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
"若 菩薩 有 我相 · 人相 · 衆生相 · 壽者相하면 卽非 菩薩"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
아상 등 네가지 상에 대해 배운 이들은 그 뜻이 오리지날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의역이라 하는데.. 그렇다고 멋대로 의역이 아닌
오리지널 뜻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금강경>의 뜻을 살리면서 한역하였기에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관세음보살.().
만일 브라만과 같은 영원불멸인 아트만의 뜻을 제대로 알면 세존께서 왜 그런 아트만은 없다고 하셨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련만
나의 주체인 자아라고 하는 아트만으로 새기니.. 그런 자아는 없다는 무아 이해가 어려워집니다.
힌두교.. 석가세존 당시 힌두교라는 종교는 없었지요.
당시 인도 주류 종교는 바라문교라 했고, 그들의 이론을 철학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을 우파니샤드라 했습니다.
아트만이란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관통하며 변하지 않는 실체하는 존재이며, 바라문교의 목표는 브라만과 아트만이 합일하는 것이라는 것은 우파니샤드의 주장입니다.
세존께서 부정하는 것은 바로 우파니샤드가 주장하는 그런 아트만인 자아입니다.
그리고 석가세존께서 인정하는 자아는 생로병사하는 자를 나라고 하듯..
행위가 있으면 그런 행위를 했거나 하는 자를 나라고 합니다
세존의 설법을 듣고 세존의 행위를 본 제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인 분을 세존 스스로 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행주좌와 행위를 하는 자를 보며 나라고 합니다.
앞에 설명한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1. 내가 생각을 한다.[선험적 자아]
2. 생각하는 자를 나라고 한다.[후험적 자아]
는 문장의 차이를 분명히 아실겁니다.
따라서 내가 주어처럼 이미 존재하고 있어 그가 행주좌와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하여 일반인이 의심하지 않고 있는 아트만이 사라지지 않지요.
내가 꽃을 보고 내가 나무의 향기를 내가 자연 속에서 느끼는 촉감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습니까..
꽃을 본다.. 향기를 맡는다.. 촉감을 느낀다.. 하는
과정인 '3사화합'을 바르게 이해하고 확인하지 못하면..
이치적으로도 내가 촉감을 느끼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힌두교에서 주장하듯 전생과 내생으로 연속되는 자아인 아트만은 굳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현생 5온의 주인이며 주체인 자아[아트만]는 있다고 여깁니다.
<금강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구마라집 법사는 그곳에 주목하여..
아트만을 아(我)라고 한문으로 번역하여.. 무아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저들은 나나 우리가 아닌 남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닌지요..
지금 우리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이북은 우리가 아닌 남이라는 생각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북은 우리와 남이 아닌 한 민족으로 하나가 되어야할 존재라는 인식이 생생해지면 전쟁 위험은 작아집니다.
물론 작아진다하여 전쟁이 안 일어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비무환을 잊으면 아니되지요.
암튼 세계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남이라고 여기기에 죽여도 어떻게 되어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의식이 작용하기에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듯 인간을 남으로 보는 모습을 인상이라 합니다.
세상에는 부처와 중생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어요.
해서 지금은 중생이지만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인데..
'나는 부처가 결코 될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하며 막행을 하는 자들이 사회에는 물론 절에도 있다는 겁니다.
솔직히 저 역시 이 생에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저의 행실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에..
그렇다고 부처가 되는 것을 버릴 수는 없기에.. 말이나 생각은 부처님을 떠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윤회는 믿음이 아닌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중생은 세세생생 중생일 뿐[중생상]이다' 라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요새 연예인 프로를 보면..
4, 50대 연예인인데.. 모습은 영락없는 2, 30대로 보이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요.
자기 관리, 화장술, 수술이 집약된 결과이니 그것을 좋다 나쁘다 할 단계는 넘어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생로병사 하는 것은 인생이라 했는데..
이제는 생애사.. 태어나 사랑하다 죽는 인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으니 젊음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
인도에 있는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불멸하는 영혼인 지바를 4, 5 세기 동아시안이 알 수 없었지요.
그 대신 동아시아에는 신선이라 하여 불로장수를 바라고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금강경>을 한역한 구마라집 논사는 '수자상'으로 본 것 같아요.
그렇듯 수자상이란 현생에서 불로장수 모습을 의미합니다.
현대인 가운데 창조주의 숨[영혼]이 자기에게 있어.. 죽으면 그것이 신의 나라로 간다고 믿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있는 내가 미래인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 역시 수자상입니다.
수자상이란 영원상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보살이라면 그와같은 영원한 모습은 없다고 알아야한다며 냉정히 끊어버립니다.
지금까지 <금강경>에 나오는 4상에 대한 오리지널 의미와 구마라집 법사님이 번역한 4상을 살펴 보았는데..
이제는 인도의 종교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므로 오리지날 뜻으로 네가지 상을 설명해도 좋지만..
구마리집 법사님이 번역한 뜻으로 설명하는 게 더 보편적으로 보입니다.
구마라집 법사님은 정말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보살에게 네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은..
일인칭 주체인 나라는 상[아상]이 보살에게는 없다.
너라는 상[인상]도 보살에게는 없다.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중생일 뿐이라는 상[중생상]도 보살에게는 물론 없다.
불로장수 한다는 영원한 상[수자상]도 보살에게는 없다.
가 됩니다.
그리고 상(相)은 범어로 samjma 인데.. 그 뜻은 생각인 이미지(想)와 외부에 존재하는 모습(相)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생각 속에 있는 이미지(想)가 아닌 외부에 존재하는 모습인 상(相)으로 번역했습니다.
언뜻보면 외부에 존재하는 상은 나와 관계없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지가 생겨.. 그 이미지가 외부에 존재하는 모습으로 굳어버린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외부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상은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구마라집 법사님의 번역인 네가지 상(相)이란..
나라는 상으로 굳어버린 것, 사람이란 상으로 굳어버린 것, 중생이란 상으로 굳어버린 것, 영원이란 상으로 굳어 버려..
쉽게 사라지지 않게 된 것이지요.
보살인 나는 네가지 상이 없다고 외워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돌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일을 하고, 내가 앉아있고, 내가 잠을 잔다" 고 하듯..
'나'를 일인칭 불변하는 존재로 의심하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네가지 상이 없는 아니 네가지 상이 돌처럼 굳어버리지 않은 보살이 될 수 있을까요?.
수행하다 만나는 삼매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 데..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닌가요?.
즉 보고 있지만 내가 보고 있다는 생각이 없고..
생각, 생각을 하지만 내가 생각한다는 생각이 없는 상태..
<금강경>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 강조합니다.
"보살이라 하지만 곧 보살이 아니고[즉비 보살], 이름이 보살일 뿐![시명 보살]"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