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희와 신상옥 숙명의 비극스타
영화감독 신상옥과 톱스타 였던 최은희.
영화에서 이 두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54년 환도직후 신상옥의 데뷔후
두번째 작품인 16mm문화영화 「코리아」에 최은희가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신상옥감독은 피난시절인 52년 첫 데뷔작품인 「악야」를 내놓아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
이때 최은희는 이미 첫 데뷔작인 「새로운 맹서」 (49년)와 「마음의
고향」의 히트로 스타덤에 올랐던 시기이다.
최은희는 당시 촬영기사였던 고김학성씨와 결혼한 처지였으나 6.25의
참사로 남편의 부상, 겹친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이들 두사람은 만나자마자
결합해버려 큰 화제가 됐었다.
화가지망생이었던 신상옥은 동경미술전문학교 졸업직후 고려영화사에
미술감독으로 입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에 매료되기 시작, 당시
베테랑이었던 최인규감독(납북)밑에서 영화공부를 했다.
그 당시의 동료는 홍성기 변인집(작고) 정창화 박성호씨(작고)등.
신상옥과 최은희가 본격적으로 콤비를 이뤄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55년
1월 16일 시공관(당시 명동소재)에서 히트한 「꿈」(이광수원작)부터.
이때부터 신상옥감독의 작품은 초현실속에서 행복을 찾는 니힐리즘을
파고들며 사실주의에 입각한 이상주의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신감독이 영화 「꿈」을 68년 신영균과 김혜정을 주연시켜 다시
제작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후 신.최의 콤비는 「젊은 그들」(55) 「무영탑」(57) 「직옥화」(58)
「어느여대생의 고백」(57) 「그여자의 죄가 아니다」(59) 「춘희」(59)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59)등을 제작하면서 영화를
기업화하기 시작, 신필름이란 간판으로 영화계에 커다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후 「로맨스빠빠」(60) 「이생명 다하도록」(60) 「백사부인」(60)등도
연달아 순풍에 돛단 듯 히트했다.
이들이 결정적으로 영화계에 군림하게 된 것은 당시 옛 동료로서
김지미와 역시 콤비였던 홍성기감독과 성춘향전을 놓고 맞붙어 이기고
나면서이다.
당시영화계 양대산맥이었던 이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
컬러시네마스코프방식을 도입, 신상옥이 최은희와 「성춘향」을, 홍성기가
김지미와 「춘향전」을 만들어 맞대결, 성춘향이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신.최 두콤비는 자신들이 대표작으로 꼽았던 「사람방손님과 어머니」
(61)를 비롯, 「상록수」(61) 「로맨스 그레이」(63)등과 「연산군」(62)
「폭군연산」(62) 「벙어리삼룡」(64) 「청일전쟁과 여걸민비」(65)
「대폭군」(66)등을 제작, 계속 히트시켜 명실상부한 「신상옥시대」를
구축했다.
노래로 유명한 「빨간마후라」 (64)도 이당시 작품.
이영화는 「이조잔영」 (67)과 함께 일본에도 수출되어 상영되었으며
동남아에서도 히트됐었다.
특히 최은희가 실종되었을 당시 였던 78년 2월말께 신씨는 홍콩에서
「빨간마후라」의 필름을 창고에서 찾아내 수출을 하겠다면서 손질하기도
했었다.
한창 이태리 마카로니웨스턴이 판을 치던 60년대 말에는 「마적」 (67)
「여마적」 「무숙자」 (68)등을 만들어 오리엔탈웨스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액션영화를 찍기도 했다.
영화계에서는 이들이 남긴 작품이 줄잡아 2백여 편은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내시」 「속.내시」)(68.69) 「열녀문」 「강화도령」(63) 「쌀」(63)
「천년호」(68) 「태백산맥」(66) 「사녀」(69) 「여자의 일생」(68)
「이조여인잔혹사」(69) 「육군김일병」(69) 「만종」(70)등도 기억에 남는
영화들.
그러나 이들 두사람처럼 풍파가 거센 예도 드물 것이다.
당시 동료였던 영화인들 얘기로는 부도가 난 것만도 여러 차례 였다는
것.
한때 허리우드극장도 경영한 적이 있지만 집안간의 알력으로 바람잘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영화정책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회사명칭의 변화만 봐도 이들이
겪은 우여곡절이 어떠했었나를 짐작케 해준다.
흔히 「신필름」이라고 불렀지만 기록에 남은 영화사 이름만도 6개나
된다.
「신상옥프로덕션」 「서울영화사」 「신필름」 「신아필름」
「안양필름」 「신프로덕션」등이 그것.
신감독과 최은희는 70년대들어 장년이 되면서 눈에 띄게 변화를
가져왔다.
전성기때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등을 감독까지 했던 최은희는
66년 안양촬영소내에 안양예술학교를 설립, 교장직을 맡아 영화현장과는
다소 간격을 두기 시작했다.
신감독은 이때 「전쟁과 인간」 (71)을 만든후 윤정희와 콤비를 이뤄
「평양폭격대」(71) 「궁녀」(72) 「효녀청이」(72) 「삼일천하」(73) 등을
제작했다.
신감독이 오수미와 가까와 진 것도 이 무렵.
73년 신감독은 신성일 김지미를 비롯, 오수미와 함께 영화 「이별」의
파리로케를 다녀오면서 로맨스의 꽃을 피웠다.
신감독과 최은희의 납북이전 마지막 콤비작품은 「한강」 (74)
「아이러브마마」 (75).
신감독은 75년 오수미를 주역으로 「춘희 75」를 만든 데 이어 「장미와
들개」를 제작, 예고편 상영 중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을 무단으로
연결했다가 11월 28일 영화업허가를 취소 당했다.
북괴납치 이전의 마지막 작품은 76년 합동영화사제작으로 햇빛을 본
「여인407호」와 「속.여인407호」.
그후에도 대작규모의 「사나이들」을 만들었으나 무허가이었기 때문에
창고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 과정에서이 두사람은 76년 8월 12일 정식으로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신감독과 오수미사이에 두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최은희는 당시 「남편이 딴 여자에게서 두아이를 낳았다는데 어떻게
모른 체할 수 있느냐」고 헤어진 동기를 밝히며 「그러나 지금은 담담하다.
구분의 행복을 빈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또 「이제 나에게는 안양학교뿐」이라면서 「불란서식 배우학교로
만들겠다」고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었다.
최은희를 항상 「최여사」라고 부르던 신감독은 「회사가 없어져
고전했지만 가진 것 모두를 처분해서 그녀를 도왔다」고 밝혔었다.
최은희도 신감독과 헤어진 후 신감독의 영화활동을 「인간적으로
밀어줘야 한다」고 늘 말했었다.
소녀시절 극단 「아랑」으로 연극무대부터 연예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76년 신필름의 허가취소 후 극단 「배우극장」을 설립, 「의사지바고」를
공연하면서 놀고 있는 호사 스태프를 모두 기용하여 화제가 됐었다.
우리 영화계를 살펴보면 신필름이나 신상옥 최은희의 영화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영향력도 컸다.
톱스타였던 신성일 신일용등은 신씨 예명까지 있으며 이밖에 신영균
남궁원 김진규등도 전성기 당시 함께 꽃을 피웠다.
이밖에 최인현 이형표감독등도 콤비를 이뤘으며 이경태 이장호등은
조감독 출신.
최근 톱스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윤희도 75년 신필름을 통해
이경태감독에 의해 데뷔했다.
영화계에서는 한때 신.최 두사람을 사르트르와 보브와르에 비유하기도
했다.
항상 깔끔한 맵시와 멋을 강조했던 이상주의자가 신상옥감독이었다면
최은희는 가장 한국적인 개성과 용모를 지녔으면서도 개방적이고
소탈했던 여걸이었기 때문.
신감독은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도 모양을 내는 멋쟁이로 항상
최고급으로 입고 썼으며 화려한 분위기에 묻히기를 즐겼다.
억척스러운 면이 있어 걷어붙이면 막일도 서슴지 않았던 최은희도
톱스타의 생리가 배어 일상생활이 까다로울 정도로 단정하면서 화려하고
맵시 있었다는 게 영화인들의 회고.
따라서 자유분방한 이들의 성격과 생리로는 세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지옥 같은 북한에서 배겨나지 못할 것이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양삼>
최종 편집: 1984년 04월 02일
카페 게시글
은막의 여신들
영화감독 신상옥과 톱스타 였던 최은희 (펌)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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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1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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