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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 Sh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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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 전차는 75mm포 장착형 M4A1 셔먼)
개요
T-34와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향을 미친 전차
[William Tecumseh Sherman 그는 북부군의 용맹한 장군이였지만 점령한 지역을 초토화하는 작전을 펴 남부인에게는 악마라고 불리는등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M4 Sherman. 미국의 유명한 쑥밭 재배가 장군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이름을 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 육군 전차. 형식번호는 M4.
제원 | |
전장 | 5.89m |
전폭 | 2.62m |
전고 | 2.74m |
전비 중량 | 30.3t |
전면/측면장갑 | 초기형 50.8mm 57도 중.후기형 63.5mm[2] 측,후면 : 38.1mm 엔진 데크, 차체 상판, 바닥 : 25.4mm 전면 하부 변속기 커버101.6mm~114.3mm |
포탑 장갑 | 75mm주포 장착형형 : 포탑 전면 76.2mm 측후면 50.8mm 포신 가드 88.9mm 포방패 50.8~76.2mm,105mm 주포 포방패 88.9~127mm. 76mm주포 장착형 : 포탑 포방패 88.9mm 포탑 전방위 63.5mm형(초기 76mm) 후기 포방패 88.9(소수는 101.6mm)mm 포탑 전면 76.2mm 측후면 63.5mm. |
마력 | 400 ~ 500마력[3] |
엔진 | 콘티넨탈 R-975-C1 9기통 공랭식 가솔린엔진[4] |
제너럴 모터스 6064 디젤엔진[5] | |
포드 GAA V-8 엔진[6] | |
크라이슬러 A57 멀티백 가솔린엔진[7] | |
주무장 | 75mm L/40 M3 |
76mm M1A1 / A2 전차포 1문 | |
105MM 보병지원용 단포신 곡사포 1문 | |
부무장 | M2 대공기관총 1정 M1919 동축기관총 2정 |
추가무장 | 칼리오페 다연장 로켓 발사대 |
항속 거리 | 193km |
탑승 인원 | 5명 (전차장, 조종수, 포수, 장전수, 무전수) |
생산량 | 49,234대. E8 4,542대 총합 53,776대 |
[M4 셔먼 전차는 값싸고 만들기 쉬운 전차로 독일군 전차에 비해 10배정도의 생산성을 가진 전차였다 하지만 대신 성능은 독일군 전차에 비해 확실히 열세였으며 이점은 종전시까지 두고두고 독일군에 시달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37mm 정도의 주포나 단포신 유탄포를 탑재한 전차가 고작이던 전간기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전차의 성능이 높아졌으며, 타국에서는 속속들이 75mm 급 장포신 주포를 단 전차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전장 상황의 변화에 미 군부는 타국의 이러한 신형 전차들을 기존의 구식 전차로는 대응할수 없다고 판단하여 75mm 주포를 탑재한 신형 전차를 개발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함으로써 벌어진 세계2차대전은 전격전 이라는 새로운 전술에 의해 군사대국중 하나였던 폴란드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전격전 (blitzkrieg 블리츠크리크) 이라 불리는 전술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였다. 다만 기병대의 역활을 새로운 무기인 전차가 했을뿐.. 전차와 보병간의 일체화된 공격은 훗날 현대전의 기본전술이 된다]
이에 75mm 주포를 탑재하고 선회 가능한 포탑을 단 전차를 개발하려 했지만, 미군으로써는 포탑에 75mm급의 주포를 다는 것은 시도해본 일이 없었기에 급한 임시방편으로 차체에 75mm 주포를 단 M3 리를 만든다. 그러나 M3 리는 어디까지나 차체에 주포를 탑재하였기에 포탑에 탑재한 주포와 달리 대응력이 떨어진다는 결점이 있었고, 이에 미 군부는 포탑에 75mm 주포를 얹은 제대로 된 후계 전차로 M4 셔먼을 개발하게 된다.
[2차대전 개전까지도 미국은 이런 M2 경전차 위주의 보잘것 없는 전차만을 가지고 있었다 1차대전의 구시대적 전술을 버리지 못했던 미국은 2차 대전 내내 독일전차 쇼크에 시달려야 했고 이런 스트레스는 1980년대 M1 전차가 등장해서야 겨우 해결하게 되었다]
[T5E2 타입이라 불리는 이 전차는 1938년부터 제7기병사단에서 자체적으로 조달 사용하고 있던 전차중 하나였다 훗날 이전차의 개량형인 M3 LEE 중전차로 발전하게 된다]
[ 남북전쟁의 남군의 유명한 장군 이름을 딴 이 전차는 M3 라는 정식 명칭이 있었음에도 LEE 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했다 새로운 중전차인 T6 가 완성되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이 전차는 M4 셔만전차가 등장한 후에도 오랫동안 아프리카 전선등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M4 셔먼 전차 역시 차체의 대부분은 M3 와 호환이 가능한 전차였다]
유럽전선에서 티거와 비교되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매체에서 야라레메카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미군으로서는 처음으로 360도 선회포탑에 75mm급 중포를 얹은 차량이며, 등장 당시만 해도 장갑과 화력, 기동성을 비롯한 전차의 요소 모두가 상당히 균형 잡힌 우수한 전차였다. 당시로서는 첨단기술도 들어 있어서 기동중에도 목표를 계속 조준할 수 있도록 주포에 수직안정장치를 장착하기도 했다. 다만 이 장치는 상하안정만 제한적으로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실전에서 얼마나 명중율을 높여주었는가는 평가가 갈리는데, 최소한 저속 기동 중에는 어느 정도 명중을 낼 수 있었고 고속 기동 중에도 포수가 표적을 조준경 밖으로 놓치지 않고 계속 쫓는 데 유용했다고 한다[8] 적 차량 258대 격파 기록으로 유명한 셔먼 전차장 라파예트 풀의 경우 수직안정장치를 이용한 기동간 사격으로 적이 예측하지 못하게 사격하는 걸 특히 선호했다고 하니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던 듯.
[T6 시제품 차량 M3 LEE 전차의 특징을 이어받고 있는 이 전차는 하지만 당시로는 최고의 기술중 하나인 회전포탑에 75밀리 40구경 주포를 장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미국 전차였다 아 전차의 개량형이 곧 M4 셔먼이 된다]
개발 당시의 주포는 우수한 속사 능력, 고폭탄의 화력과 더불어서 당시 기준으로 뛰어난 대전차 능력을 지녔던 75mm 포가 선택되었다. 해당 75mm 포의 원형은 19세기말 프랑스가 개발, 전세계적 히트 대포가 되고 미군도 제1차 세계대전 이래로 애용한 M1897 75mm 야포로, 이 포는 짧은 포신에 비해 포구 초속이 빨라 독일군도 프랑스에서의 노획품을 7.5cm PaK 97/38로 명명, 한동안 대전차포로도 사용하던 물건이다.[9]
76mm포 장착형 셔먼
셔먼이 최초로 등장했을 당시엔 회전 포탑에 75mm 급의 주포를 장착한 전차는 4호전차와 T-34를 제외하면 대량생산된 전차들 가운데엔 없다시피해서 화력면에서는 충분했다. 셔먼의 개발이 1940년, 생산이 1941년 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독일 주력 전차인 3호 전차와 4호 전차 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한 화력을 발휘해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평가했을때도 셔먼은 저 4호 전차보다 주행성능이 우수하고 공방능력에서는 장포신형의 F2/G 이후의 4호 전차와 비교했을때 차체전면을 제외하면[10] 방어면에서는 우세했으며[11] 공격력도 딱 4호전차 G형의 전면 장갑을 표준 교전 거리에서 무리 없이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3호 전차와 비교하면 주행성능은 비슷하지만 공방능력이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에게 힘을 실어준 것 중 하나가 바로 300대의 셔먼이었으니… 셔먼의 배치 초기 아프리카에는 나름 중장갑의 셔먼을 잡을만한 전차가 43구경장을 장착한 4호전차 F2형이 부족한 형편이어서 88mm 대공포까지 동원될 지경이었다.
[M4 셔만 전차는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처음 데뷔 하지만 그 성적은 처첨할 정도 였다 독일군은 곧 새로운 전차의 등장을 알아챘지만 운영중인 3~4호 전차에 가볍게 격파가 가능한 이 전차를 보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문제는 저 75mm 포를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고 유럽 전선에서도 계속 썼다는 것. 이는 후속 주포의 개발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군은 티거가 등장하기 전인 1942년 초부터 M10 울버린에 장착된 3인치 M5/M7 주포에 주목하여 이에 준하는 주포를 셔먼에 장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3인치 M7은 포미가 너무 커서 포탑에 그야말로 쑤셔넣는 수준이라 도저히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고, 3인치 포의 경량화 버전이자 M18 헬캣에 탑재된 76mm M1 대전차포조차도 너무 커서 제대로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이미 76mm M1 주포를 장착했던 M4A1 셔먼(제식명 M4A1(76)W)은 사용 부적합 판정을 받고는 도로 75mm를 장착해야 했다. 결국 사용 가능한 76mm포 버전 셔먼이 개발된 것은 T23 중형전차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해당 전차의 포탑이 셔먼에 장착된 1944년의 일이었다. 기존에 생산해둔 M4A1(76)W의 재고도 1944년이 되어서야 첫번째 전투를 치렀다.[12]
[M4 셔만 전차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으로 유명한데 이는 랜드리스에 의해 연합국에 공여되는 전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상의 타입은 M4A2형으로 이 전차는 디젤엔진을 두개 연결한 셔만전차이며 영국과 주로 소련군에 공여되어 러시안 전차로도 불린다]
그 와중에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의 6호 전차 티거와 같은 강력한 중전차와의 조우시 기존의 75mm 포로는 제대로 대응이 불가능함을 확인했으면서도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된 대책 없이 "이런 예외적인 성능의 중전차는 독일군 내에서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 전황 자체에 큰 영향을 줄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라는 안일한 대응으로 연합군 전차병들의 희생을 늘렸다.[13] 더구나 이 시기면 독일은 판터를 양산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이 독일군의 신형 전차 역시 티거와 마찬가지로 75mm 포로는 500m 안까지 접근해서, 그것도 측면을 노려야 상대 가능한 수준이여서 정면에서 격파하려면 76mm 포로, 그것도 HVAP같은 특수탄을 사용하거나 취약 부위를 노려 사격해야했다.
물론 셔먼의 '타이거 쇼크'는 주로 1944년 이후 유럽 전선에서 생겼고, 티거는 생산량 자체가 원체 적은데다 1943년만 해도 생산된 수량 대부분이 격전지인 동부전선에 배치되었으므로 셔먼과 티거는 거의 만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셔먼이 겪은 것은 '타이거 쇼크'가 아닌 '판터 쇼크'라고 부르는게 좀 더 정확하다는 견해도 있지만, 티거와 셔먼은 판터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1942년 12월 4일 북아프리카 튀지니에서 최초로 조우해 포화를 주고 받았으며, 그중 육군 501 중전차 대대는 북아프리카에서 철수후 동부전선에 배치되었지만 504 중전차 대대는 북아프리카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이탈리아 전선에 남아 방어전을 치르며 영/미군의 셔먼과 교전하고 있었다는 점이나 미군 전차병들이 독일군 전차를 싸잡아 "타이거"라고 불렀던 점[14] 등을 감안하면, 판터 보다 먼저 등장해 그 위력을 과시한 티거로 인해서 연합국 전차병들이 '타이거'라는 단어를 '짱쎈 독일 전차' 내지는 '중전차'에 해당하는 일반 명사로 인식해 버렸고, 판터의 등장과 그로 인한 쇼크 조차 '판터 쇼크'가 아닌 '타이거 쇼크'가 되어 버렸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어떤 셔만은 미국이 쓰기위한 전차가 아닌 특정나라에 공여하기 위한 전차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진의 셔만전차는 M4A4 형으로 이는 영국과 영국 우방국들에게만 공급된 셔만 전차중 하나였다]
하지만 독일군 중전차의 상징과도 같은 티거는 절대적으로 수량이 적었고, 비교적 많은 량이 생산된 판터[15]조차 미국의 압도적인 공업력을 바탕으로 한 물량 앞에선 한줌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구동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가동률마저 높지 않았으며, 실질적인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을 차지하고 있던 4호 전차에 비해선 75 셔먼은 조금 더 나은 수준이고, 76 셔먼은 성능과 신뢰성, 생산성 모든 면에서 우위를 차지했다.[16]
판터나 티거등의 예외적인 성능의 전차와의 교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제외하면 셔먼의 기본 성능 자체는 준수한 편으로 미국/영연방/소련/자유 프랑스/중국 국민당[17] 정부 등의 거의 모든 연합국에서 사용했고, 영국의 경우는 전차 대량생산국이면서도 자국산 전차보다 셔먼이 더 많을 정도였다. 최대 생산대수가 소련의 T-34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마구 찍어냈다. 거기에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셔먼을 유럽전선까지 수송하는 것을 방해할 독일 해군의 거의 유일한 전력인 유보트가 서서히 관으로 전락하면서 수송함이 격침될 일이 사실상 없어졌던 것도 있으며 파괴되어도 다시 수거해 고쳐서 투입할 수 있었으므로, 파괴된만큼 그때그때 새로 채워넣는 괴랄한 보급이 가능했다. 물론 현장에서 파괴된 셔먼을 회수해서 수리하는 사람.[18]들의 고통은 별개의 이야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한다.
따라서 셔먼에 관련된 진정한 문제는 셔먼 자체의 성능이 아니라, 이거 말고는 딱히 투입할 전차가 없었던 미/영의 전차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인 44년 중반 이후를 기준으로, 소련은 주력인 T-34 이외에도 티거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는 자주포 및 중전차를 운용했다. SU-152와 ISU-152 같은 대구경 곡사포를 장착한 다목적 중자주포는 고폭탄 한발로도 티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또한 SU-85/100 처럼 대공포 기반의 직사포를 가졌고 연사속도도 괜찮고 즉응탄도 충분한 대전차전 특화 자주포도 등장하여 티거를 상대 할 수 있었다. 역시나 122mm 포를 사용하여 어느정도 티거를 상대할 수 있는 다른 자주포들도 많았다. 중전차로 보면 IS-2 같이 여러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19] 공방 성능에서 티거를 뛰어넘는 중전차를 투입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 시기에 T-34는 이미 제한적으로 티거를 상대할 수 있는 85mm 포를 장착한 상태라서 앞서 설명한 여러 자주포들의 지원을 받거나 숫자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티거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은 미국과 달리 다양한 체급의 다양한 차량들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여받은 셔먼은[20] 딱 75mm 포[21] 전차에 걸맞는 추격 및 보병지원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무리없이 써먹을 수 있었다.
반대로 미군 입장에선 아무리 성능이 좋아 봤자 체급상 상대가 힘겨운 셔먼만 가지고 티거 같은 중전차까지 상대해야 했으니... 물론 미군도 이럴 때 쓰라는 전담마크맨이 있긴 했다. 문제는 그게 중전차나 대구경 중 자주포와는 한참 떨어진 비행 중전차[22] 대전차 자주포… 영국? 대전 중기부터는 영국의 주력전차 역시 셔먼 계열이 차지하게 된다. 그나마 이쪽은 셔먼 파이어플라이를 준비해놓기는 했지만 티거나 판터와 전면에서 포화를 주고받을 물건은 아니었다.
2차 대전 초창기 미국 전차가 대부분 그랬지만, 전차용 엔진을 개발해본 경험이 부족해 항공기용 성형엔진을 사용한 덕에 동시대의 中전차들 중에서는 폭에 비해 차체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눈에 잘 띈다(-피격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 덕분에 전투시 전차장의 시계가 더 좋아졌고, 내부 공간도 넒어서 피격시 승무원의 생존에 유리하기도 해서 전투 효율은 T-34보다 유리했다. 무엇보다 넓은 공간과 널널한 설계 덕에 개량도 쉬웠다. 그 큰 17파운더를 집어넣어 파이어플라이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공간이 넒은만큼 전차병들의 피로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것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셔만 전차의 구조는 간단했다.. 그리고 효율적이였다. 트럭이나 트랙터를 몰아본 농부출신이라변 몇주간의 교육을 받고 바로 전차의 운전수가 될수 있었다 500 마력급의 가솔린 엔진으로 구동되는 A3 타입은 모든 셔만전차중에 성능이 가장 좋았으며 미군만이 사용한 타입이기도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 높은 전고가 단점으로 인식되었으나, 후일 중동전쟁에서의 이스라엘군은 높은 전고로 인한 시계확보를 높게 평가했다. 그로인한 노인학대
중형전차로써는 준수한 수준이었다.
한방에 터지는 야라레메카라는 인식과 달리[23], 초창기의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셔먼은 3호 전차와 4호 전차로는 잘 뚫리지 않는 장갑이었다. 셔먼의 장갑은 수치상으로 주적인 4호나 독일군에게 충격을 안겨줬다는 T-34 초기형에 비해 절대 얇은편이 아니었다.[24] 그런데도 셔먼이 잘 박살난 이유는 티거나 판터의 주포 관통력이 원체 뛰어났던 것도 있지만, 셔먼 자체가 전쟁에 대량으로 쓰인 시기가 너무 늦었던데다가[25], 구조적인 문제도 기인했다. 항공기 엔진을 사용하는 구조적 한계로 전면투영면적 또한 크기에 비하면 제법 넓은 편이었던데다, 앞뒤로 길쭉했던 탓에 측면의 피탄면적까지 넓었으며, 하필 그 자리에 포탄을 싣고 다니다보니 유폭이 일어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측면장갑은 경사장갑이 아닌 수직장갑인데다 두께도 상당히 얇았기에 문제가 되었다. 널찍해서 맞추기도 쉬운데 그 부분이 약점이라고 보면 딱이다. 그 당시 예비 탄약을 차체 내에 쌓아두는건 모든 전차의 공통점이였고, 유폭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1945년 독일 겔젠키르헨(Gelsenkirchen)에서 촬영된 콘크리트를 바른 셔먼 전차. 치메리트 코팅?[26]
전직 셔먼 전차 정비병이 티거와 판터에 노리개취급 당할 정도로 빈약한 장갑을 확인했던 충격적인 경험을 증언하는 영상이다
580프로의 손실률과 평균 6:1의 교환비, 18대의 신입전차병중 20분만에 17대가 격파당했다는 통계를 통해 현직 전차병들이 우월한 독일전차에 대해 느껐던 절망감에 대해 설명한다.
이와같이 절망적일 정도로 무력한 장갑문제를 해결하고자 골몰한 전차병들은 전면과 측면에 남는 장갑판을 용접해서 붙이곤 했으며, 심지어는 장갑판도 아닌 그냥 철판을 가져다 붙이거나 콘크리트를 두껍게 바르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역량을 쥐어짜내는 다른 나라 차량[27]과는 달리 셔먼의 확장성이 원체 좋았기에 이러한 무게 증가에도 기동성 저하는 크지 않았다고 하며, 방어력이 약간이나마 증대되는 좋은 효과를 봤다고 한다.[28] 이러한 플랫폼의 신뢰성을 방어력으로 몰빵한 예가 바로 후술할 점보 셔먼인데, 이러한 예를 보면 차체 자체는 작정하면 티거 이상의 방어력을 내는 것도 가능했던 셈이다. 높으신분들의 판단 덕분에 불필요했던 사상자만 늘었다
'론슨 라이터' 운운하는 소리는 엉터리입니다. 아시다시피 독일군 전차들도 똑같은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휘발유가 화재의 원인이 된다는 것부터가 유언비어입니다. 독일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이 전차 화재 분석 자료를 읽어보면 주된 원인은 항상 탄약입니다. 2차대전의 전차 화재의 가장 큰 원인이 탄약이었던 이유는 탄약 화재는 끌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엔진의 휘발유 때문에 불이 난 전차는 그 불을 끌 수가 있었습니다. 2차대전 전차들 대부분은 소화기를 탑재하고 있었고 따라서 엔진 구획에 화재가 발생한 경우 너무 심각한 수준만 아니라면 별 문제 없이 끌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탄약 화재는 일단 났다 하면 끝이었습니다. 전차 포탄 추진제는 산화제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셔먼은 차체 측면에 탄약을 적재했는데, 좁은 공간에 탄약이 가득 들어 있어 문제를 가중시켰지요. 하지만 1944년 늦여름부터 습식 탄약고를 장비한 셔먼이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그 문제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론슨 소리가 잘못되었다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독일의 사례에는 눈길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역시 4호 전차와 판터같은 전차들에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고 특히 판터는 연료도관 누출과 변속기 특성 때문에 불쏘시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렇지만 자료 자체가 많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독일측 자료는 볼 생각을 안 했습니다. 영어로 된 기록이나 회고록은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독일어 자료는 그렇지 못하지요. 그리고 독일어 자료 자체도 적어요. 셔먼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미군이나 영국군 전차병의 회고록은 수십, 수백 건이 있지만 서부전선에서 4호 전차나 판터를 몬 독일군 전차병의 회고록은 거의 없습니다. 동부전선에만 약간 있을 뿐이지요. 만일 있었다면 셔먼 전차병들이 한 것과 똑같은 불평을 읽을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사진자료들을 보면 독일군 전차들이 셔먼과 같은 탄약 유폭을 일으킨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4호 전차의 탄약 방호 수준은 셔먼보다 나을 것이 없었고 말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관점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군과 영국군의 화재 관련 기록은 다수 보유하고 있지만 이와 비교할 만한 독일군 자료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티거에 쏠리는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티거 승무원들의 회고록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티거는 심지어 동부전선에서도 드문 존재였지요. 그 반면에 수가 훨씬 많았던 4호 전차와 판터 승무원들이 회고록의 비율은 적고요.Steven J. Zaloga살아야 회고를 쓰던가 하지
셔먼은 유럽전선에서 붙었던 론슨 라이터라는 별명이 유명한데, 사실 근거는 없다. 론슨 라이터의 광고문구가 '한번에 바로 불이 붙습니다!'였으나 이는 전쟁 후에 시작된 광고라서 나중에 붙은 별명이지 전쟁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 전쟁 당시 미군에게 보급된 라이터는 주로 지포(Zippo)였으므로 만약 불이 환상적으로 잘 붙는다고 별명을 지어주고 싶었으면 그냥 지포라고 불렀으면 되었을 일이다. 실제로 태평양 전선에서는 불 잘 붙는 일본군 폭격기G4M을 지포라고 불렀지만, 셔먼 계열 차량 중에서 지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화염방사기 장착형 전차 뿐이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셔먼이 그렇게 유난히 잘 불타는(…) 전차는 아니었다. 노르망디에서 셔먼이 피탄당했을 때 불탈 확률은 82%로 평균 1.89번 관통당할 경우였는데, 그러나 같은 전선의 독일의 4호 전차도 80% 확률로 평균 1.5번 관통당하면 불이 붙었다.[29] 셔먼이 4호에 비해 딱히 더 잘 불타거나 한건 아닌 셈이다.
불이 잘 안붙는 경유를 쓰는 디젤 엔진을 사용한 전차가 아니고서야 휘발유를 쓰는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전차들의 화재확률은 거의 고만고만했다. 티거나 판터같은 독일 전차들은 상대적으로 장갑이 두꺼웠기에 엔진에 포탄이 직접 피격되는 경우가 적었을 뿐, 관통된 경우의 화재확률에선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셔먼이 론슨 라이터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셔먼의 장갑이 워낙에 잘 뚫렸기 때문이지 엔진의 화재확률이 타 전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았기 때문은 아니다. 당장 4호 전차만 하더라도 화재확률은 비슷했으며, T-34는 디젤엔진을 탑재한 전차니 당연히 화재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셔먼의 구조상 측면을 피격당하면 포탄이 유폭하기 쉬운 구조였던 건 맞으나, 포탄이 유폭당하면 골로 가는건 어느 전차나 마찬가지였다.[30] 다만 워낙에 많은 수가 쏟아져나온 셔먼의 물량과, 상대적으로(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티거나 판터에 비해 얇았던 장갑 탓에 잘 불탄다는 고정관념(...)이 생긴 셈이다.
게다가 디젤 엔진 대신 가솔린 엔진을 채용한 것엔 이유가 있는데, T-34같은 소련 전차들의 디젤 엔진 사용이 2차대전 당시에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물론 디젤 엔진을 채용한 전차 자체는 잘 찾아보면 꽤 많다. 문제는 M11/39계열이나 89식 중전차, 치하 등 하나같이 안습이며, 해당 전차가 안습이 된 이유중 하나가 디젤 엔진의 저출력 및 작동시의 엄청난 소음과 진동[31]이었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군에 야간 기습을 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이 전차 소음 때문에 홀랑 들통난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디젤 엔진을 쓰고 제대로 성공한 전차는 T-34 하나로만 봐도 무방할 지경. 한마디로 말해 독일도, 프랑스도, 영국도, 이탈리아도 쓴 가솔린을 쓰는 게 잘타는 데도 그냥 쓴 건 아니다.
애초에 가솔린 엔진이 화재의 주 원인이었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탄약고 주변을 물로 채워서 유폭을 방지한 Wet Stowage(습식 탄약고) 형식을 채용한 셔먼의 경우, 피탄시 화재 확률이 80%에서 15%까지 감소한다는 미 육군의 연구 결과가 있다. 위에서 언급된 Steven J. Zaloga의 연구에 의하면 휘발유가 화재의 원인이라는 것은 유언비어라고 한다.
워게이밍의 직원이자 전차 탐방 동영상으로 유명한 치프틴(Chieftain)은 화재율도 중요하지만 전차병의 생존률/사망률도 함께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군이 운용한 셔먼의 전차병 사망률은 전쟁 전까지 약 3%로 사망률이 18.5%에 달했던 보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보직이었고, 미군 셔먼의 차량 격파시 전차병 사망률은 차량당 0.3명[32] 영국군 셔먼의 경우는 0.6명[33], T-34는 약 1.8명으로 T-34보다는 셔먼이 전차병의 입장에서 더 안전한 전차였다고 한다. 이런 생존률 차이는 화재가 발생했을 때 전차병이 빠져나올 수 있는 해치의 수량과 위치와 관련이 있는데, 셔먼은 전차병이 좌석 바로 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치 4개와 차량 아래로 통하는 비상 탈출구가 있어서 화재 발생시에도 비교적 빠르게 탈출할 수 있었던 반면, T-34는 포탑 천장의 해치와 좁디 좁은 전면 운전수 해치만 있었고[34] 차량의 크기가 작아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영국군 셔먼의 피격시 전차병 사망률은 동시기에 운용했던 크롬웰, 챌린저나 코멧 등과 차이가 없었으므로 셔먼이 유독 불에 잘 붙는 것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셔먼 vs 티거 논쟁에서 셔먼을 옹호하는 쪽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중에 "셔먼의 기동성은 6호 전차 티거보다 우수하니 우회하여 측면을 노려 사격하면 격파할 수 있다!"인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이와같이 격파했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35] 셔먼의 기동성은 독일의 대전기 초중반 주력 전차였던 4호 전차와 3호 전차보다는 우월했지만 6호 전차 티거와 5호 전차 판터(이쪽은 스펙상 속도지만)와 같은 독일 전차들과 비교했을때는 열세를 보이는 면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단 카탈로그 스펙상 셔먼의 최고속도는 38km/h, 평균 노상속도 33km/h, 평균 야지속도 17~32km/h이다. 40km/h대의 속도를 낼수있는 타 국가의 전차들의 평균 노상속도는 조금 열세였지만, 평균 야지속도는 최대 32km/h로 최대 25km/h에 불과한 티거와 T-34/85보다는 확실히 우월했다. 추중비 역시 12hp/t으로 나쁘지 않은편.[36] 오히려 제 3제국의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은 회고록인 회상(원제 Inside the Third Reich)에서 셔먼의 기동성을 높게 평가했다.
이탈리아 남서부 전선에서 노획한 셔먼은 야지에서 상당히 우수한 기동성을 보였다. 우리 전차들이 주행하지 못하는 산악지형에서도 충분히 주행이 가능했다. 대단한 점 하나는, 셔먼이 무게에 비해 강력한 엔진을 달았다는것이다. 셔먼의 야지 주행 능력은 우리 26 기갑사단 소속 동급의 전차들이 나타낸것보다 훨씬 우수했다.[37]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셔먼과 동급인 3호전차, 4호전차와 비교했을때 이야기일 뿐이다. 카탈로그상 스펙은 우월했지만, 정작 셔먼의 실제 야지 능력은 티거와 같은 독일 중전차들보다 열세였기 때문이다. 여기엔 셔먼의 높은 접지압이 한몫했다. VVSS[38]형 셔먼의 궤도 폭은 421mm에 불과했고, 이는 0.96kg/cm^2이라는 무지막지한 접지압의 원인이 되었다. 0.735kg/cm^2인 티거의 접지압과 비교시 확실한 열세다.[39] 덕분에 티거와 판터가 주행가능한 지형에서 주행하지 못하는 참극도 발생했다.
사령부는 아군 전차가 우수한 기동성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최근 우리는 노획한 독일의 마크 5를 우리 전차의 시험조건에서 테스트 해봤다. 야지에서든, 도로에서든 독일전차는 우리 전차보다 빠를 뿐 아니라 깔끔한 선회까지 가능했다. 언덕 주행면에서도 뛰어났다. - 미군 제 2기갑사단, 윌슨 M. 호킨스 중령
내가 보기엔 판터와 티거는 (우리 전차보다)기동성은 물론이고 험지주파능력 또한 뛰어났다. 셔먼이 퍼지는 장소에서 판터와 티거가 활개치는 걸 여러 차례 목격했다. 심지어 적어도 10대의 쾨니히스티거가 셔먼은 거의 기동이 불가능한 지형을 뚫고 역공을 가해오는 걸 본 적도 있었다. - 미군 제 2기갑사단, 전차소대 소대장 찰스 A. 칼든 하사[40]
도로에서의 고속주행을 선호해 장착한 VVSS는 야지에서의 기동성을 크게 떨어트리는 원인이 되어버린것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셔먼의 선회 반경 역시 18.6m로 영 좋지 않은 편이었다. 결국 전차병들은 덕빌(Duckbills)이라는 어댑터를 궤도 바깥에 추가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접지압을 낮추려고 애를 썼고, 이 문제는 광폭궤도를 사용한 HVSS형 셔먼이 나오며 해결되었다. 문제는 HVSS형 셔먼의 생산은 1944년 5월에 시작되었지만, 정작 대대적인 보급은 노르망디에서 죽도록 터져나간 이후에 이루어졌다는것.
M62 APCBC vs 독일 전차.[41][42][43]
소련의 티거에 대한 75mm 포의 관통력 실험에선 티거의 차체 측면에 발사시 650 미터에서 관통이 가능했다.[44] 이론상으론 측면을 노려 발사시 티거를 격파할 수 있다는 말. 셔먼의 확장성 역시 나쁜 편은 아니어서, 영국에서 개조한 파이어플라이는 무거운 17파운더 포(76mm)를 달고도 잘도 싸웠던 것을 보면 설계에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더 좋은 포를 탑재할 여지도 충분했다. 물론 파이어플라이는 전시급개조형이라 무게가 불균형해져 기동력 저하도 상당한 편이었으며 포탑 공간이 부족해서 무전기도 포탑 밖으로 빼내야했었기에 이래저래 불편했지만, 밖으로 빼내 포탑의 후방에 부착한 무거운 무전기 박스는 상대적으로 길어진 포신의 무게에 대칭되는 카운터 웨이트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포탑 후방의 장갑을 증가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이는 등 전화위복이라고 볼 수도 있었기에 실제 운용에 큰 지장은 없었고, 무엇보다도 17파운더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는 발사각 25도 상태에서도 티거의 전면장갑을 1645m의 원거리에서 관통 가능했다.[45] 이런 무리한 개조를 했음에도 큰 문제 없이 돌아갈 만큼 확장성이 뛰어난 것 역시 단순한 스펙 이상의 장점이다.
또 미군은 대전차전을 염두에 두고 76mm 포 탑재형[46]을 개발했고, 76mm 포 탑재형의 경우 APCBC 사용시에 일단은 1,200 야드[47]에서 6호 전차 티거의 정면 장갑을 관통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텅스텐 탄심인 M93 고속철갑탄의 경우에는 더 먼 거리에서도 관통 가능하다. 파이어플라이가 미제 76mm 포보다 더 무거운 17파운더 포(76mm)를 더 작은 포탑에도 얹었던 걸 생각해 보면 왜 진작에 저렇게 만들지 않았는가 한탄스러울 정도. 미군 일부 지휘관들, 특히 패튼은 파이어플라이는 실패작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지만 그 예언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이렇게나 놓고보면 티거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화력을 갖춘것처럼 보이지만...
[셔먼전차에 장착된 포탑과 주포의 특징을 잘 나타낸 일러스트 취미가 19호 MORE SHERMAN 중 발췌]
이론은 이론일뿐, 현실은 카탈로그와 달랐다. 76mm 셔먼의 배치는 심각하게 늦었고 그 76mm마저 생각보다 시원치 않았다.(...) 일단 76mm 포는 1942년에 이미 시험적으로 탑재한 바가 있었지만, 정작 양산되어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연합군이 티거와 판터를 비롯한 독일의 신형 전차를 조우한지 한참 후인 1944년 후반 들어서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미군 수뇌부는 76mm를 사용한다면 판터고 티거고 충분히 자국산 전차로 상대할수 있다고 판단해 버렸다. 따지고 보면 이건 전혀 근거없는 생각은 아니다. 판터의 장갑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정보를 입수하여 동일 두께의 장갑판에 사격을 해본 후에 관통가능이란 결과가 뜬 후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맞붙어 보자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실전에선 높으신 분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문제, 바로 탄착각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당장 맨 위의 관통력 시험 보고서 이미지에도 30도정도로 티타임을 준 채로 삐딱하게 서있는 티거에 대해선 측면조차도 표준 교전 거리에서 관통이 불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와있다. 이걸 무시한채로 주포 관통력과 장갑 두께만을 산술적으로 계산해 "뭐? 티거 정면장갑이 100mm인데 우리 76mm의 관통력이 109mm라고? 그럼 됐네!" 해버린 게 문제의 시작(...).
이러한 결과는 독일 육군 병기국 1과가 자체적으로 셔먼을 상대로 한 자국 판터의 관통실험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48]
어쨌건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대응에 나섰지만 때는 너무 늦었고, 판터의 전면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M93 HVAP탄이 제식으로 채용된 것은 슬슬 티거와 판터의 씨가 말라가던 1945년 2월 경[49] 이었던 데다가, 76mm 급의 HVAP같은 소구경 고속탄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위력이 급감하고 입사각 영향을 심하게 받기에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시쳇말로 높은 관통력만큼 도탄률 역시 쩔었던것. 1944년 8월 30일 행해진 미군의 76mm 와 17파운더 대전차포의 관통력 비교 시험에선 판터의 전면에 대해 200 야드 거리에서 발사된 76mm HVAP 4발중 3발이, 명중한 17 파운드 APDS 2발중 1발, APCBC탄 두발은 균열만 발생시켰을뿐 관통에 실패한 사례도 보고 되었을 정도다.[50] RHA 강판에 대한 관통력 시험 결과 대로라면 200 야드 거리에선 당연히 모든 탄이 판터의 전면 장갑을 관통 했어야 한다. 해당 실험에선 17파운더 APDS와 17파운더 APCBC, 76mm HVAP탄의 효율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 이유로 17파운더의 강력한 관통력에 반하는 심각하게 낮은 명중률, 17파운더 APCBC탄과 76mm HVAP탄의 만족스러운 명중률에 비해 부족한 관통력을 들었다. 76mm HVAP탄에 대하여서는 '현시점에서는 76mm급의 포에선 중장갑 목표물을 대상으로 사용가능한 가장 효율적인 물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76mm 급에선 가장 쓸만하다는거지 76mm HVAP만 있으면 다른게 필요 없을 정도로 좋다는 소리가 아니다.[51]
포(탄종) | 500야드 | 1000야드 | 1500야드 | 2000야드 |
75mm M3 (AP M72) | 76mm | 63mm | 51mm | 43mm |
75mm M3 (APC M61) | 66mm | 60mm | 55mm | 50mm |
76mm M1A1 (AP M79) | 109mm | 92mm | 76mm | 64mm |
76mm M1A1 (APCBC M62) | 93mm | 88mm | 82mm | 75mm |
76mm M1A1 (HVAP M93) | 157mm | 135mm | 116mm | 98mm |
17 파운더 (APCBC MK.VIII T) | 140mm | 130mm | 120mm | 111mm |
17 파운더 (SVDS) | 208mm | 192mm | 176mm | 161mm |
조금 더 자세한 비교를 위해 추가한다. 표기된 관통력은 30도로 기울인 RHA 강판에 사격한 결과. [52] 아무리 30도로 기울인 강판이라지만 75mm는 정말 좌절스럽다.
오죽하면 위에서 "니네 아직도 75mm쓰냐? 76으로 바꿔줄게." 라는 이야기가 나와도 "아 ㅆㅂ 75나 76이나 어차피 정면에선 안먹히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측면 노리고 파고 들어야 되면 차제가 좀 더 가벼워서 달리기 빠르고 연사력 좋은 75가 훨 나음요." 하고 76 셔먼의 수령을 거부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대표적인 부대가 바로 아라쿠르 전투의 선봉에 서서 독일군의 판터마저 탈탈 털어버린 미 제 4기갑사단.
[M4A2 의 최후기형의 모습 신형 현가장치인 HVSS 와 76.2 밀리 54구경 주포 그리고 신형 포탑 T23 을 탑재한 모습이다]
이러한 포 탑재 문제는 미군의 교리에서 기인하는데, 대전차전을 완전히 도외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차의 주 임무는 돌파였기 때문에 고폭탄 위력이 우수하며 속사가 가능한 75mm포를 쓰는 편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다.[53][54][55]영국으로 치자면 '보병전차'의 개념에 가까운데, 이러다보니 이미 1942년에 76mm포를 만들어놓고도 대전차포로서만 쓰려는 생각 때문에 처음에는 고폭탄을 개발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고폭탄의 필요성을 느껴서 기껏 개발을 해놓고 보니 이런저런 문제로 위력이 75mm의 반도 되지 않는 형편없는 놈이 나와 버렸다. 누가 영국 사람들이랑 조상이 다르다고 할까봐 삽질하는 것도 똑같다...
이 현시창스러운 교리의 저변에는 미군 수뇌부의 심각한 오판이 깔려있었다. 연합군애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오버로드 작전) 당시만 해도 100여 대 가까운 76mm 셔먼이 이미 생산 된 상태였고, 90mm 장착형 등의 프로토타입도 존재했으며 미국의 공업력을 고려하면 얼마든 더 만들어 투입할 수 있었겠지만, 미군 수뇌부로써는 이미 아프리카 전선에서 4호와 신나게 치고박아본 결과 75mm로도 충분하다 생각했으므로 용도가 대전차전에만 한정된 76mm 탑재형을 75mm를 대체할 정도로 생산하지 않아도 충분하다(원래 요구 수량의 1/3정도만 )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적 기갑전력의 대다수는 75셔먼으로도 충분히 맞설 수 있는 /F2(나중의 H형)형 이전에는 4호가 셔먼의 화력에 밀렸다 4호였고, 막강 타이거는 그 수가 적으므로 대전차 자주포와 연계하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76으로도 부족해 90mm를 들고와야 했던 현실을 감안하면 명백한 오판이였고, 그 결과로 노르망디에서 셔먼은 4호대신 판터와 치고 받으며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다.[56]
[M4A376(W) 후기형에 해당되는 셔만으로 신형 HVSS 와 76밀리 주포 그리고 대형화된 T23 포탑을 장착하고 있다 W 자가 붙은것은 피격시 탄약오폭을 막기위한 습식소화장비를 장착한 타입을 뜻한다]
2차 세계대전의 기갑병기 중 유독 티거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공식적인 기록상 미군의 셔먼이 티거와 교전한 것은 노르망디 전선 이후 고작 3번에 불과하다고 한다. 티거를 상대한건 대부분 영국군이었다고...영국군 셔먼은 셔먼이 아니냐?[57] 오히려 동부전선을 가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있던 더 위협적인 티거 II와 야크트 티거를 만났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위의 저평가는 숫자놀음을 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독일군 전차병들 입장에서 기존의 75mm 셔먼들은 티거나 판터 등을 뚫기 어려웠으니 그렇게 큰 위협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76mm로 업그레이드 된 셔먼들은 최소한 정확히 사격을 가하거나 고속철갑탄 등의 특수탄종을 사용시 자신들을 뚫을 수 있었을테니, 잠재적 위협요소가 하나 증가한 셈이다. 물론 그 시기가 굉장히 늦긴 했지만, 적어도 44년 말엽에 독일군의 전차병 중 숙련병은 거의 다 소모되고 없던 시기였으니 76mm를 장착한 셔먼이나 그 이외의 차량들에 대응하기가 어려웠을 것임은 자명하다.
포(탄종) | 100m | 500m | 1000m | 1500m | 2000m |
76mm M1 L/55(AP M79) | 124mm | 104mm | 83mm | 67mm | 54mm |
76mm M1 L/55(APCBC M62) | 101mm | 93mm | 84mm | 76mm | 69mm |
76mm M1 L/55(APC M61) | 101mm | 85mm | 69mm | 55mm | 44mm |
76mm M1 L/55(HVAP M93) | 192mm | 165mm | 137mm | 113mm | 94mm |
전차의 주포로서 필수적인 대전차전 능력이 부족하기는 했으나[58], 75mm형의 고폭탄 화력은 속사야포 출신답게 확실했고. 보병 지원을 위해 105MM 돌격전차형 셔먼을 만들었지만. 다목적성 및 탁월한 속사력을 가진 75mm 주포를 장착한 셔먼도 그 별볼일없다는 철갑탄으로도 동급 중형전차는 다 편히 때려잡을 수 있었으니. 밥값을 충분히 해 내고도 남았다. 문제는 30톤급은 밥값을 잘만 하는데. 4~50톤급 이상의 전차는 전쟁 다 끝날때서야 투입이 되었다는 것......
이렇듯 셔먼의 성능은 타국의 주력전차와 비교하면 나쁘진 않았고 오히려 일부 면에서는 우세에 있었으나, 상층부 및 기타 운용국들의 거한 삽질로 동급의 적 전차만이 아니라 더 강한 상대와도 싸워야 했던 탓에 막심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랜드리스로 건너간 소련에서는...
속도는 빠른 편이어서 적을 추격하는 작전에 유리하며 전술적 능력이 매우 높다. 75mm 주포는 고폭탄의 파괴력은 물론 철갑탄 관통력 역시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주포는 물론이고, 탑재된 브라우닝 기관총 역시 고장 없이 아주 잘 작동하며, 방어력 역시 중전차로서 손색이 없는 60mm 장갑덕분에 80m 지근거리에서 14.5mm 대전차소총을 여유있게 막아낸다. T-34보다 조종이 훨씬 편하고 쉬우며 오랫동안 주행해도 고장이 잘나지 않고 엔진 역시 튼튼하며 고장이 없다. 정말 잘 만들어지고 쓸모있는 전차지만 넓은 평지에서는 높은 차체 때문에 표적이 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이 정도면 잠재적인 적성국의 무기 체계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일 것이다.
초창기 셔먼의 약점은 트랙이 고무로 덮여서 고온에서 금방 벗겨지고 지면과의 마찰력이 떨어져 험지 주파 능력이 다소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점은 미군측 기술자의 도움으로 새 트랙을 공수해와서 금방 해결되었다.
전고가 높아서 무게중심이 높은 것도 문제점이었는데, 험지에서 급하게 선회를 할 경우 옆으로 넘어질 위험성이 다소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탄 전차가 옆으로 넘어져서 세우는 동안 중대의 전차들이 돌격했다가 기습을 당해 전멸당하고 나는 살아남았으니 이런 약점에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부는 T-34와 비교하면 마치 서유럽의 고풍스러운 그림 작품과도 같았다. 내부 공간도 넉넉했고 수리가 쉬웠을 뿐 아니라, 좌석에 깔린 인조 가죽이 워낙 질이 좋았기에 격파되거나 유기된 셔먼이 보이자마자 가죽을 벗겨서 구두를 만들고는 했다. 배터리를 충전할 때도 T-34는 엔진을 무식하게 돌려야 했던 반면에 셔먼에는 작은 오토바이 엔진이 배터리에 연결되었기에 오토바이 엔진을 돌리면 손쉽게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었다.
T-34는 화재가 발생하면 군령을 어겨서라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야 했다. 탄약이 워낙 빨리 유폭되었고 불길이 사방으로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셔먼이 피탄되어 화재가 발생한 걸 본적이 있는데, 철갑탄이 유폭되었음에도 고폭탄이 터지지 않았다. 소련군의 위험한 화약과는 무언가 다르면서도 안전한 화약을 쓴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다른 전차와 마찬가지로 장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좋은 전차였다. 누군가가 이 전차를 나쁘다고 욕할 때마다 나는 "뭔 소리야?"라고 대꾸한다. 대체 어느 전차와 비교해서 나쁘다고 하는 것일까?
http://iremember.ru/en/memoirs/tankers/dmitriy-loza/ 실제 타본 사람들의 소감. 주로 76mm 셔먼을 탔다고 한 하다. 그외에 각종 것들을 다 봐서 꽤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듯.
76mm를 장비한 셔먼은 1944년말에나 도착하는데, 이때는 이미 소련 기갑부대의 주력이 T-34/85였고, IS전차나 ISU-152등의 무식한 화력의 기갑 병력이 붕어빵처럼 찍혀나오던 시기였다. 관통력이 높은 100mm 대공포 대신 화력이 더 강한 122mm 야포를 선택하여 중전차에 넣고 관통력이 높은 57mm 장포신 포 대신 화력이 강한 76mm를 선택하던 화력덕후 소련답게 셔먼의 신뢰성에는 매우 만족했지만 화력에는 만족하지 못했다고. 다만 소련군은 미군과 다르게 독일군의 티거나 티거 2에 대응할 수 있는 중전차와 중장갑 자주포가 있었으므로 셔먼의 화력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종합하면 가혹한 소련의 환경에서도 잘 작동하고 고장이 잘 안나는 주행장치와 엔진의 신뢰성, 오리 궁둥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향능력이 형편없기 그지없던 소련제 전차와 비교를 불허하는 고성능의 조향장치와 내부 승무원을 배려한 편의성, 맞으면 높은 확률로 화재가 나거나 유폭되어 승무원 모두가 요단강으로 가는 소련제와 비교해 불이 나도 소련제보다 안전한, 습식 탄약고로 대표되는 높은 생존성, 전차를 관통시키는 것보다 아예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것을 선호했던 소련군도 맘에 들어한 고폭탄의 화력, 이외 자잘한 편의성 등... 소련군이 가장 좋아했던 서방제 전차라는 말이 결코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소련군의 M4 셔먼은 전쟁 후반기까지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사진은 1945년 베를린 전투 당시 촬영된 소련군의 M4A2 (76) W.[59]
그리고 공여받은 M4 셔먼에 있는 주포안정장치와 무전기는 복제되어 이후로도 오랫동안 소련 전차에 쓰이게 되었다.
셔먼이 밥값을 못한것은 아니었지만, 대전 후반기인 1944년 10월, 미5군은 수백대의 75셔먼이 있는데도 그딴 거 줘도 안받으니까 76을 내놔, 지금 당장!해서 모든 전차를 76셔먼으로 교체해버린다. 사실 셔먼이 첫 등장한 북아프리카의 경우 셔먼을 상대할수 있는 장포신 4호(=H형)같은 기갑차량이 드물어서 셔먼은 당시 추축군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유럽에 돌아온 연합군을 맞이한 독일군은 (화력만큼은) 셔먼과 대등해진 4호에 3호 돌격포를 비롯한 각종 구축전차, 돌격포에 표범과 뱅골 호랑이같은 맹수들을 있는 대로 다 끌고 나왔고, 여기에 영국군의 우직한(...) 전차 운용까지 겹쳐진 결과 셔먼의 손실률은 상상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전쟁 후기로 갈수록 76셔먼의 수도 늘어나고, 이런저런 전술과의 시너지로 인해 아라쿠르 등지에서는 판터를 상대로도 사실상 압승을 거두기도 했을 정도이다. 판터의 경우 구동계통의 신뢰성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쿠르스크 이후 어느정도는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별다른 엄폐물이 없는 평지인 아라쿠르 같은 지역에서는 짤없이 털렸고, 그 결과 아라쿠르 전투에서 판터와 셔먼의 교환비는 8대 3.1이었다.셔먼이 8인줄 알았다
유럽 전선에서 셔먼의 교전 기록중 특이한 사례로는 셔먼 1개 중대와 반궤도 장갑차에 탑승한 보병 1개 중대, 3대의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로 구성된 웰본 기동부대가 미 제 3기갑사단장을 전사하게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제507 중전차 대대 3중대의 티거2 10대(!!!)와 지근거리에서 조우해 괴멸적인 피해(셔먼 17대, 하프트랙 17대, 3대의 트럭, 1대의 M36 GMC 그리고 트럭 두대)를 입은 사례로, 여기까지만 보면 이게 뭐가 특이한가 싶지만 특이한점은 이 전투에서 3대의 티거2 완전 손실이 보고 되어 있는 점이다. 그것도 그중 2대는 76mm셔먼도, 보병의 바주카도 아닌 초기형 포인 M2 75mm 셔먼의 전과. 어째서 이런일이 가능했는고 하니...
언덕위와 숲 방향에서 갑툭튀한 티거2들에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와중에 75mm형 셔먼 한대가 숲 방향에서 나타난 티거2 3대를 향해 미친척하고 개돌을 감행. 지근거리에서 백린탄으로 사격을 가해 발생한 연기와 화염으로 티거2의 전차병들이 자신의 전차에 포탄 피격에 의한 화재가 발생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전차를 버리고 탈출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연달아 두대를. 이 용감한 셔먼은 결국 다른 한대의 티거2에게 격파 당했지만 76mm도 아닌 75mm로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한것으로 여겨지는 강력한 중전차를 상대하며 승무원의 기지 만으로 상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어버린 뜻 깊은 사례. 해당 티거2들이 소속된 제507 중전차 대대 3중대의 기록에선 해당 전투에서 티거2 3대의 완전 손실(이중 한대는 다른 셔먼들이 티거2에게 두들겨 맞는 동안 농가에 숨어들어 측면을 노리고 매복 공격을 가한 76mm의 셔먼의 전과로 확인)이 보고 되어 있어 백린탄에 의한 티거2 격파는 사실로 인정되었다.http://panzerkatz.egloos.com/327222
(전략)
어둠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굉음은, 살펴보니 거의 이, 삼십대의 대형전차 같았다. M4형 전차의 위력은 해하릴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대로 여기 있다간 벌레와 개미처럼 쉽게 뭉게질 것이 당연했다. 그 섬뜩한 캐터필러의 소리는 우리를 "도망쳐", "도망쳐" 라고 위협하는 것 같았다.
"어쩔수 없다, ...전진![60]" 이시하라 중대장은 즉시 전진 명령을 내렸다. 전진은 퇴각의 뜻이나 다름없었다.
(중략)
그야말로 무아지경으로 거대한 전차무리에 따라잡히지 않도록 도망에만 열심이었다. 중대는, 사나운 호랑이에 쫓기는 양처럼, 등 뒤의 늪 속으로 흩어지며 뛰어들었다.
하지만, 뛰어든 것은 좋았지만 힘든 장소였다. 그 늪에는 악어도 있고 독충도 서식하고 있었다. 늪을 건너다 어디에서 덮쳐올지 알수 없었다. 그러나, 거대한 "육지의 전함"에게 짓밟히는 것만은 못한 것이었다.
-후나사카 히로시,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
압도적인 힘으로!
대륙에선 야라레메카가 섬나라에선 최종 병기로 요약 가능하다.본격 셔먼 무쌍을 찍어보자
유럽에서의 그저 그런 전적과는 달리, 일본군은 미 해병대가 대전차 전투보다는 밀림 속을 밀고 들어가기 위해서 투입한 M4 셔먼을 맞닥뜨리자 '악마를 만났다'면서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그들이 보유한 그 어떤 대전차포도 셔먼은 가볍게 튕겨냈으며,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47mm포 탑재 97식 改 치하가 쏘는 포탄도 가볍게 튕겨냈다. 괜찮아, 튕겨냈다!~ 버틸수가 없다!! 여기에 우수한 속사능력에 일본 전차 쯤은 간단히 뚫어버릴 관통력을 지닌 75mm포로 시원하게 뚫었습니다!! '뭐라도 움직이는 것만 보이면 일단 쏴대고 보는' 미군 특유의 전투 방식 때문에 사방에서 피해가 속출, 1944년의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셔먼에게 그야말로 녹아내리는 피해를 입었다. 가까이 숨어있다가 지근거리 기습으로 셔먼을 잡은 몇몇 97식 改도 있었지만, 그 직후에는 역습을 받아서 괴멸당했다. 화염병도 써봤으나, 태평양의 셔먼은 디젤 엔진을 쓰는 A2형. 아 망했어요.
[A2 형은 전원 연합군에 공여되었지만 일부는 미해병대에서 쓰기도 했다 상륙용 스노클을 장착한 이 멋진 모습은 아카데미에서 제품화 하고 있다]
결국 일본군은 가장 강력했던 전차인 '노획한' M3 스튜어트(...)를 끌고 나왔지만 M3로 셔먼을 막을 수 있을리가 있나. 그러다보니 대전차총검술 같은 전법까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셔먼을 가장 애먹인 것은 사방에서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일본군 보병[61]. 그래서 뾰족하게 만든 철판과 쇠못을 차체에 용접해서 전차를 고슴도치처럼 만들고 다녔다고 한다. 일본군도 부랴부랴 셔먼에 대항할 전차를 개발했지만 너무 시기가 늦어서 포탑이 달린 것들 중에선 치헤, 치누, 치토 등을 양산했지만, 치헤는 화력이 치하와 그리 차이 나지 않고, 치누는 그 치헤 차체에 그나마 근거리에서 셔먼을 뚫을 포를 얹는 바람에 느려터졌고, 치토는 2대만 굴릴 수 있어서 너무 적었는데다 시기도 늦어서 모두 본토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전차자주포로는 치하 차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호니는 치누에 달린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 셔먼을 전면 격파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에 가서 결전을 준비했지만 대부분의 차량이 바다의 어초가 되어버리고, 무사히 상륙한 소수의 차량들로 맞서 싸웠지만 노획당했다. 설령 최고의 포탑 장착 전차인 치리가 나왔다고 해도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미군이 작정하고 6호 전차 티거 대항마로 개발한 1,000여 대의 M26 퍼싱 중(重)전차였다.[62]
위쪽의 사진은 화염방사전차 M4A3R "Zippo", 아래쪽은 불도저 전차 |
그밖에 동굴 속에서 농성하는 일본군 수비대에 대항하기 위한 화염방사 전차[63]와 불도저 전차같은 현지 개수형 차량도 등장했다. 화염방사 전차는 동굴이나 참호에 불을 뿜었고 불도저 전차는 아예 생매장시켜 버리는데 쓰였다.
물론 세상의 모든 전차가 그렇듯 태평양에서 비교 대상이 없던 무적의 위용을 뻗쳤던 셔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손실도 없이 항상 일본군을 밀어버리며 다닌건 아니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보유한 구세대 대전차포로 대항할 방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미군의 선제포격에도 버틸수 있는 반사면 진지나 견고한 대전차호를 구축해 잘 위장 시켜 매복시켰다. 일본군은 이런 매복된 대전차포로 기습적인 화망을 구성, 셔먼의 약한 측 후면을 타격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오키나와 전역에서 미 제 139 전차 대대 소속 A중대의 30대의 셔먼 전차들이 보병수반 없이 단독으로 가카즈 고지를 돌파하다 이런 대전차포 화망에 걸렸는데 단 한차례 전투에서 22대의 셔먼을 잃고 8대의 셔먼만 살아 도망쳤다. 셔먼 전차들은 매복된 대전차포가 어디에서 사격하는지 알수 없었으며 돈좌된 셔먼 전차 사이로 일본군 보병이 대전차 총검술을 벌이며 달려들자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한 셔먼 승무원은 어찌나 다급했는지 후방의 27사단에 'HELP'라는 전신을 평문으로 계속해서 보냈다고 한다. 이는 미군의 태평양 전쟁 중 한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차를 상실한 전투로 기록되었다.하지만 견인되서 다시 수리된건 함정 치하 전차 또한 이런 방법으로 몇 대의 셔먼을 잡기도 했으며 오키나와에서 작정하고 달려드는 일본군에 의해 800대의 셔먼중 153대의 셔먼을 완전 손실했다. 이는 미군으로 하여금M26 퍼싱을 오키나와로 불러들이는 이유가 되었고 오키나와 방면의 일본군이 항복에 조인할때 미군은 이 신형 전차를 항복 회담장에 도열시켰다. 그러나 가카즈 고지에서의 미군의 완패에도 불구하고 셔먼의 견고한 방어력을 다시금 확인할수 있었는데, 한 전차는 파괴되었으나 일본군의 4.7cm 1식 기동속사포 17발을 맞고서야 정지했다. 수반 보병이 없는 전차는태평양의 셔먼이라 할지라도 위험해지는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에게 있어 정상적인 대응 방법이 아닌 이런식의 반 자살적 대응을 강요한다는거 자체가 태평양의 셔먼이 일본군에 대해 가졌던 위상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셔먼을 많이 손실했다는 오키나와에서도 미군은 전차에 생채기만 나도 바로 바로 후방 정비대대에 수리를 보냈으며 그 와중에도 보충전차들로 항상 전차부대의 정수를 유지시켰다. 일본군으로선 어제 분명 저 중대의 전차 한대를 잡았는데 오늘도 똑같은 숫자의 전차들이 밀고 들어오는, 무한 셔먼의 지옥속으로 빠져들었다.
국민혁명군 소속의 셔먼.[64]
자료가 적긴 하지만 미군 이외에도 국민혁명군이 셔먼을 미국에게 대여받아 중일전쟁중 버마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운용하였다고한다.
사진은 75mm 장착 사양.
아르덴 공세 때 포위망을 뚫고 가장 먼저 바스토뉴에 도착한 미 제2기갑사단의 M4A3E2 점보 셔먼. 일명 Cobra King이라는 위엄쩌는 별명을 지닌 점보 셔먼이다.[65]
76mm M1A1 장착 사양. 현지 개수형이다.
이게 어딜봐서 중형전차냐? 중전차지.
셔먼 하면 주로 약한 방어력을 연상하기 쉽지만, 차체 전면이 최대 140mm, 포탑 전면 180mm급의 티거를 능가하는 떡장갑을 가진 M4A3E2 "점보" 셔먼도 있었다. 주 임무는 노르망디 상륙과 시가지 전투에서 중장갑으로 포탄을 튕겨내며 돌파구를 뚫기 위해 만들어졌고, 때문에 전측면에 1인치씩 6~8톤 남짓의 추가 장갑을 덕지덕지 발랐다. 약점으로 지적되던 전면 장갑의 승무원 해치 구간[66]도 평탄해져서 이후 M4A3 차체를 바탕으로 한 이지에잇도 비슷하게 매끈한 전면장갑을 지니게 되었다.
어찌보면 화력에만 몰빵했던 셔먼 파이어플라이와 완벽한 대척점에 서있는 물건.
이러한 마개조가 가능했던 것은 셔먼의 설계 자체가 좋았기에 가능했던 일로, 셔먼의 엔진출력은 무게에 비해 꽤나 여유가 있었기에 이 정도의 장갑을 추가로 장착하고도 큰 무리는 없이 기동이 가능했다고 한다. 물론 거의 차체의 한계까지 장갑을 장착한 터라 기동성도 훨씬 나빠지고 서스펜션도 고장이 잘 나는 등 아쉬운 부분은 있었으나 강력한 장갑 덕분에 PaK 40의 사격을 모든 교전 거리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튕겨내고 88mm 대공포에도 쉽게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초기에는 75mm 포를 탑재했으나, 포탑이 기본적으로 76mm 포를 장착 가능한 T23포탑의 장갑강화형이라 별 개조 없이 76mm 장착이 가능해서, 전쟁 말기에는 격파된 76mm 셔먼에서 포를 떼어내 장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전면상부 101.6mm(4인치) 47도 경사장갑, 전면하부 트랜스 미션 커버 114~144mm,(4.75~5.75인치) 포탑 전/측/후 모두 152.4mm(6인치), 측면 76.2mm(3인치), 포방패 177.8mm(7인치)라는 당대의 표준적인 중(重)전차급의 무식한 방어력을 지니게 된다.출처 대신 무거워진 게 단점이지만 전면 뿐 아니라 측면장갑도 상당히 강화되어 생존율이 높아진 점이 장점이다. 측면은 티거와 비슷한 수준인 76.2mm 장갑이지만 주 상대는 측면을 잡힐 일이 별로 없는 티거와 판터였으니 문제는 없겠다.
그리고 다른 전차와는 달리 점보 셔먼의 제1목적은 어디까지나 기동력이 아니라 탱킹이었던 것 또한 점보가 일반 셔먼에 비해 훨씬 이점을 가지던 부분. 아군 전차대대가 맞을 분량의 PaK 40을 1~2대가 전부 다 맞아주고도 멀쩡히 굴러간 것으로 이미 임무를 충분히 완수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이는 점보와는 반대의 테마로 만들어졌던 파이어플라이가 티거에게 먼저 발견될 경우 쪽도 못쓰고 부서지던 것과 대비된다.
실전 상황에서는 기갑부대의 선두에 서서 적의 최초 공격을 받아내는 탱커 역할을 했으며, 심지어 전차하면 기동성이 최우선이라 생각한 조지 S. 패튼 장군조차도 점보 셔먼이 마음에 들어서 보급 요청을 했다. 하지만 생산 수량이 250대 정도에 불과한 귀한 몸이라 얻지 못하게 되자 비슷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슈퍼퍼싱처럼 현지에서 장갑을 용접해 붙이라는 지시를 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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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장군의 4기갑사단에서 운용한 개조된 M4A3E8 셔먼인 선더볼트 7도 그와 같은 현지개조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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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벙커(...) 미 제14기갑사단에서 운용했던 모래주머니를 사방에 두른 M4A3E8.
미 제10기갑사단의 M4A3E8.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고지에 포격하는 M4A3E8 셔먼.
4.19혁명 당시 M4A3E8셔먼.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고, 전차는 시위대를 호위하듯 따라다녔다.
2차대전 말에 등장한 기존의 현가 장치를 HVSS로 개선하고 주포를 76mm로 바꾼 M4A3E8, 통칭 'Easy 8'은 더욱 우수한 험지 주행능력과 주행 안정성, 주포 발사시 떨림방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1944년 겨울부터 유럽전선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버전은 한국전쟁에서도 사용되는데 M4A3E8은 후에 대한민국 육군 기갑부대가 처음으로 보유한 진짜 전차가 된다. 한국군 창군 시기의 보유차량은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와 M3 하프트랙 병력수송용 장갑차, 그리고 군마(軍馬)여서 전차가 한 대도 없었고, 한국전쟁 중, 북한군이 버리고간 소련제 SU-76 경자주포를 노획하고, 1950년 11월에 미군이 준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를 경전차로 간주해서 교육용으로 수령해서 한국군 최초의 전차로 쓰기도 했지만 자주포나 구축전차를 전차같이 쓸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실이다. 성능이나 전차병의 숙련도가 우수했기에 북한군의 T-34/85를 상대로도 선전을 펼쳤으며, 퍼싱이 도착한 뒤에도 꾸준히 전투에 참가했다.
[승차감이 뛰어나 전차병들로부터 일명 '이지에잇' 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M4A3E8 형은 신형 현가장치인 HVSS 를 장착하여 기동성과 승차감 그리고 이동간 사격을 높인 타입으로 대전후반에 등장하여 한국전쟁에서도 널리 쓰였다. 셔먼전차의 최종 생산형이기도 하다]
M4A3E8 버전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전세계를 싹싹 긁어가며 사들였다. 그래서 한국군이 1960년대에 M47, M48 전차들을 도입하며 퇴역시킨 M4A3E8 셔먼들도 죄다 이스라엘로 실려갔다. 다만 전쟁기념관이나 일부 전시되있는 차량등을 보면 남아있는 전차를 모두 팔아버린건 아닌 듯 하다. 60~70년대 군생활을 한 사람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사격지에서 표적으로 활용된 것들도 있다고. 아무튼 이렇게 이스라엘이 모은 셔먼은 슈퍼 셔먼(장포신 75mm)과 아이 셔먼(105mm포!!!)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는 슈퍼 셔먼의 개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크피르까지 이스라엘 마개조 역사의 파트너가 되었다.
[M4A3E8 은 셔만전차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최후기형에 해당되는 기종이다]
또한 위에서 서술하엿듯 기동을 약간 포기하고 장갑판을 쫌 붙이면 점보 셔먼이 된다.
미 육군의 개량 기호인 A+숫자가 다른 차량들과는 달리 차량의 개량점과는 상관없이, 주로 엔진과 차체의 제작 방식에 따른 분류로 사용되어 있는 것도 한가지 특징이다.
참고로 공식 명칭은 M4A3(76)W HVSS지만 약칭인 M4A3E8이 더 널리 알려졌다. 이지 에잇이 워낙 어감이 좋은지라….여담으로 공식 형번을 풀어보면 'M4전차A3형 76mm포 탑재 습식 탄약고(W)장비 HVSS현가장치 장착차량'이 된다. (...) 105mm곡사포를 장착하면 'M4A3(105)W HVSS', M4A3E9가 된다. 영국에 공여된 A2판 '이지에잇'도 있는데, 이쪽은 M4A2(76)W HVSS다.
영화 퓨리에서 나온 주인공 전차인 퓨리가 바로 이 형식. 영화에 등장한 전차는 상당수가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의 물건인데 2차대전 당시 랜드리스로 영국에 제공된 셔먼은 M4A2와 M4A4가 다수였기 때문에 전후 남은 것도 이 형식이 된 것이다. 어차피 M4A2나 M4A3이나 사용하는 엔진만 다르지 외형은 같기 때문에 고증오류는 아니다.물론 찾아보면 영화촬영용 레플리카도 있다. 전신샷는 보빙턴에서 출장나온 친구가, 상부만 찍을땐 촬영용 차량을 하는식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제08MS소대에서 육전형 건담의 현지개수형인 건담 Ez-8의 이름은 이 셔먼의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셔먼 이야기가 나오면 티거의 싸움을 흔히 언급하곤 하는데, 셔먼의 중량은 60톤에 가까운 티거의 절반 정도에 불과해 이는 사실 미들급과 헤비급의 싸움이나 마찬가지라서 1:1로는 상대하기 힘든 게 당연한 것이다. 굳이 티거와 비교를 하려면 셔먼같은 중(中)전차가 아니라 티거과 같은 체급인 중(重)전차 시리즈의 T29나 M26 퍼싱을 끌고와야 할것이다.[67] 즉, 셔먼이 티거를 격파하지 못하는 것은 셔먼이 구려서가 아니다.[68] 셔먼이 티거를 상대하려면 셔먼 플랫폼을 헤비급으로 올려버리는 방법이 있다. 점보셔먼과 슈퍼셔먼 처럼 말이다. HVSS 사양의 점보셔먼에 90mm포가 달린 퍼싱포탑을 장착한다는 초강수가 존재한다. 혹은 포신을 잘라내지 않은 M1을 그대로 탑재해 관통력 저하를 막고[69] M93 고속철갑탄의 보급을 원할히 했으면 될 일이다.
노르망디 상륙이후 나타나는 셔먼의 극심한 소모율(최대 580%!!!)을 근거로 셔먼을 야라레메카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티거나 판터 같은 한체급 위의 중전차들을 상대로도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셔먼의 극심한 소모율은 성능이 개판이여서가 아닌, 나름 준수한 정면 방어력와 무난한 공격력을 갖춘 전차였지만 주 사용국인 영국군과 미군의 운용 교리상의 문제와 더불어 소련과의 화력 경쟁으로 대전차 화력이 증강될 대로 증강된 독일군을 상대로 공격을 하는 공격자의 위치였기 때문인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방어전이 공격전보다 훨씬 유리한게 사실인데 셔먼은 항상 지리도 잘 모르는 곳에서 지리를 잘 파악하고 항상 유리한 곳에서 온갖 준비를 다한 독일군의 반격을 맞아야 하는 입장이였으니...
또한 얻어 쓰는 주제에 츤츤대던[70] 소련군이 높이 평가한 얼마 안되는 서방제 무기라는 걸 보면 같은 중(中)전차인 T-34만큼 충분히 좋은 전차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냉전기 소련의 문헌에서 M4의 능력에 대해 평가한 부분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고 겨우 사이가 좋았던 편인 영국의 발렌타인을 공여 전차 중 최고로 언급하는 정도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며 해금된 자료를 통해서 얻은 자료료는 T-34/85로 생산라인 변경이 이뤄지며 후방에 구형 T-34/76의 재고 떠안은 상황에서 운송문제가 발생하여 최전선에 전차가 부족해 졌을 때 당장 대량으로 공여받아 남아나던 M4를 친위사단에 우선 배치한 적도 있다.[71] 물론 이 셔먼들은 순식간에 전멸하고 바로 T-34로 교체되었고 다시는 셔먼으로 교체되는 일 없이 계속 T-34를 사용했지만 어쨌거나 꾸준히 공여받은 M4는 이후에도 일부 부대에서 계속 사용되어 베를린 함락에도 투입되었고 발렌타인 전차등과 함께 만주 진공에도 참가했을 정도로 꾸준히 사용되었다. 물론 만주 진공에는 한심한 성능을 가진 일본 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전차면 뭐든 ok였으며 부족한 성능으로 일선에서 완전히 퇴출되고 최후방으로 돌려졌던 구형 BT 경전차마저 가져갈 정도였으니 이것만 가지고 고평가했다고 보기는 조금 어렵지만 1945년에도 정예부대에[72]까지 배치할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게 평가했다고 볼 수 있을듯 하다. 더군다나 M3 리같은 경우 아쉬워서 쓰는 '일곱 동무의 관' (…)이라고 혹평할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76mm 셔먼은 훗날 8월의 폭풍 작전 때 좁은 궤도폭 때문에 험한 지형에서 꽤나 고생했다는 게 소련군의 평가지만, 그래도 신뢰성은 T-34 못잖거나 더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화력부분에서 소련은 절대 셔먼의 화력을 T-34 이상으로 판단한 적이 없다. 애초에 75mm 셔먼은 76mm T-34보다 단순히 봤을 때 구경이 작고 76mm 셔먼 역시 85mm T-34보다 구경이 작다. 실제 실험상으로는 포탄의 관통력에서 소련제 85mm가 미제 76mm에 비해 크게 우세할 것이 없지만 소련의 전차 개발사를 보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관통력이고 일단 대구경포를 올리고보는 경향을 볼 수 있고 실제 교리도 그랬기 때문에 대전차전에서 일단 포가 큰 T-34가 우선시되어 투입되었다. 다만 당연히 힘든 일 적게하고 신뢰성 좋고 거주성 좋은 셔먼을 탄 전차병은 T-34보다 셔먼을 더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T-34의 신뢰성은 수명이 짧아서 높았던 것이기도 하다. 고장나기 전에 파괴!! 또 공여된 셔먼의 포 안정장치, 무전기는 복제되어 전후에도 오랫동안 소련군 전차에 탑재되었다.
참고로 M4에 '셔먼'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미군이 아닌 영국군으로, M3, M5 경전차에 스튜어트, M3 중전차에 리/그랜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영국군이다. 결국 미제 전차에 미국의 과거 유명한 육군 장군들의 이름을 붙이는 전통은 영국이 만들어준 셈. 셔먼 이후, 미군이 자국산 전차에 붙인 이름은 M26 퍼싱(1차대전 당시 미군 원정군 사령관), M46, 47, 48, 60 패튼(설명이 必要韓紙?), M41 워커 "불독"(2차대전 중 패튼 휘하의 군단장, 한국전쟁 초기 미 8군사령관), M551 셰리든(남북전쟁 북군 기병대장군), M1 에이브람스(2차대전 당시 발지 전투에서 활약), M2/3 브래들리(패튼의 친구 겸 상관, 나중에 미육군 참모총장, M2/3 브래들리는 장갑차긴 하지만…) 등등 미 육군사에 이름을 날린 장군들이다.
여담으로 미국 남부 출신의 전차병들이 이 전차에 탑승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가 있다. 남부 사람들에게 셔먼은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 하지만 이 일화는 거짓말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M4라고만 불렀고 그 어디에도 미국남부사람들이 타기를 거부했다는 일화는 없었다. 그리고 셔먼이나 스튜어드라는 명칭은 영국에서 쓰던 것이었다. 이 일화는 벨튼쿠퍼의 책 데스트렙에서 인용된 오류였다.
에이브람스 장군의 경우 당장 대전차용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75mm 셔먼만을 이끌고 독일전차 400대 이상을 씹어드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독일 전차를 상대로 1:1의 교환비를 보여주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괜히 현대 미합중국 주력전차의 이름으로 붙여진게 아니다. 그외에도 가끔씩 판터를 잡아내거나 한국전쟁에 투입된 셔먼들이 T-34/85를 여럿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미들급 권투선수가 헤비급 권투선수를 상대한 것 치고는 제법 선전한 셈이지만, 이미 1942년에 양산 준비가 끝났던 M6 중전차나 중전차들과 싸워야 할 M26 퍼싱이나 90mm 포를 만들어놓고도 필요 없을 거라고 실전에 투입하는데에 인색했던 미군 수뇌부의 오판(아집?)으로 전선에 나가있는 전차병들은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밀워키 저널 1945년 3월 27일자 기사 '전문가 패튼 장군이 미국 전차들을 강력히 변호하다'
나치 전차들을 상대로 2대 1 전적을 거두어
패튼 장군, M4가 타이거보다 기동성이 우수해 더욱 유리하다고 밝혀
최근 또다시 놀라운 돌파작전을 성공시킨 3군의 사령관인 조지 S. 패튼 중장이 지난 화요일 미국의 M4 전차들을 강력히 변호하고 나섰다. M4는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던 전차이다. 패튼 장군은 3군 전차들이 독일 전차들을 상대로 약 2대 1의 전적을 거두었으며, 이들 독일 전차들의 상당수가 중전차인 타이거와 팬서 전차였다고 말했다. 패튼 장군의 입장은 그가 3월 19일 합동참모차장 토머스 T. 핸디 중장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나 있다. 패튼 장군은 편지에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고의적으로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자들이 전선에서 귀국하여 미군 병사들이 가지고 싸우는 장비에 대해 흠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1942년 11월 7일부터 일선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온 몸이므로 여러 가지 군 장비에 대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일 것입니다."고 적었다.
M4 전차의 기동성이 더욱 뛰어나
"M5(경전차, 스튜어트)나 M4(중형전차, 셔먼)들이 본국에서는 독일의 6호 전차, 즉 팬서형 전차와 타이거형 전차에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3군이 운용되기 시작한 1944년 8월 1일 이래로 손실한 전차의 수는 총 1,136대이며, 같은 기간 동안 3군이 격파한 독일군 전차는 총 2,287대입니다. 격파된 적 전차 중 808대는 타이거 혹은 팬서 전차였으며, 아군 전차 중 851대가 M4였습니다. 이 숫자들만 가지고도 우리 전차가 성능적으로 열세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 또 하나 덧붙이고자 합니다. 이 기간 동안 3군은 계속 공세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전차 손실의 70% 이상이 적 전차가 아니라 엄폐한 대전차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반면 적 전차는 대부분이 아군 전차에 의해 격파되었습니다. 두터운 장갑을 갖춘 타이거 전차를 거리 한 쪽 끝에 놓고 반대쪽의 M4 전차와 사격전을 벌이게 한다면 M4가 버텨내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M4는 기동성이 우수한 덕에 대부분 느리고 굼뜬 타이거 전차를 손쉽게 우회할 수 있고, 정면에서 사격을 주고받는 대신 취약한 후방을 노릴 수가 있습니다."
타이거의 주행가능 거리는 짧아
"내가 보기에 독일군은 무겁고 둔한 타이거의 등장과 함께 기갑전 능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차들은 지나치게 무거운 데다가 주행가능 거리까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군은 이들을 전차가 아니라 숫제 포대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은 이 전차들을 아군 전차들을 막는 데 쓰게 되는 데 비해, 아군 전차들은 전차의 올바른 운용방법대로 항상 공세에서 적 보병들을 제압하는 데 투입되며 대부분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3군을 따라 프랑스를 가로질러 진격한 기갑사단들이 타이거 전차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3군이 모젤 강에 다다랐을 때쯤에는 행군간 손실률이 100%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수명이 긴 아군 전차들의 행군간 손실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군의 모든 전차들이 증기선에 실려 수송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며, 여기에서 40톤과 70톤의 차이는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70톤짜리 전차가 투입되었다면 우리가 중형전차들을 상륙정에 실어 해안에 내려놓은 것처럼 옮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군의 거의 모든 전차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탕탱 반도부터 라인강까지 주행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기계적 내구성과 정비 용이성에 있어 아군 전차들은 전역의 어느 전차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합니다. 또한 독일 전차들이 가지지 못한 기계식 포탑구동장치와 포구안정장치라는 장점이 아군 전차들이 적 전차들을 격파하는 데 막대한 도움이 되었습니다."[73]
'그 '독일군 전차 한 대와 미군 전차 다섯 대의 교전비'는 누가 지어낸 건지는 몰라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미군이 아니라 영국군이 운용한 셔먼 때문에 생긴 말 같고, 그나마도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군은 1944년 캉 지구에서 독일군과 교전하면서 다수의 셔먼을 손실한 적이 있지요. 60년대와 70년대의 초기 전차 관련 서적들, 특히 미군 전차에 다룬 서적들의 거의 대부분이 영국인 저자들이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쓰인 전차 관련 서적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다수의 셔먼 관련 자료가 영국측 자료였고요. 그리고 영국군은 노르망디에서 실제로 많은 셔먼을 잃었고요. 이는 전차 자체 문제가 아니라 전술적인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라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영국군의 셔먼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미군 전차전력이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전차들을 만난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상륙 후 첫 달의 전투는 대부분 7군단이 셰르부르로 진격하면서 코탕탱 반도에서 벌인 것들이었는데, 코탕탱 반도의 독일군 기갑전력은 노획한 프랑스제 전차들로 편성된 2개 대대 뿐이라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전차전 자체도 별로 없었고요. 7월이 되면 미군이 보카주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2기갑사단과 3기갑사단이 월말에 대규모 돌파작전인 코브라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보카주 지역도 전차전에는 그리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독일군도 전차전력이 있기는 했습니다. 기갑교도사단과 SS 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였지요. '다스 라이히'는 지형 때문에 전차전 자체를 제대로 벌여보지 못했습니다. 한편 기갑교도사단은 7월 중순 큰 공세작전을 하나 시도하기는 했는데 미군에게 박살이 나고 맙니다. 어쨌든 두 사단 모두 미군 전차들하고는 거의 붙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미군 보병들과 구축전차들을 상대해야 했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요. 그리고 8월에는 돌파작전이 진행되어 미군 전차들은 브르타뉴를 지나 프랑스를 가로질러 파리까지 나는 듯이 달려갔습니다. 간헐적으로 전차간 교전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규모는 매우 적었고요. 미군이 처음으로 독일군 전차전력과 대규모 전차전을 벌인 곳은 1944년 9월 로렌의 아라쿠르에서였습니다. 미군 4기갑사단이 독일군 기갑여단 몇 개와 맞붙었는데, 그야말로 미군이 압도적으로 깔아뭉개 버렸습니다. 패튼의 3군이 로렌에 있던 독일군 기갑여단들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지요. 4기갑사단은 이 시기쯤 되면 훈련이 잘 되고 풍부한 경험도 축적한 상태였던 반면에, 독일군 기갑여단들은 신품 판터 전차를 대량으로 보유하고는 있었기는 해도 부대 자체가 새로 편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경험 수준이 들쭉날쭉했으며 실제로 전투성과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가 2차대전 중 미 육군이 비교적 좁은 지역에 상당한 수의 전차를 투입해 벌인 전차전들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 Steven J. Zaloga
패튼의 이 자신감은 아라쿠르 전투에서 비롯된다. 독일군의 전차가 86대 격파 및 114대 중파/유기된데에 비해 4기갑사단의 셔먼은 25대 격파에 7대의 헬켓이 격파된것 뿐이다. 약 6대 1의 교환비. 그리고 육군항공대의 지원은 막바지에나 있었으며 전쟁기간동안 육군항공대의 대전차임무 실적은 미미하다. 셔먼의 장갑과 화력이 판터에 비해 부족하다는건 사실이나[74], 그 열세에서도 패튼 휘하의 4 기갑사단이 안개낀 환경과 셔먼의 기동력을 이용해 판터를 우회해서 격파한것이다. 이러니 패튼이 셔먼의 기동력을 강조한것.
그러나 패튼의 위 연설 또한 100% 진실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당시 미군들은 노르망디이후 서부전선 전역에서 실제 6호 전차와 교전한 횟수는 3번에 불가했다. 당시 미군들은 독일 전차들을 전부타이거라고 불러서 교차검증이 어려운데다 실제로 미군이 주장하는 많은 수의 티거들은 사실 4호 전차나 여타 돌격포나 판터였다. 그리고 아라쿠르 전투같이 극소수의 제한된 전투나 교전을 제외하고 독일 전차들이 우세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건 독일이 방어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셔먼은 티거나 판터를 상대로는 확실히 불리했으며 4호 전차 상대로는 우세했지만 완전한 우세를 점하진 못했다. 연합군과 독일의 전차 교환비는 종전당시 3~3.3 :1이었다. 패튼의 말에는 과장이 들어갔다는 말. 물론 지휘관들은 아군의 사기를 위해 전과를 부풀리는 경우는 어느 국가나 흔했기 때문에 패튼을 무조건 비판하기는 어렵다. 단지, 현실은 패튼의 말과는 조금 다를 뿐.
흔히 '셔먼 5대가 모여야 티거 1대를 상대할 수 있다'거나 하는 말이 유명하지만, 이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이 말은 미 제 3기갑사단 야전 정비대대 출신이었던 벨튼 쿠퍼가 자신이 전투에서 손상된 셔먼들을 수리하며 개인적으로 분석한 것과 전차병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판터의 공방 성능을 평가하면서 셔먼의 5배 정도 된다고 했던 것이 와전된 것이다. 벨튼 쿠퍼는 슈퍼 퍼싱의 화력 시험과 장갑 강화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전장 최일선에서 박살난 전차들을 직접 피격 부위와 손상 정도를 파악하고 수리 및 재정비해 전장으로 돌려보내던 일을 하던 인물이다. 물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낫겠지만 그가 소속된 부대는 600%에 육박하는 손상률과 200%에 달하는 완전 손실을 기록한 부대라 편향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위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싸우던 전차병조차도 적 전차를 싸잡아 티거로 부르던 시절인데 정비부대에 있으면서 주워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평가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자료를 보자면 영국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동해 8월 12일까지 미군과 독일군간의 전차간 교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미군측 전차병력이 독일측의 2.2배 이상인 경우는 항상 승리하는 결과가 나왔다. 독일군의 경우는 미군에 대해 1.5배의 병력을 동원한 경우 승리했다.
셔먼이 6호 전차 티거를 만났을 때 후퇴해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원래 2차대전 당시의 미국의 전차는 티거든 판터, 심지어 마우스 초중전차를 만났을 때만이 아니라 3호 전차나 4호 전차 상대로도 원칙적으로 전차는 싸우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미군의 군사교리에 의하면 그들의 상대는 M10 울버린같은 대전차 자주포지 전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전차 자주포나 대전차포 부대가 준비를 끝내면 전차는 후퇴해도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미군은 전차 자체의 대전차 전투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고, 이는 전쟁 초창기 M3 리의 차체에 장착하는 방식으로 억지로라도 75mm 포를 달아서 적 전차와 싸울 능력을 부여하는데 집착한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증거로, 미군은 티거도 판터도 본 적 없던 1941년 9월에 이미 M4에 76mm 포를 시험 장착할 정도였다. 단지 서둘러서 실전투입할 생각을 안했을 뿐...그리고 달려고 했을 때도 차체 균형 맞춘다고 멀쩡한 포신을 잘라버렸지 당시 미군 교범들을 봐도 일반 전차 역시 최우선적으로 적의 전차를 먼저 제압할 것[75]을 명시하고 있다. 보병 지원이 중요하다고 해서 대전차 전투를 등한시한 것이 아니라, 전차를 잡는 것 자체가 보병 지원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차를 뚫어서 파괴시키는 것이 유일한 전차를 제압하고 상대하는 방법이 아니였다. 탱크의 궤도를 박살내거나 주포를 날려버리거나 전차병을 기절시키거나 탱크의 광학을 망가뜨린다던가하는 방법 아니면 복합적인 방법으로 탱크를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해당 교범에는 대전차 자주포(Tank Destroyers)의 보조 역시 명시되어있는데, 대규모 기갑전투가 벌어지면 아군 전차가 전방에서 몸빵을 하는 사이 대전차 자주포가 적 전차들을 보다 우수한 화력과 낮은 차체, 오픈탑의 넓은 시야를 살려서 두들겨 패며 전차와 함께 싸운다는 것이지 아군 전차가 대전차 자주포 뒤로 도망가진 않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 즉 1943년까지는 이런 교리가 아주 잘 먹혀서 횃불 작전과 시칠리아 전투에서 미군측 셔먼은 3호 전차, 4호 전차나 엘레판트[76] 등을 때려잡으며 대활약을 했다. 그 뒤로 독일이 수세로 틀어박히고 5호 전차 판터나 티거 2를 본격적으로 투입하면서 피해가 발생했을 뿐...
결국 2차 대전 당시 실제 전장에서는 전차가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멋대로 후퇴하면 전시 적전(敵前)도망죄로 간주되어서 군법재판에 회부될 수 있었다.
타미야 구판 M4A3E8 일러스트 하비보스 M4A3E8 일러스트 |
타스카 M4A3E8 일러스트 | 아래는 D코퍼레이션제 M4A3E8 일러스트[77] |
아악... 기묘한 이 특별도장은 한국 전쟁 당시 맹활약하던 셔먼 전차에 미군들이 그려넣은 그린 호랑이 도장이다. 미간에 말뚝 박혀서 아파하는게 아니다.호랑이 기운으로 티거가 되고 싶었을지도?
또다른 괴수 특별도장. 위쪽 호랑이 도장보단 귀여워보인다. 이 역시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M4A3E8 셔먼의 도장이라고 한다.
이 괴상한 특별도장들은 미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을 겁주려고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서 그려놓은 호랑이 얼굴이다. 하지만 미군의 생각과는 달리 북한군이나 중국군은 이 그림을 봐도 별로 겁먹지 않았고, 그 대신에 아군의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구난전차 등의 용도로 개조된 M4A3E8 셔먼. 역시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 원본링크
한국전쟁에서도 북한군의 T-34/85에 맞서기 위해 투입되었으며, 우수한 차량 성능과 대전 기간을 거친 압도적인 승무원 숙련도에 힘입어 T-34/85를 몰아내는데 기여했다. 전쟁 중후반이 되어 적 전차가 싸그리 다 녹아내리고 나자 낮은 주행성능의 M26 퍼싱이나 기계적 신뢰도에 문제가 있는 M46 패튼보다 더 선호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T-34/85들이 멸종 위기에 처했을(...) 무렵에 북한군이 하도 떼거지로 달라붙어서 부수려고 해서 4개의 탱크가 한개의 조를 이루고 뒷쪽 탱크가 포탑을 뒤로 향하면서 주로 이동했다고 한다. 달라붙었을 땐 서로 기관총 사수들이 샤워(...)를 해주면서 가야했다.
전후에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으나 워낙 만들어둔 숫자가 많아(5만대 이상) 세계 각국에 마구 뿌려져 전차를 처음 운용하게 된 신생국들이나 재정이 넉넉치 않은 서방 국가들에게는 보약같은 존재였다. 특히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을 통해 현대 전차 운용의 훈련 조교로까지 떠오른 이스라엘군에게 있어 셔먼은 둘도 없는 소중한 전력으로서 아랍 연합군의 T-55까지 발라버리는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78]
셔먼의 차체에 프랑스제 AMX-13 경전차의 포탑을 얹은 물건이다. 흠좀무(…) 사진의 전차는 이집트군이 운용하다 이스라엘군에 노획당한 물건.
이스라엘이 셔먼의 노인 학대와 마개조로 특히 유명한데, 이스라엘의 험난한 여건상 어떤 병기든 쓸 수 없어질 때까지(…) 골수까지 빨아먹으며 아껴 써야 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불과 몇십년 전까지 이스라엘은 보유한 M4를 엔진이나 주포, 장갑을 지속적으로 개량하면서 현역 장비로 운용했었다. 이러한 개량형인 '슈퍼 셔먼'이나 '아이 셔먼'은 마개조의 결과와 노련한 전차병들의 활약에 힘입어 중동전쟁 등지에서 소련제 최신형 전차, 심지어는 M48에 꿇리지 않는 대활약을 보여주어 전후 셔먼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노인 학대 방법도 참 다양하다
워낙에 우월한 이미지 덕에 보통 이들을 마지막 셔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칠레의 M60 HVMS가 셔먼의 끝이다. 칠레는 페루가 소련제 무기를 야금야금 들여오고, 아르헨티나와 국경분쟁이 생기자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칠레는 돈이 없었고, 구세대 전차를 개량할 계획을 세우는데, 딱 마침 이스라엘의 셔먼 재고가 풀린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들여온 아이셔먼에 NIMDA 사의 60MM HVMS(Hyper Velocity Medium Support) 포를 장착하고, 사격통제장치와 엔진의 개량도 이루어졌다. 메르카바 MK1의 M111 APFSDS탄을 개량한 60mm APFSDS탄도 만들어졌으며, 관통능력은 페루의 T-62나 T-55/54와 견주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고 한다. 칠레가 레오파르트1V과 AMX-30B2를 도입하면서 2선으로 물러났고 2000년대 들어서 드디어 퇴역했다고 한다.
거기에 유고에서 소련제 122mm를 올린 미친 사양도 있다(...). 그냥 합성이라는 말도 있으니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자. 파라과이에선 현재도 현역으로 굴러다니는중이다
'
이 생명력의 라이벌이라 할만한 T-34는 북한의 2선과 아프리카 몇몇 국가에서 아직 현역. 누가 먼저 은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M4%20%EC%85%94%EB%A8%BC)
일부 사진과 내용은 추가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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