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낸 허곤(許琨)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이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준의 이복 형 허옥(許沃)은
임금의 신변보호와 궁궐수비를 책임지는 내금위에 있었고,
동생 허징(許澄)은
서자이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 교리 등 내직을 지냈고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노수신(盧守愼)의 사위가 되었다.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비록 서자였지만 차별받지 않고 명문가 출신답게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 등에 밝았다.
허준이 형제들과 달리 어떤 계기로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의하면 1
569년(선조 2)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1573년(선조 6)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이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1575년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기 시작했으며,
1578년 내의원첨정이 되었다.
1587년 10월에는 태의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여 건강이 좋아지자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어의로서 선조 옆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셨으며,
그 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병을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제수되었고,
이때부터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 등 여러 의원들과 함께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의 발발로
의서 편찬이 어려워 보류되었다가
본격적인 편찬은 16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601년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에는 양평군(陽平君)에 올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으나
중인 신분으로는 과도한 벼슬이라 하여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보류되기도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그는 광해군 대에 주로 의서를 편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측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이라 평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는 또 《구급방(救急方)》을 언해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벽역신방(辟疫神方)》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
《맥결집성(脈訣集成)》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의 저술이 있다.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소설 동의보감'은
1990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상, 중, 하 3권으로 간행하였다.
조선 중기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나
어의(御醫)로 정일품까지 오르고
세계적인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한
허준(許浚)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불꽃처럼 뜨겁고 명징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허준은 평안도 용천군수의 서자로 태어난 비천한 태생이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건달로 지내다
경상도 산음(山陰)에서 명의(名醫) 유의태(柳義泰)를 만난다.
허준은 물지게꾼부터 시작해
점차 유의태의 눈에 띄어 의술을 배우게 된다.
우의정 성 대감 부인의 중풍병을 완쾌시키고 받은
과거시험 소개장 때문에
의원에서 내쫓김을 당한 허준은 각지를 전전하게 된다.
과거를 포기하면서까지 민초들의 병을 고친다는 소식을 접한 유의태는
허준을 다시 제자로 받아들인다.
허준은 반위(위암)에 걸린 유의태가 해부 실험대상으로 자신의 몸을 내놓고 자살하자
밀양 얼음골에서 스승의 시신을 해부한다.
그 이듬해
허준은 내의원 의과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내의원에서 어의(御醫) 양예수를 만난 허준은
그가 유의태의 적수였음을 알고 경계하는데,
양예수 역시 그가 유의태의 제자임을 알고 허준을 박대한다.
혜민서에 근무하게 된 허준은
그곳의 불합리함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쓰다가
그를 사모하는 의녀 미사를 만난다.
그의 혼신을 다한 의술은
결국 선조 임금의 눈에 띄어
임진왜란 때는 임금을 호종하는 등 선조의 총애를 받는 어의가 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명예나 출세보다는
인간의 귀천과 관계 없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원칙에 충실한, 진정한 의술인(醫術人) 허준을 그려냈다.
그가 그려낸 허준의 우직하고 곧은 집념과
고통받는 민초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극작가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극적인 전개에 탄력을 받아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 허준 한 사람만을 단선적(單線的)으로 쫓고 있어
대하소설이 갖는 특징들을 찾기 어렵다는 지적과
역사적인 인물인 허준의 배경과 사실을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각본한 《집념》(1976년 MBC TV드라마
양예수(楊禮壽 ?~ 1597)
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경보(敬甫), 호는 퇴사옹(退思翁).
박학하고 의술에 능하였으나
1563년(명종 18) 내의원주부(內醫院主簿)로서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투옥되었다.
이듬해 다시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으로 발탁되었다.
1565년 어의(御醫)로 명종의 총애를 받아 통정대부에 오르고,
명종이 죽어 의관들이 처벌당할 때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1580년(선조 13) 가선대부에, 159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의(太醫)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박세거(朴世擧)·손사명(孫士銘) 등과 함께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저술하였다.
임진왜란 때 중전이 수안과 해주에 머물 때 호종의관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