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넥블라우스
이민령(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1962년에 개봉한 영화 ‘여판사’에는 차이나칼라에 가슴부분에 큰 무궁화가 수놓아진 검은 법복을 입고 검은 법모를 쓴 판사가 나옵니다. 이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 법복의 디자인도 두 번 바뀌어서, 오늘날의 법복은 앞단에 검자주색 양단이 덧대어진 브이넥의 검은 색 가운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성법관은 법원 문양이 그려진 회색 넥타이를, 여성법관은 법원 문양이 그려진 회색 에스코트 타이를 매게 됩니다. 여성법관의 경우 남성법관과 달리 에스코트 타이를 매기 위해 넥블라우스라는 것을 입게 되는데요, 저는 오늘 이 넥블라우스에 관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넥블라우스는 목과 가슴 부분은 정장셔츠와 동일하게 생겼지만 보통의 셔츠와 달리 민소매이고 갈비뼈 정도까지만 오는 길이로 되어 있어, 상의 위에 덧입게 됩니다. 1980년대에 유행했던 ‘페이크 목폴라’를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넥블라우스의 목적은 목에 에스코트 타이를 맬 수 있도록 목 칼라를 제공하는 일이고, 그 목적에 맞추어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의복의 용도를 신체의 보호 용도와 장식적인 용도로 나누어 본다면, 넥블라우스는 완벽하게 장식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법복 가운을 입고 나면 마치 속에 셔츠를 입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일종의 꾸밈 셔츠 또는 셔츠 모양의 장신구인 셈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법복은 1998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항상 정장셔츠를 입는 남성법관의 법복을 기본으로 두고 이에 준하여 여성법관의 법복을 만들다 보니 넥블라우스의 형태가 만들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법관 임용식에서 처음으로 법복을 받았습니다. 벅찬 마음으로 법복을 입고 임명장을 받은 후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법복 가운을 벗었는데, 넥블라우스와 에스코트 타이도 같이 벗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결국 격식이 있는 자리이니 타이를 매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아서 넥블라우스를 입고 에스코트 타이를 맨 후 그 위에 재킷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판사들은 10년에 한 번씩 재임용이 되면 새 법복을 받게 되는데요, 넥블라우스도 10년에 한번, 하나씩 제공받게 됩니다. 재판부마다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보통 일주일에 며칠씩 재판이 있기 때문에 넥블라우스 하나만으로 10년을 입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넥블라우스를 입지 않고 다른 셔츠를 입어도 상관없는데요, 넥블라우스와 비슷하게 생긴 블라우스를 몇 개 더 구입하는 판사님도 있고, 재판이 있는 날은 아예 흰 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판사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들의 정장셔츠와 같이 빳빳한 칼라가 있는 여성용 흰 셔츠는 많이 팔지 않는데다가, 저는 평소에 셔츠를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사무실에 넥블라우스와 반팔셔츠를 하나씩 가져다 두고 번갈아가면서 입고 있습니다.
넥블라우스는 한두 번만 입어도 목 부분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정장셔츠만큼 자주 빨아 입어야 하지만, 제가 게으른 탓에 넥블라우스를 깨끗하게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세탁을 하려고 넥블라우스를 집에 가져가서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날은 그날 재판기일이 없는 여판사님들에게 넥블라우스를 빌려오기도 합니다. 학생시절 체육시간에 체육복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옆 반 학생에게 체육복을 빌려 입는 것과 비슷합니다.
넥블라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법관, 사법보좌관 및 법원사무관등의 법복에 관한 규칙’이라는 대법원 규칙을 발견했는데요, 위 규칙 제3조에서는 ‘법관 등에게 법복 1착을 대여’한다고 규정하고, 그 대여기간은 ‘재판업무를 수행하는 기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퇴임을 할 때 법복을 반납해야 하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법복이 잠시 대여된 것이었다니, 몰랐던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저의 소유가 아니었던 대여기간 10년, 갱신 가능형의 넥블라우스를 두고, 빌려 쓰는 제가 그 형태와 편의성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권한 밖의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특별한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고 부대체물인 법복을 빌려 입고 있으니, 법복의 대여는 법적으로 사용대차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10년 후에 새로운 법복을 받아도 원래 입던 법복을 반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위 규정을 단순히 법률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신분과 권한을 위임받아 소임을 다하는 것과 같이, 법복도 그 권위에 기대어 잠시 빌린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라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충실한 심리를 통해 치우치지 않는 판단을 하는 것이 법관의 역할이라면, 법복을 입는 것은 법관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형식이자, 법정과 사건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넥블라우스를 입는 일은 제가 여성법관으로서 추가적으로 치르는 일종의 의식입니다. 가끔은 제때 세탁을 못해 지저분하지만, 법정에 들어가기 위해 넥블라우스를 입을 때 경건한 마음이 드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법복을 빌려 입는 것에 담긴 뜻을 생각하며, 넥블라우스에 부끄럽지 않은 차용인이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