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아일랜드 기행 63 / 윈저 성Windsor Ca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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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병 교대식
도열한 병정들의 근엄한 아침이 있다
물샐틈없는 계절이 일렬로 늘어서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새벽을 주고받는다
하늘을 인수인계하고
역사를 주고받으며
지존의 안위를 열병한다
이양移讓의 저 서늘한 깃발 속에는
로우랜드lowland의 바람소리도 들어있고
장미꽃의 안위를 묻는 질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창공에 늘어선 저 총검들을 보라
몇 번의 예포禮砲 속에는
잉글랜드의 해양성 기후와 날씨들
굳건한 미래의 낙원들이 함께 들어있다
눌러쓴 검고 둥근 깃털모자 속에는
항시 무표정이 들어있지만
가끔은 창밖을 지저귀는 새소리와
제왕의 기침소리도 거기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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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윈저 성Windsor Castle
비가 약간씩 뿌리는 흐린 날씨
그러나 대기는 산뜻한 아침
런던에서의 지난밤은 평화로웠다
아침식사가 반갑고
조금 흐린 날씨가 기쁘고
낯익은 얼굴들이 주고받는 인사가 즐겁고
내 몸이 어디 있는지 알고 나니 상쾌하다
봄은 하루가 다르게 신록으로 푸르다
윈저 성 가는 길
빗방울이 차창에 흩어지자
박윤영 가이더님이 한 마디 훌쩍 던진다
‘가랑비는 하느님의 재채기’ 라고.
재채기치고는 소리가 없어 우아하다
신의 재채기는 매일 이어졌지만
아무도 서럽게 젖지 않았다
비 뿌리는 위안의 시간이여
템스 강은 윈저 성을 에워싸듯 흐른다
템스 강의 물빛은 연이은 강우로 인해
황토빛 뻘물
신의 가벼운 재채기 한 번으로 저토록 출렁댈 수 있다니!
연도連道는 신록으로 푸르다
계절이 붐비는 소리 시끄럽다
윈저 성 -
런던에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거리
템스 강변에 구축된 성채
성채는 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레이트브리튼의 공식 왕실 거처는 세 군데
런던의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Holyrood Palace
런던 서편 템스 강변의 윈저 성Windsor Castle
윈저 성은 11세기에는 소박한 목조건물
정복왕 윌리엄 1세 이후로는 왕실의 거처
12세기에 재건축되고
13세기에는 반란군을 제압하고
19세기에는 제프리 와이트 빌 경이
조지 4세를 위한 로만양식을 가미한
중세풍의 건축물을 본떠서 만든 것
그러나 20세기 이후로의 성채의 공식명칭은
‘하우스 오브 윈저house of winsor’
성채의 왼편은 정청政廳과 주거구역
오른편은 성 조지 채플과 탑과 성벽들
중앙은 대원탑大圓塔
이 성채에 거주하는 인력은 대개 이백오십 명
벌써 구백 년 권세의 본거지여
오늘도 관광의 대하
중국의 관광전사들은 코리언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하여
새벽처럼 길게 줄을 섰다
봄날의 기다림이여 끔찍해라, 여름은 어떨까
다행히도 아직은 이른 봄이라
하필 전사가 아니라도 조금 기다리면 되리라
‘rising lion’의 게양은
‘왕실의 거주’를 알리는 깃발
간단한 검색이 있고
검색대를 통과하면 그 다음은
저마다 가보고 싶은 곳을 가 봐도 좋은 시간
성에서 내려다보니
저 멀리 이튼 칼리지Eton College가 보인다
그러나 지금 나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고작
왕가의 접시와 검과 갑옷들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상들
현란한 카펫들과 도자기와 황금의 거울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인 조지 홀과 ‘황금의 방’
휘황한 샹들리에의 불빛들
먼 곳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왕의 정원과
그곳에 고인 늙지 않는 평온
한참을 휘둘러보니 놀라워라
자꾸 바라보니 칼과 갑옷도 꽃이다
골동품도 불꽃이다
죽은 자의 유물들도 별처럼 반짝인다
왕의 침실은 왕보다 거룩하다
영광은 권좌보다 오래 산다
영광과 왕관과 제왕의 잔치여
왕실의 초상화의 행렬이여
풍성한 눈요기로 나는 배부르다
그러나 애석해라
영화도 지천이면 식상하던가
푸성귀의 옆집에 세 들어 사는 습성을 지닌 나는
진열된 영광의 자취들과
박제된 영화의 시간들에 갈채를 보내기보다
몸은 쉬이 지쳐 피로를 느낀다
여왕의 금목걸이는 너무 길어 지쳐 보인다
조지 채플George chapel의 화려함이여
생동하는 조각들과
영생을 기원하는 오랜 기도들이여
지금은 누워 잠이 든 제왕의 얼굴들이여
누군가는 기도를 두고 가고
누군가는 침묵을 두고 가나
죽은 자는 죽고
산 자는 살아서 다시 영화를 꿈꾼다
죽은 자의 유물은
산 자의 추억거리
내 몸도 누우면 추억거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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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밖으로 나오니 방금 막 시작된 근위병 교대식
성채로 행진해 들어오는 병사들을 만난다
선착객의 어깨 너머로 나는 겨우 병사들의 행진을 바라본다
구경거리인지라 인파로 붐빈다
브라스밴드가 울리고
인형 같은 병정들이 줄 지어 행진한다
동일한 제복과
어깨에 밀착시킨 총검과
이마와 눈썹을 가릴 정도의 검정빛 털모자
회색빛 외투와 검정 구두들의 씩씩한 행렬
우렁찬 구령소리를 따라
위치를 바꾸는 총검소리와
소낙비처럼 땅을 울리는 구두 발자국소리들
인형들은 종시 표정이 없다
무표정의 표정
붙박이 시선
제왕의 안위 말고는 안중에 아무것도 없는 걸까
관광객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
정작 병정들 자신에게는
교대식도 하나의 역사일 뿐
열병도 하나의 일과일 뿐
아, 나의 기억은 알고 있다
제왕의 영광을 압도하던 그것
목련의 개화 -
왕의 정원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하던 목련꽃의 정오
로얄 스테이트먼트royal statement보다
왕관의 보석보다 더 반짝이던 목련꽃
저 한 송이의 개화가 성채를 압도한다
지상의 온갖 영화를 침묵으로 제압한다
거기 지상에 내려와
꽃잎에 고인 영광을 떠받들던 하늘
튜더 왕가가 비에 젖는 날
엘리자베스 왕조가 추위에 움츠린 날
한 송이 목련꽃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 낙원의 침묵 같았다, 나에게
목련은 한 포기 기도였다
꽃은 한 그루의 영생이었다
(이어짐)
첫댓글 멋져요. 저도 이희추님처럼 북유럽 기행의 시를 나나식 올려보려고 합니다. 솜씨가 따라갈 순 없지만 몇 편의 시를 올려볼까해요. 좋은 아이디어 얻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 송지 선생도 기뻐할 겁니다. 국내 여행 기행 서사시를 권한 적이 있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건강상 이유 때문인 듯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