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tburg 마르틴 루터의 성경번역
분주한 활동을 하면서도 루터는 번역 작업을 계속 하였다. 전체 성경의 출판은 신약 성경의 출판 이후 12년이 걸렸다. 루터는 성경번역을 위해 팀웍이 중요한 것을 알고는 자신이 ‘산헤드린’이라고 명명한 전문가 팀을 식사 전에 초대하여 번역의 수정작업을 하였다. 루터가 번역에 들인 공은 상당한 것으로서, 한 번은 슈팔라틴에게 부탁하여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보석들의 이름과 색상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한 번 직접 볼 수 있도록 궁정에서 빌려와 달라기도 하였다. 또 한 번은 여러 마리의 양을 잡아 푸줏간 주인에게 보여 주면서 양의 각 부위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 걸작을 번역하고 있는 루터와 동료들. 루터는 번역위원회의 구성에 있어서도 효시가 되었다. 1534년에 출판된 ‘루터 성경’은 독일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나는 아무도 모세가 유대인이라고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그를 아주 독일인으로 만들었다.” 번역된 성경은 독일 언어 뿐만 아니라 문학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성경에 대한 열심과 진지한 태도는 그의 마음 속에 성경에 대한 겸손한 태도와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신학박사로서 34년간 지내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강해한 그였지만 성경의 깊이와 풍부함에 압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의 사후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종이 쪽지에 적혀있던 글은 이것을 증명해준다.
“어느 누구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 그리스도, 사도들과 함께 100년 동안 교회를 통치하기 전까지는 성서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믿지 않도록 하라. 이 신성한 Aeneid(성서)를 더럽히지 말고 그것에 머리 숙이며 그 자취에 존경을 표하라. ‘우리는 거지들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첫번째 완역 독일어 성경의 표지면. 루터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들 대신 성경을 읽으라고 추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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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artinluther/아이젠나흐와 바트부르크성(청소년기와 유배지)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성당 학교에서 일년(1497/98)동안 공부하고 나서 루터는 아이제나하로 학교를 옮겼다. 지금은`루터의집'으로 보존되고 있는 코타부부의 집에서그는 1498년-1501년의 기간을 보내게되었다. 이집 2층에 올라가면 구석에 아주 조그마한 방이 한칸있다. 설명에 의하면 루터가 소년시절 여기서 숙식 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이방 조그만 서가에 17세기에 간행된 루터전집이 몇권 걸려있다. 여기서 루터는노래와 합창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것은후에 찬송가 작가로서 그리고 언제나 명랑하고 쾌활하였던 루터에게 있어서 천성적인 것이 되었다. 1500년 당시 아이제나하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 였으며 이곳은 광활한 숲이 두루 펼쳐있는 튀링엔주의 이전 수도였다. 여기서 루터는초기에 빵을 벌기 위하여 이집저집을 돌며 노래를 하곤하였다. 아마도 어느정도그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것을 하지않았나 싶다. 그러나 루터는 이기회에 다져진 신앙훈련 으로 말미암아 학생으로서의 검소한생활방식이 몸에 배게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아주당연한 그리스도인의모습이었다.
하나님께 아름다운찬양으로 화답하였던 소년루터는 이곳에서 또한 프란치스코회의 경건을 배우게되었다. 고타부부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하고 교양이있고 출중한 명문집안이었다. 여기서닦게된 신앙분위기와 여러우정은 루터의일생에 걸쳐서 샘솟는 활력소였다. 천성적으로 예민한정신의 소유자인 소년루터는 이곳에서 음악과 중세경건을 담뿍 익힐 수 있었던것이다.
아이제나하에서 도보로 약 30-45분, 차로 10분정도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삼림에위치한 바트부르크성이 나타난다. 성에서 우거진 초록세계를 담뿍 감상 할 수 있다. 이것을신선한그림에나 비유 할 수 있을까?
돌로 깎아낸 성로(城路)를 따라 입구에 서면 우선종탑에 달린 하이얀십자가가 눈에 띈다. 보름스국회에서 카알대제를 알현한가운데 종교개혁자로 서위엄있게 신앙을 고백하던루터, 그리고나서 유배지의길에 올라갈길 모르던루터가 이곳에도착하였을때, 과연 무슨생각에 사로 잡혀있었을까? 불안한 마음과 병마에 사로잡힌루터, “나만 옳은것인가”라는자신의 신학적입장에 대해극도의 회의를품은채 루터는 이곳에 들어섰다. 바트부르크는 현자(賢者) 프리드리히선제후의 영지에 속하는성으로 휴양지로 보아도 좋은곳이다. 그는 루터의 사건전모를은밀하게 진행시키기위하여, 아니 자신의 유능한신학자요 영적인 목회자인루터를 보호할목적으로 이모든일을 막후조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영토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폐습으로 말미암은손실과 외부간섭에 대한항의로 암묵적인 행동을 취하였던것이다.
여기서 루터는자신의정체를 드러내지 않기위하여 기사로변장을 하게된다. 머리스타일은수도사형에서 장발과 구레나룻을 단기사형으로 바뀌게되었다. 극소수의 사람이외에는 이새로입성한기사가 누군지도통 알 수 없었다. 그기사이름은 융커외르크! 이곳에서의 생활은 활동적인루터에게 있어서 감옥과도 같은곳이었다. 그래서루터는 자신의 친우들에게 편지를 보낼때곧잘“밧모 섬에서”혹은“광야에서”라는 말을 붙이곤하였다. 참으로 고독한시절과 지나친논쟁으로 말미암은 극도의긴장감이 몰아쳐 끝내 루터는 심한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루터는아주자그마한방, 소위“루터의방”이라고 불리는 방에서 새로운다짐을 하게되었다. 즉그동안라틴어로만 읽을수 있었던 성경을 민중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고자하는일 이었다. 사실 이전에 여러방언으로된 독일어성서번역이 있었지만 지방에 따라쓰는말이달랐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그는 대중적인언어이면서도 품위가있는 말들을 골라 성경번역에 사용하였다. “가정에서 어머니와 뒷골목에서 아이들이그리고 시장에서 일반사람이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아야”한다는그의번역 원칙이 여기서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신약의희랍어 원문이 그당시 시장바닥에서 사용하던 코이네희랍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일 이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희랍어원본에서 그는 4개월 이라고 하는 아주 짧은기간에 멋진 신약독일어 성경을 창출하였다. 이성경은그 후에 독일어 형성사에 있어서 지극히 중대한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독일인은 루터를 통해서야 비로소 한국민이되었다!”(괴테). 최초의 독일어 신구약성경전서는 1534년 9월에 뷔텐베르크에서 출판되었다.
이성에서 또한 루터는경건과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하게 체험하였다. 이시기에 쓰인 그의 글들을 읽어 본다면 그의 하나님께 향한 절절한 간구와 로마가톨릭에 대한 결연하고도 확고한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대표적인글로“마리아찬가강해”와“수도원서약에 대하여”등이있다. 요컨대 봐르트부르크성 체류기간에 루터는 본격적인 교회개혁을 위한 최종준비를 하였던것이다.
3. 루터와 에어푸르트/ 어거스틴-은둔자수도원(대학교육과수도사생활)
1992년에 1250회의 생일을 맞이하여 에어푸르트는“독일의 중심에 위치한 에어푸르트”라는 모토하에 여러국제적인 행사를 루었다. 2차대전이후로 사라진 에어푸르트대학도 다시소생되었다.
여기서 루터는 1505년에 문학석사를 마쳤다. 그는이제 어느정도 부유하게된 아버지 한스루터의 소망에따라 법학도의길을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7월 2일수요일에 그는만스펠트에 사시는 아버지를 방문하고나서 귀가길에올랐는데 에어푸르트에서 약 6킬로미터정도 떨어진슈토테른하임 이라는 마을근교에있는 슈톨베르크 고지대에서 벼락을 맞게되었다. 갑자기근처에 내리친번개로 말미암아 루터는 말에서 떨어져 다리에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를죽음의 공포로 몰아붙였다. 이때 그는“성안나여,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는서약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의 순간적인 결단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그의마음의 고민을 반영하는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접할수있을까”라는 인간실존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루터는 결국 인간의 한계상황을 통하여 처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하였던것이다.
루터는 정해진 절차를 마치고 13세기중반에 탄생한 어거스틴-은둔자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그수도원의 특별히 엄격한 금욕생활때문이 아니라 여기서는 인문학 부와 동일한 철학적-신학적인 방향이 지배적이었으며 루터는거기서 동일한정신으로 그의 공부를 계속 할수있다고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풍성한 영적인삶과 신학에 대한관심에 있어서 출중한 이었던것이다.
예비신부의 과정은 1년하루의 시간이 걸렸다. 이수도원의 규정은 너무도 엄격하였기에 루터는 이예비기간에 다른사람들과는 거의접촉을 가질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엄격한 수도생활은루터의 건강을 평생해칠 정도였다. 그러나 루터는이곳에서 성경을 더한층 열심히읽고 또그것을 경건하게 들을 수 있었다. 수도사로서 루터는 수도원예배를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최고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서 루터는 어려운신앙의 문제가 있을때마다
상담 하곤 하였던 그의 영적인 아버지요 한폰슈타우피츠와 친교를 맺었다. 요컨대 루터는 경건하고 순결한 그리고 청빈한 수도승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루터는 1507년 4월 3일에 에어푸르트대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때에도루터는 자신을 다른사람이 보기에 티끌만도못한존재로 보았기에 불행한 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의`신앙의시련'은 이러한수도원의 엄격생활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그 시작에 불과하였다. “나는 수도사로서 지극한열심으로 수도원규정에 따라살고자 무진애를 썼다. 그렇지만 나의 양심은 결코확신을 얻을수 없었으며 언제나 절망하였다”. 또한 1510년어거스틴수도회안에 일어난분쟁을 해결하고자 루터가 로마로 파송되었는데, 이 로마여행은 그의생애가운데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지만, 루터에게 적지아니한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하나님께 성실하며 신앙의삶에 있어서 진지 하였던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사제의 무지와 불경성(不敬性)은 크나큰 쓰라림을 갖다준 사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