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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야곱의 우물가 원문보기 글쓴이: ♡겨자씨♡
서로 화목하라!(막9:38-50)
설교자 / 조한우
마가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신 후로부터 엿새 후에 있었던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을 보고 너무 너무 놀랐습니다.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나 싶었던 거죠.너무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베드로는 엉겁결에 아예 변화산에서 그냥 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횡설수설했잖아요?신령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좋은 거예요.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고 나면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하늘의 주님만 보이게 되는 거죠.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이 세 사람만 예수님을 따라서 변화산에 갔었기 때문에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신령한 영의 몸으로 변형되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그래서 그랬는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이 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 왔을 때, 나머지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난리가 났었습니다.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아홉 명의 제자들이 다 달려 들어서 고치려고 별 짓을 다 해봐도 안 되는 거예요.얼마나 창피했겠어요?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보시니까 난리가 난 거예요.이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와서 간구했습니다.예수님 뭘 좀 어떻게 하실 수 있으시거든 좀 도와달라고 말이죠.‘뭣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예수님,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시다면 우리를 좀 도와 주세요!’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어요?“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하시니까 귀신이 꽥 소리를 지르면서 그 아이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어요.그런데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누가 더 높으냐? 이걸 놓고서 갑론을박하면서 서로 잘났다고 떠들면서 다투고 있었습니다.참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가 없어요.그 와중에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서 아부를 하면서 잘난 체를 하는 겁니다.“선생님, 선생님! 며칠 전에 어딜 갔다가 보니까 우리를 따라다니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아내더라고요. 다행히 제가 봤으니까 망정이었지, 이건 저작권 침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특허권 침해라고 해야 되나요? 아니, 세상에 그렇게 하고 싶으면 우리랑 같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지 말이죠. 우리랑 같이 다니지도 않으면서 감히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제가 못하게 막았습죠? 잘했죠?”세배대의 아들 요한은 예수님과는 이종 간이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예수님의 최측근이었습니다.예수님의 이모뻘 되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청탁 아닌 청탁을 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하나는 오른편에 그리고 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말이죠.야고보하고 요한, 이 두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아주 핵심 인물들이었거든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연거푸 말씀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출세하는 것, 성공하는 것, 높이 올라가서 어깨에 힘주고 사는 것, 온통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거예요.여러분,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뭡니까?복 받으려고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예수 믿으면 물질의 복, 사업의 복, 직장의 복, 자녀들의 복, 이런 복, 저런 복 많이 받으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우리가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거예요.(할렐루야!)주객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무한하신 사랑이기 때문에 서로 질투하고 싸우고, 편을 가르고 그럴 게 아니에요.저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내 사랑이 줄어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38절 이하에 요한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참, 소갈머리가 없는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그리고 그걸 예수님께 자랑을 하고 있는 거예요. 칭찬을 받으려고 말이죠.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어요.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 이름을 의탁해서 능한 일을 한 사람이 바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는 거예요.그러면서 뭐라고 하셨어요?“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다.”(할렐루야!)
요즘 세태를 보면 참 안타까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상대방 후보를 비방을 하고 흑색 선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자기 인격이 그것 밖에 안 되니까 그러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니면 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그래서 교단이 다르고 교파가 다르면 서로 말도 안 하려고 합니다.종교가 다르면 말할 것도 없고요,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거나 색깔이 다르면 원수처럼 여깁니다.도무지 다른 집단과 교류하지 않으려고 해요.그래서 님비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겼잖아요? 집단 이기주의 말입니다.같은 집단끼리는 똘똘 잘 뭉치는데, 다른 집단과는 배타적으로 지내는 일들이 참 많아요.예수님께서는 편협한 이기주의를 원치 않으세요.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임을 믿는다면(히11:3)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다투고 싸우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화목해야 됩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막을 것이 아니라 그들과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여기에는 물론 신학적인 문제가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마는 아무튼 기독교가 자꾸 편협한 종교처럼 여겨지는 것은 화목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잘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해외토픽에 이런 게 났더라고요.스페인의 어느 오래 된 교회에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었나 봐요.그런데 이 예수님의 초상화가 너무 오래 되어서 색깔도 다 변하고 탈색이 되어서 도저히 볼 수 없는 형편이었나 봅니다.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시메네스라고 하는 80대 할머니가 보다 못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자기가 다시 복원해 보겠다고 그 그림에 손을 댄 겁니다.원래 이 그림은 19세기 화가가 그린 ‘에케 호모’라는 작품이었는데, 이 그림이 아주 오래 된데다가 습기로 그림이 훼손이 되어서 영 보기에 안 좋았나 봐요.그걸 다시 그려 보겠다고 80이 넘으신 이 할머니가 그 그림에 붓을 댔다가 그림을 망쳐 보린 거예요.할머니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나도 그림을 못 그리지만,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면 얼마나 잘 그리겠어요?어설픈 솜시로 그림을 그리다가 보니까 그만 예수의 얼굴이 아주 이상하게 된 거예요.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서 예수님의 얼굴을 원숭이처럼 만들어놨다고 난리들이 났습니다.문화재를 이렇게 망가뜨려 놨으니, 스페인의 문화재청에서는 얼마나 황당했겠어요?그런데 고령인데다가 본뜻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용서해주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도대체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해 놨기에 그러나 싶은 마음에 할머니의 그림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잇게 된 거예요.사람들이 그림을 보겠다고 교회로 교회로 몰려들게 되자 급기야 교회측에서는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대요.할머니가 망쳐 놓은 그림 한 장 때문에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수입이 아주 많아지게 되었나봐요.그러자 이 할머니가 변호사를 선임해서 교회측을 상대로 해서 소송을 벌인 거예요. 교회에서 얻은 관광 수입의 일부를 로열티로 달라고 말예요.이런 것도 사실은 서로 서로 입장을 잘 이해하고 나면 서로 싸울 일이 아니라, 서로 좋은 일이거든요.다음 주일이 추석이잖아요? 아무튼 일가친척이 모이면 서로 화목하시기 바랍니다.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속으로 기도하고 겉으로는 사랑으로 감싸주고 화평하게 지내시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화목해야 할 대상은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소자’(小子)라는 말을 썼었는데요, 옛날 식 표현이라 그렇습니다.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작은 자’라고 고쳐놓았습니다.
41절과 42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배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소자’(小子), 또는 ‘작은 자’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옛날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들을 소자, 또는 작은 자로 취급을 하기도 했습니다.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보고는 저리가라고 쫓아버리기도 하고 귀찮은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요즘은 그래도 많이 좋아졌습니다마는 아직도 어린 아이들을 우습게 생각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향들이 종종 있습니다.그래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에 투자하는 것을 꺼리기도 했습니다.어른들은 헌금도 하고 교회에 일도 할 수 있지만, 어린 아이들은 걸리적 거리기나 하고 헌금 액수도 별로 안 되고 그러니까 어린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단 말입니다.그러나 어린이 들이 없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는 거예요.교회에서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고 날마다 교회에 와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9월 3일부터 어린이 공부방을 시작했는데요, 어린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매일 열댓 명씩 와서 교회에서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간식도 먹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교회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귀한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물질들을 공급해 주십니다.(할렐루야!)
또한 어르신들과 병약자들, 장애를 가지신 분들, 가난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걸인들, 이런 사람들이 다 ‘작은 자’들입니다.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런 사람들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떠서 대접해 주면 결코 상을 잃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아무리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고, 서비스체계가 잘 되어져 있다고 해도 이런 일들을 정부에게 떠맡기거나, 복지 시설에 미루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모르겠습니다. 정부나 시설에서는 돈을 들여서 그런 어려운 이웃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봐 주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돌봐주어야 합니다.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옛날 어르신들을 보면 그때 그 분들은 교회에 다니시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선을 행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참 잘하셨던 것 같아요.구제하고 적선을 하는 일, 어려운 이웃들을 보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것을 많이 봤거든요.그런데 요즘은 옆집에 불이 나도 불을 안 꺼줘요.불은 119가 와서 끄는 건 줄로만 압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마는 중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별 해괴한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중국이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마는 가끔 보도되는 것을 보면, 교통사고를 당한 어린 아이를 보고서도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는 거예요.어린 아이가 차에 치었는데도 운전수는 그냥 도망가 버리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가 버려요.길거리에 고라니가 차에 치인 것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CC-TV에 찍힌 화면을 보니까 다들 지나쳐 버리고 아무도 아이를 구해 주지 않더라고요.한참 만에 다른 차가 오더니 이 아이를 또 치고 달아나 버렸어요.나중에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이를 병원으로 옮기는 걸 인터넷에서 동영상으로 봤는데,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이 얼마나 많아요?내 일이 아니라고 모르는 체 하시겠어요?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화목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43절 말씀부터 47절 말씀까지 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 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무서운 말씀입니다.여기 본문의 말씀을 보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범죄했으면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이 범죄했으면 눈을 뽑아 버리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요, 그 만큼 지옥이 끔찍하다는 말씀입니다.48절 말씀을 보니까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기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말슴하셨어요.불로써 소금 치듯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입니다.그러니 두 손, 두 발, 두 눈, 다 멀쩡해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손 하나 없어도, 발이 하나 없어도, 눈이 한 쪽이 없어도 천국에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손을 잘라 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버려라!’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이겠습니까?손을 잘라버리고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빼 버리라는 말씀은 범죄한 우리들의 행실을 끊어 버리고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첫 번째는 나와 다른 이념이나 사상, 종교를 가진 사람들까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 화목하라고 하셨고요, 두 번째에는 사회적 약자들과도 화목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이예요.(믿습니까?)나와 생각이 좀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품고 화목해야 하고, 사회적인 약자들, 어린 아이들이나 노약자들, 장애를 가지신 분들, 극빈자들이나 소외된 자들, 이런 사람들도 우리가 품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이예요.범죄한 네 손이나 네 발, 그리고 네 눈도 빼 다 버리고서라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서 저 끔찍한 지옥 형벌을 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되면 좋겠는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그렇지 않거든요.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금 이야기를 하시면서 말씀을 하고 계세요.소금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유익한 거예요. 소금이 없으면 반찬을 어떻게 만들어 먹겠어요?우리 어르신들, 간이 안 맞으면 개미(가미:加味)가 없다고 그러시잖아요?소금은 필수품입니다.그런데 소금이 음식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것에도 소금이 필요하대요.50절 말씀을 보니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을 하셨거든요.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대로 우리들은 다 부족해서 누구하고도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는 나약하고 무능하고 죄가 많은 사람들입니다.그러므로 화목하게 지내야 된다는 것은 다 알긴 알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더라는 거예요.그럼 어떻게 하면 화목하게 지낼 수가 있을까요?정답은 ‘소금’입니다.네 속에 소금을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소금이 뭘까요?소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소금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할렐루야!)너희 안에 이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거예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마음속에 소금을 품고 서로 화목하시기 바랍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살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화목하지 못할 이웃이 없는 줄 믿습니다.소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도 화평을 누리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으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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