 두 번째도 아덴에서 받은 인상이 있고 아덴에 준 인상이 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단락에서 아덴이 바울에게 준 인상과 바울이 아테네에 주는 인상입니다. 그러면 아덴이 바울에게 준 인상이 무엇입니까? 아덴은 바울에게 분노를 느끼게 했습니다. 왜요? 아덴이 바울에게 준 영향 때문입니다. 무슨 영향입니까? 세 가지인데 중요합니다. 흥미를 끌었고,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롬1;14-15. 빚을 갚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무슨 빚을 갚기를 원했나요? 복음의 빚입니다. 바울은 늘 빚 진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빚을 갚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 영향이 무엇입니까?
1-1. 바울로 하여금 흥미를 끌게 한 아덴입니다. 무슨 흥미입니까요?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덴은 놀랄만한 역사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연설하던 역사적인 광장, 역사적인 것에 흥미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헬라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습니다. 아덴은 조각상들과 미술의 본 고장입니다. 그런데 아덴의 조각과 미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덴은 철학의 중심지입니다. 에피쿠루스와 스토아 철학입니다. 그런데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와 마주하지만, 그들의 철학의 어리석음을 언급합니다. 다른 사람이 흥미를 끌었던 찬양하는 글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덴에는 테메테르신이 있었습니다. 그리이스 신화의 농업과 풍요와 결혼의 여신인데, 아덴의 예술의 장엄함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보고 인식하고 평가를 합니다. 무엇이라고? 16절.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바울은 농업과 풍요와 결혼의 여신을 우상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영향을 받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아덴을 갔을 때는 바울이 보는 관점에서 역사와 예술과 철학이 죽어 있었습니다. 아덴의 찬란함이 더 이상 타고난 광채가 아니고, 그림자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생명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선한 이유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변하면 우상이 됩니다. 우상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아덴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아덴이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철학과 자선과 풍문, 유머와 관념과 재능 이런 것이 신성시 되었습니다. 숭배하는 조각상으로 모든 것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단을 보았습니다. 23절에 바울은 우상을 보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단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우상이 기득한 것과 너무 많은 우상 때문에 알지 못하는 우상이라는 이 두 가지에 흥미를 끌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않는 부분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면 이 흥미가 어디로 연결이 될까요?
1-2. 아덴은 바울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감정은 본 것 때문에, 흥미를 끈 것 때문에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은 두 가지 본 것으로 무슨 영향을 받습니까? 16. 그는 마음이 분하여. 사도 바울의 마음은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분하여 의 표현은 격발, 돌발에서 파생 된 단어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탁월하고 뽐을 내는 도시의 미와 영광과 예술, 그리고 찬란한 철학과 역사에 대하여 분노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느낀 감정은 통쾌한 감정이 아니고, 일시적인 감정도 아닙니다. 여행자의 감정이 아니고, 격한 감정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격한 감정이 일어났습니까? 먼저는 재능, 달란트입니다. 아덴의 모든 우상의 조각들을 보았을 때 그 것들을 만든 사람의 재주가 출중했지만 그릇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만들 수 있도록 재능과 달란트는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달란트를 선하게 사용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재능과 달란트를 잘못 사용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아덴이 그랬는데 바울의 분노의 감정이 여기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는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상과 신전과 단, 그리고 빛나는 철학의 도시, 경이로운 휘황찬란한 아테네의 모든 것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깊이와 높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만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입니다. 경배 받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우상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경배와 찬양이 없고 이런 것을 만들고 변증하고 세운 사람들이 영광을 받고 경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세 번째는 이런 사람과 이런 재능으로 만들어진 사회의 구조입니다. 여러분, 우상과 신전과 단들이 아덴의 개인을 망치고, 사회를 파괴하고, 쇠퇴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상과 신전과 단들은 개인이 망가지고 사회가 망가집니다. 기초가 무너지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유대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인 바울은 아덴의 아름다움과 예술과 그림을 묘사하고 평가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성의 파괴를 보는 순간 격한 분노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감정의 격한 반응은 거짓과 파괴에 대한 분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우상(잡신의 신상)이 가득했습니다. 16절. 바울이 아덴에서...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격분하여. 왜 격분합니까? 바울이 격분한 것은 소위 아테네라는 문화와 예술과 철학으로 화려한 그 도시 이면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악함이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선거를 왜 합니까? 아직도 임기가 2년 이사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2년 6개월 전에 선포했던 비상계엄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임기 시작과 함께 무슨 많은 법사와 우상과 이상한 사람들이 예언을 하는 일들로 이렇게 비상계엄을 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목사와 신앙인들이 그릇된 일에 바르게 권면은커녕 그들을 따라하고 따라가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부추켰습니다. 모든 메스미디어와 SNS에는 무당과 법사와 우상들이 나와서 별것을 다 하는 사회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조국과 민족의 내일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방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보고 인식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짓 풍요와 잘됨을 이야기하는 깊이가 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2;5-9절.
1-3. 이런 영향을 준 아덴을 보고 인식한 이후에 바울은 주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보고 인식하게 되는 현상과 현실을 보면서 여기에 감추어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빠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왜 복음을 전할 마음이 생길까요? 선한 분노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한 분노가 바울을 움직이는데 복음을 전하도록 합니다. 선한 분노가 장갑차를 무서워하지 않고, 선한 분노가 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중견 지휘자가 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모든 것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아테네로 들어 온 것은 유대인의 방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무엇도 겁나지 않았고 선한 분노가 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처음에는 어디로 갈까요? 회당으로 갑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거기에 갔다는 내용뿐입니다. 그래도 마음 다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저자거리로 나갑니다. 아덴의 광장이고 아덴의 시장입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저자거리가 아고라입니다. 헬라문화의 근원지인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였던 폴리스(도시국가)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의 중심부의 높은 언덕을 아크로폴리스(Acro 높은+Polis 도시)라고 하는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지금 보아도 너무나 대단합니다. 아덴의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과 장터를 그리스어로 아고라(Agora)라고 합니다. 본문 17절 중간에 ‘장터’가 바로 ‘아고라’입니다. 장터에서는(καὶ ἐν τἧ ἀγορἇ) 토론을 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토론방을 ‘아고라’라고 하는데, 그 유래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18절. 바울이 아고라에서, 저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전합니다. 그런데 저자에서는, 아구라에서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시대와 삶과 미래에 대하여 토론을 하는 토론의 장이고 광장이고,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비구레오 철학자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토론을 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을 어떤 상황으로 보았습니까? 어떤 반응입니까? 19절. 아덴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매력을 보았습니다. 미래를 이야기하고 현실의 문제를 타개 하려고 하지만 생명이 없는 도시이었고 죽은 도시이었습니다. 이런 아고라에서 참된 역사와 예술과 철학에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영향을 받았지만 새로운 생명의 영향을 주었습니다.
2. 그러면 바울은 아덴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습니까? 처음에 회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나 경건한 사람들이 메시지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없어요. 거부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아덴에서는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아고라, 저자거리로 갔습니다. 18절. 바울이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입니다. 바울의 변론(辨證 dialegomai)은 예수의 부활(18절)에 관한 것인데, 그러한 내용을 접한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19절) 그래서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22절)설교를 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의 설교입니다. 내용을 말합니다. 아덴 사람은 범사에 종교심이 많은데,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2절). 얼마나 당당합니까? 창조주(24-25절)이시며, 역사의 주인(26-29절)이시며, 심판주(30-31절)이신 하나님을 일목요연하게 전하였습니다. 창조주(24-25절)이시며, 역사의 주인(26-29절)이시며, 심판주(30-31절)이신 하나님의 내용으로 설교를 할 때 그들의 신관(神觀)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무슨 신관일까요?
2-1.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는 신관입니다. 수많은 가미 중에 하나입니다. 유일신이 아닙니다. god입니다. 이러한 신관은 일반적인 종교관입니다. 마치 골목대장과 같은 신입니다. 비위를 거스리면 혼쭐이 날 것 같아 적당하게 제물을 받치는 상인들처럼, 때로는 다른 재앙을 막아달라고 종교관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다른 우상들에게 똑 같은 행위를 합니다. 내 마음에 안 맞으면 언제든지 바꾸는 신관입니다. 태어나서는 신사에 출생신고를 하고 결혼 적령기에 목사를 주례사로 결혼 예식을 하고, 죽는 순간 절에다 영혼능 맡기는 그런 신관입니다. 유일신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것을 지적합니다.
2-2. 에비구레오, 에피쿠로스 철학의 신관입니다. 최고의 선은 쾌락입니다. 에비구레오는 원래 정원생활을 했습니다. the garden life입니다. 에비구레오의 쾌락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에서 해방된 상태를 말했습니다. 현대적의미로 이야기를 하면 단순하고, 검소하고, 꾸밈이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에비구레오의 이상은 높고 고상한 것이었으나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에는 에비구레오 철학자들이 타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선이라는 명제를 쾌락으로 해석했습니다. 에비구레오 철학자는 유물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믿지만, 신의 초월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고상한 신들이 왜 하찮은 인간사에 개입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쾌락)인데, 그 행복은 육체적 쾌락만이 아니라, 정서의 평안이므로 이는 욕망의 절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비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계시고, 결코 무관심으로 무책임한 분이 아니심을 변증합니다. 유대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분파로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천사도 믿지 않고 부활도 영생도 믿지 않았습니다. 현실주의입니다. 그래서 쾌락이 됩니다.
2-3. 스도이고, 스토아 철학의 신관입니다. 최고의 선이 덕입니다. 여러분, 덕은 실천하는데 있어요. 그런데 실천이 없고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형태의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반대 입장인 스토아학파는 우리는 신의 자녀이다. 28절에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은 자연세계의 법칙과 질서를 의미하며, 결국 무신론자입니다. 바울은 자연과 질서 그 자체가 신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분이 계시고,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31절에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신 분이라고 확정해서 설교를 합니다. 철학과 신관이 다르니까? 전하는 신관과 복음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2-4. 바울이 끼친 영향은 모든 사람에게 다 동일하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각각 영향을 받았습니다. 경멸감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좀 더 심오한 사상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수박 겉핥기식의 호기심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멸의 감정을 가졌는데, 18절. 이 말 장이가? seed pecker, 이곳저곳에 이야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되풀이 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밥벌이하는 사람과 만담과 이야기꾼과 무식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깊이가 없고 철학이 없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가리켜서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신이 있고 예수라는 신이 있나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울로부터 감명을 받았지만 이 감명은 다시 호기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덴에서만 그렇습니까? 이런 것들이 오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은 받는데 현재 예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제로 삼지만, 그래서 자체는 영광스럽지만 예수님을 떠나서 표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을 신격화함으로서 아덴을 숭배하고 육체와 물질을 숭배함으로서 데메테르, 땅의 어머니를 숭배하고, 힘의 신인 제우스를 숭배합니다. 신앙인 중에 쾌락, 에비구레오 철학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앙인 중에 도덕적, 윤리적 스도이고 철학자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이 예수님으로, 복음과 영원한 생명과 부활로 가득한 여러분이 되셔서 여러분의 내일과 미래가 시온의 대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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