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0.
연중 2주일
카나의 혼인잔치(요한2,1~11)
들어가면서 : 주일복음은 3년을 주기로 해서 돌아가면서 읽는다
금년도는 2018~2019년도라도 다해라고 한다
다해는 주로 루까복음을 읽지만 전례시기에 해당되는 내용이
해당복음서에 없으면 다른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을 읽게되는데
예수님의 첫기적인 카나의 혼인잔치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기에
요한복음을 읽게된다 해마다 연중 성서본문이 적힌 수첨이 광주교구에서
나오기에 염치불구하고 올해도 자은성당의 정요한금구신부님으로부터
2권을 받았다. 아직도 신안군내에 조그마한 섬에서 50여명도 안되는
교우들과 공소와 본당을 다니면서 어렵게 미사봉헌을 하시기에
자주 찾아뵙는 것이 신부님께 부담이 되는 것 같아서 육지로 부임하시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분과의 만남을 오늘복음말씀과 연결시켜본다
말씀과 관련해서...
1~2 사흘째되는 날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고 거기에는 제자들도 함께 초대 받았다고
한다. 광주교구의 신부님은 1990년도 사제가 되셨고 저와는 서울에서 1992년도인가
혜화동에서 만났다. 그때에 그신부님이 광주교구에서 보좌신부없이 혼자서 성당을
이끄시는데도 불구하고 정의구현사제단활동은 자주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에서는
예수회.마리아회수사님과 젊은학생들과 컴퓨터동아리활동을 하였다. 한달에 한번
주일에 모여 같이 미사도 보고요 일년에 한차례 소식지를 발행하고 일일피정을
가졌다. 그때 그신부님이 계시던 광주교구 곡성성당으로 초대를 받아서 사제관에 1박
2일 수련을 가졌다. 분명히 그곳의 식자재를 사용해서 요리를 했는데 식기며 버너등은
각자 우리가 갖고간것들을 사용하였다, 대부분이 대학생이고 갓졸업한이와 고등학생도
잇었는데 그때 이글을 쓰는 저자는 30대후반의 결혼한사람이었다 이일은 대구교구에
있을때에 냉담기간이었고 수원교구로 넘어오면서 냉담을 풀고 견진을 받고난이후의 일이다.
그때 서울교구 강남지역의 본당을 다니면서 1990년대초에 사제가되신 분을 만났고
그곳 청년들과 어울렸다. 그런영향인지 그곳 본당에서 말씀봉사도 하였다.
3~5 예수님은 어머니더러 ‘여인이시어 저의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시고 정작
어머니는 ‘일꾼에게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였다. 곡성성당은 박해시절에
감옥이 있던 성지였다. 시골로 서울의 청년들이 왔다고 동네유지들이 먹을 것을 갖고
오셨다. 조그마한 성당이지만 조그마한 동산에성모마리아상이 있고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어느농촌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미사에 함께하고
우리는 평소에 불렀던 복음성가를 불렀다. 그영향인지 신부님은 가톨릭성가곡외에
여러책에서 골라서 복음성가책을 자비로 내셨다. 같이 간 청년들은 신부님을 위해서 즉석에서
합창으로 복음성가를 불러서 녹음해 드렸다. 몇년후에 가보니 주일학교학생들이 미사때에
우리들이 그때에 불렀던 복음성가를 미사때 불렀다.
6-11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정신부님은
1990년도 사제가 되셨는데 1992년도에 그때에 서울에서 하늘나라라는 가톨릭모임을
하고있을때에 광구교구신부님이신 요그분을 서울에서 만났다 그리고 해마다 그분이
발령을 받으신 곳으로 찾아갔다. 광주시내에 계셨고 목포 그리고 벌교 장흥에도 계셨다
지금은 가보기도 어려운 신안군에 계십니다. 자은면의 인구가 대랙 2천여명이니까
아무리 날뛰는 신부님이라도 신자수가 몇인지는 모르지만 주일미사에 나오는 이들이
몇십여명밖에 안되기에 모든일이 평신도가 나서기보다는 신부님이 직접 찾아나선다
어떨때에는 평일미사를 본당이 아닌 공소에서 드릴때가 있다
지금 벌써 중견사제가 되었는데 본인이 사목회장서부터 여러 가지 일을 다 하셔야
한다. 신자들이 벌써 익숙해졌는지 주일미사후에 섬주의 몇십리를 도보로 순례를 한다고
하십니다. 몇 년전에 제가 방문이후에 선교사 2분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셨지만 정작
신부님생호라비조차 그섬에서 나오지 못해서 교구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신부님은 생활의 여유가 많아서 좋다고 하시는데 아마도 그런역할을 시키는 이는 분명
주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묵상길잡이
몇 년전의 전주교구의 쌍백합에 나오는 대구교구장의 전주지역답사기를 읽어본다
대구서 기차를 타고 전주어딘가에 내려서 그리고 그때부터는 지금의 천호지역으로
말을 타고 오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소식을 듣고 그마을교우분만 아니라 그 인근의
교우분들이 와서 기다리신다. 그때에는 서울이남에서는 유일하게 대구교구뿐이지만
오래된 신자들은 이곳 전주가 훨씬 많은듯하다.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는지 아니면
친적의 혼인자치에 관리를 맡게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잔치가 끝무렵인지 술이 떨어진일이
일어난모양이다. 지금과 같이 언제든지 성사를 볼 수 있고 가까이에 성당이 있던 시절이
아니기에 수많은 공소가 있는 것이다 자금에 와서는 전통적인 공소가 농촌인구의 감소로
점차 명맥을 잃어가는 안타까움이 있다. 신자 만명이 있는 대도시의 사제나 신자 50여명도
안되는 시골본당도 사제의 역할이 별반 다를바가 없는듯하다. 사람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얼마만큼 주님의 가르침대로 그 공동체가 살아가느냐가 더 소중해 보일 것이다
대화방향
만일 지금 성서형제회가 나아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이에 소속된 나는 어떤 존재일까 ?
그리고 성서형제회와 본당 그리고 외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 나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주님께 기댈 수밖에 없는데
술이 떨어져가는 잔치집에서 성모마리아는 시중을 드는이에세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했는데 나는 과연 지금상황에서 무슨말을 할수 있는지를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