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영남일보=입력 2006-08-14 | 발행일 2006-08-14 제28면
[한국의 혼 樓亭 .10] 경당 장흥효의 안동 광풍정·제월대
"나와 남의 경계 없다" 큰 가르침 울리는 듯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김성일·류성룡 등 문하의 대성리학자
벼슬 멀리하고 평생 학문 정진·수행
선천방위 통달…천문학 새 지평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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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이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 광풍정과 그 위에 있는 제월대의 전경. |
"나는 많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적기를 바라는 것은 곧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欲己多而欲人少者, 有己故也). 내가 없어진다면 누구는 많기를 바라며 또한 누구는 적기를 바랄 것인가(無己, 則欲誰多而欲誰少). 자신이 이기기를 바라고 남이 지기를 바라는 것 또한 내가 있기 때문이다(欲己勝而欲人不勝者, 亦有己故也). 내가 없다면 누구는 이기기를 바라며 누구는 지기를 바랄 것인가(無己, 則欲誰勝而欲誰不勝).… 나 또한 저 사람이고 저 사람 또한 나이니 무엇을 뽐낼 것이 있겠으며, 나 또한 하늘이며 하늘 또한 나이니 무엇을 탓할 것이 있겠는가(己亦人, 人亦己, 己亦天, 天亦己, 何怨尤之有)."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명종 19년)~1633(인조 11년))의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예문이다. 경당 선생 일기요어(日記要語)에 나오는 이 예문은 송나라 철학가 장재(張載)의 민오동포(民吾同胞: 사람은 모두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요), 물오여야(物吾與也: 만물은 나와 함께 있는 자이다)의 통체적(統體的) 세계관과 궤도를 같이 한다.
#광풍정은 성경(誠敬)의 도량(道場)
이러한 경당의 심오한 사상과 고절한 인품은 광풍정(光風亭: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22호)을 중심으로 안동 전역의 성리학자들에게 전파되었다. 경당은 고향인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이 정자에서 강학을 끝내면 제자들과 함께 정자 뒤편 바위 위에 지은 제월대(霽月臺)에 올라 시를 외우고 담론을 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심어주었다. 광풍정과 제월대의 이름은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북송의 대 성리학자 주돈이(周敦)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光風霽月: 화창한 날씨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과 같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 대성리학자 경당은 그의 호와 광풍정 및 제월대라는 이름을 지은 연유에 대해 친구인 최현(崔晛)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찍이 정자(程子)의 뜻을 취하여 경(敬)자로서 나의 당(堂)을 이름 짓고 이것에 따라 호를 삼았다. 또 주자(周子)의 뜻을 취하여 정(亭)과 대(臺)의 이름을 정했다"면서 "내 스스로 그 실상에 맞다는 것이 아니라 고인들이 말한 것을 표적(標的)으로 삼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무릇 경(敬: 한 점의 망상잡념 없이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수행)이 아니면 마음을 주재할 수 없고 광풍제월이 아니면 이 도의 체(體)와 용(用)을 드러낼 수 없다"면서 학문과 경 수행에 특히 전념했다. 광풍정과 제월대는 경당이 죽은 30여년 뒤 없어졌다가 조선 헌종 4년(1838) 유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지었고 중간에 보수를 해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치열한 수행인
그는 광풍정과 제월대를 중심으로 한순간도 쉼 없이 학문과 수행에 정진하였다.
"사람 되고 귀신 되는 관문 머리에 생각이란 말 한 마리가 있는데(人鬼關頭有一馬) 이 말은 보통 말과는 다르다네(殊異尋常之 者). 혹 길 따라 가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기도 하는데(或由其道或不由), 늘 단전(丹田)의 들녘에서 출발함을 보겠네 (每見發丹田野), 성성주인(惺惺主人: 마음)이 이 말을 타면(惺惺主翁乘此馬), 하루 중에 잠시도 머물지를 않는다네(一日不可須臾捨)… 만약 혹 잠깐이라도 기미를 못 살피면(苟或俄頃不察幾), 천리만리로 마음대로 달아나 애써 잡기 어렵다네(千里橫奔難力把)…." 그는 '의마(意馬)'라는 이 글에서 경(敬)을 통해 진실무망(眞實無妄)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삐를 놓으면 천리만리를 달아나는 말을 다루듯 한 순간도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크도다 도(道)여, 큰 것으로 말하면 그 크기가 밖이 없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그 작기가 안이 없다. 실을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는 것이면서 지극히 은미한 것이 그 안에 들어있다… 도를 행하려면 덕(德)을 닦아야 하고 덕을 닦으려면 성경(誠敬: 진실한 본체와 하나된 마음)해야 한다. 정(靜)할 때에 삼가고 두려워함이 있고 동(動)할 때에 홀로 있음을 삼가야 동(動)할 때와 정(靜)할 때가 교대로 닦여져서 체(體)와 용(用)이 아울러 세워지게 된다… 아, 도란 큰 길과 같아 탕탕평평(蕩蕩平平: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음)하다…." 이것은 '도대인행(道待人行)'이란 글에서 제시한 수행법이다.
그는 "…꿈을 꾸거나 잠을 잘 때, 엎어지거나 넘어질 때도 자기의 공부단계가 얕은지 깊은지를 살펴야 한다(夢寐顚倒, 卜自家工夫淺深)… 자기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닫힌 눈, 막힌 귀와 같게 되고 자기욕심을 이미 극복하면 마치 귀가 밝고 눈이 밝아지는 것과 같게 된다(己未克, 如閉眼塞耳, 己已克, 如耳聰目明.)"면서 철두철미한 수행과 털끝만큼의 욕심마저 소멸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경당은 이러한 수행력으로 평생토록 사색하여 선천방위에 통달하였고 24절기의 중절되는 곳과 58괘 괘기(卦氣)의 음양변화, 그리고 64괘 12변(變) 768괘 4천680효(爻)의 변화무궁하고 정밀 미묘한 도리를 일원소장도로 재구성, 당시 천문학에 대한 새 지평을 열었다.
경당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맑은 정신과 수행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70세가 되어 운명 하는 날 밤 맹자의 양심장(養心章: 마음수양은 욕심을 적게 해야 함을 강조하는 구절)을 한 번 외우고는 문인들에게 그 뜻을 얘기해 주었다. 또 "내가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로부터 관(棺)이 주어졌으니 조짐이 필(必)히 일어나지 못할 듯하다"고 말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퇴계학파의 정맥
경당은 퇴계의 양대 고제자(高弟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남명·퇴계의 양문(兩門) 제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3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데 결코 나이와 관행을 따지지 않았다.
그가 학봉과 서애라는 두 거유(巨儒)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과 지척 간에 살았고 학봉과 인척관계였던 인연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학봉과 경당종택은 한 마을에 있다.
학봉과 경당 집안 간의 인척 관계는 400여년을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당의 12세손인 장성진씨(69)는 "지금도 집안의 대소사는 학봉 집안과 의논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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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의 12세손인 장성진씨가 제월대에서 경당과 관련한 얘기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