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五
이홍간(李弘幹) 묘갈명(墓碣銘) - 이정구(李廷龜)
성종(成宗)이 선비들의 기개를 배양하여 중종(中宗) 초년에 이르러 도덕(道德)이 있고 정직(正直)한 선비들이 빛나게 배출되어 지금까지 내려온다. 당시의 인물을 추산하여 기묘 제현(己卯諸賢)이라 일컫는데, 그중 한 사람이 구성(駒城, 용인의 고호(古號)) 이공(李公, 이홍간)이다.
방정(方正) 엄숙(嚴肅)하여 큰 절조(節操)가 있어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곧게 권세에 붙지 않는 뜻을 두었기 때문에, 자주 외직(外職)에서 곤란을 겪어 크게 현달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마쳤다.
공의 휘(諱)는 홍간(弘幹)이요, 자(字)는 대립(大立)인데, 약관(弱冠)에 과거에 급제해서 괴원(槐院)을 거쳐 사국(史局)에 선임(選任)되어 호조(戶曹)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의 원외 낭중(員外郎中)을 지내고, 대각(臺閣)에서는 장령(掌令) 두 번, 정언(正言)과 집의(執義) 한 번을 지냈으며, 강관(講官)으로는 사서(司書)ㆍ필선(弼善)ㆍ교리(校理) 각 한번씩을 지냈다.
제사(諸司)로는 사옹원(司饔院)ㆍ군기시(軍器寺)ㆍ종부시(宗簿寺)ㆍ봉상시(奉常寺)의 판사(判事)를 각기 한번씩 지냈다. 그리고 외직(外職)으로는 평안 평사(平安評事)ㆍ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내고, 부모 봉양의 편리를 위해 곤양(昆陽)과 옥천(沃川)의 군수를 지냈다.
한번 권귀(權貴)의 미움을 받아 수원 군수(水原郡守)가 되고, 재차 미움을 받아 공주(公州)ㆍ청주(淸州)ㆍ광주(光州) 세 주의 목사(牧使)를 지냈는데, 치적이 항상 한 도내에서 최(最)였다. 빈전(殯殿)의 노고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1년 지나 하동지 부사(賀冬至副使)에 충원되어 명나라 서울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풍윤(豐閏)에 이르러 병이나 졸(卒)하여 관비(官費)로 상(喪)을 치르고 구성(駒城) 선영(先塋) 손향(巽向) 언덕에 장사지내니, 공이 출생한 성화(成化) 병오년(丙午年, 1486, 성종 17)으로부터 (가정(嘉靖) 병오년(丙午年, 1546, 명종 원년)까지) 61세의 수(壽)를 누렸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사간공(司諫公)이 돌아갔을 때 공의 나이 아직 어렸는데 곡읍(哭泣) 등의 예(禮)를 어른처럼 하였으며 어머니를 색양(色養)으로 모시기를 늙을 때까지 하루처럼 하였다. 자신을 엄정하게 단속하고 자제(子弟)를 법도 있게 가르쳤다.
관에서나 집에서 안팎이 정숙하였고, 인물(人物)을 접할 때면 화기 애애(和氣靄靄)하였다. 어려운 남을 구제하면서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았다.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좋아하여 사귀는 벗들이 모두 당세의 명인(名人)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충암(冲諳) 김정(金淨)과는 도의(道義)의 교분(交分)을 맺었다.
기묘 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공은 항상 강개(慷慨)하게 남곤(南袞)의 사위 이선(李墠)에게 말하기를, “지정(止亭, 남곤(南袞)의 호)이 유림(儒林)의 영수(領袖)로 두 번이나 고변(告變)했다는 이름을 들으니, 일생 동안의 명의(名義)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실색(失色)하였다. 을사옥(乙巳獄)이 일어나 사간(司諫) 곽순(郭珣)이 법의 처단을 받아 죽자 그 집 문 앞을 지나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공은 태상시(太常寺)에 있으면서 선생(先生)의 예(禮)로 부의(賻儀)를 하자고 하니, 여러 동료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감히 응하는 자가 없었으나, 공만 홀로 그 상사(喪事)에 부의를 하였다. 그러자 군소배(群小輩)들이 미워하여 법으로 처단하려 했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또 영산군(寧山君) 이전(李恮)이 찬축(竄逐)되니, 사람들이 모두 억울함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이 경연(經筵)에 들어가 건백(建白)하면서 세종(世宗)이 양녕 대군(讓寧大君)을 방면(放免)한 고사(故事)를 들어 말하자 중종(中宗)이 얼굴을 고치고 가상히 여겨 즉시 방송(放送)을 명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상쾌하게 여겼다.
풍헌(風憲)의 직에 있으면서 권력 있는 재상 양연(梁淵)의 세력이 불꽃 같아 종을 놓아 그 이웃의 청상 과부(靑孀寡婦)를 욕보이자 공이 잡아 가두고 신문(訊問)해서 법대로 처단하였다. 그리고는 또 규찰(糾察)하지 못한 가장(家長)의 죄를 탄핵하자 호귀(豪貴)들이 꺼려하였다.
마침내 여기에 걸려 내쳐졌는데, 그 굳게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으니, 여기에서 공의 대략을 볼 수 있겠다. 아! 공으로 하여금 묘당(廟堂)에서 큰 띠를 늘어뜨리고 홀(笏)을 들고 서게 하였더라면, 그 수립(樹立)한 바가 반드시 우뚝하였을 터인데, 지위가 낮은데다가 수명도 짧았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공의 상대(上代)에 이길권(李吉卷)이란 분이 있었는데 지위가 태사(太史)로 삼중 공신(三重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여러 대를 전하여 이승충(李升忠)에 이르러서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요, 이봉손(李奉孫)은 임피 현령(臨陂縣令)이요, 이효독(李孝篤)은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니, 이들이 공의 3대(代)이다.
사간은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으니 공은 막내 아들이다. 공의 부인(夫人)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제용감 정(濟用監正) 이달(李達)의 딸로 세습(世襲)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공에게 시집와서는 공경히 따라 매우 부도(婦道)가 있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이영성(李永成)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요, 이형성(李亨成)은 음보(蔭補)로 홍산 현감(鴻山縣監)인데 공의 형 이원간(李元幹)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딸이 넷인데, 맏이는 김표(金彪)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한호(韓濩)에게 시집갔는데 벼슬은 모두 현감(縣監)이며, 다음은 조응현(趙應賢)에게, 다음은 문과(文科) 첨지(僉知) 한성원(韓性源)에게 시집갔다.
정랑이 4남 2녀를 낳았으니, 이부민(李膚敏)ㆍ이시민(李時敏)ㆍ이사민(李思敏)ㆍ이덕민(李德敏)이다. 홍산 현감은 4남 7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조민(李肇敏)ㆍ이근민(李謹敏)ㆍ이정민(李貞敏)ㆍ이정민(李靖敏)이며, 내외손(內外孫)이 모두 30여 명이다.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에 여러 손자들이 서로 모여 의논하기를, “할아버지 무덤에 나무가 늙도록 그 동남쪽에 아직도 비석이 없으니, 이는 마땅히 기다린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고는, 이정민(李貞敏)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외증손(外曾孫) 연성(延城) 이정귀(李廷龜)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의 덕망과 의열(義烈)이 알려지지 않은 바 아니지만, 그러나 자세하고 미덥기가 그대만 못하니, 자네가 지어주게.”라고 하였다.
아! 대군자(大君子)의 사업을 드러내 기리는 데 내가 적임자는 아니지만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꿇어앉아서 행장을 읽고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지극한 행실은 공의 독실함이고 공의 큰 절조는 공의 뛰어남이네.
행실은 학문의 힘으로 할 수 있지만 절조는 반드시 하늘에서 부여받아야 하네.
본디 하늘이 기른 바여서 그 출생 특출하였고, 탁월하여 세상에 고고(孤高)하였네.
공의 뛰어난 발자취 우리들의 본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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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弘幹 墓碣銘[李廷龜]
成廟培養士氣, 至于中廟初年, 道德正直之士, 彬彬輩出。 至今追數當時人物稱爲己卯諸賢。 其一駒城李公方嚴有大節, 立朝抗直, 不以權勢詘意。 由是數困於外, 不大顯以終。
諱弘幹, 字大立。 弱冠登第, 由槐院選史局, 歷戶、禮、兵員外・郞中。 於臺閣, 則再爲掌令, 一爲正言、執義; 於講官, 司書、弼善、校理各一: 於諸司, 判司饔、軍器、宗簿、奉常事又各一: 於外庸, 則平安評事、全羅都事, 便養守昆陽、沃川郡。 一忤權貴, 爲水原郡
守: 再忤爲公、淸、光三州牧, 治常爲一道最。 用殯殿勞, 陞通政。 逾年, 充賀至副使朝京, 還至豐潤, 疾卒。 官庀喪葬駒城舊塋巽向原。 距公生弘治丙午, 得年六十一。
公天性至孝。 先司諫之亡, 公年尙少, 哭泣秉禮如成人, 奉母色養, 至老如一日。 自飾峻整, 訓子弟有法, 持官莅家, 內外斬斬, 而接人遇物, 和氣藹然。 賙人之急, 不問有無費, 樂善喜士, 朋遊皆當世名人。 尤與靜菴、冲庵爲道義交。 己卯禍作, 公常慷慨, 語南衮之婿李墠曰: “止亭以儒林領袖, 再得告變之名, 一生名義何居?” 聞者失色。 乙巳獄起, 司諫郭珣死於理, 知舊無過門者。 公在太常, 欲以先生禮賻之, 諸僚懼及禍莫敢應。 公獨賻其喪, 群小側目將搆以法, 不小撓。 靈山君恮竄逐, 人皆知枉而不敢言。 公入筵建白, 乞依世宗放讓寧故事, 中廟改容嘉賞, 卽令放之, 朝野咸快。 其在風憲, 權宰梁淵勢焰薰灼, 縱奴辱其隣孀婦。 公囚訊之斷以法, 且劾家長不糾之罪, 豪貴憚之。 竟坐此出麾, 其堅確自守多類如此, 此可見公之大者。 嗚呼! 使公垂紳薦笏於廟堂之上, 其樹立必卓卓, 而位卑而無年, 吁其天意耶!
公之上世, 有諱吉卷, 位太師策三重功臣。 累傳至諱升忠, 工曹參判。 諱奉孫, 臨陂縣令。 諱孝篤, 官至司諫, 是公三代。 司諫負士望不大施, 有三子, 公於序季。 公夫人固城李氏, 濟用正逵之女, 惟世襲訓, 擇歸歸公, 克敬克順, 甚有婦道。
子凡二人: 曰永成, 禮曹正郞: 曰享成, 蔭補, 鴻山縣監, 後公兄元幹。 女凡四人: 長適金彪: 次適韓濩, 官皆縣監; 次適趙應賢: 次適文科僉知韓性源。 正郞生四男二女: 男曰膚敏、時敏、思敏、德敏。 鴻山生四男七女: 男曰肇敏、謹敏、貞敏、靖敏。 內外孫凡三十餘人。
歲辛丑, 諸孫相與謀, 以爲“先梓樹老矣, 東南尙闕顯刻, 是應有待”, 貞敏狀屬于外曾孫延城李廷龜曰: “我祖德烈靡不聞。 然其詳而信者, 宜莫如子, 子其圖之。” 噫! 鋪張大君子事業, 縱我非人, 顧義有不敢辭。 乃跪而讀狀, 序而銘之曰:
惟至行公之篤, 惟偉節公之卓。 行可學力, 節必天得。 固天所毓, 其生也特。 惟其犖犖, 今世落落。 繄公之躅, 我人之則。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