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라리쉬
내가 출가 전에, 그러니까 불교를 잘 모를 때에 라마나 마라리쉬의 ‘나는 누구인가(이호준역)’를 읽고 전율했다. 어디서 감동했냐고?
첫 번째로 감동한 것은 그가 17세에 임사체험을 겪고 나서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육체는 결국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도 아니다. 두뇌는 육체와 함께 썩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격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다. 인격과 감정도 역시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가 일찍 진리의 길에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을 떠나 사원으로 가서 명상에 잠겼다. 그가 사원의 지하실에서 명상에 잠겨있을 때 해충들이 몸을 물어뜯어 진물이 흐르고 엉덩이에서 고름이 흐르는 것도 잊고 깊은 삼매 속에 지냈다. 그는 여러 해를 ‘나는 누구인가?’를 붙들고 명상했다. 이것이 두 번째로 내가 감동한 부분이다.
내가 출가하고서 벽지불이라는 단어를 배웠을 때, 불교에서 말하는 벽지불이 바로 이런 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반박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진아(참나)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무아와 반대되고, 창조신 브라만을 이야기하는데 불교에서는 신을 부정하잖은가?”
그가 진아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개체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에고를 기반으로 생겨난 개체적 자아를 부정한다. 그는 사용하는 용어들은 우파니샤드에서 사용하는 관습적 표현들을 차용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선사들이 도가의 용어들을 차용해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그가 말하는 진아는 이런 것이다.
“순수한 앎이 진아다. 진아가 아닌 것을 제거하면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가 소멸하고 보는 자가 소멸하고 진아만이 남는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는 관념을 제거하면 개체적 자아가 소멸하고 오직 순수한 앎만이 현존한다. 오직 식뿐이다. 거기에는 ‘나’가 없다.”
라는 뜻이다.
거기에 ‘가짜 나’가 있고 ‘진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진아가 육체의 주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순수의식(진아)만이 실재한다. 그가 사용하는 브라만이라는 용어도 또한 창조신 브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체, 의식, 지복, 신, 진아는 같은 말이다.”
이런 표현을 보면 그가 말하는 진아는 무아의 다른 이름이고, 브라만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인도에서 성행하는 다양한 수행법에 대해 옳고 그름을 설명한 부분이 가슴에 와닿는다. ‘모든 길이 하나로 통한다. 모든 길이 산 정상으로 향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타요가(우리가 생각하는 몸을 유연하게 하는 운동)에 대하여
“몸에 대한 집착은 전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적인 문제는 오직 마음의 문제이다.”
쁘라나야마(호흡 명상)
“마음이 조절되면 호흡은 저절로 조절된다. 호흡을 조절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마음만 조절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는 초보 수행자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쿤달리니 요가(생명 에너지를 영적 통로를 통해 정수리까지 끌어 올리면 수행)
“위험하고 불필요하다.”
까르마 요가(이타심, 사회봉사, 희생, 타인에게 도움 주기, 함께 좋은 세상 만들기)
“이것은 도움을 주려는 나와 도움을 받는 타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원성의 세계다. 도움을 줄 사람도 도움을 받을 사람도 없다. 오직 진아만이 실재한다. 진아는 행위에 관심이 없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신이 할 일이지 그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는 내면으로 들어가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즈냐나 요가(지혜 요가)만을 주로 권했지만, 그 외에 유일하게 인정한 것인 박티 요가이다. 박티 요가는 신에게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가 박티 요가를 인정한 것은 모든 것을 신에게 바쳐버리면 에고가 소멸하고 자아가 소멸하여 무아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로 신이 있어서 구원해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30년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읽었던 내용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은 부분은 토치카 비유와 부지깽이 비유이다.
“적이 토치카에서 고개를 내미는 족족 쏘아죽이면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생각이 적이다. 생각의 습관에서 벗어나려는 싸움은 불가피하다. 생각이 없으면 세계도 없고, 신도 없고, 창조주도 없고 진아의 지복만이 유일할 실재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라. 그러면 부지깽이가 모든 불쏘시개를 타 태우고 마지막에 자신도 불타 없어지듯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모든 번뇌와 에고를 태워버리고 마지막에 자신도 타 없어질 것이다.”
이 말에 감동하여 나도 한때 ‘이 뭐꼬’ 화두를 열심히 들었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평생을 깨달은 성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도 전통 팬티로 중요 부분을 가린 것이 거의 유일한 소유였다. 특별히 누군가가 질문하지 않는 한 침묵으로 지냈다.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축생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 평등한 사랑을 베풀었다. 암에 걸려 통증이 심해도 몸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어떤 통증도 그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진짜 진리를 깨달은 성자이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_()_()_()_
진아와 브라만의 설명이 명료하게 다가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속 형상 에서도
맑고 맑음이 전해지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