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봉거사 김기추_재가 수행의 새로운 길을 가다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1. 거사가 온 뜻을 새기며
백봉 김기추(白峰 金基秋, 1908~1985) 거사의 선시집 《벽오동》의 첫 시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새삼 백봉 김기추 거사가 다녀간 자취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가 다녀간 세월이 몇 해이런가? 그리고 그가 다녀가고 남은 자취는 또 무엇인가? 그 뒤를 이어 벽오동들은 계속 자라고 있는가? 그가 남긴 자취는 다른 재가불자로 활동한 거사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가 있다. 단순히 재가자로서 불교교단을 밑받침하는 것을 넘어서서, 유마(維摩)와 같은 선풍을 드날리며 한 시대를 뒤흔들었다. 많은 스님과 재가자들이 ‘유마거사의 재림’이라고 찬탄하였고, 선수행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면서 승속을 넘어서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재가불자로서 수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화두를 던져 한국 재가불자운동의 한 갈래를 이루게 되었다 할 수 있다. 다른 재가불자 운동가들이나, 재가불자로서 불교사에 이름을 올린 분들과는 그런 점에서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우선 백봉 거사는 ‘견성오도’ 한 분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금강경 강송》이나 《유마경》 강론을 출간할 당시 당시의 고승 대덕들이 이 시대의 새로운 선지식이라고 찬탄하였다. 또 백봉 거사가 대전 심광사에 우거할 때(1970년) 청담 스님과 대의 스님 두 분이 함께 내려와 출가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들은 그 당시의 고승 대덕들이 백봉 거사의 깨달음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기추 거사의 행보는 단순히 재가불자로서 불교 교단에 기여했다든가, 재가불자로서 어떤 사상운동을 한 것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무게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김기추 거사의 독특한 위상과 특징에 맞추어 우리의 이야기는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우선 백봉 김기추 거사는 그 생애 자체가 재가 거사로서 독특한 위상을 지니고, 우리 불교계에 어떤 큰 시사를 주는 것이기에 그의 삶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다음 그의 선지와 선풍, 그리고 선사로서 후학을 이끈 방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그의 선수행의 방식과 지도체계는 당시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불교계의 수행 풍토에 큰 시사를 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그의 재가불자 수행과 삶에 관한 사상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이 부분에서는 김기추 거사도 몇 번의 변화를 거쳐서 재가불자의 삶과 수행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과 체계를 세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그의 생애와 연관 지어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2. 삶 자체가 하나의 귀감이 되는
백봉 김기추 거사는 그 삶의 역정 자체가 불교적인 관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분이다. 그의 최종 학력은 부산상고 중퇴이다. 동맹휴교 사건의 주모자로 퇴학 조치를 당해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항일운동단체인 부산 청년동맹의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일제에 의해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그 뒤로는 만주로 피신하여 동만산업개발사를 운영하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의 간부로 활약을 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법령 위반죄로 복역하기도 했다.
이 시절의 김기추 거사는 불교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절이란 술 마시기 좋은 곳으로 알았다 한다. 절에 가는 것은 늘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러 가는 일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간단한 이력에서 보듯이 거의 정치적인 색채를 띤 운동에 투신하였다 할 수 있다.
거사가 불교에 별로 인연이 없었다는 것은 거의 사실인 듯하다. 필자가 대전 심광사에서 6개월 정도 시봉한 바 있었는데, 불교의 용어에 대하여 대부분 알지 못하여 필자가 가르쳐드린 일이 매우 많았다. 《반야심경》도 끝까지 제대로 외우지 못하였다. 그런 분이 수행을 통하여 크게 이루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소중한 예가 될 것이다.
거사가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1962년 여름이었다. 인천 거사림 회원들과 충북 청주 심우사에 가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1963년에는 ‘무(無)’ 자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 수행을 시작하였다. 거사의 술회에 따르면 거의 죽을 둥 살 둥 완전히 몰입하였으며, 분심이 치밀어 화두를 타통(打通)할 수 있다면 팔 한쪽 정도는 떼어 바칠 마음이 났었다 한다(웃으며 왼쪽 팔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팔을 잘라내면 여러 가지 너무 불편할 것 같아서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다가 1964년 1월 청주 심우사에서 화두를 타파하고 견성하였다 한다. 마침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는데, 다음과 같이 그때의 마음을 읊었다.
忽聞鐘聲何處來, 홀문종성하처래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廖廖長天是吾家; 요요장천시오가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하네
一口呑盡三千界, 일구탄진삼천계 한 입으로 삼천세계 고스란히 삼켰더니
水水山山各自明. 수수산산각자명 물은 물, 산은 산, 스스로가 밝더구나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불교 경전, 그 가운데 《금강경》을 읽었는데 너무너무 신명이 나고 기뻐서 하룻밤 사이에 《금강경》 32분 하나하나에 모두 게송을 달았다 한다. 그것을 보완하여 그해 3월에 《금강반야경 강송》을 탈고하는 등 참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이며 당시의 불교계에 ‘사람’이 나왔음을 알렸다.
김기추 거사의 ‘견성’ 소식과 《금강경》 출간 소식은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큰 자극제였다. 《금강경 강송》에 해제 서인을 단 전준열 거사는 김기추 거사의 수행과 오도, 그리고 《금강경 강송》 출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스님들도 하기 힘들다는 화두 타통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금강경》을 시작으로 하여 《유마경》 등의 저작을 통해 활발발한 깨달음의 빛을 펼쳐내는 김기추 거사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것은 승속을 떠나 ‘한 번 뛰어 여래 땅에 든다’는 선종의 종지를 구현한 표상이 되었다. 특히 재가자로서 그런 경지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출가자에게 자극이 되어, 많은 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질시 내지 경시의 분위기도 있었다. 재가자에게는 그야말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으며, 재가자의 위상을 한 차원 높인 계기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출발점이 이러하였기에 김기추 거사의 행보는 자연 그 깨달음을 펼쳐내고, 그 밝은 선지를 흠모하는 일단의 학인 그룹이 생겨났으며, 그 그룹을 이끄는 선수행의 지도자로서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수행을 하는 도량을 보림선원(寶林禪院)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전 생애는 보림선원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다. 김기추 거사와 그의 지도를 받는 학인들이 모인 공간이 바로 보림선원이며, 보림선원을 중심으로 한 거사불교 운동이 김기추 거사의 삶이라 할 수 있다.
3. 재가불자의 수행과 삶에 대한 선언
승속이 엄연한 한국불교의 풍토 속에서 거사라는 신분은 상당한 제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행도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많은 고난을 겪기도 했지만, 수행 열의를 가진 학인들을 맞아 정진하는 일은 그친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 자연 재가불자로서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970년 청담, 대의 두 큰스님이 출가를 권유했을 때, 상당한 심사숙고를 거쳐서 “난 거사로 남으렵니다.”라는 답을 했는데, 그때 이미 거사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확실한 입장을 세운 듯하다. 그 뒤로는 보다 치열하게 재가불자로서 수행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재가불자의 처지에 맞는 수행방편을 찾으려는 모색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모색의 결과로 나온 것이 ‘거사풍(居士風)을 세운다’는 선언이다. 몇 구절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궁극적인 목적은 같다 할지라도 놓여 있는 처지가 다르기에 수단 방편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대기설, 즉 어떤 조건과 상황에 맞추어 설해진 것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올바른 인식이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놓인 조건과 상황이 전혀 다름에도 출가자 흉내 내기로 일관해오던 재가불자들의 삶과 수행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가자의 수행 방편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현실적인 삶의 무대가 바로 재가자의 무대라면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수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편을 찾아야 마땅하다. 김기추 거사는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김기추 거사는 중생풍과 거사풍, 그리고 승가풍을 다음과 같은 말로 특징짓는다.
여기서 김기추 거사는 절대성(絶對性)과 상대성(相對性)이라는 말을 통해 수행의 방편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개념은 김기추 거사에게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원효(元曉)에게서 생멸문(生滅門)이라고 불리던 것이 바로 상대성에 해당하고, 진여문(眞如門)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절대성에 해당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김기추 거사의 재가불자 수행에 대한 사상은 보림선원의 예불문 가운데 십물계(十勿戒)에 잘 표현되고 있다. 열 가지 계 가운데 두 가지만 들어본다.
비록 처자를 두었다 해도 쏠려봄에 떨어지지 말라(雖有妻子 勿墮愛見)
비록 가업을 이으나 삿된 이익을 탐하지 말라(雖承家業 勿貪非理)
4. 활발발한 보림의 선풍
이렇게 재가자로서 수행방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이어졌지만, 보림선원의 주된 수행방편은 역시 간화선이었다. 여름 겨울로 철야정진 법회를 가지면서 김기추 거사를 중심으로 한 치열한 수련을 이어 나갔다. 그런 점에서는 일반적인 승가의 참선수행과 차이점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 내용으로 보면 보림선원의 수행방편은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 김기추 거사는 정진 기간에 계속 설법을 통하여, 그리고 설법 외의 시간에도 학인을 채찍질하고 분발심을 일으키며, 화두참구의 의단이 계속 이어지게 하였다. 이 점에서 김기추 거사는 참으로 탁월한 지도자였다. 설법도 단순한 설법이 아니라 학인들을 깨우치고 의단을 일으켜주는 참으로 불꽃 튀는 설법이었다. 김기추 거사는 승가에서 하는 안거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냥 상당법문 한 번 하고 나서 각자 화두참구하라는 것은 참으로 학인을 팽개쳐버리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바른 지견을 세워주고, 분발심을 일으키며, 의단이 이어지도록 채찍질하는 스승이 없으면 앉아서 망상 피우는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김기추 거사는 단지 화두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살림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그것을 통해 학인을 이끌었다. 일반적인 화두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사림을 보이고, 그것을 통해 활발발하게 학인을 제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원(圓)에 들어가도 30방이요 나가도 30방이라는 화두, 즉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 不入也打)’ 화두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처를 보였다.
“끝이 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이 오니, 허수아비가 땅을 밟을 새 크고 둥근 거울일레라(無邊虛空一句來 案山踏地大圓鏡)”
그리고 일반적인 화두뿐만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선지를 보이는 수많은 게송을 짓고 그것을 통해 학인을 제접하였다. 일종의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림삼관(寶林三關, 보림의 세 관문)과 같은 것이 있다.
*보림삼관(寶林三關)
1. 가고 옴이 없는 곳에 산자는 무엇이며 죽은 자는 무엇인고?
태산이 눈을 부릅떠 오니, 녹수는 귀를 가리고 가누나.
2. 마음밖에 법 없는데 미한 자는 무엇이며 깨친 자는 무엇인가?
옛길에 풀은 스스로가 푸르르니 바름과 삿됨을 아울러 아니 쓰네.
3. 너와 내가 비었는데 말하는 자는 무엇이며 듣는 자는 무엇인가?
만약 오늘 일을 논의하면 문득 옛 때 사람을 잊으리라.
앞은 구절은 물음이요, 뒤 구절은 답이다. 앞 구절의 물음은 불교나 선가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돌이켜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학인은 마른 지혜를 넘어서 참된 앎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김기추 거사 스스로의 살림을 슬쩍 내비침으로써 학인들의 의단을 일으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뒤 구절의 답이 바로 김기추 거사의 살림이다. 그리고 새로운 화두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전통적인 공안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문제들을 개발하여 학인을 이끌었으며, 그렇게 마련된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진 중의 설법은 시종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선문답이 오가는 자리였다. 필자가 체험한 작은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김기추 거사: 어제 허공 보았나?
학인들: 예!
김기추 거사: 오늘 허공 보았나?
학인들: 예!
김기추 거사: 내일 허공 보았나?
학인들: ???
(그 가운데 학인 하나가 큰 소리로 대답한다)
“허공에 어찌 오늘 내일을 붙이십니까?”
김기추 거사: 말재주 부리는구나. 그렇지만 그 말도 맞다!(그렇게 말하면서 껄껄 웃는다)
5. 생활 속의 선-새말귀
이렇게 여름 겨울로 철야정진 법회를 주기적으로 열어가면서 하는 선 수행이 김기추 거사 생애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선 수행은 분명 일반적인 승가의 선 수행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학인들이 절실하게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스승은 지도하였고, 모든 학인이 극도로 집중되고 몰입된 분위기에서 정진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설법 시간은 학인들의 의단을 불러일으키고 분발심을 내게 하는, 번개와 천둥이 치는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수행을 한번 거친 학인들은 자기의 진정한 체험 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체득하는 귀중한 체험을 하게 마련이었고, 그것이 그들의 일상적 삶에서 수행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역시 일반적인 승가의 수행을 개선한 방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철야 용맹정진을 통해 체득한 것을 일상적 삶으로 이어 나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상적 삶은 집중적인 수행의 결과물을 소비하는 시간이 되고 만다. 수행과 삶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것이며, ‘삶 따로 수행 따로’를 완전히 면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간화선 수행을 중심으로 삼는 이상은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 점에 대하여 김기추 거사는 ‘거사풍을 세운다’에서부터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는 실마리를 내비치고 있다. 상대성을 걷어잡고 절대성으로 들어가는, 즉 동중정의 공부를 거사풍이라고 정의한 곳에서 이미 새로운 공부 방편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색이 집약되어 나온 것이 바로 새말귀이다.
김기추 거사는 일단 ‘간화’ 즉 화두를 드는 방편이 참으로 뛰어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 화두라는 방편은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재가자들에게는 맞지 않는다. 모든 힘을 수행에 쏟을 수 있는 출가자에게는 적합한 방편일지 모르나 현실의 삶 속에서 간화 수행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가자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여름 겨울의 휴가 기간 등을 통하여 철야정진을 함으로써, 그리고 그 철야정진 기간 동안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힘을 얻고, 그것을 통해 나머지의 세월을 버티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쌓고 소비하는 것은 순환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서 김기추 거사는 새로운 방편으로 ‘새말귀’라는 것을 제시한다.
우선 김기추 거사는 화두라는 방편이 재가자들에게는 자칫 독약과 같을 수가 있다고 말한다. 출가자에게는 참으로 좋은 방편이지만 재가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방편이기에 그것을 통해 재가자들이 수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김기추 거사의 사상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수행은 약간은 변형되고 개선되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방편을 통해 이루어져 왔었다.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거사풍을 세운다’ 등의 선언에서 이미 그 단서를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근본적으로 화두 참구를 부정하고 새로운 방편을 제시하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김기추 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런 사유의 과정 끝에 김기추 거사는 참으로 용기 있게 새로운 방편을 제시한다.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김기추 거사의 최종적인 모색과 사유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정말 큰 용기를 내어 제시한 재가자의 수행방편이다. 지난 성인의 입에서 나온 화두는 도로 지난 성인에게로 돌려보내자는 말은 기존 간화선의 방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적어도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화두라는 방편을 통해 수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 화두를 대신하는 방편을 찾아야 한다는 용기 있는 선언이 여기 있다. 대치법이란 화두를 대신하여 수행하는 방편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기추 거사가 화두를 대신하는 방편으로 제시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김기추 거사는 화두를 ‘말귀’라는 말로 번역하고, 그 화두를 대신할 새로운 방편을 ‘새말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새말귀는 바로 “모습을 잘 굴리자!”이다.
이 ‘모습을 잘 굴리자’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우선 우리의 모습 있는 몸은 모습 없는 절대적인 법성신이 움직이는 것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사실에 대한 이론적 깨우침을 바탕으로 하여 이 모습을 잘 굴림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김기추 거사는 운전을 하는 데에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에 의거한다면 그 결실을 거둘 수 있지만, 화두가 순일한 것으로는 결실을 거둘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수행방편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침엔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마음으로 세간에 뛰어들고, 낮에는 ‘모습을 잘 굴린다’는 뜻으로 책임을 지고, 저녁에 ‘모습을 잘 굴렸나?’라는 뜻으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일상의 모든 일이 바로 수행으로 될 수 있다. 화두 수행처럼 거기에 몰입하면 생활이 되지 않는 수행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수행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방편이 바로 ‘새말귀’ 즉 ‘모습을 잘 굴리자’인 것이다.
이 ‘새말귀’는 김기추 거사의 지속적인 모색의 참된 결실이다. 논리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그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거사풍을 세운다’에서 거사의 수행방식을 새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상대성을 바탕으로 절대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 제시가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화 수행과 같은 방식을 취한다면 절대적인 수행시간의 차이가 있는 출가와 재가의 격차는 나날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재가자는 영원히 불교의 소외계층이 되고 만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삶과 수행을 일치시키는 방편을 개발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 모색의 귀결로 제시된 ‘모습을 잘 굴리자’는 삶과 수행을 일치시키자는 구호에 명확하게 부합한다.
문제는 ‘모습을 잘 굴리자’는 방편이 김기추 거사의 설명만으로는 매우 추상적이어서 좀 더 구체적인 서술이 필요하고, 좀 더 조목화되고 세분화된 방편과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수행 요령들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서울 보림선원에서 지속적으로 연구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6. 동업보살의 공동체
김기추 거사는 이렇게 재가불자의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하면서, 또한 재가불자들이 함께 살아나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제시했다. 한 개인의 수행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수행을 해나가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김기추 거사는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동업보살’이라고 부른다. 같은 업을 지어 나가며, 같은 서원 아래 서로를 지켜주고 격려하며 나가는 그러한 보살들, 그것이 바로 동업보살이다. 다음 ‘동업보살의 서원’에 그러한 지향이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옛적부터 비로자나 법신이나
변하는 모습 따라 뒤바뀌는 여김으로
갈팡질팡 생사해에 뜨잠기는 중생이니
좋은 인연 그늘 밑에 동업보살 되고지고
괴로운 첫울음은 인생살이 시작이요
서글픈 끝 놀람은 이 세상을 등짐이니
들뜬 마음 가라앉혀 보리도를 밝혀내고
부처 땅에 들어가는 동업보살 되고지고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가? 김기추 거사는 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삶은 비극일 뿐이며,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는 길이 바로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줄여서 ‘생사 문제의 해결’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생사 문제의 해결을 함께 해 나가는 이들은 혼자인 존재가 아니다. 동업보살인 것이다. 동업이란 무엇인가? 바로 훌륭한 스승 밑에 올바른 수행을 지어나가는 업을 함께 지어나가는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보림선원의 예불에는 언제나 동업보살의 서원을 함께 읽는다. 거기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바로 동업보살이다. 불법이라는 인연, 좋은 스승이라는 인연, 그것이 바로 좋은 인연이다. 그 그늘 아래 동업보살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보림선원 도반들의 서원이다.
김기추 거사는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공부를 지어가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함께할 뿐 아니라 미래 세상에서도 함께 나가야 하며, 또 그렇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종종 “도솔천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우리 이 세상에서 이렇게 함께 닦아 나가고, 또 다음 세상에는 이 공덕으로 도솔천에 함께 태어나서 계속 수행을 해나가자는 따뜻한 서원을 내는 것이다. 수행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겠지만, 그것을 함께 해나감 또한 중요하다. 도반이란 바로 함께 좋은 인연을 함께 지어나가는 동업보살인 것이다.
‘동업보살의 서원’ 같은 게송을 소개한 김에 김기추 거사의 선구자적 개혁 정신을 말하고 싶다. 그러한 점은 특히 예불의식이라든가, 예불의식에 쓰이는 글들을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바꾼 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필자가 시봉을 하던 1970년대에 심광사에서 화봉유엽 스님과 친교를 맺었고, 그때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 것 같다. 아무튼 그때를 전후하여 《반야심경》을 비롯한 모든 의식을 새롭게 만든 글로 대신하였다. 그 대부분은 한글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예불의식에는 다음과 같은 ‘염불송’도 읽는다.
염불송
부처님 거울 속의 제자의 몸은
제자의 거울 속의 부처님에게
되돌아 귀의하는 이치를 알면
부처가 부처 이름 밝히심이네
또 ‘삼귀의’는 자성삼귀의(自性三歸依)라 하여 다음과 같은 것으로 대신한다.
세 줄의 공덕
나의 바른 깨침을 드높입니다('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에 해당)
나의 바른 슬기를 드높입니다('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에 해당)
나의 바른 거님을 드높입니다('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에 해당)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와 비교해 보라.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는 그런 평가는 나중의 일이다. 이렇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새로운 형식을 과감하게 도입한 시도 자체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7. 몸을 가을바람에 나툼이여
백봉 김기추 거사는 인간적인 측면에선 매우 고달픈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청년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만주로 피신해서도 상당한 고생을 했다. 그 뒤 정치적인 일에도 몸을 던졌으나 결국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여건에서 불교에 입문하고, 또 이른바 ‘견성오도’를 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간적인 삶,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따르는 학인들이 있으면 적건 많건 간에 여건에 맞는 장소를 택하여 정진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렇지만 언제고 풍족한 때는 없었으며, 도반과 학인들의 십시일반으로 겨우 유지되었다고 생각된다.
1964년 오도하고부터 69년까지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69년부터 1972년까지는 대전 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였다. 1972년부터 1984년까지는 부산 남천동 보림선원을 열고 법회와 정진을 지속하였다. 아마도 이 시기가 보림선원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였고, 많은 학인들이 정진하고 또 성취를 얻었다. 1984년 11월에 경남 산청에 보림선원을 신축하여 그곳으로 옮겼다가 1985년 8월 2일 수련대회를 회향하고 입적했다.
그 전 생애에 걸쳐 김기추 거사는 어느 곳에 있든지 배움을 청하는 학인이 있으면 열과 성을 다하여 지도하였다. 조건이 좋든 나쁘든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수행도량이었다.
성격은 매우 호탕하고도 격한 면이 있었으며, 육체적 건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말년에는 심한 고혈압으로 고생했는데, 200이 넘는 혈압을 견디면서도 설법을 쉬지 않았다. 경남 산청에서 입적한 것도 결국 혈압 탓이었다. 누군가 도인이란 분이 그렇게 가신 것을 좀 아쉬워하자 한 도반이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끝까지 그렇게 설법하시고 활동하시다 가신 것이 백봉 선생님답다. 좌탈입망 같은 것은 선생님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 말에 정말로 공감이 되면서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그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거의 번갯불이 튀는 것 같은 설법의 회상이 떠올랐다.
김기추 거사의 제자로서 선생 이야기를 하다 보니 참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거사풍에 조금 더 추가되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물론 큰 내용이야 들어 있지만, 사부대중의 공동체라는 구조 속에서 재가불자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적다. 그것은 김기추 거사의 불자로서 출발이 개인적인 선수행이었고, 문제의식 자체가 생사 문제의 해결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뒤에 간단히 언급했던 동업보살의 서원과 같은 부분을 좀 더 보강하여, 재가불자의 현실적 역할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면 보다 완전한 재가불자 운동의 체계를 이루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출가자보다는 현실을 직접 운영하는 재가자에게 훌륭한 세상의 건설이 바로 중요한 의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김기추 거사가 불교 종단의 구조에 들어가 본 일도 없고, 거사라는 것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기 때문인지, 출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재가자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물론 이런 것들은 재가불자 운동이라는 큰 틀을 생각할 때 필요한 이야기일 뿐, 김기추 거사의 정체성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다만 후학들이 그러한 점들을 좀 더 유의한다면 김기추 거사의 ‘모습을 잘 굴리자’가 더더욱 빛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붙이는 사족에 불과하다.
백봉 김기추 거사의 자취는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후학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보림회라는 이름 아래 모인 학인들이 서로 절차탁마를 하고 있으며, 부산과 산청 서울에는 ‘보림선원’을 설립하여 정진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서울 보림선원은 ‘새말귀’를 중심으로 하는 수행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분이 남긴 가르침과 깨달음이 진정 한국의 재가불자들을 바꾸고, 나아가 불교계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선시집 《벽오동》의 마지막 시로 김기추 거사의 모습을 그려본다.
몸을 가을바람에 들냄이여
꿋꿋한 벽오동일레
달이 큰 허공에 밝음이여
생생한 벽오동일레 ■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한국고등교육재단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서 5년간 한학 연수. 건국대학교 문과대학장,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한국철학회 회장, ‘우리는 선우’ 대표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주역과 21세기》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공저) 《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첫댓글 저는 대학교 휴학하고 군입대하기 전까지(1981년 1월에서 3월) 부산 남천동 보림선원에서 숙식하면서 백봉거사께 배웠습니다. 당시 흥미있고 아름다웠던 일들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