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이름 명'을 저녁 석 자 밑에 입 구 자가 붙어 있다. 저녁이 되어 캄캄해지면 보이지 않기에 분간할 수 없어 입으로 부른다는 뜻이다.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 그 이름을 가진 이의 품격을 남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이름은 이렇게 모든 사물의 존재와 의미를 구분하고 확정 짓는다.
지난해 팔월 이십사일 국회 법사위 옷로비 청문회장. 의상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증언대에 섰다. 증인선서 직전 "앙드레 김입니다"라고 말하자 법사위원장 목 요상 의원이 "본명을 말하세요"라고 그이를 다그쳤다. 그러자 앙드레 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김 봉남입니다"라고 다시 대답했다. 좌중에서는 폭소가 터졌고 앙드레 김, 아니 김 봉남 씨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름을 가지며 세상 만물 또한 그러하다. 이 이름 때문에 갖가지 사연이 생기고, 소동이 벌어진다.
아이가 태어날 즈음 가장 고민되는 것은 바로 이름이다. 옥편을 뒤지기도 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작명 사이트에 접속하기도 한다. 또 아이 이름을 둘러싸고 부부 사이에 견해가 달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번 정하면 여간해선 바꿀 수 없으며, 낙인이 되어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 이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이름은 성이 보통 한 자에, 명이 두 자 또는 한 자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을지문덕, 흑치상지처럼 넉 자 이름이 적지 않았고 노리사치계 같은 다섯 자 이름도 있었다. 족보와 호적이 생기기 이전의 보편적인 이름은 석 자가 보통이었고, 넉 자, 다섯 자 이름도 많았다.
'박 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러우리'
이름도 유행을 탄다. 천구백육십년대 이전에는 여자 이름에 순, 숙, 자, 옥 들이 어김없이 들어갔지만 요즈음 와서는 세련되고 다양해졌다. 예쁜 한글 이름도 등장하여 아름이, 다롱이, 하얀이, 초롱이, 봄비가 거리에서 뛰어 놀고 있다.
세계화 흐름에 맞춰 외국인도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 주려는 신세대 부모들이 늘어났다. 작명인 신 도희 씨는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승, 은, 경, 범, 회, 열, 효 들과 같은 음절은 되도록 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언뜻 들어서는 여자 이름인지 남자 이름인지 모르는 중성적인 이름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보겸, 은교, 규민, 규빈, 가빈, 세민, 지민 들이 대표적인 사례. 또 달라진 점을 찾는다면 돌림자를 고집하지 않고, 한자의 뜻보다는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이름, 곧 소리에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즈음 가장 사랑 받고 있는 이름 글자는 무엇일까. 작명인들은 빈, 민, 채, 다, 지, 가, 수 들을 공통적으로 꼽는다(경향신문 이천년 이월 삼일자).
더불어서 개성이 강하여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이름도 가끔 등장한다. 지난 천구백구십사년 일본에서는 아들의 이름을 악마로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고, 경북 예천에는 '황 금독수리온세상을놀라게하다'라는 무려 열세 자 이름을 가진 소년이 화제를 모았다. 출석부에는 '황 금독수리'라고 적지만 생활기록부에는 긴 이름 그대로 올려놓고 있다. 황 군의 긴 이름은 황금 독수리가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이 놀라는 태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열네 자 이상인 사람은 열네 명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긴 이름은 열여섯 자인 '박 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러우리' 씨라고 한다.
누구나 한 번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에 대한 불만이 생길 때가 있다. 좀더 멋진 이름이었으면 좋으련만, 남에게 놀림 당하는 이름이 아니었으면 하고 말이다. 지금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실제로 갖가지 까닭으로 이름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을 정하고 고치는 일은 언뜻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나 모든 사회관계가 이름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행 호적법은 이름을 바꾸고자 할 때는 법원의 허가를 얻도록 규정한다. 이름을 바꾸려면 먼저 본적지나 주소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이나 지방법원에 신청해야 한다. 이때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신원증명서와 개명신청사유에 대한 소명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소명자료는 법관이 개명허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결정적인 근거가 되므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를테면, 평소 부르는 이름과 호적상 이름이 다른 경우에는 평소 부르는 이름이 기재된 재학졸업증명서나 생활기록부, 편지가 필요하다. 현행법상 개명허가요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은 따로 없고, 법관이 알아서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이름 때문에 당사자가 사회 생활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겪느냐는 정도가 중요하게 참작된다.
가장 허가율이 높은 사례는 발음상 욕설로 들리거나 수치감을 느낄 수 있는 이름이거나 사회에서 악명이 높은 사람과 이름이 같을 경우이다. 나 창녀, 김 치국, 한 심해 들이 그 예라고 한다. 친족의 항렬자를 따르기 위한 경우와 호적상 이름과 평소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경우도 허가율이 높은 편이다. 성명학적으로 풀어 보아 이름이 나쁘다는 까닭으로 바꾸려는 이도 개중에는 있지만 이 경우에 허가율이 삼십 퍼센트 안팎으로 가장 낮다. 이름을 바꾸어도 좋다는 결정이 나오면 결정문을 첨부해 본적지에 제출하면 이름이 바뀐다.
이름 값도 천차만별
남의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을 '작명인'이라고 하며 작명소라는 간판을 내걸기도 하지만 역술인들이 작법을 운명감정과 겸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로 회사 이름을 지어 주고 돈을 받는 이들이 있으니 '상표 작명인' 또는 '브랜드 네이미스트'라 부른다.
그이들이 활동하는 브랜드 네이밍 업체는 '하이트'라는 상표 하나로 맥주시장을 뒤흔들어 놓은 인피니트, '카스'를 지은 디자인포거스, '라노스', '티뷰론'을 지은 인터브랜드코리아 들 하여 이십여개가 있다. 불황기에도 하루 세 건에서 다섯 건씩 작명 문의가 잇따른다고 한다. 보통 건당 작명료는 천만 원이고, 여러 상품에 쓰일 때는 천오백만 원이며, 회사이름이나 시아이 제작은 삼천만 원 이상을 받는다. 회사 이름이나 상표명은 매출과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의뢰인 측에서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만큼 이름짓는 일이 쉽지는 않다. 특허청에 등록되어 있는 상표만도 사십여만 개라고 하니 국어사전에 등록된 웬만한 이름은 거의 등록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때문에 브랜드 네이미스트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언어와의 전쟁을 벌인다. 브랜드 네이밍 업계에 종사하는 어떤 이는 "밤을 새우고 어렵게 작업한 이름이라도 구십 퍼센트 이상은 이미 등록돼 있어 휴지통에 들어가 버린다"며 "이제 두세 음절의 상표는 포화상태에 있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영어에서 작다는 단어와 편하고 아늑하다는 단어를 합성한 대우자동차의 '티코'만 해도 무려 칠백칠십여 개 후보 이름 가운데 선택되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이름들
현대자동차의 '에쿠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타고 귀환한 말을 뜻하는 라틴어다. 자동차 회사는 이름짓는 데 가장 신경 쓰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자동차 이름이 판매량의 이십 퍼센트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름짓기에만 육 개월 이상의 시간과 몇천만 원의 비용이 투입된다.
김내과니, 영등포 아무개 의원이니 하는 병원 이름은 언제나 딱딱해 보였다. 그러나 신세대 의사들이 속속 개업하면서 권위를 앞세운 명칭보다는 친근감을 주거나 병원 냄새가 풍기지 않는 이름을 짓고 있다. '사랑이 꽃피는 치과의원', '아름다운 치과의원', '고은이 치과의원' 말고도 '다이아몬드 외과의원', '버드나무 한의원', '늘푸른 의원' 들 하여 그 고운 이름의 병원에 들어가기 만 하면 아픈 병이 다 나을 것 같지 않은가.
미용실이나 음식점 이름 가운데는 유난히 톡톡 튀는 것이 많다. '버르장머리', '터프가위', '까를레보끌레', '선영아 머리해'라는 이름의 미용실은 이름 자체만으로도 머리를 하러 온 손님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며느리도 몰라'라는 고추장 광고를 본뜬 '알아버린 며느리' 떡복이집, 신데렐라가 아닌 '순데렐라' 순대집, 영화 「동방불패」에서 따 온 '동방부페'와 사회상을 꼬집은 '부정부페'라는 뷔페는 얼마나 기상천외한가. '떡데리아'라는 떡집과 '세종만화회관', '예술의 전당포', '김에 내리는 마을'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래도 이름짓기의 고수는 닭집과 중국집이다. 골목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업종간에 경쟁이 치열하여 이름으로 승부를 보려는 심사가 있는 탓이다. 코스닥 열풍에 편성한 '코스닭'과 인터넷 시대를 반영한 '치킨닭컴'이 있고, 위풍당당을 바꾼 '위풍닭닭'이란 닭집들은 독특한 이름으로 단골을 확보했다. 루, 원, 성 자로 끝나는 중국집이 많다는 점에 착안하여 '진짜루'라고 이름짓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예 '신창원'도 있고 홍콩배우의 이름을 딴 '곽부성'이란 중국집도 있다.
기호학을 전공한 제주대 박 여성 교수는 "예전에는 작명이 새로운 대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인 작업이었으나, 요즘은 고민 없이 기존 광고를 패러디하는 데 그치고 있다"며 "잘 나가는 분야를 패러디하는 상호는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충고를 한다.
인터넷, 피씨 통신 사용자가 늘면서 본명말고도 '아이디'라는 전자 이름이 등장했으니 가히 현대판 아호라고 부를 만하다. 사이버 세계에서 기존 이름은 무용지물이고 '또이름'이라고 부르는 아이디는 필수적이다. 인터넷 사용자가 천만 명을 넘어서면서 아이디는 명함에 반드시 싣는 것은 물론이고 본래 이름 못지않게 자주 쓰인다.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변형하여 아이디를 만드나 좋아하는 영화 제목이나 단어를 비롯한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과 취향을 담은 아이디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어느 디지털 평론인은 "정보화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하나는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짓는 가상공간의 이름인 아이디, '또이름'이다. 이 아이디는 컴퓨터 통신망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의 유일한 단서이다. 인터넷에서는 상대방의 주소들을 통해, 또 국내 피씨 통신에서는 상대방의 인적사항란을 통해 어느 정도 상대방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디는 컴퓨터 통신상의 자신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짓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한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
자고로 우리 민족은 이름을 소중히 여겼다. 이름은 한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의 호칭이자 죽어서까지 남는 것이며,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름은 자신이나 그이가 소속된 가문의 명예를 상징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귀에 따갑도록 말씀하셨고 '거짓말이면 내 성을 갈겠다'고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곤 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집안 어른의 의무이자 흐뭇한 긍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손의 이름을 짓기 위하여 건강과 다복과 부귀공명을 뜻하는 한자를 찾아 쓰기도 했다. 후손이 잘 되기를 바라는 바람과 기원을 글자마다 진하게 담았다.
그런 전통 때문에 동양에서는 일찍이 성명학 또는 성명철학이라는 것이 생겼다. 사람이 건강치 못하다거나 부부 사이의 불화, 사업 실패, 가난, 질병 따위의 불운을 잘못 된 이름 탓으로 돌렸다. 잘못 타고난 사주팔자도 이름만 바꾸면 백팔십 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여기에는 음양오행의 이치와 한자 획수의 수리, 문자의 의미와 운율 들이 복잡하게 작용된다.
이러한 영향 탓으로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 금기가 생겼고, 어른의 이름 또한 어른의 분신처럼 여기고 함자라 해 마구 부르지 않고 글자 하나마다 '자' 자를 붙여 칭하는 예절도 유래했다.
이토록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에게 일본은 창씨 개명을 강요했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십 퍼센트 가량의 동포가 끝내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자결로써 항거했다.
한자 '이를 명'은 저녁 석 자 밑에 입 구 자가 붙어 있다. 저녁이 되어 캄캄해지면 보이지 않기에 분간할 수 없어 입으로 부른다는 뜻이다. 이름은 이렇게 모든 사물의 존재와 의미를 구분하고 확정 짓는다. 상품의 이름, 곧 상표는 다른 제품과 다른 나름의 특징을 이름 자체로 소비자에게 알린다.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 그 이름을 가진 이의 품격을 남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김 장호 / 글쓴이는 아이들에게 한글 이름을 짓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글운동가 김 슬옹 씨가 펴낸 「한글 이름짓기 사전」(미래사)을 권한다고 한다. 이 책은 한글 이름의 역사와 한글 이름 짓는 법, 현재 사용되는 사람 이름과 가게 이름 들을 소개하고 있어 아주 쓸모 있다고 말한다. 이번 글을 취재하면서 한글 이름을 나중에 바꾸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한글 이름은 부르기에 예쁘지만 자라면서 도리어 어린이 이름같아 곤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 사람의 이름은 그이가 늙어서까지 따라다니는 것이니 당장 고운 것보다는 뜻하는 바에도 신경 써야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