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모는 이현필의 장례에 다녀온 얘기를 그의 일기에 적어 놓았다.
‘직경 3만리 흙구슬에 높이 고이어 물로 뒤덮은 위로 쌓아올린 김구슬과 밀김(呼)과 썰김(吸)으로 목숨쉬 잔치를 그만 마치신가. 임자(1912)년에 나서 갑진(1964)년에 마치다. 인제는 쓰지 않게 되어 두고 가신 몸은 흙속에 돌려 묻었다. 두덩으로 올라 묻고 넓은 흙 위에 떼풀만 보니 떼는 잘 살겠구나. 그러나 떼도 살고 죽어야 마치니 이제 제도 예 마치면 제 가면 마는 것이다. 현필 이언 수 마치신 토우는 고 현창주언이 짓고 있고 누시던 방이다. 나도 앞서 자보던 방인데 이 저녁에도 여서 김 김 이 류가 한밤 쉬자고 눕다. 늙으신 능주 한나 주인의 말씀 이선생 현필언께서는 16일 중 괴로워 하심을 나타내시다가 17일 중 돌아갈뜻의 말씀과 하느님께 빎으로 빎으로 하시다 고요하게 잠잠한 속으로 아모 기침이나 담 끓는 일도 없다가 새벽에 끝.’
이현필은 12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며 20살에는 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보았다. 거기에 이세종으로부터 생명외경사상 영향을 받아 여색과 육식을 일체 금하였다. 이현필은 이미 기독교회의 속죄교리에 젖어있어 류영모의 비정통신앙에 당혹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도 류영모의 비정통신앙에 당혹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도 류영모의 신앙사상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몇 년 동안은 광주로 초청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이현필은 대단히 총명한 사람이라 류영모의 말을 되새김질을 하는 가운데 이해의 눈을 뜨기시작하였다. 거기에 두사람은 예수 석가와 같은 철저한 금욕사상의 바다의 수평선처럼 분명한 공통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현필은 1964년 떠날 때까지 류영모를 스승으로 깍듯이 받들었고 류영모는 이현필을 경애하는 도반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현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상근기를 가진 것도 아니요 정통교리를 회의해 본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따르는 스승 이현필이 류영모를 받드니 훌륭한 분으로 알았다. 그러나 평양신학교 출신인 정인세를 비롯한 몇사람은 류영모의 비정통신앙에 불만을 들어냈다. 한번은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들의 아침 예배 시간에 류영모도 함께 하였는데 사회를 맡은 김준호가 류영모에게 공기도를 청하였다. 그러나 류영모는 공기도 대신에 일어나서 공기도는 거짓되기 쉽다며 공기도 무용론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예배는 예정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것을 정인세는 들어내놓고 싫어했다. 하긴 그들의 신성한 예배의식이 뒤틀려 졌으니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류영모는 참다운 예배는 하느님과 성령으로 통해야지 의식은 쓸데없는 것이라 여겼으므로 시키는 대로 공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류영모는 전북 완주군에 있는 임야 1만여평과 3백여평의 대지가 있는 집을 사서 동광원에 기증하였다. 김준호가 전주에 동광원 분원을 세우겠다고 해서 사주셨다. 맏아들 의상이 미국에 이민 갈 때 구기동에 있는 임야를 팔았는데 거기서 생긴 돈 일부를 의상에게 주고 남은 돈으로 사준 것이다.
얼 벗 여러분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도반 한명을 안다는 것이 그토록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얼 벗 한명을 만나기란 맹귀우목(盲龜遇木)의 인연이 아니면 불가한 일입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이 바람들은 무처럼 형펀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뽐내는 이들은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목소리처럼 들려 가까이 가서 들어보면 탐욕이 이글거리는 속을 감추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통하는 이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