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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경북 내륙에 자리잡은 영주 '소수서원'까지 찾아가는 길은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여행이다. 기차 배차간격이 잘 맞아 떨어지질 않아 몇 번을 갈아탄 기차 안에서는 각기 다른 목적으로 각기 다른 곳을 향해 여행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일 뿐, 너무 멀어지기 위해 경계하지도 또 너무 가까워지려고 안달하지도 않는, 그저 잠시 한 방향을 향해 함께 가는 객들일 뿐이다. 서울에서 얼마나 달렸을까. 소수서원에 가기 위해 내려야 할 역인 풍기역 근처에 거의 다왔을 때 기차는 소백산맥을 넘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유려한 경관은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마침 풍기역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굴뚝 같이 우뚝 선 구조물에 마치 이발소 그림과 같은 촌스러운 인삼 그림이 보이는데 인삼의 본고장 풍기에 온 것을 반겨주는 듯하다.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에 바로 면한 인삼시장도 여유를 갖고 찬찬히 한바퀴 둘러보자. 역 광장에서는 마침 5일장이라도 열리고 있다면 날짜를 잘 정한 셈이 될 것이다. 그 이름 모를 산나물들에서부터 각종 한약재들이란. 도회지에서는 도무지 보기 힘든 광경이다. 승용차를 가지고 왔다면 모를까, 배낭 하나 사진기 하나 달랑 들고 온 나홀로 답사객이라면 이곳 사람들의 표정도 살필 겸 버스를 타는 게 가장 나을 듯싶다. 역 광장을 나오면 바로 오른쪽으로 주차장으로 보이는 공터를 지나 버스 안내를 해주는 허름한 상점이 하나 있다. 버스 요금이야 현금으로 내도 되지만, 이런 곳에서 누런 갱지에 잉크로 등사한 버스표 한 장을 사보는 것도 한 묘미가 아닐까. 풍기에서 소수서원까지는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 20여 분이면 도착한다. 서원 주변엔 마땅한 숙식처가 없으니 성혈사나 석교리 석불상, 읍내리 고분벽화 등도 둘러볼 생각이라면 가까운 순흥 읍내에 일찌감치 방을 먼저 잡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늘씬하게 뻗은 당간지주를 살펴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죽계천을 잠시 바라보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원래는 맑았을 것이나 지금은 흙탕물만 보일 뿐이다. 죽계천을 중심으로 서원의 반대편에 무슨 양반 마을을 조성한다고 하는데 그 공사로 인해 탁해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 흙탕물 너머로는 작은 정자와 함께 바위에 음각과 함께 붉은 색으로 짓게 덧칠해진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한자어가 보인다.
한편 취한대 왼쪽으로 물에 변한 큰 바위면에 ‘경’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전한다. 먼저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며, 의로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이 한다)’의 ‘경’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단종 복위운동으로 명을 달리한 선비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지만, 앞서 말한 숙수사라는 절을 폐하면서 사찰의 불상 등을 바로 이 죽계천에 모두 내다버렸는데 밤마다 곡소리가 들려와 퇴계 선생이 그를 달래느라 ‘경’을 새겨넣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명륜당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오른쪽으로 지락재와 학구재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지락재는 학구재와 함께 유생들이 주로 기거하며 공부도 겸하던 건물인데, 바로 뒤로 죽계천이 흐르고 있어 유생들이 밤새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할 수 있었으리란 상상을 해본다. 한편 이 건물은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 칸으로 꾸몄고, 공부 잘 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을 '工'자 형으로 지었다고 한다.
당시 소수서원의 규정에 따르면 생원이나 진사 초시 합격자를 일차적 입학 대상으로 삼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특별히 사림의 동의를 거쳐야 입학이 가능했다고 한다. 특히 서재에 기숙할 수 있는 유생의 수를 10명으로 정했다(이후 30명 정도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고 하는데 마치 오늘날의 소수정예 기숙학교를 보는 것만 같다. 게다가 이곳 소수서원을 거쳐간 인원만 총 4천여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장서각에서 오던 방향을 계속 보면 낮은 담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건물이 한 채 외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소수서원의 사당이다. 본래 서원은 공부를 하는 곳이긴 하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선생이 한 명씩 있고 그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곳 소수서원의 경우에는 우리나라 성리학 연구의 선구자라 할 문성공 안향 선생을 중심으로 고려 말의 문신인 안축과 안보 형제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특히 안축은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남긴 이다.
한편 사당과 장서각을 양쪽으로 두고 뒤에 나앉은 건물은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그 음식이나 집기들을 준비하는 곳으로 쓰였던 전사청 건물로, 사당이 있는 건물에는 으레 전사청 건물이 있게 마련인데 종묘에만 가도 볼 수 있는 것이 전사청이다. 다시 전사청에서 학구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면 영정각이 중간에 가로놓여 있다. 영정각은 말 그대로 영정들을 보관하던 건물인데, 현재 영정각 안에 있는 안향의 영정은 고려 충숙왕 때 처음 그려졌던 것을 명종 때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으로 소수서원에서 볼 만한 건물들은 모두 한번 돌아본 것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구재와 영정각 사이로 문이 나 있고 그 너머로 멀리 한옥 건물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옥은 아니고 한옥을 모방한 양옥이라고 할까. 여하튼 이왕 여기까지 걸음한 것, 한번 가 보자는 심산으로 발걸음을 뗀다. 왼쪽으로 보이는 관리인들의 기거 공간이던 고직사를 지나면 아까 보이던 그 ‘한옥의 모습을 한 양옥’인데 돈이 꽤나 들었을 법하다. 이는 소수서원과 관련한 사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사료전시관과 교육관으로, 어째 소수서원보다 크고 넓은 터를 차지한 것이 소수서원을 압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이 안에는 나름대로 둘러볼 것이 많아 다행스럽다.
소수서원을 답사하면서 받는 느낌 중 가장 강렬한 것은 그 자유로움이다. 소수서원보다 후대에 세워진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등과는 달리 건물배치 면에서의 그 자유로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이 들게 하지 않는 포용성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를 두고 무질서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소수서원이 죽계천이나 주위 둔덕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 모습을 보면 그런 말은 쉬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만큼 청춘 남녀간의 연사가 많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4천여 명이 다녀간 소수서원도 혈기왕성한 유생들이 모였기 때문인 지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즉 유생들이 함께 데리고 온 종이나 마을 아가씨와 연분이 생겨 아이를 낳게 되는 수가 있었는데, 분명 신분상 그대로 낳아 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굴린 결과 생각해낸 것이 다음과 같다. 즉 일단은 출산을 한 다음 다리 밑에 잠시 버려두었다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척 해, 고향 집에다가는 ‘다리 밑에 버려진 아이를 주웠다’는 등의 말을 하고 데려다 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 같은 과정을 주워졌기에 이런 말이 전국에 회자되게 되었을까.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넌센스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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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아이들이 버려졌을까?? 버려졌다면 ,,,,,난감
마져 아들을왜.....
정말로 아이들이 버려져...
착하게 살아야지 그러니깐 ㅋㅋ
아이들이 버려졌다니..
아이들이 버려진다는것은 상상도 싫어~
다리 밑에서 주워온다는 유래가 이 청다리라는 것이구나
불쌍하다 ㅠ.ㅠ...
불쌍해요 정말-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