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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모금이라도 대접하며 잘 해 드리라
이영제 당호(高心堂, 고심당) 영등포교구
평북 영변 북 신현면 화산동 출생,
1924년 1월 20일 생 (음)
우리가 힘들 때는
우리 스승님 세 분께서 고생하며 목숨 바쳐 우리를 위해 일으켜 세운 도를 생각하면서
힘든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파리 한 마리도 죽이려 하면
안 죽으려고 피하는 게 목숨입니다.
누군가 힘들게 하면 싸우지 말고
마음도 상하지 말고 참고 견디면 언젠가 좋은 관계가 되니 잘 견뎌야 돼요.
내가 태어난 곳은 평북 영변 묘향산 바로 밑이에요.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할머니께 들은 말씀인데요. 할아버지께서 총부 지으실 때 논 팔고 목화밭도 팔고 집도 팔고 다 팔아서 돈을 대셨대요. 그때 돈 많은 한의원 하는 사람이 우리 집 재산을 모두 샀는데, 다행히 우리 가족이 계속 살게 하고 대신 소작료를 물고 살았어요.
내가 다섯 살쯤에 가을만 되면 아버지는 떡을 하고 또 쌀가마니를 가득 싣고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머니한테 물었어요. “아바지는 떡 해서 쌀 싣고 어디로 저렇게 가시는 거야요?” 물으니 “할아버지 독립운동을 하시는데 재산을 다 팔아 받쳐서 도로 거기 살면서 그 세를 무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 기억나요. 지금도 그 모습이 머리에 환해요. 그 재산을 팔고도 20년을 그곳에서 살았죠. 참으로 다행이지요. 한울님 조화지요.
그때 천도교인들이 거의 다 그랬어요. 그래서 천도교인 되면 망한다는 소리가 있었죠. 우리 할아버지는 일찍 조실부모하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기에 얼마나 근실하고 부지런하신지 몰라요. 잠시도 쉬지 않고 가마니 짜고 멍석 짜고 하셔서 나중에는 좋은 땅과 집도 사셨어요. 일흔일곱에 돌아 가셨는데 사실 때까지 일을 부지런하게 하셨죠.
영변거리 성안에 큰 교당이 있었는데 거기 아바지랑 어머니랑 따라서 가끔 갔던 기억이 나요. 우리 어머니가 결혼 후 8년 있다가 나를 낳아서 딸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우리 할아버지께서 영제 결혼하는 걸 보고 죽고 싶다고 원을 해서 내가 18세 때 일찍 시집을 왔죠.
큰어머니와 고모가 중신을 했어요. 영감(강정조)이 목수라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살림을 하니 교회에 정착을 못했어요. 내가 남한에 내려와서야 교회에 다니게 됐죠. 우리는 북한에서 직조 공장을 했어요. 비단도 많이 짜고 인조도 많이 짰어요. 인조실 나오는 데가 청진이라 거기서 배급을 타서 실공장을 하는데 6·25가 났죠. 평양에서 나와 애들을 데리고 업고 석 달 걸려 남한으로 피난 왔어요.
마포에 왔는데 정월초하루더군요. 빈집에 피난을 했는데 하루 만에 또 피난가래요. 평택 건너 오산이라는 곳에서 다시 안양으로 와서 살았어요. 10년을 안양에 살다 천호동으로 이사 왔는데 천호동에서 공장 하는 사람 중에 이북에서 나온 집이 있었어요. 처가가 공주인데 다 천도교인이래요. 거기서 총부를 알려 주어 그제야 총부로 나오게 된 거야요. 내가 45세 때쯤이에요. 그때 금요일에 오니 아무도 없어요. 어떤 분이 이층에 올라가서 선생님께 여쭤보라고 해서 할아버지랑 올라가니 모레 일요일 11시에 나오셔서 다시 입교식을 하라고 권유를 하시더라고요. 교회를 찾게 되니 집에 와서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때 신앙촌에 다니던 아는 사람이 있어요. 나를 항상 신앙촌에 데려가려고 한 분이에요. 내가 그날 밤에 꿈을 꿨는데, 그분이 국화꽃을 가득 심은 화분을 주면서 내가 아주머니 오면 주려고 지금까지 키웠는데 이제 아주머니가 다른 곳으로 가니 이 화분을 드린다고 주는 거야요. 꽃을 받고 꿈을 깨니 더욱 기분이 좋았어요.
시일날 교당에 가니 권태화 할머니가 나에게 “애기 엄마 처음 보는데 어디서 왔어?” 하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간의 이야기를 하니 정말 잘 왔다고 반기는 거야. 그 옆에 있던 김병화 사모님께서도 나를 반겼어요. 시일 끝나고 다시 이층에 가서 권태화 할머니랑 김병화 할머니랑 복교식을 했어요.
할머니 집에 가기도 했어요. 어느 날 할머니가 나는 수도원을 지으려고 기도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홍경지 사모님이 계를 하는데, 권 할머니는 수도원 짓기 위해서 계를 들었다는 거예요. 계 한 머리를 타서 수도원 지으려고 하신대요. 그리고 나한테도 계를 하라고 해요. 그래서 나는 벌이가 시원찮아 못한다고 했죠. 그때 박경화 사모님도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둘이 함께 반 머리씩 계를 했어요. 일 년 반 정도 하고 탔지요. 할머니는 수도원(화악산) 자리를 찾았다고 수도원을 짓는다고 하시는데, 나는 돈 낼 형편도 못돼서 그냥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할머니가 막 우시는 거야요. 수도원 집 짓는데 30만원이면 된다고 했는데 네 기둥만 세워놓고 돈 없다고 집 짓는 사람들이 못 한다고 한대요.
그때 우리 영감도 집에서 상심하고 있을 때에요. 우리 영감이 목수 일을 하는데 다방에 의자 만들어 주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잘못했다고 돈을 안주는 거야요. 같이 일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할 참이었어요. 우리 영감이 너무 속상해서 일도 안 나가고 집에 있던 중이었는데, 그때 할머니가 집에 오셔서 울면서 수도원 때문에 속상해 하시는 거야. 그래 가만 듣고 있다가 내가 “어머니 문은 어찌 됐어요” 하니 “집도 안 해 주는데 문을 해 줄 리가 있냐”고 말해요. “그러면 문은 몇 짝 이에요” 하고 물으니 몇 짝이라고 하더라고요. 가만 생각하니 우리 영감은 하루에 문을 열 짝도 더 짜는데 힘들지 않겠더라고요. 그러면 우리 애기아빠한테 문을 짜드리라고 할게요, 하니 할머니가 좋아하시더라고요.
우리 영감을 데리고 화악산 수도원에 갔는데 글쎄 산에 통째로 넘어진 통나무로 문을 짜라는 거야. 각목 사서 하면 금방 하는데 통나무는 바로 할 수가 없어요. 나무를 물에 담가 놓았다가 물에 불려 진을 다 빼서 말려서 짜야 하거든요. 한 달이 되어도 문 한 짝을 짜지 못했어요. 낙성식 기일이 다 돼 가는데 문 하나도 짜지 못했어.
권 할머니가 “어떡하며 좋으냐?”고 걱정을 해요. 그땐 나무를 톱으로 다 자르고 그 옛날 대패로 밀었거든요. 낙성식 때 권 할머니께서 당신 차로 떡가루랑 또 떡 두말해서 왔어요. 그걸 이고 싣고 화악리까지 갔지요. 한영채 선생께서 거기서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차를 얻어서 막걸리 네 통을 싣고 올라갔지요. 가다 한 통이 터져서 뒤집어썼어요.
이튿날 아랫동네에서 사람들도 오고 가평 군수님, 면장도 오고해서 행사를 했죠. 우리 영감님은 집에 오지도 못하고 계속 문을 짰어요. 가운데 방은 미닫이 네 짝이고 여닫이 창살문이 여섯 짝이고 장진문은 네 짝이고 벽장도 네 짝이고 마른문도 통나무 캐서 짰어요. 그렇게 3년 걸려 문을 짰는데 다해서 28 짝이야요. 3년 걸려서 문을 짰다면 누가 믿겠어요. 유리를 넣는데 가평보다 종로가 훨씬 싸더래요. 만 오천 원, 마장동까지 가는 택시비는 그때 할머니들이 돈을 즉석에서 걷어서 주셨어요. 내가 마장동까지 같이 운반을 했죠. 그 무거운 유리를 영감 혼자 화악리까지 가져갔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누군가에게 화악산을 물려줘야 하는데 영등포에 말하라고 할머니가 나한테 말했어요. 그래서 임운길 선생님, 문원장 선생님 등 세 분이 올라가서 보시더니, 마루에서 보면 올라오는 사람이 훤하게 다 보이는 거예요. 선생님이 딱 앉아 보시더니 “이곳이 명당이구나” 하시면서 우리가 맡아서 하자며 할머니랑 녹음기로 녹음하고 각서 쓰고 해서 영등포에서 꾸려 나갔지요.
나는 이곳 화악리에서 30년 넘게 살았어요. 내가 화악산 가게 된 것은 우리 영감이 문을 짜면서 내가 화악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예요. 그때 미군부대가 화악산에 머물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됐어요. 그때 미군들 상대로 색시 장사를 하던 집이 있었는데, 주인이 서울에 집을 사서 가야 될 형편이라 30만 원에 집을 내놨어요. 미군들이 나가니 집이 쌌지요. 그걸 25만 원에 사서 이곳에서 가게를 하니 수도원 가시는 분들이 머물다 가고 했어요.
권태화 할머니께서 수도원을 짓고 난 후에 이곳이 크게 되려면 연못을 파야 된다고 하셨어요. 그때 군부대에서 군인들이 수고를 해 주셨어요. 그 동네에 사시던 분이 거의 이북 분으로 천도교인이었어요. 그분들 모두 부역을 하면서 수고 많이 해 주셨죠.
그리고 할머니는 팔각정을 꼭 지으라고 유언처럼 당부를 하셨어요.
내가 “어머니 왜 팔각정을 지으라고 해요” 그러니까
“복판에 팔각정을 지어라 그리고 연못을 파라. 아무 때라도 좋다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세요.
“대신사님 영정을 내가 지금 다 그렸는데, 살아생전에 연못을 파고 팔각정을 짓지 못해 대신사님 영정을 못 모시고 간다. 우리 수운대신사의 수(水)자가 물수자다. 그러니 연못을 파고 팔각정을 지어 대신사님 영정을 모시면 좋다” 말씀하시더라고요. 권 할머니 집에 그린 대신사님 영정을 내가 본적이 있어요. 따님 한영빈 씨가 지금 잘 보관하고 있어요.
우리 영감님이 이래저래 뒷마무리를 했어요. 돈 30만 원에 집을 완성치 못한다고 집을 짓다가 집짓는 사람이 가버리니 우리 영감이 마무리 하느라 고생했죠. 권 할머니가 마루에서 내다보면 환하게 보이니 그것을 좀 막았으면 보기 좋겠다고 하셔서 영감께 말하니 영감이 “어머니 걱정 마세요 내가 나무 끌어다가 다 해놓을 테니 사람 하나만 구해 놓으세요. 혼자는 나무를 끌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일을 깔끔하게 해 놓았어요.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시더래요.
우리 영감님은 수도원생들이 오면 산에 같이 올라가 주고 부대가 못 올라가게 하면 올라가게 증명도 해주고 그랬어요. 우리 영감님은 그냥 안 올라가고 괭이를 들고 다녔어요. 그때는 길이 매끄럽지 못해서 비가 오면 막혔거든요. 그래서 도랑 파고 길을 만드는 거예요. 오르내리면서 그냥 다닌 적이 없었죠. 우리 집은 수도원의 연락소였어요.
권 할머니가 84세에 수도원을 짓고 88세에 돌아 가셨어요. 4월 19일에 돌아가셨죠. 나는 권 할머니 때문에 화악리 가게 됐어요. 할머니가 별것별것 다 갖다 놓아서 다니면서 만날 생각나서 울었어요. 이북에서 나온 나를 딸같이 챙겨 주시고 했는데 수도원 지어 놓고 수련생 오는 것 한 번 못 보고 가셔서 눈물이 많이 났어요.
권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머니 물건을 정리하더라고요. 이불이며 옷이며 다 버리더라고요. 그때 수도원에 수련 올 때는 각자 이부자리 세면도구를 가지고 수련 왔어요.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두고 가라고 했죠. 수도원 생각나서 할머니 이불을 다 싸서 이고 종로로 가는데 버스를 안태워 주는 거야. 그래서 을지로로 갔는데 거기도 안태워 주는 거예요. ‘못 가져가면 버려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한울님 감응인지 한참 있다 한 안내양이 태워 주더라고요.
막차를 타고 화악리 집에 가서는 아들며느리에게 야단 맞을까봐 뒷방에 살짝 갖다놓고 왔어요. 그때 한태원 선생님이 원장님으로 계셨거든요. 오시면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음날 선생님이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말씀을 드리니 한태원 선생님께서 잘했다고 하시면서 한 짐씩 지고 올라갔어요. 그 이튿날 조반을 먹고 할머니가 갖다 놓은 양은솥에 밀가루 죽 쑤어서 이불을 풀해서 말리고 속살 안까지 빨래해서 풀하고 말려서 밟아 손질해 놓으니 한태원 선생님께서 “사모님 참 대단하시고 고맙수다” 하시더군요.
단체 수련 때도 찹쌀 사다가 떡 해드리고 두부 해드리고 했죠. 별 말도 안 했는데 우리 영감님이 잘했어요. 그 무거운 것을 다 지고 올려다 드렸지요. 나도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어요. 내가 화악산 짓고 이듬해에 그곳에 가서 살았으니 오래 됐죠. 수련하러 오시는 수련생들께 솔직히 잘 해드리면 제 마음이 편해요. 늦게 오시면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시고요. 그게 신세지는 거라 생각들 하시는데, 나는 그렇게 말해요. “이 일은 누가 하려고 해도 못하는 일이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에요. 내가 이북 끝에서 왔는데 한울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주셔서 이걸 하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내 집에서 먹고 주무시고 가시는 것처럼 생각 하세요”라고 하지요. 이런 일을 내 입으로 말하면 민망하지만, 내가 힘 닿는 데까지 마음 닿는 데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을 뿐이고 ‘우리 아들딸 5남매가 잘 지내면 한울님 복 준거지’라고 생각해요.
처음 수도원에 전기가 없을 때 연락하기 위해 사람을 사니 2만 원을 달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 영감이 심부름을 했죠. 밤중에도 새벽에도 올라가요. 그러다 우리가 간신히 선을 연결해 수도원에 전화를 놓았는데 어찌나 선이 끊어지는지. 그래서 3년 동안 하루에 두 번도 세 번도 올라가고 그랬어요. 전화연결이 잘 안돼서요.
하루는 월산선생님께서 강의를 하시러 오셨는데 마이크를 사용하시니까 건전지가 필요 하다는 거야. 전기가 없으니까. 그래서 건전지 사갖고 오는데 오토바이 사고가 난거야. 커브 길에서 택시랑 부딪쳤는데, 오토바이 앞바퀴가 다 없어진 거야. 그리고 할아버지는 저만큼 떨어졌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일어나 보니 다친 데가 아무데도 없거든. 그래서 택시 운전수에게 어서가라 누가 보면 혼난다고 빨리 가라고 했대요. 택시아저씨가 운전하러 차로 가더래요. 그러니까 목욕하러 가던 사람들이 막 달려와서 뺑소니라고 막 혼내더라는 거야.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해서 병원에 가니 아무 이상은 없다고 하시며 며칠 두고 보자고 하시더래요. 그리고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서우니 입원하라”고 권유하니 “괜찮다”고 하시며 바로 합의를 해 주라고 하셨어요. 내가 아픈 데도 없는데 그분한테 손해 끼치면 안 된다고 하시며 합의를 해 주었어요. 단 오토바이는 고쳐 주기로 했죠. 하여튼 수도원 일이라면 밤중이라도 가세요. 성질은 급하거든요.
화악산 수도원 이곳이 참 대단하고 무서운 곳이죠. 수도원에 술 먹고 행패 부리던 사람들 그리고 배반하는 사람들은 가만 보면 좋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이곳이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흐린 날도 있고 좋은날도 있는데 천도교를 나쁘다고 하면 절대 안 되는 거야요. 나는 여러 사람들이 좋지 않는 일을 당하는 걸 봤어요.
월산 선생님께서도 설교 말씀으로 “꾸준히 잘해야 한다. 그래야 된다. 하다 말다 하면 안 된다” “천리 길을 달리는 말이 있는데 말 꽁지에 파리가 달려 있는데 떨어지지만 않으면 파리도 천리 길을 달린다. 우리도 파리와 같이 떨어지지 말고 꾸준히 따라와야 된다”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내가 아래에서 가게를 보는데 다리가 아파서 이번에는 수도원에서 수련을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수련을 하는데 강령이 막 오는 거예요. 그때 밥해주는 내외간이 수도원에 있었는데 간다는 말이 조금 있었어요. 그런데 수련 중 (한울님이) 갑자기 열쇠꾸러미를 탁 던져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나보고 수도원 살림하라고 그러는 줄 알고, 내가 그때 68살이었거든요. “한울님 내가 칠십이 내일 모래인데 무슨 살림을 하겠어요”하니 한울님 말씀이 “너 가을에 단풍나무 보았느냐? 가을에 단풍나무가 빨갛고 빛나고 예뻐. 그러니 너 이팔청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몇 달 있으니 그 내외가 싹 가버리는 거야. 그래서 내가 2년 동안 수도원에 밥을 해줬어요.
한번은 김경렬 선생님이 순회강사로 오시던 땐데, 한태원 선생님도 계시고 한 다섯 분이 수련을 오셨어요. 그때 밥하는 사람이 볼일 있어 어디 가고 없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밥해주면서 수련할 때 심고를 했어요. ‘한울님 저 순회강사 분들이 잘해서 천도교 하루속히 발전하게 해 달라’고 주문을 했죠.
사일되는 날에 점심을 해 드리기 전에 한 시간 수련을 하려고 앉았는데 딱 계란 다섯 알을 앞에 갖다 놓는 거야요. 참 이상하다는 생각만 했죠. ‘왜 계란을 보여 주실까?’ 혼자 생각만 했지. 다시 수련을 하면서 한울님께 ‘왜 계란을 다섯 개 주시는 지요?’ 하고 물으니 ‘네가 걱정을 했으니 내가 준 것이다. 내일 이제 선생님들이 내려가는데 이걸 하나씩 나누어 주고 이걸 깨뜨리지 말고 잘해 오라고 말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날 소감 발표시간에 각자 소감 발표를 했는데 저도 용기를 내어 그 말씀을 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들께서 사모님이 그 귀한 말씀을 주시냐고 놀라워하세요. 지금도 김경렬 선생님이 그 말을 해요. 그 뒤로 그분들이 순회강사로 갔어요. 그분들 중 세 명은 경상도지역에서 왔는데 경상도에서 순회강사를 맡고 김경렬 선생님은 경기도를 맡고 한태원 선생님은 강원도를 맡아서 순회강사로 활동했어요.
나는 원하는 게 한울님, 스승님, 조상님 성령을 합심해 하루 빨리 천도교가 발전하게 해달라고 심고에요. 수도원에서도 지극하게 이렇게 심고를 하면 그냥 아무것도 없고 편안하고 둥둥 떠다니는 느낌을 받아요. 이 세상이 다 내 것이고 다 내 식구라는 느낌을 받는 거야요. 나는 배운 게 없어서 경전을 완전하게 보지 못해요. “저울에 아무것도 놓지 않으면 평평하다”는 선생님 설교 말씀을 듣고 그 뜻이 뭔지 몰라서 수련을 하면서 뜻을 물어보니 ‘네가 수련을 해서 저울에 아무것도 안 놓은 마음처럼 되어라’고 가르쳐 주세요. 잡념을 갖지 말고 반듯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힘들 때는 우리 스승님 세 분께서 고생하며 목숨 바쳐 우리를 위해 일으켜 세운 도를 생각하면서 힘든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파리 한 마리도 죽이려 하면 안 죽으려고 피하는 게 목숨입니다. 누군가 힘들게 하면 싸우지 말고 마음도 상하지 말고 참고 견디면 언젠가 좋은 관계가 되니 잘 견뎌야 돼요.
수도원에 오면 가지가지 사람들이 옵니다. 다 친절하게 대해야지요. 일부러 시간 내어 마음먹고 오는 수련이라서 나는 누구든지 마음 상하게 안하려고 했습니다. 혹 심술이 상하더라도 스승님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마음의 기둥을 잘 잡아야지요. 지금 우리 딸에게도 “물 한 모금이라도 대접하며 잘 해 드리라”고 당부해요. 모든 게 한울님 뜻이고 감응이에요. 크게 보면 내 가정을 위해서도 아니고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서 하는 사업이에요. 한울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판단하고 계세요. 바르게 마음먹고 내 할일만 바로 하면 돼요.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경전 말씀대로 행하고 한울님 마음을 쓰면 한울님이 되는 것이고, 한울님 마음을 쓰지 않으면 마귀가 되는 거예요. 예수교는 예수를 안 믿으면 마귀가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저 한울님만 믿으며 한울님 마음을 쓰면 돼요.
(구술일: 포덕 150(2009)년 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